물병과 사자 :: '2018/09 글 목록
2018. 9. 30. 01:13 영화 이야기

한동안 누군가 내게 가장 감명깊게 본 영화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 대답은 항상 '개같은 내 인생 (My Life as a Dog)'이었다. 

주인공인 잉게말이 자신보다 불행했을 우주선을 탄 강아지 라이카를 떠올리며 애써 자신의 처지를 위안삼고 있다.

영화의 내용을 모르고 들으면 조직이 등장하는 다소 거친 영화인가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1959년 스웨덴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하는 서정성 뿜뿜 돋는 내용의 영화이다. 이 영화를 만든 라세 할스트룀 (Lasse Hallström) 감독의 대표작으로는 길버트 그레이프, 쇼콜라 등이 있고, 다들 유명한 영화지만,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좋았다.  레오나르도 드 카프리오 오빠 (잘 생기면 다 오빠)가 나오는 길버트 그레이프를, (내입장에서 보자면) 무명인 스웨덴의 아역 배우가 이긴 셈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영화는 Reidar Jönsson이라는 작가의 같은 제목의 자전적 소설 (1983년작)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어쩐지... 사소한 스토리에 생활적 디테일이 있더라니...]

소위 '성장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 사는 잉게말이라는 소년의 성장기를 그의 시선에 따라 바라본 영화이다. 잉게말에겐 자신만큼이나 장난꾸러기인 형이 있어 이 둘이 매일 합이 1+1=3인 강도의, 살아있는게 다행일 정도의 사고를 치며, 열심히 성장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결핵을 앓던 엄마의 병이 깊어지면서, 부득이 엄마가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형과 잉게말 각각 다른 친척집으로 가게 되는데, 잉게말은 순박하고 착하나 결코 어른스럽다고 보기는 힘든 삼촌에게 맡겨지게 되면서 영화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삼촌이 살던 동네로 와서도 잉게말은 장난꾸러기 소년이 칠 수 있을 만한 크고 작은 장난과 사고를 치고, 엄마 없는 소년이 겪을 만한 외로움을 겪으며, 처음엔 낯설어서 텃세를 당하던 동네 꼬마들과 하나둘 친해져 가며, 때론 대책 없는 어른들의 행동들을 지켜 봐가며, 어느새 동네의 이쁜 소녀에게 신경을 더 쓰게 되는 사춘기로 접어 들어간다는 얘기이다. 

영화 첫 장면 잉게말의 독백으로 이런 대목이 나온다. 뜬금없이 '라이카는 어땠을까? 사람들이 우주선에 자기를 태웠을 때.  내가 봤을 때엔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어. 걘 먹이통이 비워질 때까지 우주를 뱅글뱅글 돌아다녀야 했다구. 그리곤 굶어 죽었지. 거기에 비하면, 나는 괜찮아....'  이런 생각을 하며 잉게말은 자신이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강아지나 엄마와 형과 떨어져 낯선 동네로 가서 지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소련이 우주로 쏘아 올린 1957년의 우주선 스푸트니크 호에 실험용으로 실린 강아지 라이카 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삼는다.  

삼촌네 헛간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라이카를 생각하는 잉게말. 작은 헛간에 난 좁은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잉게말의 모습은 묘하게 작은 우주선에 실렸을 라이카의 처지와 오버랩된다. 

12살의 소년이라 주변의 사람들 뿐 아니라 엄마에게도 자신의 풍부한 감수성을 이해 받기 힘든 소년(그걸 이해 받기에 그가 치는 사고의 강도가 대부분 너무 높다)은 그렇게 외로운 밤 엄마 생각이 나거나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외롭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라이카를 떠올리며 자신의 처지가 낫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영화 내내, 자신보다 더 불운했을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거리곤 한다. 이를테면, 지름길로 가려던 어떤 사람이 창던지기 대회를 하는 경기장을 지나게 되어 운 나쁘게 창에 맞아 죽는 이야기. 그 사람보다는 자신의 처지가 낫다, 뭐 이런 식이다.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그 모양새가 너무나도 아이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또래 소년으로서는 할 수 있는 한껏 어른스러워서 짠하면서도 감동스럽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 작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스웨덴 선수인 잉게말 요한슨과 미국의 플로이드 패터슨간의 권투 경기의 라디오 중계에 귀기울이고 있다. 이 장면은 우리의 주인공 잉게말과 선머슴같은 귀여운 소녀 샤가와의 권투 경기와 오버랩된다.  온 마을에 터지는 함성으로 보아 잉게말 선수가 승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어느새 잉게말과 샤가는 소파 위에서 새근새근 낮잠을 자고 있는 장면을 비추곤 줌아웃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권투선수와 주인공 잉게말의 이름이 같은것, 그리고 둘다 권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쟤가 커서 권투선수가 될려나 했는데, 소설가의 자전적 소설이므로 그건 아닌걸로...)       

1959년의 스웨덴이 배경인 관계로 문화적, 시대적 차이로 이해못할 정서도 없잖아 있었지만, 감수성 풍부한 소년이 몰이해 속의 세상을 자기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며 한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자리했었다. 

그러다, 최근에 좀 충격적인 뉴스를 봤다. 무인 우주선을 쏘아보내면서, 떠돌이 강아지 라이카를 무려 3년이나 훈련시켜 스푸트니크 호에 태웠다는 것은 이 기사로 처음 알았다. 무려 3년이나!  그리고, 그 우주선은 어차피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일주일치의 사료를 다먹고 나면 라이카는 어차피 굶어죽을 운명이었다는 것도 처음 생각이 미쳤다. (지금 생각해보니, 잉게말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라이카를 떠올리며 자신의 불행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 라이카가 우주선을 쏘아 올린지 불과 다섯 시간 만에 압력과 온도 차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일주일치의 사료도 다 먹지 못하고... 일주일 후에 죽으나 발사 후 다섯시간 후에 죽으나, 그게 무슨 차이냐 싶기도 하고, 또 그렇게 일주일동안의 비행이면 끝날 인생, 아니 견생인데, 3년의 고된 훈련은 또 웬 말이냐 싶기도 하고... 허탈하고 무의미하고.... 슬프고 잔혹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도 결국은 그런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만약 일주일 후의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미래를 알거나, 내 인생의 끝을 알고 있다면 오늘의 인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  

'라이카의 진실'이라는 뉴스를 접하고 갑자기 생각나서 적어봤다. '개같은 내 인생'에 대해서...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9. 18:59 일상 이야기

네이버 이웃맺기 위젯을 맺었다 우쭐.뿌듯하기도 잠시...
친구기 확인못하겠다며 캡쳐를 보내준 모바일 판 블로그에서는 아닌게 아니라 확인이 되지를 않구요.

그나마 내가 로그인한 화면에선 관리자라 그런가 링크 옵션은 있는데 친구화면엔 오직 글 카테고리랑 방명록만 있군요!

관리자에게만 보이는 링크 옵션이라...  아이구 의미없다~~~

혹 제가 가진 문제점에 대한 해결법을 주실분은 안계실까요?


관리 페이지에서 체크해본 결과, 태그는 제대로 붙어있는거 같긴 한데, 미리보기를 클릭하면 새창에 

페이지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Chrome이 이 페이지에서 비정상적인 코드를 감지했으며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차단했습니다.  
ERR_BLOCKED_BY_XSS_AUDITOR 

이렇게 나오네요.  뭐가 잘못된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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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9. 07:00 미술 이야기

Edgar Degas (1834-1917) The Bellelli Family (1858-1867) oil on canvas ; 250 x 200 cm, © RMN-Grand Palais (Musée d'Orsay) / Gérard Blot 



개론서에는 편의상 인상주의에 포함시키고, 실제로 까칠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에드가 드가는 하지만, 살아생전에는 자신의 작품을 인상주의라고 하는 것에는 크게 거부감을 표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에드아르 마네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집안의 자제였던 드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이탈리아와 미국 등지를 다니면서 집안을 일으키고자 노력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고모를 방문해서 그녀의 가족을 그린 초상화이다. 


화면에는 고모와 그의 남편 벨레리 남작과 그들의 두 딸들이 모여 일단 가족 초상화의 형식을 띈다.  벽에는 최근 작고한 그의 아버지이자 고모에게는오빠인 오귀스탕 드가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드가의 고모는 화면의 왼쪽에 두 딸과 함께 자리하고 서 있고, 남편인 남작은 화면의 오른쪽에 놓인 의자에 등을 돌린 채 앉아서 딸들과 아내가 있는 쪽을 바라다보고 있다.  

얼핏 보면 일반적인 가족 초상화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은 인상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에 설득력이 실릴만큼, 이 작품은 북유럽의 초상화와도 같은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 가족 초상화에서는 지체 높은 귀족의 '화목한 가정'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일설에는 고모부가 처녀시절의 고모를 억지로 범해 결혼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화면 전반에는 고모의 고고함에 미치지 못하는 듯한 이탈리아인 고모부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남편과 아내는 화면의 좌우 가장자리로 멀리 떨어져 있고, 7세와 10세가 되는 조카들은 놀이용 앞치마라고 할 수 있는 pinafore를 착용하고 있지만, 다소 경직되어 보인다. 상중이라 검은 색의 옷을 입고 있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입을 꽉 다물고 있어 귀족적 풍모를 가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고모부는 편안한 옷을 입고 가족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세로선이 강조된 문과 거울의 틀, 그리고 중간에 놓인 탁자로 이들의 사이는 단절되어 있다.  이 둘의 사이가 불편한 것에 대한 암시는 의자에 걸터앉은 조카가 한쪽 다리를 미처 다 뻗지 않고 접은 채 앉아있는 모습, 화면 하단의 오른쪽의 강아지가 잘려나가 화면에 다들어오지 않게 그려진 점 등에서 더 강조된다.  




사실주의자로 불리기 원했던 드가는 전통적 화법으로 그려진 작품을 통해 모델들의 심리를 꿰뚫는 예리한 초상화작품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그린 수 많은 발레리나 그림들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8. 03:03 일상 이야기

유학을 간 지 얼마 안되어서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012

내가 첫 유학을 시작한 학교는 미국의 종합대학답게 각 단과대별로 도서관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중앙도서관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내가 다닌 한국의 학교 도서관의 자료는 아마도 한 단과대학의 자료 소장량에도 크게 못미칠 것이라 짐작될 정도로 장서의 양은 압도적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혹시라도 거기서 찾지 못하는 자료는 interlibrary loan이라고 해서, 다른 학교나 기관에서도 서로 빌려주고 빌려볼 수 있는 체계까지 갖추고 있으니, 적어도 자료가 없어서...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터였다. 

나는 그 거대한 중앙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맡은 일은 누락 소장 자료의 기록이었다. [방대한 양의 장서와 소장품을 가진 도서관이다보니, 도서관에서 소장 중이지만 미처 기록이 되지 않은 책이나 자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그건 사람이 찾지 않는 한 확인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때 깨닫게 되었다. 흔히 공식 기관의 웹사이트에 있는 기록이라면 일단 믿고 보는 경우가 많지만, 생각 외로 잘못된 정보와 오류가 많다는 것을).]  

아르바이트 하는 학생 수도 꽤 많았던 것 같은데, 그 학생들에게 섹션을 할당해서 누락 자료 정리를 하도록 하는 식이었다.  내가 할당 받은 구간은 무려 생물 분야의 '곤충학'!  곤충학 분야의 크고 작은 학회지의 누락된 기록 정리.  처음 할당 받고는 세상 재미없고 보람없는 구간을 배정받았다 한숨을 쉬었다. 내 평생 이 자료들을 볼 일 있겠냐 그러면서.....  '뭐, 재미 있으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으니'라고 시작한 일은 정리하는 일 자체는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고, 뭔가 하나씩 정리해서 완성해 나가는 재미도 있었다. 그다지 길지 않은 동안 일을 했지만, 그 사이 익숙해진 이름도 생기고 말이다. 

그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한 학자가 있었는데, (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이름은 잊었다) 그는 미조리인지 미시시피*의 (지역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호수인지 저수지(이것도 가물가물) 인지에 거주하는 소금쟁이에 대한 생태를 조사한 것을 1910년대부터 무려 4-50여년간 (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의 공백은 있었다) 지속적으로 연구하여 발표를 했었고, 학회지에 게재하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엔 그의 주제가 좀 다른 의미로 놀라왔다. 뭐 그렇게 사소한 것을 이렇게 오랫동안 연구하지? 하는 생각이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정리하던 내내 매년 꾸준히, 그것도 몇 십년동안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거 같던 주제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특정 학술지들에 이름을 올리는 그를 보고선 나중엔 경탄해 마지않을 수 없없다. 

그 때 느꼈다. 남들은 관심갖지 않고, 남들이 얼핏 보기엔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그렇게 지속적으로 파고들어야 되는 것이 학문이라는 것이구나.  그리고 결국 학문이라는 것이 저러한 작지만 지속적인 노력들이 모여 우뚝 서게 되는 것이구나... 결국, 우리가 가볍게 찾아보는 구글, 네이버, 다음 등 에서 얻는 지식의 바탕도 실은 저러한 지난한 노력들의 축적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금쟁이에 대한 어린이용 교육 동영상에서 알게되는 것들도 다 학자들의 노력이자 성과이다. 

 

나는 학문이라는 것을 떠올릴때마다, 저 미조리인지 미시시피인지의 작은 마을 조그마한 호수가에서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긴 장화를 신고 손에는 뜰 채같은 것을 들고 하루 종일 작은 곤충들을 관찰하면서 반세기를 보냈을, 이제는 세상에 없을 그 노 학자를 떠올린다. 남들은 어떻게 보든 그는 자신이 하는 그 작업이 좋아서 견딜 수 없게 즐거웠으리라 생각한다.  지리멸렬한 노력들의 축적. 학문이란 그런 것이다.  

* 내 기억으로는 미시시피 강인데, 자신이 없다. ^^;;;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7. 08:00 미술 이야기

이번에는 한 남자가 안개로 자욱한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다.  

저번의 작품이 '실내'의 '여인'이라면 이번에는 '거친 자연'속의 '남성'이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등을 보이며 서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이다. 

 

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c.1817),  oil on canvas ; 98 x 74 cm, Kunsthalle Hamburg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는 “뒷모습의 인물 (Rückenfigur, 혹은 figure from the back)"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킬 정도로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자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인물을 많이 그렸다.  이 '뒷모습의 인물'들은 관람객이 그림 속의 인물들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지극히 감상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작품은 이러한 장치를 통해 그 뒷모습의 인물들과 함께 자연을 바라보며 명상을 하게 만들고 있다. 

 

그의 작품은 소위 알레고리 풍경화인데, 밤 하늘이나, 안개낀 아침, 헐벗은 나무나 고딕 풍의 폐허를 바라보는 사색적인 인물이 주를 이룬다. 그의 이러한 상징적인 그림은 보는 이로하여금 감상적인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데, 이는 고전주의적 화풍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거대한 대 자연 속의 미미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다름 아닌 신 앞에서 작은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장대한 자연으로 드러나는 신의 존재를 그린 그의 그림의 크기는 실제로 접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작은 크기이다.  (실제로 아주 작다기 보다는 그 이미지의 규모에 비해 작게 느껴진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추상표현주의를 필두로 대작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에 더욱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고.)  

 

Caspar David Friedrich, Monk by the Sea (1808-1810)  oil on canvas ; 1.1 x 1.72 m, Alte Nationalgalerie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바닷가의 승려 (Monk by the Sea)'라는 작품은 아주 작은 작품은 아니지만, 소위 대작이라고 하는 큰 캔버스에 작품과 비교하면 그리 큰 크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자연을 마주하고 겸허한 태도로 신에 대한 명상을 하는 승려의 모습은 'size'가 아닌 'scale'면에서는 이를 능가하는 작품이 드물정도이다. 

 

Seashore by Moonlight (1835–36). 134 × 169 cm. Kunsthalle, Hamburg

 

1835년 처음 뇌졸증으로 쓰러진 이후, 그는 작품활동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위의 작품은 그가 남긴 마지막 대작이라고 알려진 그림이다.  달빛을 받으며 항해에서 돌아오는 모습은 그의 인생을 마감하는 시점에 그려져 그 의미가 남다르다.  낭만주의가 유행하던 한 시기를 풍미했던 화가는 이후 낭만주의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미술계에서 잊혀져 친구들의 온정에 기대어 생활하며 쓸쓸하게 인생을 마쳤다.  그의 명성은 표현주의자들이나 상징주의자들에게 그의 작품세계를 재평가 받으며 부활되는 듯 했으나, 나치가 좋아했던 작품으로 낙인 찍히면서 두번째의 몰락이라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이 재평가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나 되서야 되서 였다.  그야말로, 그의 작품 인생은 독일 낭만주의의 모토 처럼 '질풍 노도의 시대'와도 같은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의 작품을 통해서는 격정적 감정보다는 고요한 명상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작품 철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I have to stay alone in order to fully contemplate and feel nature. The painter should paint not only what he has in front of him, but also what he sees inside himself.” —Caspar David Friedrich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6. 03:44 미술 이야기

한 여인이 두손을 다소곳이 앞으로 모은 채, 고개만 내밀어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Caspar David Friedrich, Woman by a Window (1822) oil on canvas ; 44 × 37 cm, Alte Nationalgalerie, Berlin


젊은 여인이 서있는 곳은 독일을 대표하는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의 드레스덴에 있던 스튜디오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카홀리느 (Caroline), 화가의 아내이다. 그녀는 남편의 스튜디오 창 밖으로 보이는 엘브 강과 그 위를 지나는 배를 바라보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여린 푸른 빛의  포플러 나무들로 보아, 때는 바야흐로 북구의 긴 겨울을 나고 맞이하는 봄이다. 

강한 수직선으로 이뤄진 그녀를 둘러 싼 모든 환경과 배경과 그녀의 몸과 드레스가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곡선의 대조는 그녀의 심리를 잘 반영해주고 있다. 먼저, 강한 수직이 주를 이루는 실내의 구조를 보라!  창틀에서 마루바닥에 이르기까지 실내에는 수직선이 위주를 이룬다.  특히, 그녀의 양쪽에 내려오고 있는 창 옆의 두 기둥은 그녀를 속박하고 있는 듯하고, 곧게 뻗은 배의 마스트, 저 멀리 보이는 곧게 뻗은 포플러 나무들, 모든 것이 수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둥글게 말아올린 머리, 그녀의 작고 둥근 어깨, 주름이 잔뜩 들어간 그녀의 드레스... 이 모든 것은 그녀를 둘러싼 수직의 세계와는 상반된 것으로 보인다. 제한된 자유 속에서 그녀는 외부 세계를 동경하며 그녀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잔뜩 내비치고 있다.  

한편, 그녀의 모습과 실내의 모습, 그리고 어두운 실내와 찬란한 태양이 비치는 외부의 풍경에서 이중적인 태도와 분위기도 읽을 수 있다. 실내광이 따뜻하게 채워진 집 안에서 아늑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두손은 마주 모으고, 동그랗게 만 몸은 창 쪽으로 기울이고 고개는 길게 창 밖쪽으로 빼고 서있는 그녀의 뒷 모습에서 한편으로는 안락한 집안에서 벗어날 용기는 없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집 앞 수로 앞을 지나는 배가 이끌어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여인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그녀의 호기심이 집안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이기게 될 때, 그녀는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 대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는 잠시 후, 한차례의 꿈을 꾼 듯 멋진 세계에의 상상을 접고 조용한 일상으로 복귀할지도....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5. 07:30 일상 이야기

이 글은 공지에 올린 '양해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으로 내 변명의 부연설명 같은 글이다. ^^;;;  


블로그를 시작한 지 한달이 채 되지 않는다.  나름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티스토리 블로그인데, 이 블로그로 결정한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미술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룰 내 블로그에는 부득이하게 이미지를 많이 실을텐데 아무래도 저작권이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티스토리는 게티 이미지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기에 혹했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나름 전문성을 좀 살려서 블로그를 운영하기에는 티스토리 좋다는 글도 여기저기서 몇 번 읽었다. (이 장점이 뭔지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읽었어야 했다)  


단점으로는 네이버 등 메인 포털에 노출이 좀 덜된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단점이긴 하나, 내가 운영할 내용과 저작권 문제에 대한 문제점에 대한 나의 관심이 이 단점에 대한 우려를 이겼다.  


결국 티스토리로 낙착!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전문성을 살릴 수 있다는 건 홈페이지 운영에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화면 편집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라는데, 나같은 컴.알.못에게는 크나큰 단점이었다. html이 먹는게 아니라는 것 정도 밖에 모르는 나로서는 말이다


'자유자재'로 화면을 꾸밀 운영자들을 위해 메인 옵션들이 무척이나 단출했다. 꾸밈없이 그냥 있는 옵션만으로 글을 올리면 되긴 하지만, 내가 머리 속에 그리는 메인 화면이나 네이버 블로그 같은데서 보던 보기 편한 화면은 옵션에 없어서 좀 아쉽다. 네이버 블로그나 페이스북에서 보던 이웃 맺기나 following 기능도 안보이고... 이건 메인 포털에 노출이 안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답답한 맘에 인터넷을 좀 뒤져봤더니, 코딩이니 html이니 화면 편집이니 하는 것들에 대한 튜토리얼들이 꽤 많다. 한 번 배워볼까 하는 맘에 몇 페이지 봤는데, 아주 더 기본부터 해야하나보다.  '태그'를 붙이라는데, 어디다 붙이는지 모르겠고, 너무 기본인건지 나의 의문에 대한 해답은 어디에서도 찾기가 힘들다. 


그러다, 문득 예전 내 수업을 들으신 분 중에 한 분이 '세잔, 마네, 모네'가 이름이 예뻐서 다 여자인줄 알았노라 하셨던 기억이 났다. 그분은 아주 공부를 많이 해야하는 분야의 전문가셨다. 그때 그 말을 듣고 일동이 모두 함께 와~ 웃긴 했지만, 곧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어릴때 교과서에서 이름은 나와있었지만, 성별은 나와있지 않았었고, 그 이후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분야만 계속 파고 들었다면, 화가의 성별 쯤 전혀 모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농담으로 '마네, 모네'가 동일 인물의 미국식, 영국식 발음 아니냐, '고갱, 고흐는 종친회에서 만났냐.' 이런 말도 하곤 하지만, 실제로 마네 모네 엄청 헷갈린다는 분은 의외로 많다. 


그래서,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나 발표가 아닌 다음에는 가급적 기본적인 것도 한번씩 언급하고 지나가려고 하는데, 문제는 나는 나대로 한 분야를 오래 공부해오다 보니, 과연 처음에 내가 무엇을 몰랐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그래서 어떤 것들은 너무 당연하게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었던듯 여기는 내용들도 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응애응애' 대신 '뒤샹뒤샹'하지는 않았을텐데 말이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기본적인 지식인지 스스로 판단을 내리기 어렵고, 어떤 때엔 아예 그런 고민도 없이 당연히 '모두'가 다 안다고 생각해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정도는 다 알겠지'하는 정보들을 그냥 다 안다~치고 넘어가고 수업을 진행했다가, 나중에 질문이 '이 정도는~'하는 내용에서 나오면, 전체 수업 내용을 이해시켰나 걱정이 되고는 한다.  


짐작컨데, '태그를 붙이다'는 행위는 아마 '화면 편집'을 자유자재로 하는 분들에게는 '이 정도는~'하고 넘어간 대목일 것이다. 그런데, 난 그걸 모른다. 히이ㅇ~~  


이왕 시작했으니 짬짬이 코딩의 세계에 구경을 다녀볼 생각이다. 내가 요 며칠 살펴본 봐로는, 코딩은 컴퓨터 상의 언어로 우리가 편하게 보는 컴퓨터 상의 모든 화면들은 실은 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내 머리속에는 아주  조그마한 친구들이 광할한 텍스트기 위를 바삐 움직이며, 컴퓨터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막 번역해 내는 장면이 상상이 된다.  이들의 작업이 없이 인간들은 컴퓨터의 화면을 읽을 수 없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즉, 색다른 외국어인 셈이다. 이들의 언어를 알고나면 세상은 또 어떻게 달라 보일까?  컴퓨터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못하는 나지만, 그런 의미에서 관심이 마구마구 생겨난다. (이러다 제풀에 지쳐 다른 블로그로 이사간다 난리칠지도...) 


이제 이건 이해하겠다.  ^^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4. 07:00 미술 이야기

Georges Seurat (1859-1891),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1884-86)  oil on canvas ; 207.6 × 308 cm,  Art Institute of Chicago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조르주 쇠라 (Georges Seurat: 1859–1891)의 대표작은 단연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이다.  

인증샷  ^^  혹시 직접 작품을 본 적이 없는 분은 대략 사이즈를 가늠해보세요~

만약 쇠라가 오래 살았더라면 미술의 지평이 바뀌었으리라 평하는 천재적인 화가.  그는 당시 유행하던 색채 이론을 깊이 연구하여 역작인 <그랑자트의 일요일 오후>는 그가 2년간의 연구와 다수의 습작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사물에 고유색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Michel-Eugène Chevreul 등의 연구로 여러가지 색채이론이 대두되었다. 시각의 인식와 대뇌의 인지 관계에 대한 차이에 대해 알게 되며, 색채 대비로 인한 착시, 보색 이론 등이 밝혀졌다.  보통 사람들은 이과적 성향과 문과적 성향으로 나뉜다고 하는데, 쇠라 같은 경우는 이과와 문과의 성향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던듯 하다.  당시의 과학서와 이론서를 섭렵하면서 그 이론을 <그랑자트>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심지어 최종적으로는 캔버스를 늘려 가장자리를 빙 돌아가면서 채색을 하였는데, 거기에도 보색이론을 적용하였다] 

Seurat, Child in White, 1884-85,  Conté crayon on paper.  Solomon R. Guggenheim Museum

그리고, 위의 작품은 종이 위에 콩테 크레용으로 그린 드로잉으로 <그랑자트>의 작품 속의 어린 소녀의 습작이다.  직접 보면, 과연 흑과 백 사이에 그토록 다양한 단계의 채도와 명도가 존재했었나 싶을 정도로 감탄하게 된다. 그 다채로운 흑과 백이 가슬가슬한 미샬레 종이의 표면의 질감과 조화를 이루는데, 자세히 보노라면 그 다양하고 심오한 세계에 빠져들 듯한 느낌이 든다.  

Georges Seurat,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의  세부.  중앙 부분에 위치한 어린 소녀  

이 소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작품 <그랑자트>의 캔버스에서의 대각선이 만나는 중심에 자리한 인물로 관람자 쪽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순수한 소녀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이쪽으로 바라보게 그림으로써 관람객들의 관심을 끄는 역할, 그림에서의 focalizer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르주 쇠라는 이과 문과를 섭렵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색상에 대한 감수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흑백에 대한 안목도 탁월했음이 분명하다.  과학이면 과학, 섬세한 감수성이면 감수성, 색상이면 색상, 흑백이면 흑백 어느 하나 허투루 다루는 법이 없다. 

<그랑자트의 일요일 오후>를 위한 습작 ; Seurat, L’écho (Echo), study for Bathers at Asnières (1883–84)  Conté crayon on Michallet paper ; 31.2 x 24 cm, Yale University Art Gallery 

수 많은 드로잉들 속에는 얼마전 다뤘던 <아니에르에서의 해수욕>에 등장한 등굽은 소년도 있고, 손나팔 부는 소년도 있다.  완성작에서 볼 수 없는 적막한 고요가 아련함과 함께 전해져 온다.  

<그랑자트의 일요일 오후>를 위한 습작

그리고, 위의 여인을 보라!  눈,코,입 하나도 확인할 수 없으나, 저 여인은 분명 아름다울것만 같지 않은가!

그가 살던 19세기 말의 프랑스에도 달은 어김없이 뜨고 졌나보다.   짙은 어둠이 깔린 풍경과 휘영청 밝은 달을 쇠라는 오직 흑색의 농담 조절만으로 표현했다. 


추석입니다. 달보고 소원 많이 비시라고 마지막에 달 그림 올렸네요.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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