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2018/11 글 목록
2018. 11. 30. 00:18 미술 이야기

 

11월 26일 월요일 오후,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권위있는 경매소 도로테움 (The Dorotheum)에서 11월 28일 경매 예정이었던 르느와르의 작품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에르-오귀스트 르느와르 (Pierre-Auguste Renoir)의 1895년 작품<Golfe, mer, falaises vertes (Gulf, Sea, Green Cliffs)>은 28일 경매에서 약 $131,000~$181,000 (1억4685만원~2억290만원)으로 판매될 것으로 추정된 작품이다. 

Pierre-Auguste Renoir, Gulf, Sea, Green Cliffsoil on canvas ; 27 x 40 cm. 

The Dorotheum in Vienna, which dates to 1707. A Renoir was stolen off its walls on Monday.  Credit Leonhard Foeger/Reuters

 

빈 경찰이 공개한 CCTV 화면에 잡힌 범인으로 추정되는 세명의 남성 Credit Vienna Police

이번 사건으로 경매소 측 뿐 아니라 구매를 희망했던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을 받았음에는 틀림없다.  실제로 그림을 액자에서 빼내가는 시간까지 걸린 시간은 무척 짧아 범행은 순식간에 이뤄졌다고 알려져 있다. 어떻게 경비가 삼엄했을 경매소를 그렇게 간단히 통과했는지도 미스테리다.  르느와르 작품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이고 독특한 작품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귀중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을 하루빨리 경찰이 되찾기를 바랄 뿐이다. 

유명 작품과 도난 사건은 드문 일은 아니다. 

대표적 도난 사건으로 유명한 것으로는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의 <절규>가 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지만, 이 <절규>가 그 인기에 힘입어 1893년부터 1910년에 걸쳐 유화와 파스텔 등, 4가지 버전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처음 독일어로 제목을 붙일때에는 <Der Schrei der Natur (The Scream of Nature)>, 즉 '자연의 절규'라고 명명했었다는 것도. 

진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해골과 같은 모습의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린 얼굴이 인상적인 이 작품은 간략화된 선들로 현대인의 고독과 절망을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현대의 모나리자'라 불리기도 한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기에 거의 국보 대접을 받는 이 작품들은 지금은 거의 국외로 반출이 금해져 있는 상태. 예외적으로 2015년 반고흐 뮤지엄에서 1893년 파스텔 버전이 전시된 적이 있긴하다. 

총 4점의 작품 중 2점은 오슬로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중이다. (참고: 아래 두 이미지) 

Edvard Munch  (1863-1944),  The Scream (1893)  pastel on cardboard ; 74 x 56 cm, Munch Museum  최초의 버전으로 파스텔로 스케치를 한 작품으로 기본이 되는 구도를 잘 살펴볼 수 있다.  

Edvard Munch  (1863-1944),  The Scream (1893)  oil, tempera & pastel on cardboard ; 91x 73.5 cm, National Gallery of Norway  <절규>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이고 널리 알려진 작품 일것이다.  

뭉크 뮤지엄에서는 1910년 버전 (참고: 아래 이미지)

Edvard Munch  (1863-1944),  The Scream (1910) 

tempera on panel ; 83 x 66 cm, Munch Museum  이 버전은 1910년 카드보드위에 템페라로 제작된 작품으로 2004년 도난당했다가 2006년 무사히 찾은 작품.   

 

 

Munch  (1863-1944),  The Scream (1895) Pastel on board ; 79 x 59 cm, private collection Leon Black.  이 1895년 파스텔 버전은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119,922,600 [약1344억원 상당]라는 높은 가격으로 Leon Black에게 판매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의 하단에는 뭉크가 작품을 구상했을 당시의 느낌을 적은 일기가 동판에 새겨져 덧붙여져 있는 점도 특징이다.  

 

뭉크의 절규 작품의 도난 사건은 1994년과 2004년 두차례 일어났다. 첫번째 1994년 도난 사건은 오슬로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일어났지만 수개월 안에 작품이 회수되었고, 2004년 도난 사건은 <절규>와 함께 <마돈나>가 뭉크 뮤지엄에서 도난당했다가 수년후 회수되었다.

 

1994년 올림픽을 맞이해서 노르웨이의 문화를 소개하는 특별전을 개최하는 관계로 뭉크의 <절규>를 기존의 전시실에서 1층에 옮겼는데, 그 틈을 타 도둑들이 사다리를 놓고 그림을 가져가는데 채 1분이 걸리지 않았고, 게다가 엉성한 보안에 감사!”라는 메모까지 남기고 갔다 한다. (범인들이 명탐정 코난 만화에 나오는 괴도 키드를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수개월 내에 작품은 회수 되었고, 범인은 잡혔지만, 위법수사를 이유로 범인 네명중 세명은 제대로 처벌하지도 못했다 한다. 그 중 한 명은 1988년 뭉크의 <뱀파이어>라는 작품을 훔친 전력이 있는 폴 앵겔 (Pål Enger)이었다고.      

 

1994년 도난 당시 범인들이 사용했던 사다리. 이 사다리를 타고 오슬로의 내셔널 미술관에 잠입하여 뭉크의 <절규>를 떼가고, 거기다 "엉성한 보안에 감사!"라는 메모까지 남기고 떠나는데 50여초 밖에 안걸렸다고 한다. 

  

 

2004년 도난사건의 경우엔 좀더 험악했는데, 백주 대낮에 두 명의 무장괴한이 뭉크 뮤지엄에 출몰하여 뭉크의 <마돈나><절규> 두 점을 훔쳐 달아난 사건이었다.  한때는 증거인멸로 작품들을 태워버렸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작품은 무사히 회수하였다.   

 

보통 이러한 미술품들의 도난 사건의 경우,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기에 미술관 측에서 은밀히 처리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서 경위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도난시 작품이 위작과 교체될 위험도 있고, 미술관 측으로서는 엄청난 손해와 비난을 감수해야하므로.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은밀히 도둑들로부터 되사는 경우까지도 있다고.  개인 경매도 그러하지만, 이러한 작업들은 모르긴 몰라도 첩보전을 방불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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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26. 03:49 미술 이야기

비너스의 역사는 보티첼리와 함께 시작하였다는 것은 이전의 글에서 밝힌 적이 있다. 

거의 처음 올린 보티첼리의 비너스에 대한 글은 바로 여기~    

물론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비너스의 도상은 있었지만, 누드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은 보티첼리가 처음이었고, 누워 있는 누드로서 비너스를 그린 것은 흔히 소장처의 이름을 따서 '드레스덴 비너스'라고 불리는 작품이 있다.  이후 이 도상을 따라 수많은 '누워있는 비너스' 상이 그려졌다.  이는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는 남성의 누드가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여겨졌고, 여성의 누드는 금기시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술사적으로 살펴보면, 여성의 누드가 묘사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중반이나 되어서였다.  이후 서구 회화에서는 육체적인 것을 죄악시하거나 경시하던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에 이르면서 신들은 누드로 그려진다는 회화적 어휘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누드를 그리는 것은 정당화 되었다.  대부분의 주문자는 남성이었기에 그들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서 누드의 여인상은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고, 그 중 최초로 그려진 '누워있는 비너스' 도상은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래의 '드레스덴 비너스'는 풍경은 조르조네가, 누드는 그의 제자이자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최고 대가였던 티치아노가 그린 것이라 전해진다.  

소장처의 이름을 따서 '드레스덴 비너스'라고도 불리는 서구 미술사상 최초의 '누워있는 비너스'는 조르조네와 그의 제자 티치아노에 의해 그려졌다. Giorgione  (1478-1510) and Titian (1490-1576), Sleeping Venus (1508), oil on canvas ; 108.5 x 175 cm, Old Masters Picture Gallery Dresden 

Titian, Venus of Urbino (1532 or 1534), oil on canvas ; 1.19 x 1.65 m, Uffizi Gallery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대가로 알려진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2/34)  이 작품은 마네의 '올랭피아' (1863)의 모델이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티치아노의 또 다른 걸작으로는 역시 소장처의 이름을 따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있는데, 이러한 르네상스기의 비너스는 이후 누워있는 누드의 모습으로 마네의 '올랭피아'부터 모딜리아니의 '누워있는 나부'에 이르기까지 오늘날까지도 수도 없이 그려졌다.  

그 결과,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의 미술관에 간다면 드물지 않게 살펴볼 수 있는 그림 중 하나가 되었다.  오죽하면 뒤샹이 그린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보고, 그의 형이 '누드는 누워 있는 것이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겠는가?  

오늘은 그 친숙한 비너스의 이미지에 새로운 이미지를 더해 소개할까 한다.  

Venerina (Little Venus), life-sized dissectible wax model created by the workshop of Clemente Susini at Florence’s La Specola for Museo di Palazzo Poggi, Bologna, Italy, 1782. Courtesy of Museo di Palazzo Poggi - Università di Bologna. Photo © Joanna Ebenstein.  실제 사람 크기로 만든 밀납 모델. 계몽시대에 제작된 비너스 상 '베네리나 (작은 비너스)'라는 명칭으로 불림.


위의 비너스는 밀납으로 만든 비너스 상이다. 이는 실제 사람 크기로 만들어 졌고, 별칭이 '베네리나 (작은 비너스)'다.  마리 앙토와네트의 오빠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레오폴드 2세의 통치기에 해부학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자는 클레멘트 미켈란젤로 수시니 (Clemente Michelangelo Susini)로 이 외에도 유사한 밀납 비너스 상을 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밀납 비너스 상으로는 '메디치 비너스'라고도 알려진 '분리 가능한 비너스'다. (여기서 '메디치 비너스'라고 불리는 우피치에 소장 중인 대리석 조각상도 있으니 혼돈하지 않도록 하자. 아래 그림 둘 참고) 

 

가장 유명한 분리가능한 밀납 비너스. '메디치 비너스'라고도 불린다. 클레멘트 수시니의 워크샵에서 1780-82년에 제작. Courtesy of Museo La Specola, the Natural History Museum of Florence. Photo © Joanna Ebenstein.

Venus de' Medici,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Italy.  '메디치 비너스'라고 불리는 또 다른 비너스 상으로 현재는 우피치에 소장 중이다. 갓 목욕을 마치고 올라와서 수건으로 몸을 가린 모습의 비너스를 묘사한 '정숙한 비너스 (Venus Pudica)' 도상을 따르는 조각상.  

그렇다면, 18세기의 유럽에서는 오늘날 보기에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이러한 분리 가능한 밀납 비너스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일까?  그 이유는 앞서 밝혔듯, 일차적으로는 해부학 연구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당시의 계몽주의적 분위기도 한 몫을 했고,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귀족의 문화에도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오늘날의 미술관과 박물관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렇듯 신기한 것을 수집하려고 하는 귀족층의 독특한 취미와 만나게 된다)  일차적으로는 의학이라는 과학에서 출발했으나 '뚜껑' (?)을 덮은 여인의 인체의 모습은 무척 아름답게 묘사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미술과 연결이 된다. 

Courtesy of Université de Montpellier, collections anatomiques. Photo © Marc Danton

또한 이러한 밀납 비너스 상을 제작하는 붐이 일었던 시기는 '인체야말로 신의 가장 완벽한 창조물이자 인간이야말로 소우주'라는 사상이 만연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학 내지 종교적 측면에서도 이해해 볼 수 있다.    

피렌체의 라 스페콜라, 동물학 및 자연사 박물관에 소장 중인 이 밀납 조각상들은 한편으로는 과학실의 인체 모형을 상기시키기도 하고, 밀납 인형 박물관을 떠올리게도 한다. 밀납으로 만든 비너스 상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기괴하기 짝이 없고 징그럽게 보일 수 도 있다.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인간의 호기심과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아울러,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지식에의 욕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도 인간의 본능 속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결국 미와 과학, 종교와 의학, 영혼과 신체가 결국은 상통한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미술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티치아노와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클레멘트 수시니의 '분리가능한 밀납 비너스'는 현대미술에서 자주 논해지는 페티쉬와 순수 미술 사이에서의 간극과 혼용도 한번쯤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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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23. 00:14 일상 이야기

말을 배우기 시작한 조카가 하루는 '엄마, 무서우면 얘기해. 내가 지켜줄께.' 했다는 말을 올케가 했다.  그게 너무 귀엽고도 기특해서, 조카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나는?' 그랬더니, 제법 의연한 표정을 한 네 살짜리 조카가 망설임 없이 '고모도 지켜줄께.' 그랬다. 올케와 나는 도대체 저 말을 어디서 배웠나 신기해 했다.  누굴 지켜줄 입장은 아닌 조그마한 아이가 어떤 맥락에서 저런 단어를 익혔지? 

그 의문은 얼마 있다가 풀렸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배운 노래 중에, '지구야, 지켜줄께.'가 있었다. 신기한 건 자세히는 몰라도 이 아이가 '지켜준다'라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또래의 아이들이 자신이 배운 단어는 어디서든 꼭 써본다는 것이다.  여섯 살 먹은 꼬마가 '내 평생 이렇게 힘든 건 처음이야.'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경우다.  그래서 예부터 아이들 앞에서는 냉수도 함부로 마시지 말라하지 않았는가.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의 행동과 언어는 그 부모의 언행이 반영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부모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막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아이가 부모의 언행을 보고 배운 것이 거의 확실하다. 아직 인격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니까 교정의 여지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교육하는 부모의 언행과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과연 그 교정의 기회가 주어질 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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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22. 15:10 일상 이야기

미국에 있을 때 추석이 되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잘지내냐는 안부와 함께 타향에서 송편이나 챙겨먹냐며 외롭더라도 잘지내라며.  덕분에 간만에 정다운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난 솔직히 그다지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이 다 명절이라고 고향 가고 송편 빚고 차례지내고 했다면 나도 쓸쓸한 느낌에 가족들 생각이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의 추석은 미국에서는 평일. 누군가 일러주지 않으면 모르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반면, Thanksgiving 이라 불리는 추수감사절 때에는 한국에서는 아무런 상관없는 날이지만, 미국에서는 꽤 큰 명절이다.  11월 4째주 목요일이라 정해져 있기에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금요일도 그냥 쉬다보니, 나흘의 연휴가 주어진다.  집집마다 차이는 있지만, 칠면조 구이를 하고, 고구마와 머시멜로우를 섞어 만든 다소 정체불명의 음식도 하고, 크렌베리 소스를 만든다. 그리고 보통 후식으로는 펌프킨 파이를 준비하는데, 이는 나중에 식탁에 낼 때에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씩 얻어서 낸다.  경우에 따라 추수감사절 전날부터 가족들이 모이는 경우도 있지만, 당일 가족들이 하는 약간 늦은 점심 식사가 메인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이날은 다들 모여 준비한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며 느긋한 시간을 함께 보낸다.  저녁 식사 때에도 비슷한 메뉴.  그리고 남은 터키는 다음날 샌드위치 속에 넣어서 먹곤 한다 칠면조를 요리하는 방법은 집집마다 달라서 마당에 커다란 찜통같은 솥을 걸고 그 속에 기름을 채워 통째로 튀겨내는 집도 있고, 요리용 종이 봉투 속에 칠면조를 넣어 '촉촉하게' 요리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추수감사절은 시기 상으로는 대학원에서는 기말을 향해 나가는 시기. 유학 초반에는 준비해야할 발표와 기말 페이퍼로 늘 맘은 무거운 상태인 경우가 많긴 했지만, 나중에 학기 수업과정이 끝나고 나서는 아닌게 아니라 쓸쓸한 느낌도 들고 고향 생각도 나고 그랬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전화 한통 메일 하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는 추수감사절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추수감사절 때마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벽을 긁거나 베겟잇을 눈물로 흠뻑 적시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유학을 간 이후에 매년 추수감사절 식사에 누군가에게 초대받고는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연휴라고 편히 쉴 수 없는 학생의 처지였기에 그 때에는 초대 받으면 받는대로 응하면서도 맘이 바빴다. 한두번은 예의가 아닌듯 해서 거절하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상대방의 초대가 빈말이 아니라 몇 번이고 간곡한 초대이다 보니, 나중에는 그런게 그렇게 낯설지는 않게 느껴졌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날 추수감사절 식사에 초대를 해 준 사람들은 다양했다.  학과 친구도 있었고, 과 친구는 아니라도 거기서 사귄 친구들도 있었다. 학과 교수님도, 타과 교수님도 있었고, 직장 동료도, 직장 상사도 있었다.  심지어 타주에 있는 친구의 고향의 집까지 가서 그 집에서 머문 적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명절 날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함께 불러 쇠는 일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미국에 있는 동안, 거의 매년 난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서 명절을 함께 보내곤 했다.  그때마다 난 노먼 락웰의 그림을 떠올리기도 했다. 물론 집집마다 풍경은 다 다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커다란 파티가 이뤄지기도 했다.  

날짜를 보니 오늘이 추수감사절이다.  혹시 미국에 거주하는 친척을 둔 분들은 거기서 쇠지 않는 추석이 아니라 오늘 안부 전화를 한번 해주시라.  원래 주변의 사람들이 즐거울 때 사람은 외로워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생각해본다. 우리나라에서도 명절, 가족이 아닌 친구들을 한번씩 초대하는 건 어떨까?  실제 초대 받아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덕분에 난 자칫 벽을 긁거나 베겟잇을 적시는 일 없이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고, 그들의 말을 내가 곧이 곧대로 믿자면, 가족끼리의 모임도 좋지만, 내가 참석을 해서 색다르고 즐거웠다는 말을 했다.  명절의 모습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어 가고 있으니 이런저런 다양한 명절의 풍경도 즐거울 것 같다.   

아래는 Doris Lee의 Thanksgiving (1930-40). 좀 더 현실적인 추수감사절 풍경에 가까울지도.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1. 20. 21:33 옛날 이야기

어릴 때 안데르센 전집이 집에 있어서 그 속의 이야기들은 빠짐없이 읽었었다.  그 시절 읽었던 안데르센 동화 중에서는 지금 곱씹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많다.  안데르센 동화 중 잘 알려진 인어공주 이야기만 해도 너무 비극적이라 '동화'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그나마 그건 재미라도 있지, 개중에는 정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내용이 많다.  이를 테면, "작은 클라우스와  큰 클라우스", 이 이야기는 어린이가 읽기엔 지나치게 길면서 내용은 또 정말 재미없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생각하기엔 가장 의미 불분명한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공주와 완두콩" 이야기이다.  

스토리의 전개는 이러하다. 

어느 왕국의 왕자는 '진정한' 공주와 결혼하고 싶어했는데, 항상 결정적 순간에 진정한 공주가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식사 예절을 제대로 모른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거나.... 왕자는 선을 보는 공주들에게서 결정적 순간에 티를 발견하고는 번번히 실망하고 퇴짜를 놓고는 한다.  그러던 중, 어느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비에 흠뻑 젖은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남루한 행색임에도 거만하다고 할 정도로 당당하게 자신을 '진짜 공주'라고 주장하며 그 궁전에서 하루밤 묵게 해달라고 이야기한다. 왕자는 당황했지만, 폭풍우 치는 밤, 곤궁에 처한 사람을 야박하게 쫓아낼 수 없었기에 왕자는 시종들에게 시켜 잠자리를 마련하라고 시킨다.  매트리스 12장에 오리털이불 12장을 깐 아주 푹신푹신한 이부자리를 말이다.  

그 다음날, 왕자가 그 여인에게 잠자리는 어떠했냐고 물으니 그녀로부터 등에 뭔가 배겨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자, 왕자는 높이 쌓인 매트리스를 다 들어내고 그 맨 아래에 깔린 완두콩을 집어 올린다. 그러면서 '음하하하', 그 까칠한 여인에게 '당신처럼 예민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공주!'라며 '인정!'하며 둘이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사실 어릴때 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 ??????!!!!!!! 이런 느낌이었고, 지금 다시 그 스토리를 떠올려도 느낌이 별반 다르지 않다.  정말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지 않은가?  까칠하고 예민함이 공주의 척도라니!  




대학 때였다. 친구랑 대화에 몰두하고 있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뒤에서 톡톡 쳤는데, 나는 그 이야기 도중이라 미처 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뒷쪽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은 둔해서 못알아차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약간 발끈해가지고는,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 방금 '둔하다'는 발언을 한 친구를 쏘아보면서 내가 말했다. "아냐~ 난 완두콩 공주야~"  

그 순간 나는 내가 그 오랜 세월 그 얘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고, 그 얘기를 들은 애들 중에 그 얘기를 알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 그리고 다들 안데르센의 그 동화의 특이함과 허망함에 대해서 말하면서 한참 깔깔대고 즐거워했다. 그리고 한동안 내 별명은 '완두콩 공주'가 되었다. 

재작년 9월 12일 저녁 8시 반 정도, 경주에 지진이 크게 났을 때, 난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방바닥이 꿀렁거리고 책상이 흔들거리는 느낌을 느꼈다. 잠시 놀라서 정지 장면처럼 앉아 있다가, 잠시 후 방 밖으로 뛰어나가 '지금 흔들렸지?"라고 가족들의 동의를 구했으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이후 인터넷에 지진 소식이 올라와서 경주에 지진이 크게 있었고, 서울에도 약간의 여파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어제 새벽에는 흔들림에 잠이 깼다. 그 흔들림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오늘 잠시 잊고 있다가 찾아보니까, 어제 대전에 새벽 3시반쯤 지진이 있었다.  폭풍우나 지진이 오기 전에는 야생동물들이 부산하게 피난을 간다고 하는데, 내가 동물적 본능이 뛰어난 건가?  어찌 되었건 어제는 유난히 진동과 흔들거림의 시간이 길었고, 그 탓에 잠을 설쳤다.  그 덕분에 요새 가뜩이나 체력 저조한데, 오늘은 컨디션이 더 안좋았다.  

친구들은 '공주' 그 대목이 심히 걸린다 하겠지만, 난 '완두콩 공주'인가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1. 18. 00:30 미술 이야기

어제는 에드워드 호퍼의 "찹 수이"라는 작품의 경매소식. 내가 좋아라 하는 작가의 소식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 글은 요기!

그리고 오늘은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의 경매 소식!  데이비드 호크니 역시 나의 짧은 블로그 역사 내에 등장한 바 있는 분!  '개인적으로 흥미있어 하는 작가인데,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의 왕성한 탐구열과 실험 정신에 있어서 경의를 표하는 바'라는 내용의 글을 올린 바 있다. 

호크니에 대한 글은 요기!

물론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kney: 1937-)는 지난 수십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도 있고 유명하기도 작가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온 작가이다.  그리고 며칠전 11월 15일 뉴욕 크리스티 전후 현대미술 작품 경매에서 $90.3-millions [약 1,022억 상당]에 판매되었다.  

흔히 경매에서 천문학적 금액으로 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뉴스로 접할 때마다 '과연 작품의 가치는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그리고 '과연 그 작품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떠오르고, 종종 토론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정확한 해답은 여기서 내릴 수 없고 의문만 가중할 뿐인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관련해서 생각할만한 정보가 있다. 

이 작품은 1972년 처음 판매될 때에는 불과 $18,000 [약2,037만원 상당]에 판매되었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6개월 이내에 2배 이상의 금액인 $50,000 [약5,660만원 상당]에 판매되었다. 그러던 것이, 반세기만에 가격이 무려 1800여배가 뛴 것이다.   과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새삼 궁금해진다. 


David Hockney (b. 1937),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1972). Acrylic on canvas ; 213.5 x 305 cm 

작품의 제목은 "화가의 초상 (두 인물이 있는 풀장)"(1972년 작)은 당시 미국 화가 피터 슐레진저 (Peter Schlesinger)와 수영을 하고 있는 인물 2명이 그려져 있다.  호크니는 그와 연인관계로 있던 5년간 그를 모델로 한 작품도 많이 남겼지만, 그가 회화적으로 특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물에 대한 관심, 혹은 물의 움직임과 그에 따른 빛의 굴절과 이미지의 반영에 관한 것이었던 것이었다.  

Preparatory photograph for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Le Nid-du-Duc, 1972 © David Hockney


런던의 켄싱턴 가든에서 그의 당시 연인이었던 피터 슐레진저의 사진을 찍고 있다. 이 사진의 모습을 바탕으로 "화가의 초상 (두 인물이 있는 풀장)"(1972년 작)의 오른쪽 인물을 그렸다. Film still from A Bigger Splash, 1974. Photo: Jack Hazan / Buzzy Enterprises Ltd


호크니는 1963년 LA를 여행한 이래, 그곳의 태양과 풀장에 매료되어 이후 1976년 LA로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현재에는 런던과 LA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비슷한 주제의 작품으로는 "A Bigger Splash" (1967년 작)라는 작품이 있다. ('splash'는 동사로는 '(액체 따위가) 튀기다'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명사로 사용되었고,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풍덩' 혹은 '첨벙' 정도에 해당하는 의성어이다.)   


A Bigger Splash, 1967


호크니는 다작의 화가일 뿐 아니라, 글을 통해 자신의 예술관과 예술에 대한 관심사에 대해서 밝히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해오고 있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기록해오고 있다.  덕분에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해서는 많은 것들이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오늘의 주인공인 "화가의 초상화 (두 인물이 있는 풀장)" 만큼 자세히 기록되어 잘 알려진 작품은 드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에 대해서는 1988년 출판한 데이비드 호크니에 의한 <<데이비드 호크니: 나의 초창기 시절 David Hockney by David Hockney: My Early Years >>이라는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1971년부터 73년에 걸쳐 영국 감독인 잭 하잔 (Jack Hazan)의 A Bigger Splash 라는 호크니의 1967년 작품과 동명인 영화에서도 작품의 제작 과정이 잘 담겨져 있다.  (이 영화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픽션 영화로 당시 호크니의 거처이자 작업실이 있던 영국의 노팅힐을 배경으로 그의 연인이자 동료 화가였던 피터 슐레진저와의 1970년부터 1973년사이의 순탄치 못했던 연애사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호크니는 1974년 Gregory Evans를 만나 1976년 LA로 이주할 때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 계속 함께하고 있으며 그의 동업자이기도 하다.)   


영화의 스틸 중 하나로 호크니가 작업 중인 장면을 담고 있다.  Still from the film ‘A Bigger Splash’. Photo: Jack Hazan/Buzzy Enterprises Ltd via David Hockney and Christie’s


뉴욕 크리스티 경매 프리뷰 장면, Sept. 13, 2018.


나로서는 경매에서 그토록 고가로 거래되는 작품들의 가격을 결정하는 기준은 설명할 길 없고, 엊그제의 경매의 결과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일부 비평가들이 논하듯, 위의 작품이 동성애자로서의 심리적 갈등을 잘 나타내고 있는지, 혹은 이 시대 최고의 걸작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하지만 산뜻한 초록 계열로 산뜻하게 그려진 LA의 풍경과 햇살 받아 일렁이는 풀장에서 느껴지는 쾌적함.  그리고 그러한 풍경과 풀장과 조화를 이루며 절묘하게 배치된 두 인물은 시각적 균형을 제공한다. 그와 동시에 정지 화면에 있는 듯한 수영하는 인물, 그리고 경직되어 서있는 듯한 뻣뻣한 인물들의 모습으로 인해 긴장감이 만들어 지고 있음은 알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 절묘한 긴장감은 두 인물 사이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고 있을 수도 있으나,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왠지 모르게 경쾌한 풍경과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영리하게 계산된 즐겁고 아름다운 품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1. 17. 00:30 미술 이야기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1882-1967)에 대해서는 나의 길지 않은 블로그 역사 중에서도 몇번이나 다루었다.  개인적으로도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대중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나 평판도 인기도 좋은 작가이기 때문에 할 말이 원체 많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그의 매니저이자 조수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그의 부인 조세핀 (별칭 Jo)이 그의 사후 대부분 휘트니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그의 주요 작품들은 휘트니 미술관에서 많이 소장하고 있고, 유명한 "나이트 호크스(Nighthawks)"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워낙 인기 있는 화가인데다가 그의 주요 작품들은 이미 유명 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라 그의 작품이 경매에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2018년 11월 13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찹 수이 (Chop Suey)"(1929년 작)이 $91,875,000 (약 1,040억 상당)에 판매되었다.  이로서 이 작품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중 가장 비싼 작품이 되었다. 역대 경매가로 비교해보자면, 인플레를 고려했을 때, 가격 47위에 해당하는 마크 로스코의 "주황, 빨강, 노랑 (Orange, Red, Yellow)" (1961년작)의 바로 뒤를 잇는 48위에 해당하게 된다. [마크 로스코의 "주황, 빨강, 노랑"은 2012년 같은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86.9-millions [인플레 고려가격 $92.6-millions]에 판매된 바 있다] 

호퍼의 "찹 수이"는 식당 안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테이블에서 마주한 두 여인이 화면의 주를 이룬다. 두 여인 모두 화가의 아내인 조세핀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밝혀진 바에 따르면 호퍼가 생전에 자주 가던 뉴욕시의 콜럼버스 서클에 위치한 저가의 중국 음식점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dward Hopper, Chop Suey (1929)  oil on canvas ; 81.3 × 96.5 cm

 

작품의 제목이 된 찹 수이 (Chop Suey)는 미국화된 중국 음식의 이름 중 하나이자, 그림 속의 간판으로 미루어 식당의 이름이기도 하다.  중국 음식이 현지화 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찹수이는 그런 관점에서는 미국식 자장면. 조리법에서 보자면, 우리나라의 잡채와 비슷한 음식이다.  찹 수이란 원래 雜碎에서 나온 단어로 미국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대중적인 음식에 속한다.  조리법도 비교적 간단해서 고기나 해산물, 그리고 잘게 썬 야채를 볶다가 간장, 참기름, 피쉬 소스, 칠리 페이스트 등 여러가지 소스를 넣어 후루룩 볶은 stir fry라는 총칭으로 불리는 조리법을 사용한 요리다.  

 

이러한 대중적 음식, 그리고 그 요리 이름을 딴 음식점, 그리고 그 속의 마주한 두 인물.  미국의 일상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그의 기존 작품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호퍼의 작품은 당시 미국의 일상과 풍경이긴 하나,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도심의 일요일 오전 풍경이나 깊은 밤의 간이 식당, 그리고 변두리의 한적한 주유소 등, 현대인의 고독을 도드라지게 표현되게 그려왔다. 따라서, 이 "찹 수이"라는 작품은 호퍼로서는 예외적으로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이 모두 일행이 있다는 점이 차이가 있는데, 따라서 이 작품은 호퍼의 작품 중에는 가장 따뜻한 작품이라고도 평가되기도 한다. 

Edward Hopper, Chop Suey (1929) oil on canvas ; 81.3 × 96.5 cm  세부 화면 왼쪽 가장자리 중간의 여인의 측면이 절묘하게 잘려나간 것도 재미있는 한 측면. 

 

오랜 시간 생계를 위해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다가 매니저의 역량이 탁월한 아내 조를 만나면서 작품 판매가 순조로워지면서 호퍼는 후반의 작가 생활 동안 경제적으로는 성공한 화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과묵하고 내성적인 호퍼는 연극과 영화를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하던 그가 극장에 자주 가는 것이 가장 큰 사치라고 밝힐 정도로 경제적인 성공 후에도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작품에서도 드러나는 그의 세계관은 부귀영화나 세속적 가치에 대한 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한 호퍼가 지금 살아서 자신의 자그마한 작품이 1천억도 훌쩍 넘는 가격에 거래된 것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이하는 보너스 이미지들

Hopper,  Early Sunday Morning (1930), oil paint, canvas ; 89.4 × 153 cm 

  

Hopper, Lighthouse  Hill (1927) , oil on canvas ; 71.76 x 100.33 cm, Dallas Museum of Art, Dallas, TX

 

Hopper, Gas (1940), oil on canvas ;  66.7 x 102.2 cm, MoMA

 

 

Hopper, Automat (1927), oil on canvas ; 71.4 × 91.4 cm,  Des Moines Art Center, Des Moines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1. 15. 00:30 일상 이야기

건강이 최고라는 말은 누구나 다 한번씩 하고 들어본 상투적인 말이지만, 뼈저리게 절감하는 순간은 내 몸이 정말 아플 때이다. 

감기라는 감기는 종류별로 돌아가면서 하다보니 앓기 시작한지 한달이 넘어간다. 이미 잡혀 있던 일정들에도 앞으로의 계획에도 많은 차질이 생긴다.  

아프면 일단 떨어진 체력만큼 자신감이 떨어진다.  매사가 뜻대로 안 이뤄지다보니 우울해지고, 비관적이 되기 쉬운 것같다. 그리고, 생활이나 삶의 질도 떨어진다. 

긍정적인 측면은 내가 언젠가 끄적였듯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던 일상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짧게 약간 아플 때엔 그런 기특한 생각도 들더니만, 장기전으로 가다보니 좀 힘이 빠진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매일 하나씩은 올리자 했는데, 그렇게 해온지 돌아보니 두달이 조금 넘었다. 그닥 뚜렷한 명분 없이 그냥 일단 시작했으니 그렇게 하려고 생각했었는데, 먼저 건강을 좀 회복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횟수를 조금 줄이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인듯하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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