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2019/01 글 목록
2019. 1. 31. 13:52 미술 이야기

이 글에는 2편이 있어요.    1편만 읽고 오류를 지적하시지 마시고~ (뭐 하셔도 괜찮습니다만), 어쨌든 2편까지 꼭 읽어주세요~ 혼란을 야기했다면 죄송합니다. 

인도계 영국작가인 아니쉬 카푸어 (Anish Kapoor)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아마도 시카고의 밀레니엄 파크에 설치된 <구름 문 (Cloud Gate)>라는 작품일 것이다. 나만 해도, 아니쉬 카푸어라는 외우기 힘든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이 작품을 통해서였다.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 파리에 가면 에펠탑 앞에서 사진 찍듯이, 너나없이 모두 이 거대한 강남콩 앞에서 포즈를 취하곤 했다.  물론 나도 이 앞에서 몇 차례....  선촬영 후감상.  

공공설치인 탓에 이 작품은 당시의 기후의 변화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에 따라 비춰지는 풍경의 모습도 매번 변한다.  일단 거대한 조각품은 전통적 조각에서 느낄 수 없는 규모와 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그 아름다움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개인차가 있으니 패스. 

이 작품이 인상적인 작품은 알루미늄이라는 현대적 매체를 사용하고 형상도 도우넛 모양의 충분히 현대적 형상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전달하는 미학은 지극히 동양적이라는데 있을 것이다.  'bean'이라는 별칭처럼 도우넛 같기도 하고, 콩의 형상을 하고 있는 형태의 특징과 거대한 규모 탓에 주변의 풍경이 오롯이 다 비춰진다. 따라서 삼라만상을 다 담고 있는 우주와도 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그 속에 비춘 나의 작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우주 속에 갖힌 또다른 나와 마주하게 되고, 과연 진정한 나란 누구인가...하는 '장자의 나비'같은 생각도 하게 한다. 한편 거대한 <구름 문>과 대비되는 그 속에 비친 조그마한 내 모습에서 내 존재의 미미함을 느끼면서 철학적 사유를 하게 된다고나 할까?  

Anish Kapoor, Cloud Gate (2006), Stainless steel sculpture, 10 × 13 × 20 m,  Millennium Park, Chicago.  고광택제의 알루미늄으로 제조한 조각으로 아니쉬 카프어의 대표작. 북쪽의 마천루를 비추고 있는 모습을 동쪽에서 촬영한 것. 북쪽으로는  East Randolph Street을 따라 마천루들이 즐비하다.   

 

Anish Kapoor, Cloud Gate (2006), Stainless steel sculpture, 10 × 13 × 20 m,  Millennium Park, Chicago 

 

그러던 작품이었으나, 최근 영하를 밑도는 강추위에 이렇게 쪼그라들었다는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댓글 중에는 '이제야 작품 같아졌네.'라는 글도 있더라마는, 나같은 경우는 원상회복이 될 것인지 심히 걱정이 되었다.  나의 추억도 담겨 있는 조각품이 또 다시 아름답게 삼라만상을 비추어줬음 좋겠다는 바람.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은 국내에도 있다. 리움 미술관 야외 정원에 두 점과 실내에 한 점~

하늘 거울 (Sky Mirror)는 여러버전이 있고, 리움의 작품과 대동소이하다. 

예전에 안토니 곰리에 대한 글을 쓰면서 리움 미술관은 종합선물세트와도 같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건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에도 해당이 되네요.  안토니 곰리에 대한 그 글이 궁금하신분 여기를 참고하세요.  

 

아니쉬 카푸어의 공공조각 다른 작품으로는 <하늘 거울 (Sky Mirror)> 있다.  시카고의 <구름 (Cloud Gate)> 마찬가지로 고광택제 알루미늄으로 제작되어 하늘을 비추는 오목한 접시모양의 설치물로 여러가지 버전이 세계 곳곳에 있다.  

최초의 버전은 2001 영국 노팅엄의 웰링턴 서커스 (Wellington Circus, Nottingham, England) 설치된 것이다. 작품은 무게가 10 톤에 육박하고 6 미터 너비의 오목한 접시로 하늘을 향해 고정되어 있어, 거울과도 같은 매끈한 표면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을 반영한다.   버전은 2006 9 19일부터 10 27일까지 한시적으로 뉴욕의 록펠러 센터에 설치되었던 버전이 있는데, 무려 11m 지름으로 3 높이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볼록한 면은 5번가를 오목면은 록펠러 센터의 안뜰 쪽을 향해서 독특한 풍광을 제공했었다

이밖에 영구 설치로는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허미타지 미술관 (Hermitage Museum) 네덜란드 틸버그 (Tilburg) 드퐁 현대미술관 (De Pont Museum of Contemporary Art), 달라스의 AT&T Statium 있다. 그리고, 한국의 리움 미술관.  

아니쉬 카푸어, <하늘 거울 (Sky Mirror)> 2006 9 19일부터 10 27일까지 한시적으로 뉴욕의 록펠러 센터에 설치되었던 버전이 있는데무려 11m 지름으로 3 높이에 해당하는 규모

 

1980년대부터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명실공히 세계적 작가인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세계는 시기별로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시카고의 <구름 문>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 내가 한차례 아핫! 하고 아이디어에 감탄했던 작품은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되었던 <승천 (Ascension)>이라는 작품.  

‘ascension’ by anish kapoor, basilica di san giorgio, venice image by oak taylor-smith

 

 

서양의 중세때부터 수도 없이 그려졌던 예수 승천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런 신박한 표현을 착안해내다니!   어떤 의미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가장 '리얼리즘'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쉽게도 나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은 고사하고, 직접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목도한 경험도 없지만, 영혼이라는 것은 본래 형상을 지닌 것이 아니니, 만약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니시 카푸어의 작품과 가장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원을 따지자면, 뒤샹의 '남성 소변기'에서 출발했고, 이후 팝아트와 네오팝 작가들이 끊임없이 시도해온 '발상의 전환'과 '사고의 전복'을 통해 유발되는 '충격'이 예술의 목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충격 요법'을 지향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중 하나라면, 그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참고로 아래는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그려졌던 예수 승천의 다양한 예들 중 일부.  아래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얼마나 참신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Rembrandt (1606–1669), The Ascension (1636), oil on canvas ; 93 x 68.7 cm, Alte Pinakothek 

 

Master of the Rabbula Gospels, The Ascension of Christ (586) Parchment, 34 × 27 cm, Biblioteca Medicea-Laurenziana

Benvenuto Tisi da Garofalo, Ascension of Christ, 1510-20. Source: Wikimedia Commons

Gebhard Fugel, Ascension of Christ (1893/94), Catholic Parish Church of St. John Baptist, Obereschach, Ravensburg

 

쪼그라든 강남콩 모양의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을 보고 써본 내맘대로 작품 보기 세번째 시간이었습니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26. 05:18 일상 이야기

평소에는 엄청 점잖은 사람인데, 차만 타면 쉽게 흥분하고 욕설도 마다 않는다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들었다.  그건 우리나라만 그런게 아닌듯, 옛날 디즈니 초창기 시절 운전으로 위법을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안전운행 교육용 화면으로 만들어진 것에도 등장한다. 차를 탈 때엔 평소 우리가 보던 순하고 느릿느릿한 구피였는데, 운전대를 잡는 순간 눈빛이 바뀌며 헐크 같이 변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면 안된다는 교육용이다. 


왜 운전대만 잡으면 분노조절이 안되는 것일까?  갑자기 끼어드는 차를 향해 욕설을 내뱉는 것은 어쩌면 놀람을 넘어선 공포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과연 난폭 운행이 분노조절 장애 있는 운전자들을 낳는 것인지, 아니면 원체 분노조절 장애 운전자가 많다보니 난폭 운행이 많아진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밀리는 상황이 많으니 짜증이 나고 여유가 없어져서 그럴 수도 있는데, 가끔 깜빡이 없이 갑자기 훅-하고 눈 앞에 차가 끼어들면 무엇보다 사고의 위험때문에 등골이 서늘하고 그 다음 순간에는 화가 확 치민다.  내 경험상 너무 놀라면 경적을 울릴 틈도 없다. 제발 그러지 좀 말았으면 좋겠다. 운전자들의 시야가 그렇게 넓거나, 모두가 그렇게 순발력이 뛰어나지 않다. 그러다 사고나면 그렇게 끼어든 운전자도 손해지 않은가?  내가 몇 번 그 차 도대체 얼마나 빨리가나 싶어 눈으로 좇으며 가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끼어든 차가 나중에는 내 뒤쪽으로 오는 것도 몇 번이나 봤다. 그래봤자 별 수 없다는 것이다. 

병목 현상있는 구간에서는 차례로 한 대씩 지나가면 될 것을 한번 양보를 시작하면 끝도 없이 같은 쪽 길에서 차들이 밀고 들어와서 난감한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결국 감정 싸움을 야기하고 서로 머리 박고 꼼짝 않는 황소 두마리 처럼 길을 막아서는 결과를 야기하기도 한다.  아무도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결과이다. 여하튼 운전을 하면서 '왜 저러나' 싶은 적이 많은데, 이런 상황에서 초보 운전자의 경우 길 위로 나서려면 적잖은 공포를 느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차가 초보운전임을 알리는 스티커가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작년에는 차를 몰고 가는데, 옆 라인 차의 뒷쪽에, '먼저 가, 난 이미 틀렸어'라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고 빵 터진 적이 있다. 그걸 주변에 이야기 했더니, 원체 널리 퍼진 문구였는지, '참 싱거운 사람'이라는 평도 들었다.  (내가 싱거운 건 딱히 부정 못하겠지만, 날 그렇게 놀린 사람도 처음 봤을때엔 좀 웃지 않았을까? 속으로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미국 버전을 발견했다. 직접은 아니고, 페북에서...  '열심히 가고 있잖아~'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규~' 이런 뉘앙스일텐데, 이번 경우 스티커가 아닌 차 번호판을 아예 그렇게 만들었다. (미국은 돈을 더 내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저렇게 원하는 문구를 넣을 수 있다. No.1 Daddy, No.1 Mom을 비롯해서, 의사라던가 변호사라던가 직업을 넣는 사람, 좋아하는 스포츠 팀의 이름을 넣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과연 어느 쪽이 분노에 차 뒤따라 오는 운전자들을 효과적으로 달랠 수 있을 것인가?  맥락은 비슷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 쪽이 좀 더 페이소스가 더 묻어난다고나 할까...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25. 00:30 일상 이야기

알함브라 궁전

난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다. 내가 본 드라마는 손꼽는데, 드라마를 안보는 이유는 단순하다. 아무래도 매주 그 시간 기다려서 보는게 너무 힘들어서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광고 나오는 동안 딴 짓하다가 매번 흐름을 놓치곤 하다가 시들해져서 안보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 20대 초반 남녀간의 연애 드라마인데, 이건 뭐 주인공이 의사이면 병원에서, 변호사이면 법정에서 알콩달콩 연애만 하는데, 나로선 드라마에 설득당하지 못해서 딱히 공감이 되지 않아서이다. 

내가 최근 들어서 본 드라마 중에서 재미있게 본 드라마는 '비밀의 숲'하고 '라이프 온 마스'였는데, 이 두 드라마는 광고 없는 스트림으로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매주 다음주를 기다렸다 본 드라마였다. 

비밀의 숲은 왜 다들 '조승우, 조승우' 하는지 알게 해 준 드라마였고, 난생처음 드라마 작가가 누구인지 이름을 찾아본 드라마였다. 단 하나의 살인 사건과 그것에 대한 해결 과정만으로 드라마 전체를 아우르며 빅 픽쳐까지 그려낸 수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라이프 온 어스'는 한국 드라마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연기력에 새삼 감탄한 드라마였다.  애초에 BBC의 드라마를 리메이크라고 한 것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처음에 1회 한국 드라마를 보고, 영국 건 어떻게 만들었나 궁금해져서, 힘들게 BBC 드라마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단순히 한국 사람이라서인 것일 수도 있지만, 한국 드라마 쪽이 훨씬 더 재밌고 구성이 조밀했다. 내가 전문적인 연출가도 아니라 자세한 것은 분석 내지 비평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긴 하지만, 나로서는 한국 드라마 쪽이 10점 만점에 10점이었다. 영국 드라마는 한 두편 보다가 중간에 재미없어서 관둬서 모르긴 하지만, 너무 축축 처지고 음울하기만 하고, 주연 배우의 카리스마라고 할까 흡인력이라고 할까 하는 것이 너무 약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보게 된 드라마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연말에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 두명다 재밌다고 재밌다고 한 두 드라마 중 하나였다.  다들 재미있다고 장안이 떠들썩한 'SKY캐슬'은 뒤늦게 첫 회보고서 전반적으로 주인공들의 행동설득당하지를 못해서 계속 보지 않기로 하고, '그렇다면...'하면서 오랜만에 본 드라마였는데.... 

결론만 먼저 말하자면, 실망이었다. 막장 드라마 욕하면서 본다고 하더니만, 그렇다고 딱히 중반 넘어 본 드라마 몇개 되지도 않는데, 중간에 그만두게도 안되었다.  불만이 차오르는데 끝까지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 이렇게 악평 하나 남기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아 글이라도 하나 쓰는 것이다. 

난 겜알못이라 처음에 한 두회는 정말 참신하고 신선했다. 아, 이래서 겜 폐인이 나오는 거구나 생각도 하면서... 

'가상 현실'은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 사유를 유도하는 화두이고 많은 철학자들이 이에 주목해서 담론도 활발한 분야이다. 내가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주변의 현실에 대한 반응인데, 그 현실이 가상일 경우의 우리의 행동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늘 생각해온 인간의 정의, '인간이란, 그 주체의 경험의 결정체'라는 정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의 주제를 듣고 혹 해서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첫 회를 보았을 때의 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광도 한 몫을 했다. 다음 번 유럽 여행에는 반드시 스페인을 넣자,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회가 갈수록 시청자들을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로 아는지 매번 전회의 요약편을 회상씬 형태로 절반 이상을 채우더니, 후반으로 갈 수록 'PPL의 추억'이 되어 갔다. 덕분에 많은 별명이 생긴 것 같았다. '발암브라 궁전의 추억',  '서브웨이의 추억', '토레타의 추억' 등등.... 

그리고, 아무리 내가 게임의 전문 세계를 모른다고 해도 그렇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물론 원체 설정 자체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으니까, 어느 정도 말이 안되는 건 안되는대로 오히려 그게 드라마의 재미일 수도 있지만, 주인공들의 대처 능력이랄까 사고 처리 방식이랄까 납득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례적으로 드라마 작가의 이름을 찾아본 두번째 드라마였다. 전작과는 다른 이유로....  

왠만하면 드라마 잘 보지도 않는 1인으로서 비판으로만 가득 찬 글로 마무리 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가 이름으로 검색하다 보니, 정작 드라마 작가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거나 자부심을 느낀다거나하는 내용의 인터뷰를 했나보다. 그런 내용의 글을 몇 개나 뉴스 포털의 헤드라인에서 봤다.  아마 작가의 주변에는 전부 드라마 참가자들. 서로 전부 좋다 좋다 해주고 자축하는 분위기였나보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는 참 많구나, 그리고 모름지기 주변에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사람이 많으면 위험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비밀의 숲'이 '조승우', '라이프 온 마스'가 정경호의 발견이었던 드라마였다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현빈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수확이었다면 수확이다.  명불허전. 솔직히 현빈이라는 배우가 나온 드라마를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분명 CG로 처리했을 장면들에서의 연기를 포함해서 미묘한 감정표현에서 참 탁월했다.  왜 다들 그렇게 '현빈, 현빈~'하는지 알 것 같았다. 반면 잘생기고 이쁜 배우들도, (맡은 역이) 너무 어버버하고, 너무 맨날 울기만 하는 것이면 매력이 반감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드라마를 보고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1. 스페인은 한번 꼭 가봐야겠다.

2. 주변에 자신에 대한 칭찬만 해주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사는 환경은 자신을 정확히 바라볼 기회를 잃을 위험이 크므로 항상 경계해야한다. 

3. 역시 드라마는 내 선호 장르는 아니다. 매주 챙겨봐야 하는 문제나, 중간의 광고 문제는 어떻게 어떻게 해결해도 역시 나랑은 잘 맞지 않는 장르이다. 

4. 무슨 일을 진행하던 예산의 안배는 중요하다. 이번 드라마처럼 스페인 로케로 초반에 예산을 때려부으면, 나중엔 자본주의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진 역량의 안배도 중요하다. 초반에 너무 소진하면 일이 결국은 용두사미가 될 위험이 있다. 

5. 이 드라마가 주려는 교훈은 아마 이런 것이리라. '게임에 빠지면 건강에도 안좋고 (총이나 칼 맞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 때로는 목숨도 진짜 잃는다 (말 그대로 게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위험이 있다).' 

그리고, 귀에 익었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기타 곡이 어디선가 들리면 칼든 자객이 내 주변에 없을까 휘이휘이 둘러보게 될 것 같은 건 이 드라마의 후유증이리라.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24. 00:30 미술 이야기

어제는 음악에 대한 글을 하나 올렸다. 거기에 탄력을 받아서 음악과 미술에 대한 글을 하나 올려보려한다. 

2018년 제18회 송은미술대상의 대상작으로 선정된 김준 작가의 작품은 무려 '사운드' 작품이다.  이름하여, '사운드스케이프'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의 작품이다.  사운드스케이프, 즉, Soundscape란 음악이라는 뜻의 단어 'sound'에 '-scape'라는 접미어를 붙인 단어이다. 여기서 '-scape'는 'landscape'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넓게 펼처진 경치, 풍광이라는 뜻이나, '그러한 풍광을 묘사한 그림'을 의미한다. 같은 어미를 사용한 단어로는 도시 풍경을 의미하는 cityscape, 달의 표면의 경치를 뜻하는 moonscape, 바다의 풍경이라는 뜻의 seascape 등이 있다.  따라서, '사운드스케이프 (soundscape)'란 이를테면, '소리로 표현한 풍경'이라고나 할까? 

에코시스템: 도시의 신호, 자연의 신호, 2018 12채널 사운드, 스피커, 앰프, 나무, 사진, 이미지 북, 돌, 식물 450 x 300 x 220cm [사진=송은문화재단]

신문방송학과 미디어학을 공부한 이례적 이력을 갖고 있는 김준 작가는 흔히 시각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미술에 청각을 들여온 다소 생소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서울, 런던, 시드니, 베를린 등 여러 곳에서 수집한 소리들과 함께 그 장소에서 채집한 다양한 사물들을 서랍 속에 넣어 전시한다. 감상자는 설합을 빼고 넣는 행위를 하면서 설합 속의 사물이 위치했던 장소의 소리를 듣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작품 <에코시스템: 도시의 신호, 자연의 신호>(2018)은 관람자의 참여를 이끈다는 점, 그리고 found object의 활용한다는 점에 있어서 미술사적으로는 '다다'의 영역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소리'가 추가됨으로써 인간의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을 모두 총체적으로 활용하여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바로크적 종합예술을 구현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바로크적 종합예술의 경험은 건축, 인테리어, 미술이 총체적인 조화를 이룬다는 개념이지만, 김준의 작품이 구현하는 바로크는 인간의 오감과 기억과 추억, 정서와 감정을 모두 통합하고자하는 '내적인 바로크'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제18회 송은미술대상전 김준, 박경률, 이의성, 전명은 2018/12/21-2019/02/28

(참고로 '송은미술대상'은 역량있는 국내 작가들의 활동을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재)송은문화재단이 시행하는 공모전으로 2001년부터 시작되어 매년 수상자들을 배출해오고 있었다.  송은문화재단은 현재 송은아트스페이스도 운영하고 있고, 수상자들의 전시가 2월말까지 진행되고 있다.)

도시와 자연에서 수집한 소리와 함께 해당 지역에서 수집한 사물들을 함께 전시하므로써 관람자들로 하여금 청각과 촉각, 시각이 함께 작용하는 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관람자 각각의 기억과 추억을 소환하거나 상상력을 발현하도록 이끈다. 

많은 관람객에게는 낯선 이러한 작품은 실은 예술계에서 최근 많이 주목받고 있다.  일례로 2010년 터너 상을 수상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 수잔 필립스의 작품이 있다.  2014년에는 작위까지 받은 그녀의 경우,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녹음하여 특정 장소에서 그 녹음된 음악을 트는 식의 작품을 한다. 그녀의 노래는 어떻게 들어도 가수의 음성과는 거리가 멀고, 녹음도 어떠한 보정이나 수정도 하지 않아 불안정한 음정은 물론 그녀의 호흡도 다 담겨있다.  

2010년 터너 상을 수상한 수잔 필립스의 <저지대 (the Lowlands)>라는 작품을 한번 감상해보자. 


Susan Philipsz, Lowlands (2008/2010), Clyde Walkway, Glasgow. photo: Eoghan McTigue

위의 사진은 수잔 필립스의 작품을 원래 설치했던 글래스고의 클라이드 워크웨이라는 곳, 아래는 수잔 필립스의 작품을 2010년 10월 영국의 테이트에 설치했을 때의 사진.  같은 작품을 테이트 갤러리에 설치했을 때와 원래 설치한 글래스고우의 한 다리 아래 설치했을 때 그 음악으로 인해서 감상자가 느끼는 감정이나 불러 일으켜지는 정서는 사뭇 다른 것이리라.  

1950년대 중반의 Psychogeography와도 연관되는 그녀의 작품은 지리학적 위치가 인간의 정서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그녀의 작품과 김준의 작품이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Susan Philipsz, The Distant Sound (2014), Three channel radio transmission, Installation view Moss, Norway, 2014. Photograph: Eoghan McTigue


예술의 경험을 시각에 국한하지 않고 청각과 촉각 등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하여 감상자가 인간으로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일깨운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감각은 또한 얼마나 쉽게 주변 환경에 의해 영향받는가를 실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총체적 경험과 자각이 김준이나 수잔 필립스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게 되는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이러한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왜 요즘에 들어 예술계에서 부상하고 인정받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생각해볼만한 흥미로운 현상이다. 



※ 참고로 2019년 제19회 송은미술대상의 공모요강에 대해서는 송은 아트스페이스의 웹사이트를 참고하기 바란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23. 10:26 영화 이야기

나의 모든 취미와 관심은 시각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다.

미술사 공부를 하고 있고,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고, 시간이 날때 거의 모든 시간을 책을 보거나 요새는 인터넷을 통한 자료를 읽는데 보내고 있다. 

그래서, 음악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좋아하는 음악도 극히 제한되어 있고, 요새 음악도 모르고, 외국 생활이 길어서 한국의 대중 가요에도 오랫동안 노출이 안되어서 잘 모른다.  (예전에 god를 '갓'으로 읽어서 면박을 당한 일도 있다. 다행히 HOT는 알고 있었다.)

그런 내가 우연히 유튜브에서 음악을 들었는데 좋다고 느껴서 올려본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이 노래 제작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으니, '내맘대로 음악듣기'가 되는건가?

내가 어제 첨 '발견(?)' (음악이니 발청이 되나?)한 음악은 일본 그룹인거 같은데, King Gnu라는 가수의 'Prayer X'라는 노래이다.  물론 음악과 함께 뮤직비디오라는 시각적 요소에도 맘이 끌린것도 사실이니 내 취미와 관심사와도 약간 관련이 있는지도...

 

얼마전, 그 유명하다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봤다. 

그룹 퀸에 대해서는 그냥 사람들 아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이전부터도 라디오에서 퀸의 노래는 자주 나온 터라, 딱히 음악에 관심없는 나도 그들의 노래 몇 곡은 익숙하다.  '위 윌 위 윌 락유'라던가, '위 아 더 챔피언'이라던가, '라디오 가가'라던가... 그리고 '보헤미안 랩소디'도 제목과 노래를 연결지은 것은 좀 이후였지만, 라디오에서 많이 들어봐서 익숙한 정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룹 퀸은 회화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거다.  대중문화에서의 노출이 워낙 많아 익숙하다 느끼지만, 정작 곰곰 생각해보면 아는 것이 없는 것.  그리고 알려고 하기엔 너무 많이 보고 들어서 알기도 전에 이미 지겨워진....  

나한테도 그랬다. 그룹 퀸은 원체 들어서 알고 있지만, 얼핏얼핏 들어서는 그닥 좋은지 모르겠고, 호기심을 갖기엔 원체 많이 들어서 알고싶다는 맘이 들지도 않았던....  락 음악이라는 자체도 시끄러운 음악이라는 편견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고. ('락' 하면 딱 떠오르는 것은 굉음과 다소 폭력적인 퍼포먼스, 그리고 길고 고운 머리카락 휘날리는 헤드 뱅잉... ㅎㅎㅎ)

그런데 개인적으로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는 수 년전에 우연한 기회에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알고 있던 것보다 한 곡 속에 담긴 음악의 깊이와 다양함에 깜짝 놀랐고 감탄하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당시에 힘든 일을 겪을 때 나는 내 아이팟에 담긴 그 노래를 아이팟이 테이프였다면 분명히 늘어났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감정이입이 되어서, 'Mama I just killed a man'이라는 프레드 머큐리의 목소리가 '엄마 누가 날 죽였어'라고 하는 것 같이 슬프고 애절하게 들렸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음 좋았어'라는 부분에서는 반드시 눈물이 났었다. 

나중에 관심있는 곡이라 조금 찾아봤더니, 혹자는 그 곡을 프레디 머큐리의 '커밍아웃'을 노래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었다. 말이 되긴 한다. 양성애자 혹은 동성애자로서의 성인이 된 자신이 엄마가 낳아주신 한 남자 (어릴 때의 자신)을 죽인 것이 된다.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톨레랑스가 많이 생긴 요즘도 힘들다는데, 그 당시 그가 느꼈던 고통과 고민이 얼마나 엄청났겠는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음 좋겠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해석이 사실인지 아닌지 난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떤 경위에서 만들어진 곡이었든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노래를 들은 나에게 프레디 머큐리의 그러한 경험과는 관계없이, 당시 겪고 있던 나름의 슬픔과 고통 고민에 공명을 일으켰고, 위안과 감동을 선사했던 것이다. 그리고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대단한 이유는 그런 것 아닐까? 

사실, 난 한 바탕의 인기의 파도가 지나고 나서 영화를 봐서인지, 아니면 하도 좋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기대치가 한껏 올라가서 인지 그렇게까지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내가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받을 감동은 몇년전에 이미 충분히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는지도. 

하지만,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명곡이라는 평에는 나도 추호의 이의가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의 그닥 영향력없는 표라도 한표 더 던지고 싶다.  

음악은 공중에 떠도는 음들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임에 분명하다.  칸딘스키를 위시한 추상화가들이 그토록 음악 같은 미술을 만들고자 했던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이 즈음 해서 안듣고 갈 수 없겠죠?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입니다. 듣고 가실게요~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23. 00:30 일상 이야기

원예가의 일기...

이렇게 말머리를 농담삼아 올렸다가 원성을 들을까봐 참았다. 

저번에 방울 토마토의 성과에 힘입어 일전에는 슈퍼에서 산 파프리카 다듬다가 나온 씨들을 모아서 말렸다가 뿌려보았었다.

아무리 물을 줘봐도 싹이 올라올 낌새도 안보이길래, 다시한번 씨를 모아다가 다른 화분에는 그냥 마구마구 뿌려보기도 했었다.  

그리고는 습관적으로 물을 가끔 주긴 했어도 별 기대를 안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보니까 연한 녹색잎이 올라오더니, 며칠 새 여러개가 올라오고... 그러더니 어느새 이렇게 많이 자라 있었다. 

처음에 싹 튼 파프리카들

분갈이 하면서 씨를 더 뿌려준 후 자란 파프리카들

너의 정체는 뭐냐? 혼자 무럭무럭 크는 정체불명의 식물


중간에 키가 큰 이 놈은 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전에 방울 토마토 씨를 한 번 더 사다 뿌렸는데, 걔들은 다 죽은거 같았는데, 그 중 살아남은 한 녀석인지 아니면 파프리카 우성 종자인지 확실히 모르겠다)

여하튼 본격적으로 정원을 가꾸는 이들이 보면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겠지만, 나로서는 기특하고 대견하고 뿌듯한 생명체들이다. 별 것 아니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뿌리내리고 생명을 키워가는 존재들을 보고 있노라면 적잖은 힐링이 된다. 

나중에 정말 본격적으로 조그마한 정원은 꼭 꾸며보고 싶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22. 08:19 미술 이야기

작년 12월 초 순경에 한 기사에서 서도호 작가의 작품이 "The Best Public Art of 2018"으로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브릿징 홈, 런던(Bridging Home, London)’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예전 그의 'Seoul Home'과 유사하구나 생각하면서, 잠깐 훑어보았다.  UAP라는 단체가 제정한 3년차 되는 상이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일단 그 단체가 뭔지 자세히 모르겠고, 3년차니까 상자체가 자리를 잡은 건 아니겠구나 하면서 그냥 지나긴 했다. 서도호는 원체 내가 관심있어 하는 작가라 일단 북마크를 해두고 나중에 다시 한번 살펴봐야지 하다가 연말 바쁜 통에 잠시 잊고 있었다. 

Do Ho Suh, Bridging Home, 2018, London. Co-commissioned by Art Night and Sculpture in the City, and curated by Fatoş Üstek.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Victoria Miro Gallery, and Gautier Deblonde (관련기사: https://www.artsy.net/article/artsy-editorial-best-public-art-2018)

오늘은 한동안 블로그 글도 못올리고 있다가 다시 '내 맘대로 작품 보기' 시리즈(?)의 두번째 시간에 올리기로 맘 먹었다. 

내가 서도호 작가의 작품과 처음 접한 것은 뉴욕에서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PS1이라는 곳에서 신생 유망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아둔 전시회였다.  그 때 전시되었던 작품은 하나는 'Who Am We?'(2000)라는 작품이었고, 또 하나는 'High School Uniform'(1997)이었다.  

당시 인상은 참 참신하다는 인상과 함께, 아이러니하게 참 '한국적'이라는 느낌이었다.  라벨로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기도 전이었고, 작가에 대한 정보도 없던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작가의 이름을 보고도 발음상으로는 한국 사람 이름 같지만, 작가의 성장배경, 교육과정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한참 이후의 일이었기에 당시로는 확신을 갖지 못했었다.)  

(PS1은 Public School 1이라는 뜻인데, 폐교가 된 뉴욕의 공립학교를 미술관으로 바꾸어서 전위적인 작품들을 전시하는 곳이다.

Do Ho Suh, Who Am We? (Multi) (2000) Offset wallpaper ; sheet (each): 61 x 90.8 cm, MoMA ; 아래 사진은 위 작품의 세부 (image from MoMA)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얼굴 하나 없는데, 벽지로 제작된 이 사진첩(?)은 멀리서보면 모두가 같은 모양의 점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뽀인트라고 할 수 있다.  제목도 'Who am I?'가 아니다. 'Who ARE We?'도 아니다. 'Who AM WE?'이다. 여럿이지만 하나로 뭉뚱그려진 존재들.   


Do Ho Suh, High School Uniform (1997) (인터넷에서 가져온 이미지로 내가 본 전시장의 모습은 아니지만, 대략 분위기는 전달되리라 생각한다)

아, 이 이상 한국의 교육 환경을 잘 표현한 작품이 있을까 하는 느낌.  물론 요새는 학령인구가 줄어들어 한 반 학생 수가 소수이기도 하고, 교복 자율화를 거쳐 교복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훨씬더 다양하고 이쁜 교복들이 많지만, 국민학교를 나온 세대라면 윗 작품에서는 코딱지 만하게 얼굴이 실리던 '국민학교 졸업앨범'을 떠올릴 것이고, 아래 작품을 보면, 예전 고등학교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을 방문한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발언의 패러디 급의 문구가 유행한 적이 있었고, 그 여세를 몰아 뉴욕 빌보드에 비빔밥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리기도 했었다.  미술계에서도 저 화두에 맞춰 여러 작가들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많았었던 것으로 안다.  그 고민에 결정적인 해결방법은 없었던 듯, '이제는 단청 문양과 오방색은 그만 보고 싶다' 는 소망이 생길만큼 천편일률적인 '한국적임'에 지쳤던 관람객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에 반해, 서도호의 작품에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저 작품들을 본 외국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무엇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천편일률적인 규격에 맞추어 넣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임을 다 알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신하면서도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라 크게 인상 깊었다. 벽지 작업은 앤디 워홀은 물론 로버트 고버 등 유명한 팝 작가들이 많이 사용한 작품 기법이기도 하고, 마네킹들의 설치들도 수많은 작가들이 사용한 방법이라 기법만으로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로버트 고버 Robert Gober 의 설치 작품 (1989)

서도호의 작품들을 두번 째로 만난 것은 수년 후의 그의 개인전이었는데, 이것도 꽤 오래전의 일이다. 

그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Karma"라는 제목의 설치 작품인데, 커다란 인물의 조상을 다리 부분만 크게 만들어 갤러리 전체를 차지하게 만들어 놓고 그의 내딛는 구둣발 아래로는 어릴적 남자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초록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그마한 군인 인물상들이 그 발걸음을 떠 받치고 있는 형상이었다. 

Do Ho Suh (b.1962), Karma (2003), Urethane paint on fiberglass and resin, 389.9 × 299.7 × 739.1 cm, 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두번째로 인상 깊은 작품으로는 'Some/One' (2001)이라는 애매모호한 제목의 작품으로, 얼핏 멀리서 보면 이순신 장군이 입으셨을 법한 갑옷 같은 조각품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셀 수없이 많은 군인들의 인식표 (Dog tag)들을 이어 만든 설치 작품이었다. 

Do Ho Suh, Some/One (2001) at the Seattle Art Museum, Washington

Do Ho Suh installs Some/One (2001) at the Seattle Art Museum, Washington, 2002. Production still from the Art in the Twenty-First Century Season 2 episode, Stories, 2003. © Art21, Inc. 2003.

Do Ho Suh, Blue Green Bridge (2000), plastic figures, steel structure, polycarbonate sheets, 1137.9 x 129.5 x 61 cm, Edition of 2, LM2466 (위)와 그 세부 (아래) https://www.lehmannmaupin.com/artists/do-ho-suh  이 작품에서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의를 위한 소의의 희생에 대해서 좀 더 확실히 표현하고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이 작은 군상들이 커다란 청록색의 다리를 만들기 위해 힘겨운 몸놀림으로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들에서는 공통적으로 한 명의 위인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이 떠받들고 희생을 해야하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한국의 현대사와 나란히 생각해보면, '군 독재의 군화에 짓밟힌 민중'이라는 이미지일 것이라는 짐작도 할 수 있게 해준다.  두번째 전시회는 작품의 모습과 형식적인 면에서는 첫번째 내가 봤던 전시회의 것들과 전혀 달랐지만,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점에서도 놀라왔다.  전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개별성과 그로 인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그러던 그의 작품 세계가 확연히 달라진 것은 그의 집 시리즈에서였다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대학원과 군복무까지 마친 그가 미국에서 다시 학업을 하면서 느꼈던 '노마드'적인 정서를 담았다는 평을 얻고 있는 작품들이다. 

Do Ho Suh, Seoul Home/Seoul Home/Kanazawa Home (2012) silk, metal armature, 1457 x 717 x 391 cm, LM16332 https://www.lehmannmaupin.com/artists/do-ho-suh 

Do Ho Suh, Seoul Home/L.A. Home/New York Home/Baltimore Home/London Home/Seattle Home 1999, silk, 149 x 240 x 240 inches, Installation view at the Korean Cultural Center, Los Angeles, 1999 

이 작품들도 한편으로는 팝아트적인 어휘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라는 촉감과 질감의 전복을 통해 유용성을 제거함으로써, 충격과 신선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클레즈 올덴버그 (Claes Oldenburg: b.1929)가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있다. 

클레즈 올덴버그의 작품들, Soft Sculptures

서도호는 올덴버그의 촉감과 질감의 전복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땅에 굳건히 자리한 집'이 공중에 떠 있게 만듦으로서 굳건함과 부유함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충돌하게 만들었다.  또한 불투명한 건축물을 재질상 거의 투명한 올 고운 모시나 명주천을 사용함으로써 투명/불투명 사이의 전복도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전복을 통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과 경험, 그리고 미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오가면서 느끼는 방랑자적인 입장을 투영하고 있다.  

이 작품들을 통해서 서도호는 개인적인 것으로 세계적인 것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쿠로자와 아키라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말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성장했던 한국의 한옥을 위주로 설치 작업을 했지만, 점점 더 영역을 확대해서 외국의 건축물은 물론 가전제품과 가재도구들에까지 제작하고 있다. 

Do Ho Suh,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2013) silk, metal armature, polyester fabric, metal frame, 1530 x 1283 x 1297 cm, LM22819 https://www.lehmannmaupin.com/artists/do-ho-suh


Do Ho Suh, (left) “Specimen Series: 348 West 22nd Street, APT. New York, NY 10011, USA - Toilet”; (right) “Specimen Series: 348 West 22nd Street, Apt. A New York, NY 1011, USA - Stove,” both polyester fabric. (Courtesy Do Ho Suh and Lehmann Maupin Gallery)

이번에 UAP (Urban Art Project: 뉴욕과 상하이 등 다양한 지역에 거점을 두고 공공 미술을 제작하고 있는 조직)에서 선정한 그의 작품은 그의 Seoul Home에서 발전해 온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시간을 두고 조사를 해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고 그렇게 해보고 싶다.     

내가 블로그에 첨언할 필요도 없이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훌륭한 작품세계를 펼치고 있는 작가이지만, '내 맘대로 작품 보기' 코너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서 올려보았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22. 05:12 일상 이야기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작년에 지인에게 받은 방울토마토 씨앗을 뿌려서 한 차례 수확을 했고, 난생처음 유실수를 키워서 얻은 터라 엄청 흥분하며 기뻐했었다. 


그리고서는 계속 키만 크는 토마토 줄기에 '내 네가 계속 자라니 물은 준다마는...'이라는 심정으로 물만 주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다보니 물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주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이번에 물을 좀 줘보다가 아니면 그냥 갈아 엎어야지 괜히 거실 자리만 차지하고 점점 웃자라는 가지로 지저분해지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오히려 신경을 쓰면서 물을 좀 줬더니, 얘들이 한겨울인 것을 모르고 갑자기 꽃을 막 피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한 며칠만에 보니까 여기저기서 다시 방울 토마토들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다시 감격 모드~

그래서 요새는 일주일에 한 두번씩 물을 주면서 방울토마토의 갯수를 세보면서 힐링 타임을 갖고 있다.  집에 오신 손님 한분이 원래 일년생인데 또 키우는 거 보니 신기하다고도 하시던데, 그 말씀에 힘입어 내가 정말 원예에 소질이 있는건가? 하는 중.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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