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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10 내 눈에 이쁜 당신...외눈 브로치
2019. 1. 10. 00:30 미술 이야기

예전에 진주는 눈물을 상징하므로 '결혼 안 한 아가씨들은 진주 목걸이 하는게 아니다'라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나야 진주 목걸이가 없어서 안하고 다녔기에 본의 아니게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듣는 '아가씨'가 되어버렸지만. 

원래 진주란 것이 특정 조개 속에 들어간 이물질을 몸 안에서 삭히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이니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된 내력은 짐작할 만하긴 하다. 그래서 '진주'는 때때로 각고의 노력 끝에 맺는 결실을 비유하기도 한다.  양식 진주가 등장하기 전, 진주는 100% 천연 진주였기에, 엄청나게 귀해서 한때는 다이아몬드보다도 비쌌다고도 하는데...

미술 작품 중, '진주' 하면 유명한건 역시,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1632-1675)(요즈음 표기법으로는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1665)일 것이다. 

Johannes Vermeer, Girl with a Pearl Earring (c. 1665), oil on canvas ; 44.5 × 39 cm,  Mauritshuis, The Hague, Netherlands    [여담이지만, 베르메르의 소녀가 하고 있는 진주는 진짜 진주가 아니라, 당시에 막 개발되던 기법들로 만들어진 모조 진주다.  갈치 같은 은빛 나는 생선의 표면에서 나온 색소들을 주석에다 문질문질 채색하여 만든 것 (그게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개발된 기술이란 말씀. 집에서 실험해보고 그러지 말자.)  만약 실제 저 정도 크기의 진주 귀고리라면 가격이 너무나도 어마무시 했을 것이고, 당시로선 무명 화가였던 베르메르 같은 일개 화가가 소품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은 베르베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가 주인공이 아니다.  그렇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우연히 발견한 이 장식품!  

'진주는 눈물'이라는 것을 이 브로치만큼 성공적으로 시각화한 작품이 있을까 싶어 좀 살펴보았다. 

             Eye Miniature, early 19th century. ©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관련기사: The Mysterious History of Lover’s Eye Jewelry)


이 브로치는 18세기말의 영국 왕 조지 4세 (George IV: 1762-1830)가 아직 왕위를 계승하기 전 프린스 조지 오브 웨일즈 (Prince George of Wales)로 불리던 왕자 시절에 짝사랑하던 여인 마리아 앤 피처버트 (Maria Anne Fitzherbert: 1756-1837)에게 연애편지에 동봉해서 보낸 선물이라고 한다. 

한 쪽 눈은 왕자의 초상에서 눈 부분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다이아로 표현한 눈물 한 방울 또로록~

여기까지만 들으면 '꺄악! 너무 로맨틱하잖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눈 한 쪽이 주는 느낌은 로맨틱하지만은 않을 뿐더러, 다소 기괴한 느낌도 없잖아 있다.  그리고 알고 보면 둘의 사랑도 그렇게까지 순애보적인 것 같지만은 않다. 

좀 들여다보면, 이들의 로맨스는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다. 

영국의 왕자가 사랑한 여인이 두 번이나 결혼했다가 두 번 다 남편을 잃은 평민 출신의 미망인인데다 카톨릭 집안 출신이라 영국 국교와는 종교도 다른 여인이라는 점.  국법으로 왕자와 결혼할 수 없는 처지의 몸이었다 한다. 하지만, 첫 눈에 이 여섯 살 연상녀에게 반한 왕자는 끈질기게 구애를 하여, 결국 둘은 비밀리에 결혼식까지 감행하지만, 왕의 집안에서 그것을 용인할 리 없었고, 국왕의 윤허가 없었기에 법적으로 둘의 결혼은 무효. 

게다가 이 왕자님이 워낙 씀씀이가 크셔서 파산 위기라 그 재정난을 이기고자 친척이자 부자인 신부를 맞이하게 되고... 이런 연유로 결혼한 둘 사이에 애정이 있을리 만무해서, 결국 첫 아이를 낳자마자 둘은 별거 상태. 왕비는 왕비대로 애인이 생기고, 왕은 왕대로 열손가락 모자라게 수많은 여인들과 연애행각을 벌였다고 한다. 

귀족 집안의 여성들도 결혼하지 않으면 상속권이 없고, 결혼해야만 상속을 받을 수 있는데, 상속 된 재산이 남편의 명의가 되고, 그 남편이 부인보다 먼저 죽는 경우, 부인이 아닌 자식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19세기 말까지의 법이었다. 사실 마리아 앤이 두번째 결혼을 서둘러야 했던 것도 첫번째 결혼 후 얼마되지 않아 남편이 말에서 떨어져 죽는 바람에, 아내에게 따로 재산을 남긴다는 유서를 쓸 틈이 없었기에 무일푼으로 생활고에 시달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자와 인정 받지 못한 결혼을 한 그녀는 '연금을 제 때 주지 않으면, 둘의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나 문서를 공개해버리겠다'고 왕실에 협박을 해서 생활비를 받았다고도 전해진다.  

조지 4세는 문화와 예술에는 관심이 많아 '영국 최초의 신사'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지만, 한 수행원이 남긴 글에는 '백성을 생각하는 왕이나 귀족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조지 4세는 그 중에서 최악'이라는 구절이 있다는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다지 훌륭하고 인기있는 왕은 아니었던 듯하다.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이기적이고 성격 나쁘고, 행실 나쁘고, 낭비벽 심한' 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4세의 마리아 앤 피처버트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일화들은 절절한 면들도 있다.   

마지막 왕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피처버트가 보낸 편지를 읽고는 베게 아래 지니고 있었고, 피처버트는 피처버트대로 왕의 건강이 악화된 것은 모르고 답장이 없음에 무척이나 가슴아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위의 '눈물 한방울 똑! 진주 브로치' 선물에 대한 화답이었는지 피처버트도 자신의 눈동자가 담긴 펜던트를 선사했던 듯한데, 유언이 그 펜던트를 자신의 목에 걸어달라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조지 4세가 죽은 뒤, 마리아 앤 피처버트에게 왕실에서 귀족 작위를 수여하려 했으나, 그것은 반려하는 대신, 자신이 상복을 입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오늘 날 우리들의 눈에는 다소 기괴해 보이는 '외눈 브로치,' 혹은 Eye miniature는 당시에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며 귀족들 사이에 유행을 했다. 

Memorandum Case with a Portrait of a Women's Left Eye. Courtesy of the Philadelphia Museum of Art.

Portrait of a Right Eye (mounted as a ring). Courtesy of the Philadelphia Museum of Art.  

조지 4세와 마리아 앤 피처버트와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렇게 연인들이 은밀하게 주고 받았을 선물이었을 이 '외눈 브로치' (가끔 양쪽 눈이 다들어가 있는 것도 있긴하다)는 따라서, 브로치나 반지 등과 같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형식이 많다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러한 작품들의 주문 내역이나 혹은 제작자의 이력 등 배경역사가 제대로 남아 있을리 없다. 클리브랜드 뮤지엄 (Cleveland Museum of Art)이나 필라델피아 미술관 (the Philadelphia Museum of Art), 그리고 세계적인 공예 미술관인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 (Victoria and Albert Museum) 등에 이러한 작품들이 다수 소장되었다고 하는데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연구를 할래도 기록이 있어야 뭐래도 덤벼보지, 그렇다고 생존자들이 있어 녹취를 딸 수 있나...)  

글 첫머리에 다소 기괴하다고 했으나, 만약 사랑하는 이에게 그의 눈동자가 담긴, 게다가 거기 눈물 한방울 또르륵! 브로치를 받았다면 '심쿵'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도 없이 남겨진 다른 'Eye miniature'들의 사연이 무척 궁금해진다. 

미래의 미술사학자나 역사학자들, 아니면 나같이 호기심 많은 후손들을 위해서 연인들이여, 은밀한 선물을 하더라도 어디엔가는 기록을 남겨주시라~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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