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태어난 곳에서 살고 있습니까?
2018. 11. 3. 00:30 일상 이야기

오늘은 페북에 연결하다가 우연히 페북에서 질문을 올린 것을 발견하였다. 
"당신은 태어난 곳에서 살고 있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신선한 질문이다.  한국에서 과연 태어난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일까? 새삼 궁금해진다.  내가 짐작하기에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다.  시골에서 취재를 하는 오락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만 봐도 젊은 사람들은 다 대도시로 떠나고, 고향을 지키는 것은 나이가 든 노인층 밖에 없다고 하니 말이다.  서울에서 일자리를 잡은 사람들 중에서 서울 토박이도 사실상 얼마나 되겠는가?  

나만해도 태어난 곳과는 다른 곳에서 살고 있고, 지금 여기 뿐 아니라 이곳저곳 많은 곳을 옮겨 다니며 살고 있는 걸.  그러다가 예전 비행기에서 만났던 분과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텍사스 오스틴에 살고 있었고. LA로 향하는 비행기였던 것 같다.  

비행기 옆자리에는 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여자분이 타고 있었는데, 원래 미인이기도 했지만, 눈이 마주쳤을 때 미소짓는 모습이 무척이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여자분이었다.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 옆자리에 앉은 그 분이 왠지 긴장하는 듯 해서 다시 살펴보니까, 한손에는 묵주를 들고 또 다른 한손으로는 팔걸이부분을 꽉 쥐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행기  타기를 두려워하는 분이군. 이렇게 생각하고, 그러냐고 물어보니 수줍게 웃으면서 그렇다고 했다.  내가 괜찮다면 내 손을 잡아도 된다고 했더니, 괜히 잡으랬나 후회될 정도로, ^^;;; 내 손이 으스러질 정도로 꼭 움켜잡았고, 드디어 이륙을 마치고 나서야 꼭 쥔 손을 풀고서는 무안한듯 내눈을 보고 웃었다.      

덕분에 맘의 거리가 많이 가까워져서였을까?  비행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텍사스의 작은 도시 출신이라는 그 분은 소위 하이스쿨 스윗하트, 즉 고등학교때의 커플이었던 분과 결혼해서 태어난 곳에서 살고 있다 했다.  심지어 자신은 물론 남편 쪽 친척들도 거의 모두 지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5마일 내의 거리 안에서 살고 있다고.  친척들이며 가족들도 다 근처에 살 뿐 아니라, 자신들 부부는 둘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해서 (We enjoy each other's company.라는 표현도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평소에는 그다지 여행도 멀리 하지 않고, 그래서 살면서 비행기를 탈 일은 전혀 없었다 했다.  이번에는 일가 친척 중 유일하게 멀리 있는 친척 하나가 LA에 살고 있는데, 이번에 생일을 맞아 'Surprise Party'를 해주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자기가 대표로 그 모임에 가는 거라고.   


나는 내 주변에 이렇게 태어난 곳에서 모든 친척들이 모여 사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이라 신기해 했고, 그녀는 그녀대로 나처럼 태어난 곳은 고사하고 태어난 나라도 아닌 곳을 여기저기 다니는 인간을 처음 만났으니 신기해 하면서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미국이라는 넓디 넓은 나라에 태어나서 살면서 삶의 반경이 5마일이었던 여인과, 비슷한 또래로 살면서 한국에서도 태어난 곳이 아닌 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생활을 하고, 또 미국이라는 전혀 다른 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생활을 하는 나.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면서.  서로의 삶에 충실하면서도 또 다른 삶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이러한 감정을 교류하며 즐거운 만남을 가졌고, 이후로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만남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전혀 다른 인생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해 하며 '만약 내가 다른 삶을 선택했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가 있었는데, 제목이 떠오르지 않네.  과연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삶을 택하게 될까?  

오늘 우연히 던져진 질문 앞에서, '나는 태어난 곳에서 살고 있지 않지만, 본인 뿐 아니라 온 가족이 태어난 곳에서 살고 있는 어떤 여인을 난 만난 적이 있다'라고 대답한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