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공주와 완두콩-지진 탐지기
2018. 11. 20. 21:33 옛날 이야기

어릴 때 안데르센 전집이 집에 있어서 그 속의 이야기들은 빠짐없이 읽었었다.  그 시절 읽었던 안데르센 동화 중에서는 지금 곱씹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많다.  안데르센 동화 중 잘 알려진 인어공주 이야기만 해도 너무 비극적이라 '동화'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그나마 그건 재미라도 있지, 개중에는 정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내용이 많다.  이를 테면, "작은 클라우스와  큰 클라우스", 이 이야기는 어린이가 읽기엔 지나치게 길면서 내용은 또 정말 재미없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생각하기엔 가장 의미 불분명한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공주와 완두콩" 이야기이다.  

스토리의 전개는 이러하다. 

어느 왕국의 왕자는 '진정한' 공주와 결혼하고 싶어했는데, 항상 결정적 순간에 진정한 공주가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식사 예절을 제대로 모른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거나.... 왕자는 선을 보는 공주들에게서 결정적 순간에 티를 발견하고는 번번히 실망하고 퇴짜를 놓고는 한다.  그러던 중, 어느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비에 흠뻑 젖은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남루한 행색임에도 거만하다고 할 정도로 당당하게 자신을 '진짜 공주'라고 주장하며 그 궁전에서 하루밤 묵게 해달라고 이야기한다. 왕자는 당황했지만, 폭풍우 치는 밤, 곤궁에 처한 사람을 야박하게 쫓아낼 수 없었기에 왕자는 시종들에게 시켜 잠자리를 마련하라고 시킨다.  매트리스 12장에 오리털이불 12장을 깐 아주 푹신푹신한 이부자리를 말이다.  

그 다음날, 왕자가 그 여인에게 잠자리는 어떠했냐고 물으니 그녀로부터 등에 뭔가 배겨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자, 왕자는 높이 쌓인 매트리스를 다 들어내고 그 맨 아래에 깔린 완두콩을 집어 올린다. 그러면서 '음하하하', 그 까칠한 여인에게 '당신처럼 예민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공주!'라며 '인정!'하며 둘이 결혼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사실 어릴때 그 이야기를 읽었을 때, ??????!!!!!!! 이런 느낌이었고, 지금 다시 그 스토리를 떠올려도 느낌이 별반 다르지 않다.  정말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지 않은가?  까칠하고 예민함이 공주의 척도라니!  




대학 때였다. 친구랑 대화에 몰두하고 있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뒤에서 톡톡 쳤는데, 나는 그 이야기 도중이라 미처 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뒷쪽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은 둔해서 못알아차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약간 발끈해가지고는,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 방금 '둔하다'는 발언을 한 친구를 쏘아보면서 내가 말했다. "아냐~ 난 완두콩 공주야~"  

그 순간 나는 내가 그 오랜 세월 그 얘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고, 그 얘기를 들은 애들 중에 그 얘기를 알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랐다. 그리고 다들 안데르센의 그 동화의 특이함과 허망함에 대해서 말하면서 한참 깔깔대고 즐거워했다. 그리고 한동안 내 별명은 '완두콩 공주'가 되었다. 

재작년 9월 12일 저녁 8시 반 정도, 경주에 지진이 크게 났을 때, 난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방바닥이 꿀렁거리고 책상이 흔들거리는 느낌을 느꼈다. 잠시 놀라서 정지 장면처럼 앉아 있다가, 잠시 후 방 밖으로 뛰어나가 '지금 흔들렸지?"라고 가족들의 동의를 구했으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이후 인터넷에 지진 소식이 올라와서 경주에 지진이 크게 있었고, 서울에도 약간의 여파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어제 새벽에는 흔들림에 잠이 깼다. 그 흔들림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오늘 잠시 잊고 있다가 찾아보니까, 어제 대전에 새벽 3시반쯤 지진이 있었다.  폭풍우나 지진이 오기 전에는 야생동물들이 부산하게 피난을 간다고 하는데, 내가 동물적 본능이 뛰어난 건가?  어찌 되었건 어제는 유난히 진동과 흔들거림의 시간이 길었고, 그 탓에 잠을 설쳤다.  그 덕분에 요새 가뜩이나 체력 저조한데, 오늘은 컨디션이 더 안좋았다.  

친구들은 '공주' 그 대목이 심히 걸린다 하겠지만, 난 '완두콩 공주'인가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