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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8. 00:18 미술 이야기

예술계의 홍길동이라고 할까 쾌걸 조로라고 할까?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 (Banksy)가 또 사고를 쳤다. (상황은 여기서 확인!)

사건은 10월 5일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유명 작품 '풍선을 든 소녀 (Girl with Balloon)가 1백4만 파운드, 한화로 15억을 훌쩍 넘는 가격에 팔리고 난 직후에 일어났다.  직후에 뱅크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이 경매에 나와 팔리게 되면 작동하도록 이 작품에 분쇄기를 장치했음을 밝혔다고 한다.  물론 이는 당시 경매에서 작품이 조각조각 분쇄되는 장면을 보고 진정으로 놀라는 관중들의 모습이 담긴 인스타그램들과 함께 여러 뉴스에 게재되었다. 

물론, 이 상황 자체가 과연 어떻게 가능했는지 여러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1. 분쇄기가 액자 속에 장치가 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과연 경매를 준비하는 측에서는 액자에 끼워져 있는 작품을 사전에 살펴보지 않았던 것일까? - 경매 이전 작품의 상태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 한번쯤은 작품을 액자에서 빼보지는 않았던 것일까? 게다가 작품과 액자 무게 외에 그 정도의 장치가 되어 있었다면 작품은 이상할 정도로 상당한 무게였을텐데 말이다.

2. 그 분쇄기는 왜 작품의 절반 정도밖에 분쇄가 진행되지 않은 것일까?  전부다 분쇄되었다면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되었을텐데, 지금 상태로는 미묘하다.  예상했던 대로, 구매자는 이 상태의 작품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은 이 상태로 또 거래가 될 것이라 짐작된다. 

3. 그 분쇄기를 장치하고 나서 경매에서 판매될 때까지 수년은 걸렸을텐데, 과연 그 분쇄기는 어떻게 작동했던 것일까?  - 뱅크시의 정보원 (?)이 그 작품의 소재를 계속 추적해오다가 소더비 경매장에 잠입하여 경매가 이뤄지는 순간 원격 조정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던 것일까?   건전지 없이 그런 작동을 할 수 있는 장치가 있나? 전기 장치는 잘 모르지만, 여하튼 미스테리다. 

경매 관련자들을 깜쪽같이 속였다 치고, 지치지 않는 건전지 에너자이저를 써서 성공적으로 경매사가 경매봉을 두드리는 순간 분쇄기를 작동시켰다 치자.  방법이야 어떻게 되었든, 이번 사건은 미술사에 또 다른 역사를 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퍼포먼스라고도 볼 수 있는 이번의 사건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터무니 없기까지 한 천문학적인 금액들이 오가는 경매에서의 작품거래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를 보내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유명세에 따른 작품 가격이 높아지고 하는 미술계의 통례에 반대하기 위해 자신(들)의 얼굴이나 구체적인 이력을 밝히지 않아 왔던 것이다.  

뱅크시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애당초에 그 (혹은 복수의 작가군단?)가 익명으로 활동한 것은 그(들)의 작품이 영국 브리스톨 거리에 그리피티를 그리는 것을 시작해서인데, 영국에서 거리에 낙서를 하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법적인 제재를 피하기 위해서라고도 알려져 있다. 물론 위에 밝힌대로 미술계의 통상적인 관례에 대한 반항이라는 설도 있다.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그가 1974년 영국 출생이라고 밝힌 곳도 있는데, 대부분의 미술관련 사이트에서는 여전히 그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다고 씌여있다.) 

후에 그리피티 이외에도 꾸준하게 기발한 활동을 해온 그의 작품은 많은 논란과 함께 경매에서의 작품의 가격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자세한 활동은 그의 홈페이지를 참고하라.  http://www.banksy.co.uk/out.asp)

다분 정치적이고, 반전주의, 반자본주의적 메시지로 가득한 그의 작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그의 명성에 편승해 뱅크시를 자처하는 작품도 적지 않고, 그에 대해 '내 작품 아님'을 홈페이지에서도 밝히기도 한다. (한번 더 꼬아서 생각하자면, 이러한 의사표명 또한 그의 자작극이 아닌가 의심하게도 된다. 왜냐하면, 익명으로 작품활동하는 것 자체가 '작품에 따라다니는 작가의 이름'이라는 관례에 대한 반항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애당초 굳이 저렇게 주인 찾아주기 식의 성명서를 낼 필요가 있나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몸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체제적인 작품을 하는 그가 미술시장에서 몸값을 높이게 된것은 어찌된 영문인걸까? 

일례로 2003년 제작되었던 Bomb Hugger라는 그래피티 작품의 경매 경과를 살펴보자. 




Sotheby's London 

Date:2010-02-11 

Lot Number :284 

Low Estimate :$39,200[+92%]* 

High Estimate :$54,800[+37%]* 

Hammer Price :$75,200 

Sold For :$92,250*



2010년 2월 11일자 경매를 보면 이 작품의 최종 가격은 최저 예상 가격 4만불을 가볍게 넘어 최종가는 9만2천불, 한화로 1억이 넘는 금액에 거래가 되었다.   애당초 미술 작품에 터무니 없는 가격을 매기는 이러한 미술 시장에 대한 비판은 경매서 고가로 팔린 작품을 거리에서는 60불에 파는 행위를 하거나 직접적으로 아래와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등, 여러차례 그의 작품 속에서 언급되었다. 

Banksy – I Can’t Believe You Morons Actually Buy This Shit, 2007  '너희같은 멍청이들이 정말로 이런 쓰레기를 사다니, 나는 당최 믿을 수가 없다.'는 제목으로 경매장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쯤 되면, 그의 작품 값을 올리는 것은 미술 시장이자 미술계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가깝게는 앤디 워홀의 팝아트, 좀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셀 뒤샹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다. 

Banksy, Soup Cans (2006) EHC Fine Art 앤디 워홀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인건가? 현대미술가들은 스프캔이라는 상품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미술사 적으로 보면, 이는 마르셀 뒤샹이 1917년 한 전시회에 철물점에서 구입한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라는 서명만 하고, '샘 (The F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출품을 한 것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 되지 않을까?    

애시당초 참가비만 내면 전시를 허용하는 허술한 전시회에 출품했음에도 당시에는 그가 출품한 변기는 출품이 거절 당했다.  이후, 작가는 작품을 '제작'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기만 해도 되는 것이라는 면죄부 (?)를 받게 되는 미술사적인 일대사건으로 기록되게 되는 것이다. 이후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 면죄부로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선택'해왔던가. 

이번 뱅크시의 첩보전을 방불케할 '퍼포먼스'는 미술사적으로 또 다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경매에서 작품의 가격을 매겨 유통하는 과정에 대한 반항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 퍼포먼스 자체는 또 다른 형태의 예술 형태로 자리잡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절반쯤 분쇄기를 통과한 그 작품은 이번 경매가를 가볍게 뛰어넘으며 더 높은 가격에 판매될지도. 

한편, 뱅크시가 자신(들)의 인스타그램에 사전에 분쇄기를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해당 경매에서 작품이 순식간에 분쇄되어 액자밑으로 흘러내리는 과정을 촬영한 것을 올리면서 "The urge to destroy is also a creative urge" - Picasso라는 구문을 함께 실었다. 이는 항상 자신의 이전의 작품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창조를 추구했던 피카소가 '창조적인 진공청소기'라 불렸던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천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  미술계의 황금만능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을 했지만, 그 미술계에서 최고가를 갱신하며 그러한 시스템을 만끽한 피카소에 대해서는 별 저항이 없었나보다.  

https://www.instagram.com/p/BomXijJhArX/?utm_source=ig_web_button_share_sheet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7. 01:30 미술 이야기

세상을 보는 시각은 여러가지다.  여기서 그 다양한 시각에 대해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크게 줌인한 시각과 줌아웃한 시각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친구들끼리 모였을때, '얘는 어머님이 전라도 분이시라 음식맛이 좋다'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갱상도 사나이의 '으리'도 자주 하는 말이다.  이 밖에도 충청도 출신인 사람들은 느긋하다거나, 뭐 그 밖에도 각 지방에 대한 선입견 내지 편견을 포함한 평가는 한국 사람이라면 거기에 동의를 하든 안하든 들어보긴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거기에 반해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냥 '미국 사람' '일본 사람'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한다. 

다른 곳은 잘 모르지만, 일단 미국은 그 크기로 말하자면 남한의 백 배는 족히 되는 크기의 땅인데, 그리고 그 속에 얼마나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우리는 그냥 '미국 사람들은...'이라고 특징을 지워 이야기 하곤 한다. 

참고: 

남한의 면적=9만 9538㎢
북한의 면적=12만 2762㎢
미국의 면적=951만 8323㎢
참고로 시카고 북쪽에 있는 오대호의 크기를 합하면 24만5000㎢이고, 

그 중 가장 큰 슈페리어 호 같은 경우만 해도 8만㎢이다. 

즉, 미국 면적의 크기는 
남한에 비해 105배의 크기
북한에 비해 79~80배의 크기
한반도를 합한 면적의 44배의 크기

미국인들에게 물어보면 또 다르다.  뉴욕을 방문했다가 그 다음 행선지가 LA라고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내 평생 LA를 가본 적은 없지만, LA 사람들은 이렇다며?'라고 물어본다. 그리고 LA를 방문한 뒤, 다시 뉴욕으로 돌아갈 날짜가 언제다라고 이야기하면, '나는 한번도 뉴욕을 가본적은 없지만...'이라는 이야기를 꼭 하곤 했다. 그 뿐 아니다. Texas 사람들은... Midwest 사람들은.... 이렇게 각각 다른 지방에 대한 사람들에 대한 인상과 고정관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때에는 '한국에 가면 다 "미국 사람들"인데...'라고 생각하면서 재밌다고만 생각했었다.  

원체 미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좀 식견이 있다는 사람들도 한국과 중국, 일본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위치가 다르다는 정도는 알아도, 결국 한국은 그냥 '극동' 내지 '동양'이라는 큰 범주에 묶인다.  '미국인들'이 본국 이외의 지역에 대해 알려고 하는 노력이 부족하기도 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나라에 대해서 세분해서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생각해봤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내린 결론은 결국은 본인에게 가까운 것에 대해서는 세분해서 살펴보고 이해하고, 자신과 먼 것일 수록 개략적으로 이해하는 인간의 본성 탓이라는 것이다. 내가 명명해보자면, '줌인과 줌아웃 법칙'인 것이다.  가까이서 보면 차이들이 도드라져 보이고 멀리서 보면 공통점들이 잘 보이는 것이다. 이는 미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미술사에서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이야기 할 때, 플로렌스 (피렌체)와 베니스 (베네치아)의 미술을 선과 색으로 대비하여 설명한다. 즉, 피렌체는 색보다는 '선'을 중시하는 미술이라 소묘의 기법이 뛰어난 작가들이 많고, 베네치아의 미술은 선보다는 '색'을 중시하는 미술이라 다른 지역에 비교해서 탁월한 색상이 특징인 작가들이 많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MICHELANGELO (1475-1564)'Ignudi detail from the Sistine Chapel Ceiling', c.1508-12 (fresco) - 선을 중시한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대변하는 작가,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천장화를 위한 수많은 드로잉 중 하나 ; 오른쪽은 완성된 모습

Titian, Bacchus and Ariadne (1520-23),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색을 중시하는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 티치아노

그러나, 이것은 줌인했을 때의 시각이고, 줌아웃해서 북유럽르네상스 (이탈리아보다 북쪽의 유럽국가, 플랑드르 지방 등)과 함께 비교해보면, 세부의 디테일을 중시하는 북쪽지방의 예술에 비해 이탈리아 미술 전반이 소묘, 즉 디세뇨 (disegno)를 중시하는 예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북유럽르네상스를 설명할 때에는 이탈리아 미술전반에 대한 특징을 다시금 언급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Jan van Eyck,Giovanni Arnolfini and His Wife Portrait  (1434)oil on oak panel of 3 vertical boards 82.2 ×60 cm, National Gallery, London

이는 동서양 미술의 특징을 논할 때가 되면 다시 달라진다. 북유럽과 이탈리아 할 것 없이 그냥 '서양미술'.... 이처럼 우리는 줌인해서 관찰할 때와 줌아웃해서 관찰할 때의 자세가 달라지고 따라서 도출되는 결과도 달라진다.  

요는 줌인해서 보는 세상과 줌아웃해서 보는 세상이 많이 다르다는 것. 평소에는 아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세상을 가끔은 줌아웃해서 보는 것도 신선한 시각을 유지하는 방법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  좀 논의가 달라지긴 하지만, 내 인생이기 때문에 가깝게 들여다보고 자세히 보이는 내 삶의 문제들도 때로는 줌아웃해서 보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닐때도 있다는 점. 그리고 의외로 쉬운 해결책이 보이기도 한다는 것.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5. 01:30 미술 이야기

데이비드 호크니라는 화가는 인기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의 저서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화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저서로는 Secret Knowledge 라는 책이 있다.  원제는 Secret Knowledge: Rediscovering the Lost Techniques of the Old Masters.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이 된 걸로 알고 있는데, 국내에서의 인기는 모르겠지만, 해외에서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책이다. 물론 호평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엄청난 논란도 일으킨 책.  

그 책에서 그는 1430년대 이후의 많은 유명 화가들이 실은 렌즈와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음을 밝혔다.  대중들은 '놀랍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이제까지 천재라고 여겨왔던 베르메르나 카라바조와 같은 대가들이 실은 그런 도구와 기구를 사용해서 그렸었던 것을 알게 된데서 오는 '배반감'에 대한 토로도 많았다. 

거기에 엄청난 반대들... 데이비드 호크니를 반대하는 웹사이트에 들어가보면, 자신이 미술교사인데, 학생들에게 한 몇 개월만 가르치면 베르메르나 카라바조 같이 그릴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한다며 반증들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폭탄 발언에 대해서는 언론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표하며, 인터뷰 방송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David Hockney, The Lost Secrets of the Old Masters: camera lucida obscura (이 곳의 댓글도 반대글이 엄청나다)


많은 논란과 관심을 불러 일으킨 그의 Secret Knowledge 의 후속편 아닌 후속편으로는 2016년 출판된  A History of Pictures: From the Cave to the Computer Screen 이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어쩌다가 내가 번역하게 되어서, 출판과 동시에 번역을 진행해서 책의 출판과 거의 동시에 국내에서도 출판된 바 있다. 그 제목하야 A History of pictures 한국어로 <그림의 역사>

국내판은 여기참조. (참고로 표지도 다 데이비드 호크니께서 직접 아이패드 사용해서 그린거라 책에서 언급하심)  


그 책의 내용에는 다음번에 기회가 있으면 가끔씩 언급할테지만, 요번에는 아이패드 관련 소식만. 

캔버스 위의 회화작품 뿐 아니라, 2차원의 모든 작품들 (사진, 드로잉, 영화의 스틸...)을 언급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제목에서도 'Painting'이 아닌 소문자 p를 사용한 'pictures'로 한 그.  그 책에서 자신은 새로운 기기가 나오면 반드시 사용해 본다고, 그래서 팩스가 나왔을 때에는 팩스를 이용해서 작품을 제작해봤고, 지금은 아이패드를 이용해서 작업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한참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이 책이 대담집 형식이니까, 이야기 한 것의 기록이므로)  

그 때였다. 내가 '내가 데이비드 호크니 이름을 들은 게 언젠데, 그리고 도대체 팩스 나올때 작업을 할 정도면 나이가 어느 정도 되시나?' 하고 다시 찾아본게.  1938년 생, 만으로 해도 81세 되셨다.  그 때 대단하다 싶었다.  여하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굽히지 않는, 자신이 몰두한 연구의 결과 에 대한 신념.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겠는가?) 

그리고, 멈추지 않는 탐구열과 성실성. 

물론 호크니는 매 번 옥션에서 고가로 작품이 거래되는 '유명' 작가임엔 분명하나, 대중적 기호에 있어서는 호불호가 있는 작가이고, 비평계 쪽에서도 그를 인기만을 추구하는 가벼운 작가라는 평도 적잖게 있는 터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그의 원근법에 대한 관심, 동양의 산수화에서 적용된 이동하는 원근법을 적용한 풍경화가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나중에 미술사적으로는 어떻게 평가될까'라며 궁금해 하던 작가였다. 하지만, 그 때 그의 열정적인 탐구심과 노력과 성실성에 대해서는 깊은 경의를 품었었다. 

David Hockney, Garrowby Hill (1998), oil on canvas ; 152.4 x 193 cm, Museum of Fine Arts, Boston

David Hockney, Road to Thwing 제작 장면, 2006년


그런데, 오늘 기사를 하나 봤다. 팔순의 그가 아이패드로 작업해서 그 결과물인 스테인드 글래스를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설치하기로 했다는.  (뉴스는 여기를 참고)

David Hockney and The Queen’s Window. Photo by Alan Williams.

결국, 모든 논란을 재우는 것은 성실과 끈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번 욕하고 비난하기는 싶지만, 한 분야를 열정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오랫동안 연구하고 실험하고 생산물을 만들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신념을 이야기 할 수도 있으나, 진정한 신념은 끈기와 성실한 노력과 함께 성장하고 확립된다. 안그러면 x고집.)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4. 01:30 미술 이야기

블로그를 시작하고 나니 남이 쓴 글들도 많이 읽게 된다. 

그러고서 느낀 것으로는 요새 부쩍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나부터도 짧은 글을 여기저기 쓰기도 했고, 이 블로그에도 일상 속에서의 단상을 이야기 하면서 언급하기도 했으니.

2018년 한국에서의 삶이 복잡하긴 복잡한가보다. 

하지만, 미술사에서 논하는 1960-70년대 정점을 이룬 미니멀리즘과 생활 속의 '미니멀리즘 (?)'은 많이 다르다.  

언제 한 번 나부터라도 조용히 앉아 생각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우선은 그게 다르다는 것은 나라도 나서서 밝혀두고 싶었다.  앞으로도 미술이랑은 관계 없이 살 것인데 그게 뭐 대수냐 하면 정말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혹시라도 앞으로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많은 미술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미니멀리즘 작품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관련 자료를 접할 기회가 올 때, 그렇게 잘못 잡힌 개념 때문에 정확한 이해에 방해를 받을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생활 속의 '미니멀리즘'은 '미니멀 라이프 스타일'이 맞고 '미니멀'까지만 쓰시는 게 적확하다는 것. 그리고, '미술에서의 미니멀리즘은 개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는 게 낫지 않나 하는 게 개인적 소견.      

그러다 접한 전시 소식이 있어 소개. 가을에 전시한번 봐도 좋을 것 같아요. (뉴스에서만 접한 것일 뿐이므로, 개인적으로는 어떠한 관련도 없고, 전시회의 퀄리티에 대해서도 모릅니다만) 

서울대 미술관 전시관에서 미니멀리즘 작품의 전시회가 열린다네요.

【서울=뉴시스】 오완석 언더페인팅 (마이너스) Underpainting (Minus)2014 불투명 무반사 유리 위에 페인트 paint on groundnon-reecting glass 150x100cm 5점 each 150x100cm 5 piece set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9. 07:00 미술 이야기

Edgar Degas (1834-1917) The Bellelli Family (1858-1867) oil on canvas ; 250 x 200 cm, © RMN-Grand Palais (Musée d'Orsay) / Gérard Blot 



개론서에는 편의상 인상주의에 포함시키고, 실제로 까칠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에드가 드가는 하지만, 살아생전에는 자신의 작품을 인상주의라고 하는 것에는 크게 거부감을 표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에드아르 마네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집안의 자제였던 드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이탈리아와 미국 등지를 다니면서 집안을 일으키고자 노력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고모를 방문해서 그녀의 가족을 그린 초상화이다. 


화면에는 고모와 그의 남편 벨레리 남작과 그들의 두 딸들이 모여 일단 가족 초상화의 형식을 띈다.  벽에는 최근 작고한 그의 아버지이자 고모에게는오빠인 오귀스탕 드가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드가의 고모는 화면의 왼쪽에 두 딸과 함께 자리하고 서 있고, 남편인 남작은 화면의 오른쪽에 놓인 의자에 등을 돌린 채 앉아서 딸들과 아내가 있는 쪽을 바라다보고 있다.  

얼핏 보면 일반적인 가족 초상화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은 인상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에 설득력이 실릴만큼, 이 작품은 북유럽의 초상화와도 같은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 가족 초상화에서는 지체 높은 귀족의 '화목한 가정'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일설에는 고모부가 처녀시절의 고모를 억지로 범해 결혼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화면 전반에는 고모의 고고함에 미치지 못하는 듯한 이탈리아인 고모부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남편과 아내는 화면의 좌우 가장자리로 멀리 떨어져 있고, 7세와 10세가 되는 조카들은 놀이용 앞치마라고 할 수 있는 pinafore를 착용하고 있지만, 다소 경직되어 보인다. 상중이라 검은 색의 옷을 입고 있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입을 꽉 다물고 있어 귀족적 풍모를 가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고모부는 편안한 옷을 입고 가족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세로선이 강조된 문과 거울의 틀, 그리고 중간에 놓인 탁자로 이들의 사이는 단절되어 있다.  이 둘의 사이가 불편한 것에 대한 암시는 의자에 걸터앉은 조카가 한쪽 다리를 미처 다 뻗지 않고 접은 채 앉아있는 모습, 화면 하단의 오른쪽의 강아지가 잘려나가 화면에 다들어오지 않게 그려진 점 등에서 더 강조된다.  




사실주의자로 불리기 원했던 드가는 전통적 화법으로 그려진 작품을 통해 모델들의 심리를 꿰뚫는 예리한 초상화작품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그린 수 많은 발레리나 그림들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7. 08:00 미술 이야기

이번에는 한 남자가 안개로 자욱한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다.  

저번의 작품이 '실내'의 '여인'이라면 이번에는 '거친 자연'속의 '남성'이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등을 보이며 서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이다. 

 

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c.1817),  oil on canvas ; 98 x 74 cm, Kunsthalle Hamburg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는 “뒷모습의 인물 (Rückenfigur, 혹은 figure from the back)"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킬 정도로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자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인물을 많이 그렸다.  이 '뒷모습의 인물'들은 관람객이 그림 속의 인물들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지극히 감상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그의 작품은 이러한 장치를 통해 그 뒷모습의 인물들과 함께 자연을 바라보며 명상을 하게 만들고 있다. 

 

그의 작품은 소위 알레고리 풍경화인데, 밤 하늘이나, 안개낀 아침, 헐벗은 나무나 고딕 풍의 폐허를 바라보는 사색적인 인물이 주를 이룬다. 그의 이러한 상징적인 그림은 보는 이로하여금 감상적인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데, 이는 고전주의적 화풍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거대한 대 자연 속의 미미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다름 아닌 신 앞에서 작은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장대한 자연으로 드러나는 신의 존재를 그린 그의 그림의 크기는 실제로 접해보면 놀라울 정도로 작은 크기이다.  (실제로 아주 작다기 보다는 그 이미지의 규모에 비해 작게 느껴진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추상표현주의를 필두로 대작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에 더욱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고.)  

 

Caspar David Friedrich, Monk by the Sea (1808-1810)  oil on canvas ; 1.1 x 1.72 m, Alte Nationalgalerie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바닷가의 승려 (Monk by the Sea)'라는 작품은 아주 작은 작품은 아니지만, 소위 대작이라고 하는 큰 캔버스에 작품과 비교하면 그리 큰 크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자연을 마주하고 겸허한 태도로 신에 대한 명상을 하는 승려의 모습은 'size'가 아닌 'scale'면에서는 이를 능가하는 작품이 드물정도이다. 

 

Seashore by Moonlight (1835–36). 134 × 169 cm. Kunsthalle, Hamburg

 

1835년 처음 뇌졸증으로 쓰러진 이후, 그는 작품활동을 계속 할 수 없었다. 위의 작품은 그가 남긴 마지막 대작이라고 알려진 그림이다.  달빛을 받으며 항해에서 돌아오는 모습은 그의 인생을 마감하는 시점에 그려져 그 의미가 남다르다.  낭만주의가 유행하던 한 시기를 풍미했던 화가는 이후 낭만주의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미술계에서 잊혀져 친구들의 온정에 기대어 생활하며 쓸쓸하게 인생을 마쳤다.  그의 명성은 표현주의자들이나 상징주의자들에게 그의 작품세계를 재평가 받으며 부활되는 듯 했으나, 나치가 좋아했던 작품으로 낙인 찍히면서 두번째의 몰락이라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이 재평가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나 되서야 되서 였다.  그야말로, 그의 작품 인생은 독일 낭만주의의 모토 처럼 '질풍 노도의 시대'와도 같은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의 작품을 통해서는 격정적 감정보다는 고요한 명상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작품 철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I have to stay alone in order to fully contemplate and feel nature. The painter should paint not only what he has in front of him, but also what he sees inside himself.” —Caspar David Friedr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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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26. 03:44 미술 이야기

한 여인이 두손을 다소곳이 앞으로 모은 채, 고개만 내밀어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Caspar David Friedrich, Woman by a Window (1822) oil on canvas ; 44 × 37 cm, Alte Nationalgalerie, Berlin


젊은 여인이 서있는 곳은 독일을 대표하는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의 드레스덴에 있던 스튜디오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카홀리느 (Caroline), 화가의 아내이다. 그녀는 남편의 스튜디오 창 밖으로 보이는 엘브 강과 그 위를 지나는 배를 바라보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여린 푸른 빛의  포플러 나무들로 보아, 때는 바야흐로 북구의 긴 겨울을 나고 맞이하는 봄이다. 

강한 수직선으로 이뤄진 그녀를 둘러 싼 모든 환경과 배경과 그녀의 몸과 드레스가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곡선의 대조는 그녀의 심리를 잘 반영해주고 있다. 먼저, 강한 수직이 주를 이루는 실내의 구조를 보라!  창틀에서 마루바닥에 이르기까지 실내에는 수직선이 위주를 이룬다.  특히, 그녀의 양쪽에 내려오고 있는 창 옆의 두 기둥은 그녀를 속박하고 있는 듯하고, 곧게 뻗은 배의 마스트, 저 멀리 보이는 곧게 뻗은 포플러 나무들, 모든 것이 수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둥글게 말아올린 머리, 그녀의 작고 둥근 어깨, 주름이 잔뜩 들어간 그녀의 드레스... 이 모든 것은 그녀를 둘러싼 수직의 세계와는 상반된 것으로 보인다. 제한된 자유 속에서 그녀는 외부 세계를 동경하며 그녀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잔뜩 내비치고 있다.  

한편, 그녀의 모습과 실내의 모습, 그리고 어두운 실내와 찬란한 태양이 비치는 외부의 풍경에서 이중적인 태도와 분위기도 읽을 수 있다. 실내광이 따뜻하게 채워진 집 안에서 아늑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두손은 마주 모으고, 동그랗게 만 몸은 창 쪽으로 기울이고 고개는 길게 창 밖쪽으로 빼고 서있는 그녀의 뒷 모습에서 한편으로는 안락한 집안에서 벗어날 용기는 없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집 앞 수로 앞을 지나는 배가 이끌어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여인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그녀의 호기심이 집안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이기게 될 때, 그녀는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 대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는 잠시 후, 한차례의 꿈을 꾼 듯 멋진 세계에의 상상을 접고 조용한 일상으로 복귀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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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9. 24. 07:00 미술 이야기

Georges Seurat (1859-1891),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1884-86)  oil on canvas ; 207.6 × 308 cm,  Art Institute of Chicago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조르주 쇠라 (Georges Seurat: 1859–1891)의 대표작은 단연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이다.  

인증샷  ^^  혹시 직접 작품을 본 적이 없는 분은 대략 사이즈를 가늠해보세요~

만약 쇠라가 오래 살았더라면 미술의 지평이 바뀌었으리라 평하는 천재적인 화가.  그는 당시 유행하던 색채 이론을 깊이 연구하여 역작인 <그랑자트의 일요일 오후>는 그가 2년간의 연구와 다수의 습작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그 전까지 사람들은 사물에 고유색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Michel-Eugène Chevreul 등의 연구로 여러가지 색채이론이 대두되었다. 시각의 인식와 대뇌의 인지 관계에 대한 차이에 대해 알게 되며, 색채 대비로 인한 착시, 보색 이론 등이 밝혀졌다.  보통 사람들은 이과적 성향과 문과적 성향으로 나뉜다고 하는데, 쇠라 같은 경우는 이과와 문과의 성향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던듯 하다.  당시의 과학서와 이론서를 섭렵하면서 그 이론을 <그랑자트>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심지어 최종적으로는 캔버스를 늘려 가장자리를 빙 돌아가면서 채색을 하였는데, 거기에도 보색이론을 적용하였다] 

Seurat, Child in White, 1884-85,  Conté crayon on paper.  Solomon R. Guggenheim Museum

그리고, 위의 작품은 종이 위에 콩테 크레용으로 그린 드로잉으로 <그랑자트>의 작품 속의 어린 소녀의 습작이다.  직접 보면, 과연 흑과 백 사이에 그토록 다양한 단계의 채도와 명도가 존재했었나 싶을 정도로 감탄하게 된다. 그 다채로운 흑과 백이 가슬가슬한 미샬레 종이의 표면의 질감과 조화를 이루는데, 자세히 보노라면 그 다양하고 심오한 세계에 빠져들 듯한 느낌이 든다.  

Georges Seurat,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의  세부.  중앙 부분에 위치한 어린 소녀  

이 소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작품 <그랑자트>의 캔버스에서의 대각선이 만나는 중심에 자리한 인물로 관람자 쪽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순수한 소녀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이쪽으로 바라보게 그림으로써 관람객들의 관심을 끄는 역할, 그림에서의 focalizer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르주 쇠라는 이과 문과를 섭렵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색상에 대한 감수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흑백에 대한 안목도 탁월했음이 분명하다.  과학이면 과학, 섬세한 감수성이면 감수성, 색상이면 색상, 흑백이면 흑백 어느 하나 허투루 다루는 법이 없다. 

<그랑자트의 일요일 오후>를 위한 습작 ; Seurat, L’écho (Echo), study for Bathers at Asnières (1883–84)  Conté crayon on Michallet paper ; 31.2 x 24 cm, Yale University Art Gallery 

수 많은 드로잉들 속에는 얼마전 다뤘던 <아니에르에서의 해수욕>에 등장한 등굽은 소년도 있고, 손나팔 부는 소년도 있다.  완성작에서 볼 수 없는 적막한 고요가 아련함과 함께 전해져 온다.  

<그랑자트의 일요일 오후>를 위한 습작

그리고, 위의 여인을 보라!  눈,코,입 하나도 확인할 수 없으나, 저 여인은 분명 아름다울것만 같지 않은가!

그가 살던 19세기 말의 프랑스에도 달은 어김없이 뜨고 졌나보다.   짙은 어둠이 깔린 풍경과 휘영청 밝은 달을 쇠라는 오직 흑색의 농담 조절만으로 표현했다. 


추석입니다. 달보고 소원 많이 비시라고 마지막에 달 그림 올렸네요.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