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미술관 탐방' 태그의 글 목록 (3 Page)
2018. 9. 8. 00:25 미술 이야기

이쁘면 모든게 다 용서된다. 이쁘면 진리다. 이쁘면 착하다.  

궁서체로 먼저 한번 써봤습니다. 이런 말, 한번쯤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후후...  이런 믿음과 동일하지는 않으나, 일맥상통한 것이 신플라톤주의라고 할수도 있지 않나 혼자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만.... 오늘은 '이쁘면 진리다'라는 화두를 따라 보티첼리의 작품 하나를 살펴볼까 합니다. 


Sandro Botticelli, The Birth of Venus (c. 1486). Tempera on canvas. 172.5 cm × 278.9 cm (67.9 in × 109.6 in). Uffizi, Florence


Sandro Botticelli (1445–1510), Primavera (1482) tempera ; 203 × 314 cm, Uffizi

보티첼리의 작품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 위의 두 작품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베라 (봄)>라고 할 수 있죠. 이 두 작품이 쌍을 이루도록 메디치가에서 주문했다는 일설이 있는 반면, 또 한편으로는 <프리마베라>와 <미네르바와 켄타우르스>를 한 쌍으로 묶는 설도 있습니다.

Sandro Botticelli (1445–1510), Pallas and the Centaur (ca.1482), tempera on canvas ; 205 × 147.5 cm, Uffizi

여하튼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두 작품 다 신화 속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지만, 딱히 특정 에피소드와는 상관없는 전개라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먼저 <비너스의 탄생>은 제목과는 조금 다르게, 귀여운 아기 비너스가 탄생하는 순간...은 아니고, 이러저러 여차저차해서 파도의 거품속에서 탄생했다는 비너스가 이미 다 장성해서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파도를 타고 해안으로 도착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때, 비너스는 메디치가 소장 중인 비너스의 포즈와 유사하게, 다소곳이 몸을 가린 모습인데, 정숙한 여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명, Venus Pudica).  조신조신... 

Venus de'Medici,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Italy   통칭 '메디치가의 비너스'

한편, 비너스가 파도에 밀려 조개껍질을 타고 해안에 도착하는 장면도 고대부터 있는 도상인데, 폼페이 벽화부터 까메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남아있습니다.

Casa de la Venus en la concha Pompeii – 여기서는 비너스가 장막 같은 천으로 바람도 연출하고 있다. (펄럭이는 망토는 바람의 상징)

고대 로마시대 까메오 장식 – 재료와 주제의 적절한 결합을 보여준 탁월한 예

Sandro Botticelli, The Birth of Venus (c. 1486) – Zephyr and Aura

<비너스의 탄생> 화면의 왼쪽에서는 서풍(Zephyr)이 볼 빵빵히 바람을 불어 비너스를 해안으로 인도하고 있고, 그의 품에서 미풍(Aura)도 함께 이 일을 거들고 있습니다.

Sandro Botticelli, The Birth of Venus (c. 1486) –Horae

오른쪽에서는 값비싸 보이는 아름다운 천을 받쳐들고 역시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인이 누드의 여인에게 덮어주려는 듯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여인은 호라 (Horae), 혹은 계절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간의 흐름을 뜻하죠 (이 단어에서 시간 (hour)이라는 영어단어가 나온건 안 비밀). 혹자는 호라의 포즈를 기독교에서의 예수의 세례 장면과 연관시키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시시콜콜하게 신들의 이름이나, 작품의 주문 배경을 전혀 몰라도 작품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뭐 어차피 확실하지 않은 것도 많으니까요.  ^^

비너스의 모델이 된 것이 당대 최고의 미녀이자, 메디치가의 청년들 – 로렌조와 줄리아노 – 가 모두 숭배해 마지 않았다는 여인 시모네타 베스푸치 (Simonetta Cattaneo Vespucci)였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뭣이 중한디? 이렇게 이쁜데....

Sandro Botticelli, The Birth of Venus (c. 1486) –Venus 

메디치 가가 설립했던 아카데미에서 플라톤의 사상을 신봉하고 연구하던 일군의 학자들의 주도로 르네상스기에 널리 유행했던 것이 바로 신플라톤주의입니다. 그리스 로마의 전통과 사상을 연구, 재발견하게 되면서,어떻게 하면 중세 천년 동안 신봉해 왔던 기독교의 신앙과 사상을 버리는 일 없이조화롭게 포용할 수 있을까하는 궁리 끝에 나온 사상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관점에서 비너스는 그리스 로마의 신처럼 현세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을 관장하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인간들에게 천상의 진리, 신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이해하게 됩니다. 즉, 우리가 육체적 아름다움은 제대로 감상하고 명상하기만 한다면, 궁극적으로는 더 고상한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너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처음에는 그 외면적 아름다움에 맘을 빼앗기지만, 종국에는 우리의 맘을 신성한 경지, 신성한 신의 사랑으로까지 고양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거죠.  

따라서, 단순화 하자면, 맞는 말입니다. 적어도 신플라톤주의자에게는요, "이쁘면 진리다~"라는 말은요.  


#보티첼리 #비너스의탄생 #신플라톤주의 #우피치 #메디치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5. 19:53 미술 이야기


이 블로그의 제목과 필명의 근간이 된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1897) 이야기

앙리 루소 (Henri Rouseau: 1844-1910)의 <잠자는 집시 (The Sleeping Gypsy)> (1897)

Henri Rousseau, The Sleeping Gypsy (La Bohémienne endormie) 1897. Oil on canvas; 129.5 x 200.7 cm ; Gift of Mrs. Simon Guggenheim, MoMA


때는 바야흐로 난생 처음 뉴욕을 방문했던 해의 겨울의 어느 날, 처음으로 뉴욕 현대미술관, MoMA를 방문했을 때, 나는 <잠자는 집시>라는 작품을 봤다. 전시실로 들어서자마자 생각보다 컸던 작품이 눈에 안기는 순간, 난 뭐라 형언하기 힘든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가 꽂히는 듯한 (그렇다고는 해도 가슴에 비수가 꽂혀 본 적은 없으니, 그냥 느낌상 그러할 것 같다는 의미)..... 그게 요즘 말로 하자면, '심쿵'인건지... 충격과 감동인건지... 그 당시 나로선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물론 그 이전까지 문학 작품을 보고 울컥하거나 통렬한 감동을 느껴본 적은 있었지만, 미술 작품을 보고 그러한 종류의 감정을 느낀 적은 난생 처음이라 당황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이 생기는 걸까~



어느 누구도 인생을 한 줄로 요약되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것은 아니니까, 나라고 해서, 이 작품을 똵! 보고 그 길로 미술사로 똵! 전공을 바꿔서 그 이후로 원탁의 기사가 성배 찾듯 이 작품에 대한 열정 어린 탐구를 주욱!~ 지속적으로 했.... 이런 식으로 이어진 건 아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이 작품을 본 이후로 ‘왜 난 문학 작품이 아닌 하나의 시각 예술 작품을 보고 그토록 감동을 받았던가?’ 하는 맘으로 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었고, 이후 여차저차 결국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이 작품에 감춰진 수수께끼는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늘 맘 한 켠에 묻어두고 지냈던 것 같다. 이미 미술 교과서에서 익히 보아 알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대했을 때의 받았던 충격에 가까운 감동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었던 것이었단 말이었던가?...하는.


그러다가 몇 해 전 비로소 그 해묵은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줄 만한 아티클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quest가 지속적이고 집요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들통이 나는 순간. 그도 그럴 것이 이 글이란, 실은 저명한 미술사학자 알버트 보임의 아주 해묵은 아티클로 내가 작정하고 찾아봤다면 진작에 발견할 수 있었을 글이었으므로...)

[Albert Boime, “Jean-Léon Gérôme, Henri Rousseau’s Sleeping Gypsy and the Academic Legacy,” Art Quarterly Vol. XXXIV: No.1 (1971): pp.3-29. [http://www.albertboime.com/Articles/20.pdf 관심이 있으신 분은 한번 읽어보시길]


이 아티클에서 알버트 보임은 19세기 유명한 아카데미 화가 장-레옹 제롬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자의 출처를 추적해가는데.....

그 글을 요약하자면,

1. 우선 화가 앙리 루소는 독학파였으나, 스스로는 아카데미 풍의 화가로 생각하였고, 자신의 화풍을 화가 윌리엄 부게로나 장-레옹 제롬의 화풍과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루소는 이들의 작품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2. 제롬은 열강의 식민지 개척이 한창이던 시기, 아카데미 화가의 자격으로 그 개척단을 수행하며 그곳의 자연과 생활상을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내셔널지오그래픽지의 사진작가 정도의 역할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제롬은 사자를 실제로 보고 그릴 기회가 많았다는 것.


3.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롬은 그 광활한 사막을 돌아다니는 백수의 제왕 사자를 자신과 동일시 했을 거라는 것,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유독 사자가 많이 등장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첫째, 장-레옹 제롬은 그의 이름에 사자를 뜻하는 ‘Léon’이 들어간다. ('밀림의 왕자 레오'를 떠올려보자~) 둘째로, 자신의 성인 'Gérôme'은 유명한 성인 St. Jerome과 발음이 같다.


Jean-Léon Gérôme, Saint Jérôme, 1874, oil on canvas painting, 69 x 93 cm., Städel Museum

(기독교인들을 사자굴에 집어넣어서 사자가 잡아먹지 않으면 살려주는 벌을 행했을때,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뽑아주었더니 사자가 성 제롬을 살려주었다는 유명한 전설. 물론 제롬도 알고 있었고, 그 이야기를 주제로 그림도 그렸다.)

Jean-Léon Gérôme (1824–1904) The Two Majesties, 1883 oil on canvas; 69.22 × 128.91 cm


장-레옹 제롬의 작품에서 대부분 사자는 광활한 자연을 홀로 거닐거나 앉아서 사색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알버트 보임은 제롬이 당시 아카데미의 화가로 명성과 지위를 얻었음에도 경직된 관료주의와 주변과의 관계에서 항상 고독함을 느꼈기에 이런 그림을 그렸으리라 추측한다.

그리고, 오늘의 작품 <잠자는 집시>에서 등장하는 사자의 출처는 아마도 앙리 루소는 자신이 동일시 하던 아카데믹 화가 장-레옹 제롬의 작품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아래의 작품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라는 작품은 장-레옹 제롬이 주문을 받은 이래 상당한 공을 들여 오랜 기간에 걸쳐 제작한 작품이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사자는 동물들의 제왕으로서의 위엄은 가득하지만, 위협적 맹수의 모습은 아니다. 또, 지하굴을 아직 채 빠져나오지 않은 사자들도 피에 굶주린 맹수라기보다는 온순하고 조심스러운 고양이와도 같은 모습이다.

Jean-Léon Gérôme, 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 (1863-1883), oil on canvas 150.1 x 87.9 cm


이제 <잠자는 집시>로 돌아와 보자. 루소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자도 위협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고 호기심 많고 온순한 모습이다.
실제로 화가 루소 자신이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는 목적으로 쓴 편지에서도 그 의도를 확실히 하고 있다:

…떠돌이 흑인여성, 만다린 연주자는 물 단지를 옆에 두고 누워서,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사자는 우연히 그 곁을 지나다가 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지만, 잡아먹지는 않습니다. 달빛의 효과 탓에 매우 시적이죠. 장면은 완전히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집시는 동양 풍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루소의 <잠자는 집시>의 사자는 장-레옹 제롬의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의 사자들과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제롬의 사자 그림들의 제작 의도는 물론 루소의 <잠자는 집시>의 의미도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직접 정글 탐험은 고사하고, 사자를 본 적도 없이, 파리의 식물원을 방문하면서 그때마다 정글을 탐험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고 하는 루소와 정글과 사막 지대를 누비며 사자를 직접 보았을 장-레옹 제롬이 사자에 대해 느꼈던 감성은 일맥상통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Jean-Léon Gérôme, Solitude, 1890


위의 작품에서는 제목마저 알기 쉽게 <고독>이다. 저명한 아카데믹 화가였던 장-레옹 제롬도 때론 비평가들의 놀림을 받던 일요화가였던 앙리 루소도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외로웠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작품이 그려진 지 100년도 훨씬 넘게 세월이 흐른 후에 루소의 작품을 봤던 나는 왜 엄청난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의 경우, 그것은 아마도 ‘외로움’과 ‘안도감’의 공명이 아니었을까?

난생 처음 낯선 타국에 홀로 떨어져 생활하면서, 때때로 위험하다는 뉴욕 거리를 다니면서 불안하기도 했었던 나로서는 누워 있는 집시에게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고, 엄청난 위력을 갖추었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무방비 상태의 집시를 지켜주고 사자의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힘 쎈 사자가 나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지켜준다니! 그 이상의 든든함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광활한 사막에 홀로 놓여진 사자와 집시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외로움… 그 와중에 웃고 있는 달님과 아련한 별 빛으로 채워진 짙푸른 밤하늘로 인해 느껴지는 시상 충만한 감성...

물론 그 이후에도 수없이 MoMA를 방문해봤고, 그 때마다 첫날의 감동을 떠올리며 다시 그 작품을 봤었고, 처음 그때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은 빛이 바래갔다. 그 전시실에 들어가면 그 자리에 그 작품이 있을 것임을, 그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아마 20살 언저리 뉴욕에 있던 난 외로웠고, 그 작품을 보면서 커다란 위안을 받았고, 그 작품으로 인해 무한한 안도감을 선사 받았다는 것을.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4. 11:13 미술 이야기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오늘 티스토리 초대받아서 일단 블로그 개설.... 블로그 제목은 "물병과 사자"로, 그리고 필명은 "잠자는 집시"로.... 아는분은 아시겠지만,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에서 따온 것...보다 정확히는 그 작품의 묘사에서 따온 것.



드넓은 사막을 홀로 걷던 집시는 들고 다니던 만다린과 물병을 내려놓고, 단장은 손에 쥐고 있는 채로 지친 몸을 모래 바닥에 누이자마자 깊은 단잠에 빠져버렸다.  어디선가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사자. 맹수 중 맹수인 사자가 하지만 어쩐 일인지 집시를 발견하고서도 킁킁거리며 냄새만 맡고 있을 뿐, 집시를 날름 잡아먹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삭막하고 위험한 사막에서 불침번을 자처하며 집시를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물병과 사자'는  사막에서 집시의 생명을 지켜주는 존재.... 잠자는 집시는 유난히 아름다운 음악을 만다린으로 연주하며 행복해하는 관람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고, 그러한 사자와 집시를 너그러운 미소로 내려다보는 보름달이 높이 뜨면서 사막의 밤은 깊어져간다.         


#앙리루소 #잠자는집시 #MoMA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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