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현대미술' 태그의 글 목록 (6 Page)
2018. 9. 20. 08:00 미술 이야기

Norman Rockwell, Freedom from Want (1943) oil on canvas ; 116.2 x 90 cm, Norman Rockwell Museum, Stockbridge, Massachusetts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온 가족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네의 한 식탁에 모여들었다. 반가운 얼굴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는 가운데, 할머니께서 온 가족이 실컷 먹고도 남을만큼 커다란 칠면조 통구이를 내오셨다.  할머니께서 식탁에 큰 쟁반을 내려놓으시면 할아버지는 그 칠면조를 가족들에게 나눠주실 심산으로 그 옆에 서서 기다리고 계신다.  모두의 접시 위에 칠면조 구이 조각이 놓여지면, 할아버지의 주도로 기도가 이어질 것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가족을 주신 것과 생활에 부족함이 없게 살 수 있게 해주신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는...... 


노먼 락웰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추수감사절'이라는 말을 들으면많은 미국인들의 뇌리에 이 그림이 떠오를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시트콤 '모던 패밀리'에서의 락웰 <추수감사절> 패러디  -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 - 다문화 가정, 동성애 커플, 청소년 문제 - 등을 다 가지고 있는 미국의 중상류층의 가정을 배경으로 한 코믹시트콤. 그런 가족이 보수적이며 온건한 미국의 중산층 가정을 대변하는 락웰의 <추수감사절>을 재현한다는 것에서 코믹한 요소가 배가되는 효과가 있다. 


대중적인 인기가 워낙 높은 락웰이었지만, 이 작품의 인기는 특히 높아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이후 수많은 패러디가 제작되었다. 락웰의 작품은 거의 다 '그림으로 그린듯한' 이상적인 미국인들의 생활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화목한 가정을 묘사할 때 '노먼 락웰-같은 가족 (Norman Rockwellish Family)'라고 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락웰이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 현실의 어려운 면은 외면한 채, 설탕물을 바른 쓴 알약, 당의정같은 작품을 그렸노라 하는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시절, 혹은 한번도 누리지 못했으나 가졌으면 했던 행복한 시절을 떠올리며 흐믓한 미소를 띄게 되는 그의 작품은 줄곧 인기가 높았다.      


이 작품은 '4가지의 자유' 중 하나 Freedom of Want (기본 의식주가 부족하지 않을 권리)의 주제로 그려진 작품이다.  [그 밖의 세가지로는 Freedom of Speech (언론과 표현의 자유), Freedom of Worship (신앙의 자유), Freedom from Fear (공포로부터의 자유)이 있다]  그리고, 시리즈로 제작되었던 작품은 아래와 같다.


Norman Rockwell, Freedom of Speech (1941-45) oil on canvas ; 116.2 x 90 cm,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Norman Rockwell, Freedom of Worship (1941-45) oil on canvas ; 116.2 x 90 cm,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Norman Rockwell, Freedom from Fear (1941-45) oil on canvas ; 116.2 x 90 cm, National Archives at College Park 


1941년 12월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을 결정하게 되는데, 그 해 1월, 루즈벨트가 '4가지 자유'라는 제목의 국회 연설을 하게 된다.  '세계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미국이 참전할 수 밖에 없다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내용이다. 락웰의 작품은 이러한 이데올로기, 즉, 당시 파시즘과 대조하여 민주주의가 더 우위에 있다는 것 강조하는 이념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순회 전시되면서 전쟁 채권의 판매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John Currin, Thanksgiving (2003), oil on canvas ; 173 x 131 cm, Tate



위의 작품은 존 커린 (John Currin)의 <추수감사절>이라는 작품이다.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 있는 화려한 저택, 세 명의 여인이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고 있는 모양이다. 일견 부유해보이는 이 저택의 식탁에는 그러나, 요리되어 있는 음식이 없다 - 생 칠면조, 껍질도 까지 않은 양파 한 알, 시들어가는 꽃이 꽂힌 꽃병, 빈 접시, 이러저리 널려있는 포도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여인들 중 어느 누구도 제대로 먹고 있는 인물이 없다. 한 명이 스푼에 뭔가를 담아 다른 한 명에게 권하고 있으나, 상대방은 받아먹으려는 것인지 그 스푼을 피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입은 벌리고 있으면서도, 목을 쭉 빼고 윗 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추수감사절>이지만, 과도한 다이어트, 혹은 거식증을 이야기 하고 있다. 먹을게 없어서가 아닌 자발적인 기아. 존 커린이 자주 언급하는 '미의 기준'에 대한 언급이자, 현대인들이 과도하게 집착하는 '깡마른 미'에 대한 비판이다. 

이번 추석 우리 가족의 식탁은 어떤 모습일까?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13. 08:00 미술 이야기

Edward Hopper, Nighthawks (1942)  oil on canvas ; 84.1 x 152.4 cm, Art Institute of Chicago

'도시 군중 속의 고독'을 탁월하게 묘사했다고 평가받는 에드워드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대중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은 이 작품은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였고, 느와르 영화 감독들이 영화의 미장센으로 많이 차용하기도 하였다.  Nighthawks라고 불리고 있으나, 원제는 'Night Hawks'였고, 이는 직역하면, '밤의 매'라는 뜻인데, 신사들이 쓰는 모자의 모양이 매의 부리와 닮아서라는 설, 혹은 nighthawk라는 단어가 올빼미족 (밤에 잠안자고 활동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설 등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위 작품의 배경이 된건 뉴욕의 그리니치 애비뉴와 W 11가의 교차로 선상 (70 Greenwich Avenue  at West 11th Street의)의 코너에 자리한 가게라고 한다. 호퍼는 시각적 효과를 위해 실제의 모습과는 변형된 식당의 모습으로 변모시켰지만 말이다.  

한밤 중, 뉴욕의 어느 다이너 (간단한 식사와 커피와 케익 등을 파는 카페겸 식당) 안에는 4명의 사람이 있다. 그 중 한 명은 그 카페의 점원이고, 또 한명은 홀로 카페에 들른 사람, 또 하나는 남녀 커플이다. 점원과 혼밥족은 그렇다 하더라도, 일행임이 분명한 남녀도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다. 여럿이 있어도 지극히 고독하고 외로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들이 어떤 사연으로 한밤중에 그 카페에 들르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홀로 앉은 이는 실은 마주 앉은 커플 중 남자를 저격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암살범일 수도 있다 (느와르 영화에서 있을 법한 설정).   

다음 휴가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은 남녀 커플은 어쩌면 헤어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슬픈 로맨스 영화에 있을 법한 설정).  

아니면, 낮밤 바꾸어 일하지만 집안에 문제가 많아 고통받는 카페 점원의 고달픈 생활에 대한 영화 (사회비판을 겸한 성장 영화에 있을 법한 설정)일 수도 있다.  

Robert Siodmak의 1946년 작 영화 <The Killers

실제로 호퍼는 이 작품을 구상할 때, 헤밍웨이의 'The Killers'라는 1927년작 단편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다 했다. 그리고, 호퍼의 작품을 미장센으로 십분 활용한 'The Killers'라는 느와르 영화가 실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림을 감상하는 이는 이러한 상상력을 마구 펼치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아니면, 비록 한 밤 중에  그런 카페 같은 곳에 가 본 적은 없다하더라도, 분위기로 공감할 수 있는, 자신의 인생 안에서 있었던, 그런 고독의 순간에 대해 회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회화에서의 서사를 최대한 절제하는 한편, 깊은 통찰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 외로움을 포착해내는 것이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의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보는 이들에게 그 빈 서사의 장에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려넣을 수 있도록, 또 볼 때마다 다른 기억과 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봐도봐도 또 보고 싶은 그림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묘한 위안 같은 것을 받게 만든다.  아~ 나만 그렇게 외로운 건 아니었어......

호퍼의 <나이트 호크스>를 감상하는 이들은 그 비어 있는 서사 공간에 자신의 스토리를 채워넣으면서도 인간 본연의 조건에 대한 동질감을 공유하게 됨으로써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5. 19:53 미술 이야기


이 블로그의 제목과 필명의 근간이 된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1897) 이야기

앙리 루소 (Henri Rouseau: 1844-1910)의 <잠자는 집시 (The Sleeping Gypsy)> (1897)

Henri Rousseau, The Sleeping Gypsy (La Bohémienne endormie) 1897. Oil on canvas; 129.5 x 200.7 cm ; Gift of Mrs. Simon Guggenheim, MoMA


때는 바야흐로 난생 처음 뉴욕을 방문했던 해의 겨울의 어느 날, 처음으로 뉴욕 현대미술관, MoMA를 방문했을 때, 나는 <잠자는 집시>라는 작품을 봤다. 전시실로 들어서자마자 생각보다 컸던 작품이 눈에 안기는 순간, 난 뭐라 형언하기 힘든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가 꽂히는 듯한 (그렇다고는 해도 가슴에 비수가 꽂혀 본 적은 없으니, 그냥 느낌상 그러할 것 같다는 의미)..... 그게 요즘 말로 하자면, '심쿵'인건지... 충격과 감동인건지... 그 당시 나로선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물론 그 이전까지 문학 작품을 보고 울컥하거나 통렬한 감동을 느껴본 적은 있었지만, 미술 작품을 보고 그러한 종류의 감정을 느낀 적은 난생 처음이라 당황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이 생기는 걸까~



어느 누구도 인생을 한 줄로 요약되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것은 아니니까, 나라고 해서, 이 작품을 똵! 보고 그 길로 미술사로 똵! 전공을 바꿔서 그 이후로 원탁의 기사가 성배 찾듯 이 작품에 대한 열정 어린 탐구를 주욱!~ 지속적으로 했.... 이런 식으로 이어진 건 아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이 작품을 본 이후로 ‘왜 난 문학 작품이 아닌 하나의 시각 예술 작품을 보고 그토록 감동을 받았던가?’ 하는 맘으로 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었고, 이후 여차저차 결국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이 작품에 감춰진 수수께끼는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늘 맘 한 켠에 묻어두고 지냈던 것 같다. 이미 미술 교과서에서 익히 보아 알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대했을 때의 받았던 충격에 가까운 감동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었던 것이었단 말이었던가?...하는.


그러다가 몇 해 전 비로소 그 해묵은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줄 만한 아티클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quest가 지속적이고 집요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들통이 나는 순간. 그도 그럴 것이 이 글이란, 실은 저명한 미술사학자 알버트 보임의 아주 해묵은 아티클로 내가 작정하고 찾아봤다면 진작에 발견할 수 있었을 글이었으므로...)

[Albert Boime, “Jean-Léon Gérôme, Henri Rousseau’s Sleeping Gypsy and the Academic Legacy,” Art Quarterly Vol. XXXIV: No.1 (1971): pp.3-29. [http://www.albertboime.com/Articles/20.pdf 관심이 있으신 분은 한번 읽어보시길]


이 아티클에서 알버트 보임은 19세기 유명한 아카데미 화가 장-레옹 제롬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자의 출처를 추적해가는데.....

그 글을 요약하자면,

1. 우선 화가 앙리 루소는 독학파였으나, 스스로는 아카데미 풍의 화가로 생각하였고, 자신의 화풍을 화가 윌리엄 부게로나 장-레옹 제롬의 화풍과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루소는 이들의 작품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2. 제롬은 열강의 식민지 개척이 한창이던 시기, 아카데미 화가의 자격으로 그 개척단을 수행하며 그곳의 자연과 생활상을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내셔널지오그래픽지의 사진작가 정도의 역할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제롬은 사자를 실제로 보고 그릴 기회가 많았다는 것.


3.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롬은 그 광활한 사막을 돌아다니는 백수의 제왕 사자를 자신과 동일시 했을 거라는 것,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유독 사자가 많이 등장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첫째, 장-레옹 제롬은 그의 이름에 사자를 뜻하는 ‘Léon’이 들어간다. ('밀림의 왕자 레오'를 떠올려보자~) 둘째로, 자신의 성인 'Gérôme'은 유명한 성인 St. Jerome과 발음이 같다.


Jean-Léon Gérôme, Saint Jérôme, 1874, oil on canvas painting, 69 x 93 cm., Städel Museum

(기독교인들을 사자굴에 집어넣어서 사자가 잡아먹지 않으면 살려주는 벌을 행했을때,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뽑아주었더니 사자가 성 제롬을 살려주었다는 유명한 전설. 물론 제롬도 알고 있었고, 그 이야기를 주제로 그림도 그렸다.)

Jean-Léon Gérôme (1824–1904) The Two Majesties, 1883 oil on canvas; 69.22 × 128.91 cm


장-레옹 제롬의 작품에서 대부분 사자는 광활한 자연을 홀로 거닐거나 앉아서 사색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알버트 보임은 제롬이 당시 아카데미의 화가로 명성과 지위를 얻었음에도 경직된 관료주의와 주변과의 관계에서 항상 고독함을 느꼈기에 이런 그림을 그렸으리라 추측한다.

그리고, 오늘의 작품 <잠자는 집시>에서 등장하는 사자의 출처는 아마도 앙리 루소는 자신이 동일시 하던 아카데믹 화가 장-레옹 제롬의 작품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아래의 작품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라는 작품은 장-레옹 제롬이 주문을 받은 이래 상당한 공을 들여 오랜 기간에 걸쳐 제작한 작품이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사자는 동물들의 제왕으로서의 위엄은 가득하지만, 위협적 맹수의 모습은 아니다. 또, 지하굴을 아직 채 빠져나오지 않은 사자들도 피에 굶주린 맹수라기보다는 온순하고 조심스러운 고양이와도 같은 모습이다.

Jean-Léon Gérôme, 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 (1863-1883), oil on canvas 150.1 x 87.9 cm


이제 <잠자는 집시>로 돌아와 보자. 루소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자도 위협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고 호기심 많고 온순한 모습이다.
실제로 화가 루소 자신이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는 목적으로 쓴 편지에서도 그 의도를 확실히 하고 있다:

…떠돌이 흑인여성, 만다린 연주자는 물 단지를 옆에 두고 누워서,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사자는 우연히 그 곁을 지나다가 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지만, 잡아먹지는 않습니다. 달빛의 효과 탓에 매우 시적이죠. 장면은 완전히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집시는 동양 풍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루소의 <잠자는 집시>의 사자는 장-레옹 제롬의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의 사자들과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제롬의 사자 그림들의 제작 의도는 물론 루소의 <잠자는 집시>의 의미도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직접 정글 탐험은 고사하고, 사자를 본 적도 없이, 파리의 식물원을 방문하면서 그때마다 정글을 탐험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고 하는 루소와 정글과 사막 지대를 누비며 사자를 직접 보았을 장-레옹 제롬이 사자에 대해 느꼈던 감성은 일맥상통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Jean-Léon Gérôme, Solitude, 1890


위의 작품에서는 제목마저 알기 쉽게 <고독>이다. 저명한 아카데믹 화가였던 장-레옹 제롬도 때론 비평가들의 놀림을 받던 일요화가였던 앙리 루소도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외로웠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작품이 그려진 지 100년도 훨씬 넘게 세월이 흐른 후에 루소의 작품을 봤던 나는 왜 엄청난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의 경우, 그것은 아마도 ‘외로움’과 ‘안도감’의 공명이 아니었을까?

난생 처음 낯선 타국에 홀로 떨어져 생활하면서, 때때로 위험하다는 뉴욕 거리를 다니면서 불안하기도 했었던 나로서는 누워 있는 집시에게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고, 엄청난 위력을 갖추었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무방비 상태의 집시를 지켜주고 사자의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힘 쎈 사자가 나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지켜준다니! 그 이상의 든든함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광활한 사막에 홀로 놓여진 사자와 집시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외로움… 그 와중에 웃고 있는 달님과 아련한 별 빛으로 채워진 짙푸른 밤하늘로 인해 느껴지는 시상 충만한 감성...

물론 그 이후에도 수없이 MoMA를 방문해봤고, 그 때마다 첫날의 감동을 떠올리며 다시 그 작품을 봤었고, 처음 그때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은 빛이 바래갔다. 그 전시실에 들어가면 그 자리에 그 작품이 있을 것임을, 그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아마 20살 언저리 뉴욕에 있던 난 외로웠고, 그 작품을 보면서 커다란 위안을 받았고, 그 작품으로 인해 무한한 안도감을 선사 받았다는 것을.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4. 11:13 미술 이야기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오늘 티스토리 초대받아서 일단 블로그 개설.... 블로그 제목은 "물병과 사자"로, 그리고 필명은 "잠자는 집시"로.... 아는분은 아시겠지만,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에서 따온 것...보다 정확히는 그 작품의 묘사에서 따온 것.



드넓은 사막을 홀로 걷던 집시는 들고 다니던 만다린과 물병을 내려놓고, 단장은 손에 쥐고 있는 채로 지친 몸을 모래 바닥에 누이자마자 깊은 단잠에 빠져버렸다.  어디선가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사자. 맹수 중 맹수인 사자가 하지만 어쩐 일인지 집시를 발견하고서도 킁킁거리며 냄새만 맡고 있을 뿐, 집시를 날름 잡아먹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삭막하고 위험한 사막에서 불침번을 자처하며 집시를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물병과 사자'는  사막에서 집시의 생명을 지켜주는 존재.... 잠자는 집시는 유난히 아름다운 음악을 만다린으로 연주하며 행복해하는 관람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달콤한 꿈을 꾸고 있고, 그러한 사자와 집시를 너그러운 미소로 내려다보는 보름달이 높이 뜨면서 사막의 밤은 깊어져간다.         


#앙리루소 #잠자는집시 #MoMA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