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화양연화 ... In the Mood for Love
2019. 1. 13. 00:07 영화 이야기

며칠 전 지인이 앙코르와트 여행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떠올랐다. "화양연화 (花樣年華)"  영어판 제목으로는 In the Mood for Love.

사실 이 포스터가 요약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자는 남자가 다가올 여지를 주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만, 남자는 용기가 없어 다가가지 못한다. 그리고, 여자는 돌아서서 떠난다. 

유명한 영화다 보니, '화양연화'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곳에 설명이 있다. 인생에서 꽃을 피운 가장 아름다운 시절, 춘삼월과 같은 호시절이라는 해석이다. 그리고 193-40년대 상하이에서 유행했던 '화양적연화'라는 제목의 중국 노래가 영화에 삽입되기도 한다는 깨알 지식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내 생각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꽃과 같은 시절'이 의외로 '한 때'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Ambrosius Bosschaert the Elder (1573-1621), Still-Life of Flowers (1614) 

서양 회화에 빗대자면 '바니타스 회화'라고나 할까?  아름다운 꽃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지만, 다음 순간, 그 꽃의 찬란한 아름다움은 곧 스러질 것이라는 아련한 안타까움.  물론 바니타스 회화에서는 따라서 영원한 아름다움과 진리를 추구해야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하지만 말이다. 

이 영화는 냉정히 상황만 놓고 보면, '불륜'에 관한 영화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연애 영화는 아니다. 이별에 관한 영화이다.  사실 자세히 보면 어정쩡한 불륜에, 시작은 제대로 없고 이별의 끝만 있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 줄거리는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싯구에서 다 요약해주는... 스토리 자체에서는 그다지 쨍~한 것은 없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빈약한 스토리라인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이야기를 하는 방식과 섬세하고 시각적인 연출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것은 1962년 홍콩의 한 아파트.  그 곳으로 이사온 상하이 출신 주민들. 엄청 좁은 아파트에 좁은 복도. 그 사이를 부딪치지 않고 스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용하다 했는데...  거기로 이사오고 나서일까? (아님 사단이 나고 의도적으로 같은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일까?) 여하튼 사건은 불거지는데... 

공교롭게도 그 아파트에 사는 두 커플이 어느날 한 사람은 자신의 남편이,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아내가 바람을 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알고보니 크로스 불륜.  이 둘은 머리 맞대고 상담하다가 연애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줄거리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영화의 주인공, 장만옥과 양조위.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왕가위 감독이다.  

이 영화는 전체 플롯이나 스토리 전개보다는 미장센이 훨씬 돋보이는 영화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별 일 아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미술 장치나 화려하면서도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또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주인공들의 의상, 그리고 중요한 장면에서 얼굴 대신 비추는 손의 섬세한 떨림. 때로는 얼굴보다 손이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느 드레스 사이트에서는 장만옥의 드레스만 따로 스틸을 모아서 포스팅을 했을 정도로 그녀도 그녀의 드레스도 아름답다. 그리고 그 드레스와 아파트나 사무실, 그리고 홍콩 뒷골목의 벽과 잘 조화를 이룬다. 

배우자의 불륜이라는 충격적 사건 앞에서 같은 (정말 같은)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며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는 두 남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앞에서 요약본으로 다 밝힌듯 하지만, 굳이 한 번 더 밝히자면, 힌트는 '앙코르와트'

우리 나라식으로 하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다.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있으면 벽의 구멍에다 대고 이야기 하고 나서, 그 구멍을 진흙으로 막아버리는 것.  눈빛만으로 10번쯤 실연한 연기를 하는 양조위가 앙코르와트에서 하는 행동이다. 

마지막 싯구처럼 어차피 과거는 '먼지 낀 창으로 들여다볼 수 있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기만 한것.'  영어 번역에서는 'glass darkly'라는 구절이 나오는 데,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구절로 인간의 지식이 불완전 한 것을 빗대는데 사용된 구문이다.  불완전한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 그리고 찰나같은 아름다운 시절.  '화양연화'는 그런 아름답지만 짧고 허무하고, 그래서 더더욱 아련한 것에 대한 영화이다.  


물론 앙코르와트 여행 갈 친구는 그럴 일 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여행을 하고 오겠지만, 그리고 내가 그곳을 여행한다고 해도 즐거운 추억 담뿍 쌓고 올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 속에서 앙코르와트는 영원히 '화양연화'와 함께 할 것 같다.   

그리고 좁은 복도를, 홍콩의 좁은 골목을 아름다운 치파오를 입고 누비던 장만옥의 뒷모습을 슬로우비디오로 잡으면서 흘러나오던 'Yumeji's Theme'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작곡가 우메바야시 시게루 (梅林 茂)가 1991년 일본 영화 유메지 (夢二)를 위해 작곡한 곡을 '화양연화'에서 재사용한 것이라 한다. 시각적인 영화인 화양연화에 일본화가 타케히사 유메지 (竹久夢二)에 관한 영화에 사용되었던 곡을 사용했다는 것도 왠지 의미심장하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