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난 아일랜드인이야~ 모든 것이 가능해~
2019. 4. 14. 00:10 일상 이야기

난 아일랜드 인이야~

이건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게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할 때 경험했던 일이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에는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질문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한국에서 왔다는 말 해주고, 그러면 반드시 돌아오는 ‘Oh, I like Bulgogi!’ 혹은 ‘I love kimchi.’라는 뻔한 반응에 그냥 웃어주곤 했다. 물론 개중에는 자신이 잘가는 네일숍의 한국 점원들이 얼마나 자신의 손톱을 잘 손질해주는지 칭찬하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들이 내 피부색만 보고 내가 ‘외국인’일 것이라 짐작하는 것 이면에는 잠재적인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나같이 완전한 외국인일 경우에는 덜하지만, 그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교포 2,3세가 느끼기에는 더 민감한 문제이기도 했다.   

어떤 한국계 코미디언은 그걸 코미디 소재를 삼기도 했다.

누가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물으니까, ‘I’m from Chicago.’라고 하자, 그 사람이 다시 ‘NO. I mean, where are you from originally.’라고 묻는다. 그러자, 자신은 'originally'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해주며, 이번에는 그 한국계 코미디언이 그 백인 친구에게 묻는다. ‘Where are you from?’ 방금 똑같은 질문을 한국계 친구에게 했던 백인 친구는 다소 황당해하며, 자신이 어디 출신이라고 미국 도시 이름을 댄다. 그러자, 한국계 친구는 ‘NO! I mean, where are you from originally?’이라며 방금 그가 받은 질문들을 그대로 돌려준다는 내용이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자의든 타의든 아직도 정체성의 문제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흑인인 경우 대부분 ‘originally’ 아프리카 출신일 것이고, 백인들의 경우 많은 이들이 'originally' 유럽 어느 나라에서 왔을 것인데, 유독 아시아계 사람들에게만 이방인이라는 편견을 갖고 대한다는 말이다.

나는 물론 명실공히 ‘한국인’이 분명하지만, 번번히 국적을 묻고, 그 반응이 기껏해야 자신들이 다니는 음식점이나 네일숍과 연관해서 말하는 것이 좀 지겨워지면서 내 나름대로 대응하는 농담을 고안해 냈다. 누가 나한테,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물으면, 난 ‘I’m Irish. I mean black Irish.’ (난 아일랜드 사람이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럼 보통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쳐다보곤 곧 그게 농담인 것을 깨닫고는 함께 웃곤 했다.   

하루는 내가 자주 가던 카페에서 일어난 일. 

그 카페는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자주 가던 주택가 한가운데 있는 카페였다. 한국의 대학가에 있는 이쁜 카페들에 비하면 왠지 낡고 다소 지저분하기까지 하달 수 있는 카페였지만, 그 도시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제공한다고 자랑하는 곳이었고, 벽을 둘러서 놓여져 있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는 차 한잔에 꽤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아주 잔뜩 멋을 낸 공간이 아니니만큼, 그 곳은 친구 집에 놀러온 듯한 편안함을 주었고, 벽에는 학생 혹은 어린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걸려있는 갤러리를 대신해 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도 하는 예술적 감각도 지닌 그런 공간이었다. 위치가 위치인만큼 손님들로는 그 주변에 사는 주민들인 단골들이 많았고, 따라서, 맘만 먹으면 옆에 앉은 사람들과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실제로 아닌게 아니라, 그 곳의 단골들은 대부분 서로 알고 지내는 눈치였다. 나로서는 집에서는 잘 안되는 숙제나 번역을 하러 가는 곳이어서 그다지 옆의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내가 펼쳐든 '그림책'을 보고 '오~ 정말 아름다운 그림이네요. 누구 작품이에요?' 혹은 '미술을 공부하나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서 간단한 대꾸를 해주며 예의바르게 '난 지금 바쁘다'는 사인을 보내곤 할 정도.) 

하루는 공부를 하려고 그 카페에 갔는데 마땅히 자리가 없어서 집에 다시 가야하나 망설이던 중에, 조금 큰 테이블을 혼자 차지한 사람이 있길래, 그에게 내가 합석을 좀 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흔쾌히 자기 자리를 좁혀주면서 그러라고 했다. 왠지 개인적 공간을 침범한 게 미안하기도 하고, 또 그 자리를 내 준게 고맙기도 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사람이 나보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묻길래, 내가 예의 ‘아일랜드 사람이야’ 그랬더니, 그 사람은 ‘아~’ 그러면서 납득하는 듯한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오히려 좀 당황해서 ‘이 타이밍에 니가 웃었어야 한다’라고 했더니, 그 남자애는 ‘자기 절친 중 하나가 원래 한국 사람인데 입양이 되어서 국적이 아이리쉬’라고 했다. 아~ 그럴 수 도 있구나. 

미국을 ‘용광로 (melting pot)’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후론 내 ‘아이리쉬’ 농담은 한동안 봉인해두었다는 전설이… 

한국에서는 자리값 비싼 카페에 공부를 하러가서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던데, 나로선 ‘고독’은 좋으나 ‘고립’은 싫은 그 심정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금방 비판을 못하겠다. 물론 한국에선 땅값도 인권비도 유명 카페의 권리금 같은 것도 내가 가던 그 카페에 비할바 아니게 비쌀테니 한국에서의 상황은 미국의 그것과는 엄청나게 다르겠지만 말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