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보라색 혹은 자주색의 역사
2019. 7. 8. 19:54 미술 이야기

의도한 것은 아닌데, 어제 파랑색에 관한 글을 쓰다가 자유연상 작용으로 오늘 보라색에 대해서도 쓰게 되었다.  어제 파랑색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색상이라고 밝힌 바가 있고, 나도 파랑색을 좋아한다고 썼지만,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은 보라색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밝고 청아한 보라색보다는 좀더 붉은기와 검은톤이 도는 버건디나 머룬 같은 자주색을 가장 좋아하지만 말이다.  무엇인가 색을 골라야하고, 버건디나 머룬이 없으면 바이올렛 색이라도 고른다.  보라색은 다 좋다.  색상 때문은 아니지만 심지어 '마룬 5'라는 그룹도 좋아한다.  (옛날엔 노래방에서 가수 강수지 씨의 '보랏빛 향기'를 즐겨부르기도...하하하 전혀 안어울리는 분위기이긴 하다.)   예전에 내가 '보라색' 좋아한다고 하면, 으레 '보라색 좋아하는 사람은 천재 아님 정신이상자'라던데...라며 내가 어느쪽에 속하는지를 파악하려고 실눈을 뜨면서 나의 정신상태를 가늠해보려는 사람들이 좀 많았는데.  난 천재도 아니지만, 딱히 현재 한국사회 기준으로 봤을 때, '정신이상자'인거 같지는 않으니 그런 설은 맞지 않는걸로.  하지만, 보라색과 함께 연상되는 것은 상반되는 것이 많긴 하다. 

유럽과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자면, '보라색' 혹은 '자주색'에 해당하는 purple은 왕실이나 신성성 등 귀중한 것, 희소성이 있는 것으로 연상된다. 때로는 마법이나 미스테리와 같은 신비로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보라색이 분홍분홍 분홍색과 함께 등장하면 우~ 에로티시즘, 여성성, 그리고 유혹적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보라색, 조금 더 세부적으로는 자주색의 보편적 이미지가 왕실을 연상시키는 데에는 서양에서는 역사적 유래가 깊다. 비잔틴과 신성로마제국을 통틀어 통치자들이 입는 의상의 색상이자 로마 카톨릭의 교주들의 의상의 색상이기도 했다. 유사하게 일본에서도 자주색은 왕과 귀족들을 연상시키는 색상이기도 하다. 

Ravenna의 San Vitale 성당의 모자이크 세부 -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겉옷이 원래는 자주색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1세와 그의 시종들 모자이크,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 Justinian I in the Basilica of San Vitale, Ravenna. consecrated 547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부인인 황녀 테오도라와 시종들의 모자이크,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 Mosaic of Empress Theodora and attendants in Basilica of San Vitale in Ravenna Italy.

왜 그러면 보라색은 왕실 전용의 색상이 되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 염료의 색상을 만들기가 어렵고 따라서 가격이 무지무지 비쌌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왕족이 아니면서 자주색 옷을 함부로 입었다가는 대역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았다고도 하니 요새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 싶다.

영국을 너무 사랑하여 영국과 결혼하느라 처녀 여왕으로 지냈다고 칭송받는 대영제국을 이끈 엘리자베스 여왕은 사실은 '나보다 예쁜 애들 다 꺼져!'라는 정책을 펴신걸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자신만 화려한 옷을 입고, 다른 여인들은 모두 수수한 색상의 옷만을 입게 했다고 한다.  이 당시에도 보라색을 함부로 입었다간 아주 큰 벌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Queen Elizabeth in Tyrian Purple (mollusk)

 

1998년의 영국 영화 <엘리자베스 1세>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분한 케이트 블랑쳇.  짙은 보라색의 복장을 차려 입은 배우의 모습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보라색이 너무 잘어울리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왕족이라서 그런건가?

알고보면 이 보라색은 뿔조개에서 채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조개 하나에서 정말 개미 눈물만큼 밖에 얻을 수 없었고 채취방법도 까다롭기에 엄청난 노동량이 필요했다고. 그러니 염료의 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었다고. 요새도 해안가에 이 조개껍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곳도 있다하니, 이 조개로서는 체액의 색상이 인간들 눈에 이뻐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대량학살을 당해왔던 셈이다.  

Bolinus brandaris 라는 어려운 이름의 이 뿔소라는 자주색 염료를 채취하는데 주로 사용했던 관계로 purple dye murex 혹은 the spiny dye-murex라고 불린다. 
뿔소라를 각각 다른 각도에서 찍은 모습

이에 비해 멕시코 인들도 이 뿔소라의 염료를 이용해서 자주색을 채취했지만, 죽이는 대신 뿔소라를 염색하고 싶은 천 위에다 놓고 소라들에게 바람을 쐬는 방식을 택했다 한다. 그렇게 바람을 불어넣어 주면 이 소라들이 스스로 체액을 짜내고, 그 체액이 점차 천에 스며들며 자연스레 염색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염색이 완전히 끝나면 멕시코인들은 이 소라들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주고, 산란기에는 이러한 행위조차 금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 뿔소라가 멸종하는 일은 면했다고 하는데, 고대 멕시코인들은 참으로 지혜롭게 자연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태양신을 믿어서 인간제물의 피를 태양에게 바치느라 살아있는 인간의 심장을 꺼내서 제사 지낸 것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긴 하지만 말이다) 

p.s. 자연에서 보라색을 추출하는 방법은 그밖에서 식물들에서 얻는 방법도 있다. 우리가 떠올리는 슈퍼푸드들 - 블루베리, 블랙베리, 라즈베리 등의 각종 딸기들과 나무 껍질이나 체리나무의 뿌리등에서도 추출할 수 있다고 한다. 자연 속의 색상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새삼 깨닫게 된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