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하면 머릿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혹자는 붉은 장미꽃, 혹자는 아름다운 여인의 붉은 입술, 많은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있겠지만, 의외로 빨간색은 내가 좋아하는 자주색과 연관이 깊다. 그도 그럴것이 보라색 혹은 자주색은 빨강과 파랑의 혼색이기 때문이다. 빨간색 역시 내가 좋아하는 색상인데 (생각해보니 나는 싫어하는 색이 그닥 없는거 같네) 빨강과 자주가 절묘하게 혼합된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무제'라는 제목에 이어 괄호 안에 (파랑위에 빨강과 버건디)라는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색상들이 다 모여 있어서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캔버스가 아닌 종이위에 그려진 유채라서 그런지 표면의 질감이랄까 마티에르감이 그의 다른 작품과는 좀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몇 년전 경매에도 나왔던 이 작품 이외에도 로스코의 작품은 붉은 색이 많다. 작가의 생존시에도 엄밀히 비밀을 엄수했기에, 아직도 정확한 작법이 밝혀지지 않은 로스코의 작품은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각형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톤이 다양한 붉은 색이 어우러진 그의 작품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닌게 아니라 물 속에 잠겨 있는 색면이 물결의 움직임에 따라 일렁거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신의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한 관람자라면, 작품 앞에서 통곡을 할 것이라 작가는 말했다고 하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통곡'까지는 아니라도 왠지모를 울컥함을 느꼈다는 사람은 가끔 볼 수 있고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고백해두는 바이다. 빨간색 색조가 주를 이루는 그의 작품은 초기의 작품에 많고, 이후 그의 작품은 점점 더 어두워진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1970년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파랑색이 더 강해지면서 밤하늘 같은 푸른색이나 머룬 색, 어두운 갈색을 거쳐서 점점 검은색에 가까워지게 된다.
마크 로스코도 빨강의 변주곡을 훌륭하게 보여주는 작가이긴 하지만, 미술사를 통틀어 빨강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는 뭐니뭐니 해도 앙리 마티스라고 할 것이다. 그의 1911년 작품 <붉은 스튜디오>는 야수파의 리더이자, 색채를 해방시킨 화가로 칭송받는 화가인 마티스가 얼마나 자유자재로 색상을 다루는지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자연의 재현'이라는 굴레에 묶여 있던 회화에서는 사물에는 으레 정해진 '색'이 있었다. 하지만, 마티스가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얼굴 한가운데 녹색 선을 과감하게 그어버림으로써 작품 별명을 녹색 선 (Green Stripe)라고 불리게 만든 이후, 화가들은 더이상 일대일 식의 정해진 색상의 규범에 얽매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마티스의 공로는 실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날 초등학생이 나무나 산을 빨갛게 색칠하고 있는 것을 본 선생님은 어린 학생에게 조용히 빨간색 크레파스 대신 초록색 크레파스를 쥐어줄지도 모르고, 아니면 학생의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요새 아이한테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볼 지도 모를 일이다.
[인터넷 상의 해상도와 색조가 제각각이라 마티스의 진짜 빨간색이 무엇인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MoMA의 이미지를 참고해보고 싶으면 여기를 클릭!]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 붉은 색이라면, 예전 댈러스의 유명한 콜렉터 라초프스키 (Rachofsky)의 개인 미술관인 라초프스키 하우스(The Rachofsky House)에서 본 마크 퀸 (Marc Quinn)의 <자신 (Self)>이라는 작품이다. 방 한켠에 투명한 플랙시 글래스 안에 들어가 있는 냉동 두상은 작가 마크 퀸이 자신의 얼굴 모양의 본을 뜬 뒤에, 조금씩 수혈한 자신의 피 5.6리터를 모아 액상 실리콘을 혼합해서 얼려 만든 작품이다. 냉동장치에 연결되어 얼어있는 상태로 보존된 이 작품은 둘러쌓인 공간의 흰색 벽과 대조되어 강렬한 인상이었는데, 그곳을 안내해주던 그곳의 큐레이터가 전해주는 에피소드 때문에 더더욱 내 머리 속에 각인되는 결과가 되었다. 말인 즉슨, 그 뜨거운 텍사스의 기후 속에서 냉동장치가 고장이 난 적이 있어서 한번은 그 작품이 폭발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 피가 흰벽의 방 사방에 튀어서 그것을 청소하는 데도 힘들었고, 이후 작가가 다시 수혈을 거쳐 작품을 다시 만들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왜 그런 작품을 만드는지, 또 왜 그런 작품을 수집하는지 이해불능이겠지만, 자신의 모습을 가감없이 본을 떠서 그 속에 한 사람의 몸 속에 존재한다는 피의 양을 사용해서 만드는 두상은 현대판 '바니타스 정물화'인지도 모른다.
동굴 속에서 살던 석기인들은 돌에서 추출한 황토색인 '오커(ochre)'를 사용했고, 이후 진사 혹은 주사라고 부르는 시나바 (cinnabar)라는 광물에서 붉은 색을 추출하였다. 이 시나바를 분쇄한 것을 버밀리언 (Vermilion)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이 밖에도 금과 은 다음으로 비쌌다는 카마인 (Carmine)은 특이하게도 콩처럼 생긴 벌레,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충 혹은 코치닐 (Cochineal bug)을 분쇄하여 제조했다고. 마티스가 주로 사용한 붉은 색은 화학적으로 합성한 색상으로 카드민 레드 (Cadmine Red)로 전통적인 버밀리언을 대체하기 위해 고안된 색이다. 붉은 색을 많이 사용한 로스코의 경우 리솔 (Lithol)이라는 안료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 안료의 경우 결정적으로 빛에 약한게 문제. 로스코 채플에서 천정에 난 창을 통해 자연스런 자연광이 작품에 비추도록 하려던 계획을 변경해 가림막을 설치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색의 역사를 훑다보면 오늘날 만큼 생활 속에 다양한 색이 풍요롭게 존재하는 시기도 드물었던 것 같다. 쪼꼬마한 벌레들을 직접 잡아 으깨서 빨간색을 구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붉은 색의 옷이나 구두를 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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