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개같은 내 인생...그리고 라이카
2018. 9. 30. 01:13 영화 이야기

한동안 누군가 내게 가장 감명깊게 본 영화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 대답은 항상 '개같은 내 인생 (My Life as a Dog)'이었다. 

주인공인 잉게말이 자신보다 불행했을 우주선을 탄 강아지 라이카를 떠올리며 애써 자신의 처지를 위안삼고 있다.

영화의 내용을 모르고 들으면 조직이 등장하는 다소 거친 영화인가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1959년 스웨덴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하는 서정성 뿜뿜 돋는 내용의 영화이다. 이 영화를 만든 라세 할스트룀 (Lasse Hallström) 감독의 대표작으로는 길버트 그레이프, 쇼콜라 등이 있고, 다들 유명한 영화지만,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좋았다.  레오나르도 드 카프리오 오빠 (잘 생기면 다 오빠)가 나오는 길버트 그레이프를, (내입장에서 보자면) 무명인 스웨덴의 아역 배우가 이긴 셈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영화는 Reidar Jönsson이라는 작가의 같은 제목의 자전적 소설 (1983년작)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어쩐지... 사소한 스토리에 생활적 디테일이 있더라니...]

소위 '성장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 사는 잉게말이라는 소년의 성장기를 그의 시선에 따라 바라본 영화이다. 잉게말에겐 자신만큼이나 장난꾸러기인 형이 있어 이 둘이 매일 합이 1+1=3인 강도의, 살아있는게 다행일 정도의 사고를 치며, 열심히 성장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결핵을 앓던 엄마의 병이 깊어지면서, 부득이 엄마가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형과 잉게말 각각 다른 친척집으로 가게 되는데, 잉게말은 순박하고 착하나 결코 어른스럽다고 보기는 힘든 삼촌에게 맡겨지게 되면서 영화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삼촌이 살던 동네로 와서도 잉게말은 장난꾸러기 소년이 칠 수 있을 만한 크고 작은 장난과 사고를 치고, 엄마 없는 소년이 겪을 만한 외로움을 겪으며, 처음엔 낯설어서 텃세를 당하던 동네 꼬마들과 하나둘 친해져 가며, 때론 대책 없는 어른들의 행동들을 지켜 봐가며, 어느새 동네의 이쁜 소녀에게 신경을 더 쓰게 되는 사춘기로 접어 들어간다는 얘기이다. 

영화 첫 장면 잉게말의 독백으로 이런 대목이 나온다. 뜬금없이 '라이카는 어땠을까? 사람들이 우주선에 자기를 태웠을 때.  내가 봤을 때엔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어. 걘 먹이통이 비워질 때까지 우주를 뱅글뱅글 돌아다녀야 했다구. 그리곤 굶어 죽었지. 거기에 비하면, 나는 괜찮아....'  이런 생각을 하며 잉게말은 자신이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강아지나 엄마와 형과 떨어져 낯선 동네로 가서 지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소련이 우주로 쏘아 올린 1957년의 우주선 스푸트니크 호에 실험용으로 실린 강아지 라이카 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삼는다.  

삼촌네 헛간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라이카를 생각하는 잉게말. 작은 헛간에 난 좁은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잉게말의 모습은 묘하게 작은 우주선에 실렸을 라이카의 처지와 오버랩된다. 

12살의 소년이라 주변의 사람들 뿐 아니라 엄마에게도 자신의 풍부한 감수성을 이해 받기 힘든 소년(그걸 이해 받기에 그가 치는 사고의 강도가 대부분 너무 높다)은 그렇게 외로운 밤 엄마 생각이 나거나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외롭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라이카를 떠올리며 자신의 처지가 낫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영화 내내, 자신보다 더 불운했을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거리곤 한다. 이를테면, 지름길로 가려던 어떤 사람이 창던지기 대회를 하는 경기장을 지나게 되어 운 나쁘게 창에 맞아 죽는 이야기. 그 사람보다는 자신의 처지가 낫다, 뭐 이런 식이다.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그 모양새가 너무나도 아이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또래 소년으로서는 할 수 있는 한껏 어른스러워서 짠하면서도 감동스럽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 작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스웨덴 선수인 잉게말 요한슨과 미국의 플로이드 패터슨간의 권투 경기의 라디오 중계에 귀기울이고 있다. 이 장면은 우리의 주인공 잉게말과 선머슴같은 귀여운 소녀 샤가와의 권투 경기와 오버랩된다.  온 마을에 터지는 함성으로 보아 잉게말 선수가 승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어느새 잉게말과 샤가는 소파 위에서 새근새근 낮잠을 자고 있는 장면을 비추곤 줌아웃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권투선수와 주인공 잉게말의 이름이 같은것, 그리고 둘다 권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쟤가 커서 권투선수가 될려나 했는데, 소설가의 자전적 소설이므로 그건 아닌걸로...)       

1959년의 스웨덴이 배경인 관계로 문화적, 시대적 차이로 이해못할 정서도 없잖아 있었지만, 감수성 풍부한 소년이 몰이해 속의 세상을 자기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며 한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자리했었다. 

그러다, 최근에 좀 충격적인 뉴스를 봤다. 무인 우주선을 쏘아보내면서, 떠돌이 강아지 라이카를 무려 3년이나 훈련시켜 스푸트니크 호에 태웠다는 것은 이 기사로 처음 알았다. 무려 3년이나!  그리고, 그 우주선은 어차피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일주일치의 사료를 다먹고 나면 라이카는 어차피 굶어죽을 운명이었다는 것도 처음 생각이 미쳤다. (지금 생각해보니, 잉게말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라이카를 떠올리며 자신의 불행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 라이카가 우주선을 쏘아 올린지 불과 다섯 시간 만에 압력과 온도 차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일주일치의 사료도 다 먹지 못하고... 일주일 후에 죽으나 발사 후 다섯시간 후에 죽으나, 그게 무슨 차이냐 싶기도 하고, 또 그렇게 일주일동안의 비행이면 끝날 인생, 아니 견생인데, 3년의 고된 훈련은 또 웬 말이냐 싶기도 하고... 허탈하고 무의미하고.... 슬프고 잔혹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도 결국은 그런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만약 일주일 후의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미래를 알거나, 내 인생의 끝을 알고 있다면 오늘의 인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  

'라이카의 진실'이라는 뉴스를 접하고 갑자기 생각나서 적어봤다. '개같은 내 인생'에 대해서...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