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시작한 '색에 대한 이야기'의 네번째 시리즈 (?) [시리즈가 될지 안될지 모르지만, 네번째니까 나름 시리즈]
봄에 돋아오르는 새싹과 새순들만큼 가슴설레게 하는게 또 있을까? ['신록'이라는 단어를 썼더니, 학생들이 '연륜이 묻어나온다'며 꺄르르꺄르르] (정녕 너희들은 피천득 선생님을 모른단 말이냐!) 난 보라색 계열 중에는 검정색이 섞인 짙은 자주색 계열을 더 좋아하지만, 초록은 아주 쨍하고 선명한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자연속에서 발견하는 '신록'은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지만 말이다.
물감으로 만드는 초록색이야 파랑과 노랑색을 섞으면 된다는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이면 다 알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초록색에 대해서 좀 조사를 하다보니, 의외로 초록색은 화학과정에서 생산된 것이 많아서 놀랐다. 뿐 만 아니다. 초록색은 단순히 화학과정으로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화학 염료 중에서는 유독성이 가장 높은 색이라는 것이다. 영어로도 'green'은 “to grow”라는 의미의 동사“growan”에서 나온 단어일 뿐 아니라, '초록'하면 제일 먼저 딱 떠오르는 것이 나뭇잎이라 생명력과 자연과 관련이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19세기 말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과 파리지엥들이 사랑해마지 않았던 술 압생트, 이후 독성이 강해서 유통이 금지되었던 술의 색깔도 초록색이었다!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읽은 패션 관련 잡지에서 원래 패션계에서는 초록색을 금기로 여긴다는 글을 읽고 좀 의아했었던 기억이 났다. 어떤 배우가 행사장에서 초록색 드레스로 등장한 것을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치부하면서 말이다. 최근 패션 관련 기사에서도 '금기에서 유행색이 된 초록색'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초록을 패션에서 금기한 역사가 깊은 모양이다.
관련기사: Fashion’s most feared colour – how green went from taboo to trendy
그 잡지의 기사에 따르면, 패션 잡지에서 녹색을 꺼려하는 이유는 인쇄 기법 (CMYK printing)과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녹색을 금기시하는데에는 더 깊은 역사가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초록색을 처음 쓴 것은 고대 이집트인들로, 그들은 공작석 (Malachite)에서 녹색 염료를 추출해서 사용했다. 그들은 오시리스 신을 그릴때 얼굴을 초록색으로 그렸는데, '위대한 초록 (Great Green)'이라 불렀다 한다. 하지만 이들의 초록에 대한 인상은 이후 서구에 이어지지 않았던 듯 하다.
공작석은 르네상스 시대에도 계속해서 초록색의 염료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그 예가 페루지노가 사용한 <예수 탄생>(1503)에서의 목자의 셔츠에 사용된 초록색이다. 물론 뒤쪽 벽에도 톤이 다른 녹색이 사용되어 있다. 이후로도 초록은 오늘처럼 염료가 다양하지 않던 시절에 즐겨 사용되던 색상 중에 하나였다. 이는 19세기 말, 자연에서 모티브를 주로 따오던 아르누보의 예술 작품들 속에서도 계속 되었다. 초록은 자주 사용되었고, 이 경우엔 자연을 연상시키기 위해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초록색과 연상되는 것들이 그다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에서 악마는 초록색이었다. 일견 안정되고 안전한 것과 같은 색으로 위장하고 있는 악마는 우리가 악의 유혹에 쉽사리 빠질 수 있다는 것에서 생겨난 연상일까? 성인의 로브가 붉은색인 것에 선명하게 대비되는 악마의 초록색 피부가 인상적이다. 만약 이것이 동양에서 그려진 것이라면 성인이 초록색의 의상이고, 악마의 피부색이 붉은 색이 아닐까? (어릴적 내가 본 동화책 속에서 머리에 뿔이 나고 뾰족한 이를 가진 도깨비는 죄다 빨강색이었다.) 직접적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동양에서 나무와 숲, 산은 사색의 공간이자 도인의 거처이자 세속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공간으로 여겨졌지만, 서구의 숲은 마녀가 사는 위험한 공간이었다는 점에서도 서양인들의 사고 방식 안에서 초록색은 위험하고 악한 것이라는 연상이 자라왔나보다. 이러한 녹색 공포와 악몽은 18세기에 접어들면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화된다.
1775년 스웨덴의 화학자 칼 빌렘 쉴르 Carl Wilhelm Scheele가 초록색의 염료를 발명하게 되고, 이를 '쉴즈 그린 (Scheele's Green)'이라 불렸다. 저렴하여 빅토리안 시대 널리 사용되었던 이 밝고 아름다운 초록색의 염료가 비소를 다량 함유하여 치명적 독성이 있었다. 일설에는 이 염료를 이용해 만든 녹색 벽지가 나폴레옹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하고, 녹색을 즐겨 입던 지체 높으신 공작 부인이 피부염을 앓았다는 기록도 있다.
일견 생명과 자연을 연상시키는 색이 실은 치명적 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치명적 매력을 가지고 있으나 결국 유혹에 빠진 남성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진다. 독소를 함유한 섬유, 그리고 그로 인해 연상되는 팜므 파탈. 이 때문일까? 소위 하이패션계에서는 매년 다양한 색상으로 새로운 유행색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초록색은 암암리에 오래도록 금기색이 되어왔었던 것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키르케 인디비오사> (1892)의 경우, 마녀의 대명사인 키르케가 동굴 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며 물에 독을 섞는 모습을 매혹적으로 그리고 있다. 낭만주의적 성향의 라파엘전파의 경우 유난히 팜므 파탈의 이미지가 많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가 그린 프로세르피네는 대지의 여신의 딸로 너무 예뻐서 지하의 신이자 죽음의 신인 하데스에게 납치되었고, 그곳에서 석류알 4알 먹는 바람에 거기서 풀려나서도 일년에 4개월은 저승에서 머물러야했다. 팜므 파탈은 아니지만, 죽음의 세계와 깊은 연관이 있던 그녀가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건 당연해보인다. 예전에 초록색의 의미에 대해서 깊은 생각없이, 혹은 동양적 관념의 초록만 알고 작품을 봤을 때엔 존 에버렛 밀레의 <오필리어>(1851)는 오필리어의 죽음과 생명력 넘치는 자연과의 대조미로만 파악했었는데, 초록의 의미를 음미하며 감상하니, 그 초록색들 울창한 수풀이 죽음의 향기를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쉴즈 그린의 대체물로 만들어진 패리스 그린 (Paris Green) 혹은 에메랄드 그린 (Emerald Green)도 독성을 갖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네가 노년에 실명을 하게 된 것, 세잔이 심한 당뇨를 앓게 된 이유가 이 초록색을 즐겨 사용했던 것이 원인이라고 하니 말이다. 패리스 그린 혹은 에메랄드 그린...예술적일 것 같은 이쁜 이름에 걸맞지 않게 독성을 갖고 있었다니. 무엇보다 초록색 염료가 거의 예외없이 독성을 가지고 있었다니... 무서운 색이다.
물론 최근에는 더이상 그런 독성을 지닌 염료를 사용해서 초록색을 만들지도 않을 뿐더러,점차 환경문제까지 더해져서 초록색이 환영받게 되었고, 패션계에서도 유행색이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리라.
컴퓨터의 해상도가 어디까지 협조를 해줄지 모르지만, 참고로 몇 가지 초록색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나의 경우, 이번 봄에 에메럴드 그린의 얇은 트렌치코트를 사서 초록을 만끽하며 봄을 보냈는데, 모를때엔 '신록'을 떠올리며 신나하며 입고 다녔건만, 녹색에 대해서 좀 알다보니 여러가지 상상의 나래를 펴며 생각이 복잡해진다. (흠...그렇지만, 난 녹색 코트 '놓치지 않을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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