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전염병의 공포와 미술 - 코로나 19의 사태에 즈음하여
2020. 3. 12. 02:33 미술 이야기

요새 우한 폐렴 혹은 코로나 19, Covid 19 등으로 알려진 전염병으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지난 수년 몇 차례 전염병이 유행하긴 했었고, 이번의 전염병은치사율로 치면 그렇게까지 높은 편은 아니지만, 일단 이 병의 잠복기가 길고 무증상 보유자가 많은데다가, 실제로 사망자 수가 이전의 전염병에 비해 훨씬 많다보니 체감적으로는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새롭게 발병한 병이다보니, 이 질병의 후유증에 대해서도 정확한 정보가 없고, 이 전염병에 해당하는 백신도 아직 없는 상태이다 보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방편으로 내 스케줄이 상당부분 조정되어 내 생활에 직접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치다보니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이전의 전염병에 비해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신경쓰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한동안은 실제로 일어나는 생활 속의 변화와 쏟아지는 뉴스로 정신이 없었는데, 그 기간이 좀 지나고 나서 진정도 되고, 이탈리아에서의 감염율이 높다는 소식까지 접하게 되면서, 21세기 의학과 정보가 이렇게 발달한 사회에 사는 나도 이러한데, 예전 유럽에서 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절망감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동유럽에서는 6세기경 한차례 유행해서 인구의 절반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흑사병 혹은 페스트는, 1346년~1353년 사이 서유럽에서 번지면서 삽시간에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기록에 따르면, 14세기의 이 질병은 이 당시 유럽 전 인구의 1/3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50% 이상의 인구 감소가 일어났다는 기록도 있다고).  쥐들에 의해 병균이 옮는다고 알려진 페스트가 창궐하게 된데는 당시 사회의 불결한 위생상태도 한 몫했을 것이고 부족한 의학 지식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페스트는 전염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밤 중에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장례를 치르러 간 친구 2명과 임종을 지키러 간 신부님이 그 다음날 죽음에 이르렀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이다.  

무력한 상태에서 전염병이 창궐한 사회에서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감이 어떠했을까?   21세기, 중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위생상태와 의료기술이 갖춰진 상태에서 치사율이 그리 높지 않다고 하는 전염병에도 나라가 들썩거리는 것을 보니, 그때의 사람들이 겪었을 공포와 불안감은 가히 짐작하기도 힘들다.  언제 다가올지 모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고안해낸 방식은 다소 놀랍게도 죽음과 마주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자주 대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Michael Wolgemut , The Dance of Death (1493) from the Nuremberg Chronicle of Hartmann Schedel   '죽음의 무도회'를 묘사한 초기의 작품 중 하나.  죽음은 어디에도 존재한다는 개념의 알레고리적 표현한 작품. 해골의 모습으로 나타난 죽음은 모두 춤을 추며 하나가 된다. 해골로 표현되긴 했지만, 음울한 분위기 대신 마치 축제와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어차피 어디서건 어느 누구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과 함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탄생한 장르가 바로 '죽음의 무도회'라고 생각한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기근과 연이은 전쟁, 거기다 결정적으로 흑사병의 창궐 등, 죽음에 대한 불가피성과 공포 때문에 탄생한 장르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죽음의 무도회 (The Danse Macabre)'이다.   '죽음의 무도회'는 죽음의 보편성에 대한 알레고리로 중세 후기때부터 제작되었던 미술의 한 장르이다. 해골의 모습으로 나타난 죽음은 모두 춤을 추며 하나가 된다. 해골로 표현되긴 했지만, 음울한 분위기 대신 마치 축제와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어차피 어디서건 어느 누구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과 함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탄생한 장르가 바로 '죽음의 무도회'라고 생각한다.  

Bernt Notke (1440-1509), The Danse Macabre (1475/1499), oil on canvas ; 160 x 750 cm, Art Museum of Estonia Church , Tallinn. 15세기의 '죽음의 무도회' 작품. 아무리 지위가 높고 고귀한 인간이라고 해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교황, 귀족들이 해골로 표현된 죽음의 손에 이끌려 가고 있다. 
Bernt Notke , Lübecker Totentanz (around 1463) 뤼벡 (Lübeck) 의 ‘ 죽음의 무도회 ’ (‘ 죽음의 무도회 ’ 중에서는 가장 대표적 작품이었으나 1942 년 공습 중 파괴됨 ) 

 

'죽음의 무도회' 작품에는 따라서 여러 계급의 인간들이 등장하고, 계급과 위계를 중시하던 봉건주의 기독교 사회였던 만큼 죽는데 순서가 있을리 없고 그렇노라 이야기하면서도 그림 속의 인물들은 계급순으로 손에 손을 마주한채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인간 군상의 행렬을 이끄는 이는 바로 '죽음'이다. 베른트 노트케의 '죽음의 무도회' (독일의 뤼벡 소재)는 최초의 작품은 아니지만, 이후 같은 주제의 작품의 전형이 된 작품인데, 당시 유행했던 흑사병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작품은 프랑스의 La Chaise-Dieu Abbey에 소재] 뤼벡의 성당에 걸려있었는데, 이 성당은 고해성사를 위한 고해소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한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고해성사를 하러 오는 인간들을 연상시키는데, 아울러 그들의 유한한 인생을 되새기게 해준다. 이러한 주제는 'memento mori'와도 연결되는데 이는 '(네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인간의 유한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채용된 미술의 주제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전에 포스팅을 했던 '바니타스 정물화'를 참고하시라)  기독교적인 주제로 지상의 삶의 유한성과 대비되는 영적인 삶의 무한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1842년 브로셔에서 발췌한 세부: the St. Marien Church (독일의 뤼벡 Lübeck 소재)의 ‘죽음의 무도회'장면의 세부 묘사 (Anton Wortmann의 1701년 복사본)  등장인물들은 사회적 지위의 순으로 등장하고 있다. 차례대로 교황, 황제와 황후, 추기경과 왕 주교, 공작, 수도원장, 기사 카르투지오 수도사, 귀족, 수사 신부, 시장, 의사, 고리대금업자, 사제, 상인, 집달관, 교회 행정관, 장인 청년 소녀, 요람속 아기가 있다. 

오늘날 '죽음의 무도회'라는 장르의 작품이 그려진다면 어떻게 그려질까? 모르긴 몰라도 신형 코로나 19를 표현하려면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등장할 수도 있겠다 싶다. (참고로, 15세기 작품에서 맨 마지막에 요람 속의 아기가 등장하는 것은 아직 '어린이'라는 개념이 없는 시절, 아기나 어린이는 온전히 한사람으로서의 일을 해내지 못하는 부족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라 한다.)   

처음 며칠동안은 무척이나 갑갑하고 불편했는데, 아예 3월의 일정이 다 정리되고 나니, 너무 조급하게 굴지말자 여기게 되었다. 차라리 호흡을 길게 가지자 맘을 먹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상을 나름 알차게 보내자 생각하게 된다.  영화 '개같은 인생'에서 주인공 소년 잉게말이 우주로 쏘아 올려진 '라이카'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안했듯이, 15세기 흑사병이 전유럽을 휩쓸었을 때 사람들이 느꼈던 절망과 공포를 떠올리며 지금의 상황을 끌어안으려 한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