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작년에 쓴 글로 2016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들 중 "믹스 라이스"라는 팀에 관한 것이다. 기존에 알고 있는 회화나 조각, 심지어 설치미술이나 비디오 아트가 아닌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팀'의 작품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글이다.
하지만, 대략이라도 현대미술이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가끔씩 아주~현대적 미술에 대해서도 쓸까 생각중인데, 이 글이 그 첫 포문을 여는 글이 되겠다.
이하는 작년의 글을 그대로 옮기는 식으로~~
믹스라이스 – 올해의 작가상 2016 수상 작가의 ‘장소’, ‘주거’에 대한 고찰
작년 8월부터 올해 2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올해의 작가상》전에는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영상 등 다채로운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 4팀 – 김을, 백승우, 함경아, 믹스라이스 – 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올해의 작가상 2016》전( 2016.08.31 - 2017.02.19)
전시 소개에 관해서는 여기를 참조
그 《올해의 작가상》전이라는 전시회는 원류를 따져 올라가보면,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대표적인 전시로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던 《올해의 작가》전을 모태로 하고 있다. 이를 국립현대미술관이 SBS 문화재단의 협력을 통해, 2012년부터 독창성과 역량을 갖춘 작가들을 후원하는 수상제도로 변경하여 운영하고 있다. 어느덧 올해로 5회째를 맞은 《올해의 작가상》전은 재능있는 작가들의 발굴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발전을 모색해가면서 이제는 대한민국의 대표 수상제도로 제대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위치의 《올해의 작가상》에서는 1차 심사를 통과한, 위에 언급한 4팀의 작가들 중, 2016년 10월 2차 심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2016년의 수상자로 “믹스라이스”를 선정하였다. “믹스 라이스”는 조지은과 양철모라는 두명의 작가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으로 지난 15년 동안 한국사회의 이주노동자와 재개발에 대한 이슈를 지속적으로 다루어 왔다.
1. 그룹 명칭에 대한 고찰; 믹스라이스 (Mixrice), mixed rice 혹은 Mix Rice!
먼저 “믹스라이스”라는 그룹명을 먼저 살펴보자. 잡지 <미술세계>의 2016년 11월호에 실린 작가 양철모의 인터뷰에 따르면, ‘믹스라이스’는 ‘비빔밥’이라는 ‘콩글리쉬’라고 밝혔다. 그리고 아시아가 “쌀 문화권”이라서 이러한 용어를 사용했음을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2002년부터 이미 프로젝트 팀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던 조지은 작가에 이어, 2003년 자신도 가담하며 공동작업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팀의 명칭에 대한 양철모 작가의 의견을 십분 존중하더라도, 애시당초 정확히 어떠한 의도로 프로젝트 팀 명을 정했는지,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정한 명칭에 내포되었을 다양한 의미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만약 ‘비빔밥’이라는 정확하고도 단일한 의미를 전달하기를 원했다면 ‘믹스라이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의견을 빌자면, 우리의 단어 선택은 우리의 잠재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만이 중요한게 아니라 관객이 그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도 중요하고 작품의 의미에 포함된다는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프로젝트 팀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왜 ‘믹스라이스’인가?
첫째, 그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두 작가가 초기 작품 활동에서 주력했던 이주노동자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빵과 밥이라는 이분법으로 생각해 보자면, 확실히 쌀은, 작가의 말맞다나, 아시아 문화권을 대유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믹스라이스’라는 그룹명이 영어도 한국어도 아니라는 점, 그래서 단어자체의 의미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점은 그 두 작가가 처음 주목했던 아시아계 노동자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묘하게 맞물려들어간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보다는 경제적 상황이 좋지않은 동남아 국가에서 들어와 한국에서 불법체류라는 상태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분명 한국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당당하게 외국인임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불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한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해석은, 이 단어가 콩글리쉬 혹은 브로큰 잉글리쉬일 경우, 그것이 의도 된 조어이든 아니든간에 단어자체가 주는 반향은 이처럼 ‘섞임’ 혹은 ‘어울림’이란 쉽지않다는 것을 그 자체로 드러내준다. 상대방의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오용하기 쉽고 의미도 왜곡되기 쉬울 것이다. 물론 그러한 왜곡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잠시 유보해봐야 한다. 낯선 문화의 몰이해 속에 아름다운 오해가 탄생하고 그것은 또다른 의미의 창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해석도 물론 가능하다. 그룹명이 믹스드 라이스 (Mixed rice), 즉 잡곡이라는 이미 여러 종류의 쌀이 섞여 있는 상태가 아닌 동사로서의 ‘mix’를 사용한 명령문으로서의 믹스 라이스 (Mix rice), 즉 이제는 ‘쌀을 섞으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룹명을 통해서 작가들은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동일성에 주목하여 우리 모두 ‘더불어 살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 말고도 또다른 해석들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믹스라이스’의 작품활동의 다양성과도 상통한다는 것도 염두에 둘만하다.
2. 믹스라이스의 다양한 작품 세계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형태의 프로젝트 팀을 이루어, 마찬가지로 낯선 듀오 그룹명으로 활동한 “믹스라이스”의 작품행보 또한 현대미술에 아주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들에게는 낯선 것일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믹스라이스는 조지은과 양철모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으로, 이처럼 한 작가가 아닌 두 명이상의 작가들이 프로젝트라는 것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일컫는 일련의 현대미술의 한 형태로, 한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예술작품에 대한 일종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믹스라이스는 이에 머물지 않고 두 작가 이외에도 이주 노동자들과의 협업을 통한 작업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제작해왔다. 그 속에는 사진, 영상, 벽화, 퍼포먼스와 같은 기존의 예술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메시지를 담은 티셔츠, 핫케이크, 포츈 쿠키의 제작, 주민들과 함께 개최한 페스티벌 등 작품의 유형을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작품들도 많다. (자세한 내용은 믹스라이스 홈페이지를 참조해보자. http://mixrice.org/)
성남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한 믹스라이스의 작품은 소외되어 망각된 도시와 그곳에서 생활하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2006년 마석가구단지의 이주민공동체와의 협업을 통해 불법체류 중인 이주민들의 인권문제와 그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조명하는 작품이 있다. (도판 1) 믹스라이스의 작업의 특징은 ‘전지적 작가’로서 작품을 기획하고 감독하는 위치가 아닌 이주민들과의 협업을 통해 완성해가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이들과 작업을 하기도 하고, 이주민들의 속내를 그대로 반영하기 위한 글들을 작업화하기도 한다.
믹스라이스는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무분별한 도시의 재개발 운동으로 야기되는 사회문제에도 시선을 돌려 작품활동을 하였다. 최근에는 2 채널 영상으로 제작된 《덩굴연대기》에서 볼 수 있듯이, 나무들의 ‘이식(移植)’의 문제를 조명하면서, 도시 재개발과 맞물려 자행되는 변두리 지역 나무들의 무차별적이고도 비자발적인 이식문제를 다룬다. 이 들 해묵은 나무들은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그 지역의 풍경이자 나아가서는 공동체의 일부로서 역사를 이루며 함께해 왔던 존재이다. 이들을 무분별하게 파헤쳐 새로 건축된 아파트 단지의 조명을 위해 옮겨심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는 환경문제이자 생태학의 문제에 대한 언급인 동시에, 여러가지 주변 상황들 때문에 자신들의 오랜 보금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는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의 ‘이주 (移住)’ 상황의 은유로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식물의 ‘이식’에 대한 관심은 비디오 작품 뿐 아니라, 실제 재개발 지역에서 채취한 식물들을 갤러리의 거대한 흰벽에 세심하게 늘어붙이는 작업과 같은 설치작업으로도 이뤄지고 있다.
또한 ‘이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재개발 지역에서 파낸 ‘흙’을 갤러리의 바닥에 깔고 ‘집을 위한 땅’으로 재배치하는 설치도 감행한다. 흙 바닥에는 노끈등으로 구획을 만들어 ‘주방,’ ‘거실,’ ‘안방’ 등의 푯말을 세워두었는데, 이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 아파트 개발 초기의 분양 당시, 농지로 사용하던 땅에 그런식으로 구획해두고 재개발을 위한 토지 매매가 이뤄지던 것을 풍자하여 재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도판 2)
도판 2) 아주 평평한 공터
일견 일관성이 없어보이는 믹스라이스의 작업은 자세히 들여보면, ‘거주’와 ‘이주,’ ‘동일성’과 ‘차이,’ 또 그로 인해 생겨나는 ‘경계’ 그리고 나아가서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일관되게 이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견 생활과 밀접하여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듯한 그들의 작품은 실은 무척이나 심오한 철학적 주제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이처럼 생활에 밀접하면서도 철학적인 믹스라이스의 작품은 묘하게도 독일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1889-1976)의 “건물, 거주, 사고” ("Building Dwelling Thinking")라는 글의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Martin Heidegger, ‘Building Dwelling Thinking’, in Poetry, Language, Thought (NY: Harper & Row, 1971), pp. 145–61.)
독어로는 'Bouen Wohnen Denken'이라는 제목인 “건물, 거주, 사고”라는 에세이는 원래 1951 년 하이데거가 건축가들이 주축이 되어 열린 '인간과 우주'라는 주제의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다. 과연 작가 믹스라이스가 하이데거의 저작에 친숙한지 특히 이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에세이의 내용은 지난 십 수년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믹스라이스의 작품의 주제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일견 일관성있어 보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다소 상충하는듯도 보이는 믹스라이스의 작품 속에 내재한 복잡한 질문들도 하이데거가 논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과 상통하고 있다.
과연 60여년전에 한 독일 철학자의 에세이가 어떤 식으로 오늘날 한국의 한 프로젝트 팀의 작품을 비추어주는 렌즈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믹스라이스를 다루는 한 방송국의 다큐멘터리에서 언급한 “혐오의 시대 예술의 역할”이라는 부제에서 일말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2017년 1월 22일 일요일 밤 11시 5분 방영, SBS 아트멘터리 ‘남을 위한 행진곡’) 하이데거의 글이 씌여진 시대도 “혐오의 시대”를 겪고 전후 이제 막 화해를 모색하던 시기였을 것이고, 이는 2017년의 오늘날의 현실과도 일맥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이데거의 에세이 “건물, 거주, 사고”는 1951년 건축가들을 위주로 한 심포지움의 강의를 그 내용으로 한다. 그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건축의 개념과 거주의 개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 나가는데 이는 오늘날 믹스라이스가 제기하는 문제와 연결해 보면 흥미롭다. ‘장소(place)’를 무시하고 ‘건물(building)’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었을 건축가들이 모여 개최한 심포지움에서 하이데거는 모름지기 ‘건물’과 ‘주거’의 차이를 명백히 하며, ‘거주한다는 것(dwelling)이 건물 (building)에 선행한다’는 다소 이색적인 주장을 한다.
이 거주하는 것(dwelling) 이라는 개념은 그 거주의 주체가 어디에 ‘소속된다는 것 (belonging)’을 의미하고 따라서 그 거주의 주체의 ‘정체성 (identity)’ 나아가서는 ‘진정성 (authenticity, 독어로는 Eigentlichkeit)’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는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거주’라는 것은 곧 ‘진정한 존재 (authentic existence)’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발전되는 것이고, 우리가 진정성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과도 상통한다고 볼 수 있는 있는것이다. 결국 장소 (혹은 거처)와 주거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결여했을 정체성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대로라면, 주거란 정체성, 자신, 혹은 의미자체에 대한 감각을 잃을 위험이 있는 현대성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고정된 장소를 전제로하는 주거는 정체성을 지켜주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는 유용하지만, 본질적으로 배타적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개념이라고 봤을때 중대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 정체성은 우리에게 고정된 정체성을 부여하고, 과거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취해진 것으로 미래와의 진정한 관계를 방해하는 본질적으로 후진적인 방향성을 내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소로 인해서 생성된 정체성은 장소의 경계 내에 있는 ‘우리’라는 소속감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서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그 장소에서 제외시킨다. 그 정체성이 바로 그 ‘장소’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정체성은 상당부분 장소의 개념에 의존하며 ‘우리’의 통제 밖에 있게 된다. ‘주거’와 ‘장소’의 개념을 강조하고 그 특성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성’에 정당성을 부여한 점이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동조한 역사적 증거 내지 근거로 비판 받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믹스라이스의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지난 십수년 동안의 다양한 작품들에 드러난 장소와 거주에 관한 논의는 상반된 문제의식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알 수있다. 믹스 라이스의 재개발 문제와 식물의 이식의 과정에 촛점을 맞춘 최근의 작품이 ‘주거’가 부여하는 ‘정체성’에 관한 문제라면, 그보다 이전의 마석가구단지 페스티벌을 필두로 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는 바로 그 주거의 고정성으로 인해 야기된 ‘배타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이 당하는 불이익에 대한 문제,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아 확실히는 알수 없으나 아마도) 원치 않는 곳으로 이식 되는 식물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한 문제와 타국에서 한국에 옮겨와 자리잡고자 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앞서 밝혔듯, 장소와 거주라는 개념을 소속감과 정체성을 연관시킬 때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이때, 정체성은 차이를 배제하고, 마찬가지로 장소와 거주라는 개념도 그런 점에서 봤을때에는 배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논지는 배타성으로 점철되어 있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의 1957년의 “정체성의 원칙 (The Principle of identity)”라는 글에서 그는 정체성에 대해 화해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정체성의 의미를 ‘함께 소속하는 것 (belonging together)’에서 찾는데, 여기서 ‘함께 (together)’에 중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소속됨(belonging)’에 중점을 둘것인가에 따라 큰 차이가 야기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함께’를 모인이들과의 단결을 강조하게 되면서 단일성이 더 중시되고, ‘소속됨’을 강조하게 되면 그 구성원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되므로 ‘자율성’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나아가서 정체성이란 동일성에 머물것이 아니라, 함께 소속하는 주변의 사물 (여기에서는 믹스라이스의 작품에서의 나무를 떠올리게 된다)들과 인간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라고 논한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자면, 땅 (Earth), 하늘, 유한자 (mortals)와 신 (divinities)라는 4겹(Fourfold)의 요소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다양성과 조화의 예를 블랙포레스트 농가에서의 생활을 예로 들며 하이데거는 글 (강의)를 마치고 있는데, 이는 믹스라이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견 상충하는듯 보이는 자연과 인간의 문제, 외국의 이주민과 재개발 지역 주민의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점의 모색 보다는 문제제기의 단계인지는 모르지만, 또 어차피 어떠한 장소에 소속한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본질이자, 그 속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 만큼이나 주거와 소속,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영원히 계속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믹스라이스가 제기해 온 여러가지 방향으로 향한듯 보이는 복잡한 문제들이 실상은 ‘서로의 특이성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소속감을 지니고 주거’할 수 있는 조화로운 지점에서 해답을 구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글이 길어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나머지를 올리기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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