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Danse macabre' 태그의 글 목록
2020. 3. 18. 20:29 미술 이야기

오랜만에 돌아온 '내 맘대로 작품보기' 시리즈!  시국이 시국이다보니, 또 이런 그림 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17세기 플랑드르의 바니타스 회화.  현세에 사람들이 탐낼 만한 것들이 다 늘어져 있는 거실의 풍경과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함께 담겨져 있다.  죽음의 무도회와 보다 전형적인 바니타스 정물화가 결합된 형태. 여기에 서민들의 삶을 풍자적으로 그렸던 풍속화적 특징이 결합되어 있다. 

엊그제 '죽음의 무도회'에 관한 글을 하나 올렸고, 그 때 이전에 올렸던 '바니타스'에 대한 글도 링크를 걸어두었다.   이 그림은 엊그제의 포스팅에서 소개되었던 '죽음의 무도회 (Danse Macabre)'와 '바니타스 정물화'의 주제를 다 포함 할 뿐 아니라,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장르화에 해당한다.

우선 '죽음의 무도회'에 관련된 면을 살펴보자.  죽음은 깃털로 장식을 한 붉은 모자를 쓰고 해골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는 죽음의 갑작스런 등장에 당황해 보이는 집주인으로 보이는 남자 앞에서 만다린을 연주하고 있다.  그림속의 그림, 화면의 왼쪽의 그림에서도 같은 장면이 그려져 있어 '죽음의 무도회'라는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동시에 전형적인 바니타스 정물화의 주제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현세에서 인간들이 원하는 것들 - 금은보화, 화려한 생활, 진수성찬 등 - 을 나열해 그리는 것이 특징인데, 이 작품에는 화려하게 꾸며진 방안에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한 사람이 식탁앞에 앉아 있다. 그의 앞 마루 바닥에는 금화가 쌓여 있고, 값비싼 접시들이 넘쳐나게 늘어뜨려져 있다. 풍성한 식탁의 뒷쪽 장식장에도 금은보화가 넘쳐나고 있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이러한 화려하고 값비싼 사물들을 화면에 담아냄으로써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동시에, 그러한 현세의 부귀영화가 실은 덧없는 것이고, 진정한 가치는 신의 뜻에 따라 살아서 영생을 얻는 것에 있다는 교훈을 주고자 하는 목적에서 그려진 그림이다.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금은보화, 진수성찬 등 인간이 욕망하는 대상들을 나열하는 것도 있고, 해골이나 불이 꺼진 촛불 등 보다 직접적으로 죽음을 상징하는 사물들이 그려지기도 한다 (바니타스 정물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전 포스팅을 참고하시길). 때로는 아름답고 풍성한 꽃들이 그려지기도 하는데, 여기서 꽃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그 아름다움이 지속되는 것은 순간에 불과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때로는 악기와 악보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덧없음'을 상징하는데, 이는 음악 역시 머물지 않고 공기 속으로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골이 연주하고 있는 악기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체로 죽음과 인생의 덧없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Evert Collier의 바니타스 정물화 (1705) 화가의 자화상을 담고 있는 이 바니타스 정물화는 식탁 가득한 금은보화와 권력을 상징하는 왕관과 홀, 지구본과 칼 등이 늘어져 있다.  이러한 바니타스 정물화에서는 책들도 등장하면 이는 인간의 지적인 욕구를 나타내며 경계의 대상이 된다.  화면의 책의 한 페이지에는 라틴어로 '죽기전에는 행복을 평가할 수 없다'는 내용을 명기하고 있다.  

대표적인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가 중 한 명인 에버트 콜리어의 1705년 작품은 보다 전형적인 바니타스 정물화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화가의 자화상을 담고 있는 이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식탁 가득히 인간이 욕망하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든 것들이 담겨져 있다.  금은화와 값비싼 귀금속들은 물론, 지상의 권력을 상징하는 왕관과 홀, 지구본과 칼 등도 그려놓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책들도 등장하고 있는데, 주지할 사실은 바니타스 정물화에서의 책들은 성경인 경우, 현세적 사물에 대비되는 정신적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때로는 인간의 지식욕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또한 경계해야할 대상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여기 등장한 책에는 왼쪽 페이지에는 "Sic transit gloria mundi" 오른쪽 페이지에는 "Nemo ante mortem beatus  dici potest"라는 라틴 문귀가 적혀져 있는데  이는 각각 "그러므로 지상의 영광은 지나가리라"  "아무도 죽기 전에는 누가 축복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즉, 미래에는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화가는 이 그림의 의미를 혹시라도 그냥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물들을 그림으로 오해할까봐 이 작품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니타스" - 지상의 것들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가!

오늘 살펴볼 그림에는 이처럼 바니타스 정물화의 주제를 나타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에 유행하던 풍속화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 있다. 

Jan Steen, Beware of Luxury (1663) 얀 스틴의 '사치에 대한 경계'라는 제목의 장르화. 흥청망청 살다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는 것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는 풍속화이다. 흐트러진 인물들과 속된 말로 '개판'인 집안 꼴을 보여주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삶의 다양한 면면을 보여준다. 바니타스 회화의 일종의 변종과도 같은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유머와 풍자를 담고 있다.  

위의 작품은 장르화라고도 불리는 풍속화로 유명한 얀 스틴 (Jan Steen)의 작품으로  <사치에 대한 경계 (Beware of Luxury)>(1663)이다.  그림 속에는 반면교사 역할을 하고 있는 흥청망청 살고 있는 인간의 군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근면과 성실을 중시하는 개신교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바니타스 정물화와 일맥상통하는 주제가 있긴 하지만 훨씬 더 대중적이고 풍자와 유머를 담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런 종류의 장르화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생활은 보통 바닥에 물건들이 어지럽게 늘어뜨려져 있는 모습으로 나타낸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작품에서도 보인다. 값비싼 그릇이나 금은보화, 도자기들이 찬장에도 대충 쑤셔넣어진 상태이고 바닥에 어지럽게 어질러져있다.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어지럽혀진 내 방안을 돌아보며 반성하곤 한다)  강아지나 고양이, 다른 가축들이 등장해서 인간이 먹어야 할 음식들을 먹고 있는 모습 역시, 위계질서 분명한 기독교 가치관에서 무질서를 상징하며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을 나타낸다. 이러한 장르화에서 원숭이는 허세나 어리석음 자체를 상징하거나, 잘난척하거나 허세부리는 어리석은 인간의 우화이기도 한데, 오늘 살펴보는 그림에서도 그 원숭이가 등장하여 건방지게 담배까지 피우고 있다.     

오늘 살펴본 작자미상의 17세기 장르화는 미술사적으로 깊게 연구해보기에는 자료가 풍부하지 않을지 모르나 여러가지 주제가 곁들여져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라는 면에서 '내 맘대로 작품보기'에는 아주 적합한 흥미로운 작품이다.  

This shall too pass~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20. 3. 12. 02:33 미술 이야기

요새 우한 폐렴 혹은 코로나 19, Covid 19 등으로 알려진 전염병으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지난 수년 몇 차례 전염병이 유행하긴 했었고, 이번의 전염병은치사율로 치면 그렇게까지 높은 편은 아니지만, 일단 이 병의 잠복기가 길고 무증상 보유자가 많은데다가, 실제로 사망자 수가 이전의 전염병에 비해 훨씬 많다보니 체감적으로는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새롭게 발병한 병이다보니, 이 질병의 후유증에 대해서도 정확한 정보가 없고, 이 전염병에 해당하는 백신도 아직 없는 상태이다 보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방편으로 내 스케줄이 상당부분 조정되어 내 생활에 직접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치다보니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이전의 전염병에 비해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신경쓰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한동안은 실제로 일어나는 생활 속의 변화와 쏟아지는 뉴스로 정신이 없었는데, 그 기간이 좀 지나고 나서 진정도 되고, 이탈리아에서의 감염율이 높다는 소식까지 접하게 되면서, 21세기 의학과 정보가 이렇게 발달한 사회에 사는 나도 이러한데, 예전 유럽에서 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절망감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동유럽에서는 6세기경 한차례 유행해서 인구의 절반을 죽음에 몰아넣었던 흑사병 혹은 페스트는, 1346년~1353년 사이 서유럽에서 번지면서 삽시간에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기록에 따르면, 14세기의 이 질병은 이 당시 유럽 전 인구의 1/3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50% 이상의 인구 감소가 일어났다는 기록도 있다고).  쥐들에 의해 병균이 옮는다고 알려진 페스트가 창궐하게 된데는 당시 사회의 불결한 위생상태도 한 몫했을 것이고 부족한 의학 지식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페스트는 전염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밤 중에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장례를 치르러 간 친구 2명과 임종을 지키러 간 신부님이 그 다음날 죽음에 이르렀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이다.  

무력한 상태에서 전염병이 창궐한 사회에서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감이 어떠했을까?   21세기, 중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위생상태와 의료기술이 갖춰진 상태에서 치사율이 그리 높지 않다고 하는 전염병에도 나라가 들썩거리는 것을 보니, 그때의 사람들이 겪었을 공포와 불안감은 가히 짐작하기도 힘들다.  언제 다가올지 모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고안해낸 방식은 다소 놀랍게도 죽음과 마주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자주 대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Michael Wolgemut , The Dance of Death (1493) from the Nuremberg Chronicle of Hartmann Schedel   '죽음의 무도회'를 묘사한 초기의 작품 중 하나.  죽음은 어디에도 존재한다는 개념의 알레고리적 표현한 작품. 해골의 모습으로 나타난 죽음은 모두 춤을 추며 하나가 된다. 해골로 표현되긴 했지만, 음울한 분위기 대신 마치 축제와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어차피 어디서건 어느 누구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과 함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탄생한 장르가 바로 '죽음의 무도회'라고 생각한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기근과 연이은 전쟁, 거기다 결정적으로 흑사병의 창궐 등, 죽음에 대한 불가피성과 공포 때문에 탄생한 장르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죽음의 무도회 (The Danse Macabre)'이다.   '죽음의 무도회'는 죽음의 보편성에 대한 알레고리로 중세 후기때부터 제작되었던 미술의 한 장르이다. 해골의 모습으로 나타난 죽음은 모두 춤을 추며 하나가 된다. 해골로 표현되긴 했지만, 음울한 분위기 대신 마치 축제와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어차피 어디서건 어느 누구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과 함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탄생한 장르가 바로 '죽음의 무도회'라고 생각한다.  

Bernt Notke (1440-1509), The Danse Macabre (1475/1499), oil on canvas ; 160 x 750 cm, Art Museum of Estonia Church , Tallinn. 15세기의 '죽음의 무도회' 작품. 아무리 지위가 높고 고귀한 인간이라고 해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다. 교황, 귀족들이 해골로 표현된 죽음의 손에 이끌려 가고 있다. 
Bernt Notke , Lübecker Totentanz (around 1463) 뤼벡 (Lübeck) 의 ‘ 죽음의 무도회 ’ (‘ 죽음의 무도회 ’ 중에서는 가장 대표적 작품이었으나 1942 년 공습 중 파괴됨 ) 

 

'죽음의 무도회' 작품에는 따라서 여러 계급의 인간들이 등장하고, 계급과 위계를 중시하던 봉건주의 기독교 사회였던 만큼 죽는데 순서가 있을리 없고 그렇노라 이야기하면서도 그림 속의 인물들은 계급순으로 손에 손을 마주한채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인간 군상의 행렬을 이끄는 이는 바로 '죽음'이다. 베른트 노트케의 '죽음의 무도회' (독일의 뤼벡 소재)는 최초의 작품은 아니지만, 이후 같은 주제의 작품의 전형이 된 작품인데, 당시 유행했던 흑사병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작품은 프랑스의 La Chaise-Dieu Abbey에 소재] 뤼벡의 성당에 걸려있었는데, 이 성당은 고해성사를 위한 고해소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한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고해성사를 하러 오는 인간들을 연상시키는데, 아울러 그들의 유한한 인생을 되새기게 해준다. 이러한 주제는 'memento mori'와도 연결되는데 이는 '(네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인간의 유한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채용된 미술의 주제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전에 포스팅을 했던 '바니타스 정물화'를 참고하시라)  기독교적인 주제로 지상의 삶의 유한성과 대비되는 영적인 삶의 무한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1842년 브로셔에서 발췌한 세부: the St. Marien Church (독일의 뤼벡 Lübeck 소재)의 ‘죽음의 무도회'장면의 세부 묘사 (Anton Wortmann의 1701년 복사본)  등장인물들은 사회적 지위의 순으로 등장하고 있다. 차례대로 교황, 황제와 황후, 추기경과 왕 주교, 공작, 수도원장, 기사 카르투지오 수도사, 귀족, 수사 신부, 시장, 의사, 고리대금업자, 사제, 상인, 집달관, 교회 행정관, 장인 청년 소녀, 요람속 아기가 있다. 

오늘날 '죽음의 무도회'라는 장르의 작품이 그려진다면 어떻게 그려질까? 모르긴 몰라도 신형 코로나 19를 표현하려면 사람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등장할 수도 있겠다 싶다. (참고로, 15세기 작품에서 맨 마지막에 요람 속의 아기가 등장하는 것은 아직 '어린이'라는 개념이 없는 시절, 아기나 어린이는 온전히 한사람으로서의 일을 해내지 못하는 부족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라 한다.)   

처음 며칠동안은 무척이나 갑갑하고 불편했는데, 아예 3월의 일정이 다 정리되고 나니, 너무 조급하게 굴지말자 여기게 되었다. 차라리 호흡을 길게 가지자 맘을 먹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상을 나름 알차게 보내자 생각하게 된다.  영화 '개같은 인생'에서 주인공 소년 잉게말이 우주로 쏘아 올려진 '라이카'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안했듯이, 15세기 흑사병이 전유럽을 휩쓸었을 때 사람들이 느꼈던 절망과 공포를 떠올리며 지금의 상황을 끌어안으려 한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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