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인생을 책으로 배우다...우주전쟁, 바이러스, 멍게와 뇌
2020. 3. 27. 23:18 일상 이야기

요즘 들어, 웰스 (H. G. Wells: 1866-1946)의 <우주전쟁>이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원제는  <The War of the Worlds>라는 건 이후에 안 사실이다. 내가 처음 이 소설을 접한 건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에 있던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 소년소녀 문학전집 30권 안에 들어있었다. 어린 마음에 조마조마 해가며, 공포에 떨며 읽었던 기억이 있는 소설인데, 새삼 생각이 나서 좀 찾아봤더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123년전, 1897년에 씌여진거다.   모르긴 몰라도 어린이용으로 편집되었을 것이고, 빛바랜 기억에 의존한 것이긴 하지만 대략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 날 평화로운 지구에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화성인들이 쳐들어와서 지구를 정복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화성인들은 무지막지한 파괴를 일삼지만, 지구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문명을 지닌 그들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어 지구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지구가 화성인들에게 함락될 순간, 갑자기 화성인들이 하나씩 둘씩 픽픽 쓰러지는데, 지구인들은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다. 덕분에 지구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오고, 나중에 알고보니 화성인들을 물리친건 다름 아닌 지구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들이었다. 지구인들은 태어나서 부터 공존해온 터라 자연스레 면역이 있어 생겨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다른 행성에서 온 화성인들은 지구에 살고 있는 이 낯선 생물체에게 면역이 없어 결국 다 죽고 만다는 것이다.  

H. G. Wells의 소설 <우주전쟁 (The War of the Worlds)>의 표지. 1897년 

어릴 적에 그 책을 읽으면서는 바이러스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더니만, 요새 들어서 연일 전염병 뉴스만 계속 듣다보니 새삼 바이러스의 대단한 생명력에 경외감 마저 느끼게 된다.  영국작가인 웰스는 대영제국 하에서 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부족이 멸종되는 것을 보고 소설에 착안했다고 하는데, 소설 속에서는 천하의 대영제국이 지닌 막강한 군사력도 단숨에 제압하는 더 앞선 문명의 화성인들이 등장한다. 현실에서는 막강한 군사력 앞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부족은 힘없이 멸종되어 버리지만 말이다. 물론 작가는 당시 유행했던 진화론이라던지 과학이론 등을 결합하여 자신의 이야기에 담아냈다.  결과적으로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문명이 완전한 생명체라고도 할 수 없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무너질 수도 있다는 얘기로 SF 소설계의 성경격인 <우주 전쟁>이라는 소설을 만들어낸다.  

21세기, 인간의 과학 기술이 발전했다고 자부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원시적인 생명체 바이러스 때문에 사회체계 전체가 흔들리는 것을 보니, 새삼 인간이 오만했구나 반성하게도 된다. 어릴 적에는 이야기만 좇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저자가 의도한 바도 그러한게 아닌가 싶다. 이번 일련의 사태를 통해 느낀 것 중 하나가 '일상의 소중함'이라면, 좀더 거시적으로는 '인간으로서의 겸허함'도 보태야겠다 싶다. 

지구를 황페화시키는 화성인들의 모습

이에 관련해서 떠오른 단상 하나.

대학 다닐 때, 공대 다니던 명석한 친구 하나가 나랑 소설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은 전공책은 사지만, 소설책은 사지 않고 관심이 있는 경우 그냥 서점에서 선 채로 읽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허구의 이야기를 돈주고 사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문학도인 나로서는 문학의 존폐 여부에 관한 질문 같았고, 왠지 분하기도 하고, 그건 아니다 싶으면서도 딱히 반박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과연 왜 우리는 '나 아닌 타인이 지어낸 이야기'를 읽는가? 왜 허구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는가? 

그 해묵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최근 내가 보기 시작한 드라마에서 '멍게'에 대한 이야기에서 찾은 듯하다. 놀랍게도 멍게에는 뇌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멍게가 원래부터 뇌가 없는 것은 아니란다. 멍게도 어릴 적엔 뇌가 있지만, 그건 자신이 살 곳을 발견하기 위해서 머리를 쓰기 위해서라고 한다. 일단 자신이 평생 살 곳을 발견하고 나면 야금야금 스스로 뇌를 먹어치워 버리는데, 그건 더 이상 머리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결국 한 사람이 경험하고 사고할 수 있는 폭이라는 것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타인의 상상력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사고의 영역을 넓히고자 소설을 읽는게 아닐까? 전공책은 지식을 넓히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상상력과 사고력을 넓히는 건 아무래도 소설만한게 없는 것 같다. 더군다가 그게 백 여년 전에 이미 작금의 상황을 예견할 수 있는 탁월한 상상력의 소유자의 그것이라면.  

​다소 뜬금없지만, 바이러스와 멍게를 생각하면서 하루 빨리 이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원해본다.  그리고, 소설, 넓게 문학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