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아는 맛이 무섭고 해본 것이 해보고 싶고...일상의 소중함
2020. 5. 16. 01:49 미술 이야기

예전에 라디오에서 문희준 디제이께서 핑클의 옥주현씨가 다이어트를 하는 이들에 대한 충고로 '그거 먹어봤자 다 아는 맛이니 참으세요'라고 했다고 자신은 그 발언에 '정식으로 반박'하겠노라며, '아는 맛이 무섭습니다, 여러분. 알기 때문에 먹고 싶은거지, 모르는 맛을 가진 음식은 뭐 먹어보고 싶지도 않아요!'라고 하는 것을 듣고 깔깔 웃었던 적이 있다. 

그러하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외국 요리들, 재료값 흐드드한 고급 요리들... 영상이나 사진으로 보면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막상 기회가 되어 먹어보면 기대에 못미치는 경우가 많다. 입에 익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세계 10대 진미라는 프와그라니 캐비어, 그리고 상어지느러미도 평생 못먹고 지내야한대도 별로 억울하지 않다. (이렇게 입맛이 저렴해서 참 다행이다. 먹고 싶은데 못사먹으면 속상했을테니까.)  다이어트 할 때 뿐 아니라 그냥 배고플 때에 머리 속에 뱅뱅 돌면서 먹고 싶은 것은 '다 아는 맛' '많이 먹어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도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은 아니다. 물론 전용기타고 외국 여행하기, 최고급 스위트룸에서 한달동안 머물기, 최고급 레스토랑서 질릴 때까지 매일 식사하기, 이런건 할 수 있다면 뭐 땡큐일지는 모르지만, 나를 위시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간절하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내가 이제까지 별 생각없이 해 오던 일, 그리고 만나던 사람 거리낌 없이 만나기, 무엇보다 그냥 아무런 걱정없이 외출하고 거리 쏘다니기, 늘 들르던 카페나 음식점에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가기, 등 이렇게 특별할 것 없는 이런 일들, 예전에 수도 없이 해본 일들이다.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서 지내면서, 예전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노라면, 등장인물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 거리낌없이 돌아다니는 장면만 봐도 좀 오버하자면 울컥한다. 좀 더 오버하자면, 내게 그런 날이 있었나 싶고, 앞으로 그런 날이 올까 싶고....

그렇다. 아는 맛이 무섭고 해본 것이 해보고 싶다.  진부하지만 '일상의 소중함'을 뼈속 깊이 새기는 지난 몇 달이었다. 좀 괜찮은가 싶었더니 또 다시 터지고 또 터지고 하다보니 더욱더 '일상'이 그립다. 

요새 비가 잦다. 난 비가 오는게 참 좋다. 비를 맞고 돌아다니는 건 축축해져서 안좋아하지만, 창너른  카페 창가에 자리잡고 앉아서 내리는 비를 쳐다보는 건 참 좋아한다. 물론 거실에서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거나, 비가 오는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라하지만, 카페에서 내다보는 건 더 운치가 있고 멋있게 느껴진다.  비오는 풍경을 집에서야 지금도 내다 볼 수 있지만, 폼 좀 잡으며 통유리 있는 카페에서 차 한잔 마시는 건 아직 좀 조심스럽기에 더더욱 그러한가보다. 

Gustave Caillebotte. <Paris Street, Rainy Day> (1877), oil on canvas ; 212 x 276 cm, Art Institute of Chicago

구스타브 카이유보트 (Gustave Caillebotte: 1848-1894)의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 (Paris Street, Rainy Day)> (1877)은 그런 그림이다. 내가 잘 아는 풍경. 물론 프랑스에서 살아본 건 아니지만, 비를 머금은 윤기나는 포석이나 우산을 쓰고 한가로이 거니는 사람들. 조금씩은 다 낯익은 풍경이다.  프랑스 여행을 최근에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이 거리를 지나친 기억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  

the Place de Dublin, Paris, France

카이유보트의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이라는 작품에서 특히나 눈길을 끄는 것은 빗물을 머금고 있어 반짝이는 돌로 포장된 길의 표현이다. 그의 다른 스케치에서도 빗물로 씻긴 포도의 그림은 탁월하다. 

Gustave Caillebotte. <Paris Street, Rainy Day> (1877)를 위한 습작

카이유보트는 생전에는 예술 후원가로 알려져 있었고, 아직 생활의 기반을 잡지 못했던 젊은 인상주의 작가들을 도와준 것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원체 유복한 환경이라 그럴 필요가 없어서이기도 했겠지만, 그의 작품은 생전엔 한 작품도 팔지 않았기에 그의 화가로서의 역량을 평가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영리하고 치밀하게 구도를 잘 계산해서 그림을 그렸는지,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일상과 환경에 대한 통찰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보면 볼 수록 참 쾌적하고 즐겁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그가 교묘하게 가감한 실제의 풍경과, 치밀하게 계산하여 배치한 우산과 행인들의 위치 때문이다. 

Gustave Caillebotte. <Paris Street, Rainy Day> (1877)을 위한 스케치. 오른쪽 메인이 되는 커플이 쓰고 있는 우산의 위치를 계산하여 잡아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커플의 시선의 위치와 가로등은 화면을 정확히 4등분하고 있다. 

 

카이유보트는 비오는 날을 참 좋아했었던 것 같다. 위의 그림 뿐 아니라,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포착하기 힘든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품이 카이유보트의 그림 중 내가 더 좋아하는 그림이다.  비오는 날 그의 영지 예르 지방에 있던 여름 별장에서 내다본 한가롭고도 평화로운 풍경을 그린 <예르, 비의 효과>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이 작품을 보노라면 예전 어떤 한적한 카페에서 내다보던 바깥의 풍경과도 더 닮아 있기도 하다. 바닥에 고인 물 웅덩이에 내리는 빗방울들이 만들어내는 리드미컬한 파문을 하릴없이 내다본 기억도 되살려준다.  

소위 금수저였던 카이유보트가 가족의 여름 별장에서 비오는 풍경을 그린 그림.  팔방미인이었던 화가는 보트 타기도 즐겨했는데, 화면 원경에 묶여있는 그의 보트가 보인다.  부유했기에 생전에는 자신의 그림을 하나도 판매하지 않았기에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후원자로만 오래도록 알려져 왔다.  Gustave Caillebotte, <The Yerres, Effect of Rain> (1875) oil on canvas ; 80.3 x 59.1 cm, Sidney and Lois Eskenazi Museum of Art at Indiana University

지난 주부터 비가 잦다보니 갑자기 기억이 났다. 카이유보트의 그림이... 그리고 그의 그림을 봤던 미술관도 생각나고, 그의 그림에서처럼 빗방울 내다 볼 수 있는 예전의 그 카페도 생각이 나고, 그곳에서 마셨던 커피도 생각이 난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걸린 카이유보트의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  꽤 큰 그림이다.  Gustave Caillebotte. <Paris Street, Rainy Day> (1877), oil on canvas ; 212 x 276 cm, Art Institute of Chicago

아는 맛이 무섭고, 해본 것이 해보고 싶다.  내리는 비가 전염병을 옮기는 세균도 미세먼지도 다 쓸어내버려주길!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