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판도라의 상자와 희망, 프쉬케의 시련과 영생
2020. 5. 28. 13:04 미술 이야기

며칠전 돌발 퀴즈를 냈었죠?  그 질문은 어쩌면 오늘의 포스팅에 대한 예고편이라는 성격이 강했어요. 여러분의 열화같은 성원 (?)에 힘입어 오늘 답변 겸 본방을 진행하고자 해요.  작품 아래 제목이 달려 있으니까 글을 읽으시다보면 자연스레 해답을 아시게되겠죠.  정확한 답변은 이 글 말미에 올릴테니까, 궁금해 못견디겠는분은 스크롤 쭉쭉 내려서 답변만 보시고, 그게 아니면 한번 천천히 읽어봐주세요~ 


 

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 Pandora (1896) oil on canvas ; 152 x 91 cm, Private collection

위의 그림은 2세대 라파엘 전파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판도라>라는 작품이다. 먼저, 워터하우스는 신화 속의 아름다운 여인들, 특히 팜므파탈의 묘사가 탁월한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묘사한 '판도라 (Pandora)'는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으로 고대 그리스판 '이브'에 해당한다. 이 작품은 잘 알려진 '판도라의 상자'와 연관된 작품으로 작품 속의 판도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절대로 열지 말라'던 상자를 몰래 열어보는 장면을 그렸다. (원래 그렇다. 하지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이후의 스토리는 잘 알려진 바다. 세상의 금은보화가 다 들어있나 싶었던 그 상자 안에는 실은 각종 질병과 악의들, 탐욕과 시기 질투, 증오와 불의 배반 등, 세상에 없는게 더 좋을 법한 나쁜 것들이 모조리 모여있었던 것이다. 신화는 보통 이렇게 마무리된다. '판도라는 당황해서 급히 상자의 뚜껑을 닫았지만, 이미 상자 속에 담겨 있던 악의와 불행은 거의 다 빠져 나가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상자 바닥에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희망'만이 남아있었다.'라고. 그리고, '그래서, 인간들은 모든 사악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 남아 있기에 버티고 견딜 수 있다'라는 것이다.

어릴 때 이 신화를 읽을 때에는 '아~ 그래도 희망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는 항상 의문이었다. 신들이 불경스럽게도 인간들에게 허락도 없이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벌로써 내린 것이 판도라의 상자라면 그리고 그 속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과 불행을 담은 종합선물 상자였다면 애당초 희망이 왜 그 상자 속에 있었을까 하고.    요즘 '희망 고문' 이라는 말도 있지만, 애초에 '희망'은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불행을 연장하는 고문 도구로 고안되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중인 16세기 프린트 작품.  여기서는 판도라의 남편이자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가 뚜껑을 여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상자'가 아닌 '단지'라는 것이 특이하다. 이는 원전의 'phitos' 즉 단지라는 것을 따른 것이라 보이는데, 달아나고 있는 것들도 딱히 불행과 악이 아닌 풍요, 평화, 축복 등 인간들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들이다.   Giulio Bonasone, Epimetheus opening Pandora's box (1531-76) Engraving ; 16.7 × 11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그에 대한 의문이 약간은 해소되는 판화 작품을 하나 발견하였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중인 16세기 프린트 작품. 줄리오 보나소네 (Giulio Bonasone)라는 작가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에피메테우스 (Epimetheus opening Pandora's Box)> (1531-76)라는 작품이 그것이다.  제목에 따르면, 여기서는 판도라가 아닌 그의 남편이자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가 '상자'가 아닌 '단지'가 열려 세상의 모든 악과 불행이 날아가버리는 상황에 당황하여 뚜껑을 닫으려 하고 있는 듯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 신화 원전에는 '상자'가 아닌 'Phitos', 혹은 단지 (jar)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그를 충실히 따르는 듯하다.  미술관의 제목에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있는 에피메테우스"라고 달려있긴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에 따르면, 뚜껑을 연 것은 판도라이므로, 내 생각엔 뒤늦게 뚜껑을 닫아 아내의 실수를 수습해보려는 에피메테우스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여기서 내가 오랫동안 지녀왔던 의문에 관련해서 주목해볼만 한 대목은 열린 뚜껑 밖으로 막 달아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의인화되어 나타나있어 사람의 형상들을 하고 있지만, 혹 얘들이 누구인가 헷갈려 할까봐 라틴어로 토를 달아놨다.   단어 몇 개는 불분명해서 확인하기 어렵긴 하지만, Liberas (자유), Pax (평화), Concordia (조화), Felicitas (축복 혹은 행복) 등등 다 인간이 바라마지않는 좋은 것들이다. 따라서, 이 작가의 해석에 따르면 신이 준 종합선물세트인 단지 속에는 좋은 것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걸 열어버려서 다 놓쳐버렸다. 그런데, 아마도 희망은 그 단지 바닥에 아직 있어서 인간에게는 희망이 남아있게 되었다. 

상자를 연 것이 행동을 먼저하고 생각은 나중에 하는 스타일인 에피메테우스의 실수인지 아니면 호기심 왕성한 판도라인지는 깊이 연구를 안해봐서 현 단계에서는 모르겠지만, 내가 늘 가져왔던 의문 즉, '왜 희망은 불행하고 나쁜 것들이 가득한 상자 속에 함께 있었나?'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은 풀리는 대목이다. 애초에 상자 속에 담긴 것이 자유와 행복, 조화와 생명, 구원과 같이 인간이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었다면 그 속에 희망이 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그 축복의 종합선물 세트를 과연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 형제에게 하사했을까 하는 더 큰 의문이 남는다. 애초에 판도라와 그 선물 상자는 허락없이 신의 독점물이었던 불을 인간에게 선사한 프로메테우스의 괘씸죄에 대한 벌이었다.  그리스 신화를 좀 읽어본 분이라면 익히 알고 계시겠지만, 화가 나서 벌을 내리는 마당에 축복을 모아모아 꽉꽉 채운 선물을 세상에서 제일 이쁜 여자랑 함께 하사할만큼 제우스가 속이 넓은 신은 절대 아니다. 신화 해석적 측면에서도 '불'이라는 것을 소중하고 중요한 것을 얻은 것에 대한 반대급부, 즉 큰 획득을 상쇄하는 작용을 하는 것이 갖가지 불행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여인인 이 판도라는 신들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인물이니만큼 아름답기 그지 없었고, 이름조차 판도라 (pan-dora), 즉 pan("all") + dōron ("gift")을 어원으로 가진 이름으로 "모든 선물"이란 뜻이긴 하지만 말이다.  

 

16세기 에라스무스가 '단지'를 '상자'로 오역한 이래 판도라는 단지 대신 상자를 가진 여인으로 묘사되기 시작했고, '판도라의 상자'라는 관용적 표현도 굳어졌다. Pierre Loison (1816–1886)의 Pandora (1861) 

 

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 Psyche Opening the Golden Box (1904)

그렇다면 저번 포스팅의 '돌발 퀴즈'에서의 두번째 인물인 위의 인물은 누구인가?  두둥~

놀랍게도 프쉬케이다. 프쉬케는 맨날 나비가 근처에 노닐거나, 큐피트가 옆에 있거나 하는 것이 일반적인 도상이지만,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는 이번에는 프쉬케에 관해서 비교적 덜 알려진 에피소드를 택해서 그렸다. (원체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기존 도상보다는 새로운 도상을 많이 개발하긴 했다.)

프쉬케의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다.  프쉬케가 너무 예쁘다못해 비너스의 질투어린 분노를 사게 되고, 급기야 비너스는 아들인 큐피드에게 프쉬케를 죽여버리고 오라는 명령을 한다. 그런데, 막상 프쉬케를 보니 너무 아름다워 죽이기는 커녕 그녀와 연인이 되었던 큐피트.  '나에 대해서 알려하지마. 많이 알면 다쳐.'라고 큐피트에게 말했건만, 궁금한건 못견딘 프쉬케는 큐피트 얼굴을 보려고 밤에 등불을 밝힌다. (이렇게 궁금증 폭발하게 된 이면에는 프쉬케의 미모를 질투한 언니들의 부추김이 큰 역할을 했다.) 램프의 기름이 떨어져 잠이 깬 큐피트는 '넌 내게 배신감을 줬어.'라며 약속을 깬걸 핑계삼아 큐피트는 (실은 엄마의 귀에 소문이 들어갈까 무서워서) 황급히 프쉬케를 떠나버린다. 이후 그를 잊지 못하고 그와 다시 만나기 위해 프쉬케는 수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큐피트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프쉬케는 굳은 의지로 불가능에 가까운 수 많은 과업들을 다 달성하였다 (물론, 프쉬케가 원체 예쁘다보니, 쩔쩔매는 그녀를 기꺼이 도와주는 인물이 많기도 했다).   

마지막 단계에 비너스는 그 수고를 치하하며 지하세계에 가서 페르세포네에게 선물을 받아오라 시킨다. 마시면 더 예뻐진다는 묘약을 말이다. 프쉬케는 그렇게 이쁘면서 더 이뻐질라고 페르세포네에게서 받은 상자를 열어 묘약을 꺼내 홀짝 마시는데, 그게 실은 죽음에 이르는 독약이었다. 그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잃은 프쉬케를 보고, 이제까지는 엄마가 무서워서 가만히 있던 큐피트가 참다참다 나서서 제우스에게 읍소를 하고, 이를 받아들여준 제우스 덕분에 프쉬케는 새로운 생명을 얻어 신의 세계에 들어갔고, 큐피트와 프쉬케는 이후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다.   따라서, 위의 장면은 프쉬케가 페르세포네에게서 받는 독약이 든 상자를 여는 장면이다. 죽는 장면도 아니고, 독약이 든 병도 아니고 상자를 여는 모습이니 많은 사람들이 제목을 보지 않고서는 여주인공이 프쉬케가 아닌 판도라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리고, 이 부분이 돌발 질문의 '함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정답:저번 포스팅의 위의 작품은 '판도라' 아래의 작품은 '프쉬케'를 그린 것입니다. 요번 포스팅에 게시된 작품 아래에 기재된 정확한 제목을 확인해주세요~  [함정 퀴즈를 낸 셈인데, 혹여 속았다 분해하시는 분들~ 이렇게 장렬히 틀리고 나면 영원히 기억하게 될 테니까 너무 노여워마시길 바랍니다~]

[보너스 이미지]  상자를 들고 있는 도상의 인물들이 서양에만 있냐~ 그건 아니라는거. 아래는 <금동약사여래입상>이라는 작품이다. 줄여서 약사불이라고 하는데, 병이 든 사람들이 저 부처님께 기도를 하면 병이 낫게 된다는 것. 약사불은 현세의 재난과 질병을 낫게해주시는 지극히 현세적 행복과 밀접한 부처님이다. 저 약사불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약함. 즉 약통이다.  단지 속에 행복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해석으로서의 판도라의 상자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고, 에피메테우스가 뚜껑을 여는 판화에 나타난 해석으로 보자면 일맥상통하는 '약통'이라고 할 수 있다.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 약칭 약사불, 통일신라, 국립중앙박물관

 

아울러 함께 보너스~~ 다른 작가들이 묘사한 판도라들도 함께 살펴보세요~

Odilon Redon (1840–1916) Pandora (c. 1914) oil on canvas ; 143.5 x 62.2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 Pandora (1869) chalk on paper ; 100.6 x 72.7 cm, Faringdon Collection Trust


 이번에 알게 된거지만, 판도라라는 장신구 브랜드 이름도 있네요. ㅎㅎ  

이건 '판도라'라는 이름의 장신구 브랜드 상품이에요.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