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2018/09/05 글 목록
2018. 9. 5. 19:53 미술 이야기


이 블로그의 제목과 필명의 근간이 된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1897) 이야기

앙리 루소 (Henri Rouseau: 1844-1910)의 <잠자는 집시 (The Sleeping Gypsy)> (1897)

Henri Rousseau, The Sleeping Gypsy (La Bohémienne endormie) 1897. Oil on canvas; 129.5 x 200.7 cm ; Gift of Mrs. Simon Guggenheim, MoMA


때는 바야흐로 난생 처음 뉴욕을 방문했던 해의 겨울의 어느 날, 처음으로 뉴욕 현대미술관, MoMA를 방문했을 때, 나는 <잠자는 집시>라는 작품을 봤다. 전시실로 들어서자마자 생각보다 컸던 작품이 눈에 안기는 순간, 난 뭐라 형언하기 힘든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가슴에 날카로운 비수가 꽂히는 듯한 (그렇다고는 해도 가슴에 비수가 꽂혀 본 적은 없으니, 그냥 느낌상 그러할 것 같다는 의미)..... 그게 요즘 말로 하자면, '심쿵'인건지... 충격과 감동인건지... 그 당시 나로선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물론 그 이전까지 문학 작품을 보고 울컥하거나 통렬한 감동을 느껴본 적은 있었지만, 미술 작품을 보고 그러한 종류의 감정을 느낀 적은 난생 처음이라 당황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의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이 생기는 걸까~



어느 누구도 인생을 한 줄로 요약되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것은 아니니까, 나라고 해서, 이 작품을 똵! 보고 그 길로 미술사로 똵! 전공을 바꿔서 그 이후로 원탁의 기사가 성배 찾듯 이 작품에 대한 열정 어린 탐구를 주욱!~ 지속적으로 했.... 이런 식으로 이어진 건 아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이 작품을 본 이후로 ‘왜 난 문학 작품이 아닌 하나의 시각 예술 작품을 보고 그토록 감동을 받았던가?’ 하는 맘으로 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었고, 이후 여차저차 결국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이 작품에 감춰진 수수께끼는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늘 맘 한 켠에 묻어두고 지냈던 것 같다. 이미 미술 교과서에서 익히 보아 알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대했을 때의 받았던 충격에 가까운 감동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었던 것이었단 말이었던가?...하는.


그러다가 몇 해 전 비로소 그 해묵은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줄 만한 아티클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quest가 지속적이고 집요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들통이 나는 순간. 그도 그럴 것이 이 글이란, 실은 저명한 미술사학자 알버트 보임의 아주 해묵은 아티클로 내가 작정하고 찾아봤다면 진작에 발견할 수 있었을 글이었으므로...)

[Albert Boime, “Jean-Léon Gérôme, Henri Rousseau’s Sleeping Gypsy and the Academic Legacy,” Art Quarterly Vol. XXXIV: No.1 (1971): pp.3-29. [http://www.albertboime.com/Articles/20.pdf 관심이 있으신 분은 한번 읽어보시길]


이 아티클에서 알버트 보임은 19세기 유명한 아카데미 화가 장-레옹 제롬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자의 출처를 추적해가는데.....

그 글을 요약하자면,

1. 우선 화가 앙리 루소는 독학파였으나, 스스로는 아카데미 풍의 화가로 생각하였고, 자신의 화풍을 화가 윌리엄 부게로나 장-레옹 제롬의 화풍과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루소는 이들의 작품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2. 제롬은 열강의 식민지 개척이 한창이던 시기, 아카데미 화가의 자격으로 그 개척단을 수행하며 그곳의 자연과 생활상을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내셔널지오그래픽지의 사진작가 정도의 역할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제롬은 사자를 실제로 보고 그릴 기회가 많았다는 것.


3.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롬은 그 광활한 사막을 돌아다니는 백수의 제왕 사자를 자신과 동일시 했을 거라는 것,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유독 사자가 많이 등장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첫째, 장-레옹 제롬은 그의 이름에 사자를 뜻하는 ‘Léon’이 들어간다. ('밀림의 왕자 레오'를 떠올려보자~) 둘째로, 자신의 성인 'Gérôme'은 유명한 성인 St. Jerome과 발음이 같다.


Jean-Léon Gérôme, Saint Jérôme, 1874, oil on canvas painting, 69 x 93 cm., Städel Museum

(기독교인들을 사자굴에 집어넣어서 사자가 잡아먹지 않으면 살려주는 벌을 행했을때, 사자의 발에 박힌 가시를 뽑아주었더니 사자가 성 제롬을 살려주었다는 유명한 전설. 물론 제롬도 알고 있었고, 그 이야기를 주제로 그림도 그렸다.)

Jean-Léon Gérôme (1824–1904) The Two Majesties, 1883 oil on canvas; 69.22 × 128.91 cm


장-레옹 제롬의 작품에서 대부분 사자는 광활한 자연을 홀로 거닐거나 앉아서 사색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알버트 보임은 제롬이 당시 아카데미의 화가로 명성과 지위를 얻었음에도 경직된 관료주의와 주변과의 관계에서 항상 고독함을 느꼈기에 이런 그림을 그렸으리라 추측한다.

그리고, 오늘의 작품 <잠자는 집시>에서 등장하는 사자의 출처는 아마도 앙리 루소는 자신이 동일시 하던 아카데믹 화가 장-레옹 제롬의 작품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아래의 작품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라는 작품은 장-레옹 제롬이 주문을 받은 이래 상당한 공을 들여 오랜 기간에 걸쳐 제작한 작품이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사자는 동물들의 제왕으로서의 위엄은 가득하지만, 위협적 맹수의 모습은 아니다. 또, 지하굴을 아직 채 빠져나오지 않은 사자들도 피에 굶주린 맹수라기보다는 온순하고 조심스러운 고양이와도 같은 모습이다.

Jean-Léon Gérôme, 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 (1863-1883), oil on canvas 150.1 x 87.9 cm


이제 <잠자는 집시>로 돌아와 보자. 루소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자도 위협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고 호기심 많고 온순한 모습이다.
실제로 화가 루소 자신이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는 목적으로 쓴 편지에서도 그 의도를 확실히 하고 있다:

…떠돌이 흑인여성, 만다린 연주자는 물 단지를 옆에 두고 누워서,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사자는 우연히 그 곁을 지나다가 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지만, 잡아먹지는 않습니다. 달빛의 효과 탓에 매우 시적이죠. 장면은 완전히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집시는 동양 풍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루소의 <잠자는 집시>의 사자는 장-레옹 제롬의 <기독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의 사자들과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

제롬의 사자 그림들의 제작 의도는 물론 루소의 <잠자는 집시>의 의미도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직접 정글 탐험은 고사하고, 사자를 본 적도 없이, 파리의 식물원을 방문하면서 그때마다 정글을 탐험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고 하는 루소와 정글과 사막 지대를 누비며 사자를 직접 보았을 장-레옹 제롬이 사자에 대해 느꼈던 감성은 일맥상통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Jean-Léon Gérôme, Solitude, 1890


위의 작품에서는 제목마저 알기 쉽게 <고독>이다. 저명한 아카데믹 화가였던 장-레옹 제롬도 때론 비평가들의 놀림을 받던 일요화가였던 앙리 루소도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외로웠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작품이 그려진 지 100년도 훨씬 넘게 세월이 흐른 후에 루소의 작품을 봤던 나는 왜 엄청난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의 경우, 그것은 아마도 ‘외로움’과 ‘안도감’의 공명이 아니었을까?

난생 처음 낯선 타국에 홀로 떨어져 생활하면서, 때때로 위험하다는 뉴욕 거리를 다니면서 불안하기도 했었던 나로서는 누워 있는 집시에게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고, 엄청난 위력을 갖추었지만,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무방비 상태의 집시를 지켜주고 사자의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힘 쎈 사자가 나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지켜준다니! 그 이상의 든든함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광활한 사막에 홀로 놓여진 사자와 집시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외로움… 그 와중에 웃고 있는 달님과 아련한 별 빛으로 채워진 짙푸른 밤하늘로 인해 느껴지는 시상 충만한 감성...

물론 그 이후에도 수없이 MoMA를 방문해봤고, 그 때마다 첫날의 감동을 떠올리며 다시 그 작품을 봤었고, 처음 그때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은 빛이 바래갔다. 그 전시실에 들어가면 그 자리에 그 작품이 있을 것임을, 그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아마 20살 언저리 뉴욕에 있던 난 외로웠고, 그 작품을 보면서 커다란 위안을 받았고, 그 작품으로 인해 무한한 안도감을 선사 받았다는 것을.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5. 08:07 일상 이야기

신이 내게 다른 것을 다 주시면서 빠뜨리고 안주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방향감각.  


그렇다.  그래서 난 길치이다.  


그렇기에 난 같은 장소를 최소한 대여섯 번을 왕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특정 장소까지의 경로를 겨우 기억한다.  여하한 이유가 없으면, 난 그렇게 어렵사리 기억한 경로를 고수한다.  하지만, 나의 또 다른 특징이 있으니 그건 네비게이터의 말은 엄청 고분고분 듣는다는 것이다.


길치인 나도 이제는 완전히 익숙한 신촌에서 집까지의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는 거기서도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평소엔 신촌 로터리 쪽에서 홍대 앞을 지나치거나, 동교동 사거리 쪽으로 나가서 홍대 전철역을 지나 결국은 SK 합정 주유소 앞쪽 진입로에서 강변북로를 타서 귀가하곤 하는데....


어제는 네비게이터가 홍대 쪽으로 가라길래 순순히 산울림 소극장이 있는 길 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르막길로 올랐다.  그런데 그때부터 방향이 점점 이상해진다.  그래서 내 딴에는 없는 방향 감각을  최대한 발휘~ 일단 강변북로 표지판을 따라 한참 운전을 했는데, 결국 내가 발견한 건 일산쪽으로 향하는 강변북로!  평소에 가는 길에서는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왼쪽은  한남대교 쪽 오른쪽은 일산 쪽 이렇게 나뉘는데, 거긴 안그런가보았다. 


그래서 일대를 약간 돌다보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신촌 일대....너 오늘 되게 낯설다~) 네비게이터가 이번엔 시청 쪽으로 가랜다~  그쪽으론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고, 방향적으로는 평소 집으로 가는 쪽의 정반대인데.... 그렇지만, 내 차의 네비게이터 양 뿐 아니라, 티맵의 네비게이터 군까지 이구동성으로 마포, 시청/광화문 쪽으로 가라고 아우성~  

결국, 아현동, 충정로, 서소문 고가차도, 세종대로, 소공로, 회현사거리, 퇴계 지하차도 옆, 퇴계로 2가, 삼일대로, 남산 1호터널 한남대교 방면, 한남대로, 독서당로, 서빙고로, 보광로, 뚝섬로, 용비교 (티맵보고 옮겨 적어봄)를 경유하여 귀가.  덕분에 터널 통과할 때 통행료를 내긴 했지만, 첨으로 가보는 길이라 신선했다.  내가 늘 다니던 길이 막혀서 교통 정보를 통합해서 네비게이터가 새로운 길을 알려줬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덕분에 생각보다 크게 막히지 않는 쾌적한 귀가 길이었다.   심지어 한남동 쪽 주유소 앞에서 로이 리히텐슈타인도 만났다.  Pop Art Everywhere~




정말 간 만에 이대 앞도 지나가 보고, 학교 다닐 때 버스로 오가던 아현동, 충정로 이런데도 이제는 차로 지나가 보고, 유학 전 한국에 있을 때 자주 가던 호암아트 홀, 조선호텔 앞도 지나오다 보니 감회가 새로왔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몽글몽글....   아마 소요시간이 평소보다 짧았다고 느꼈던건 추억따라 상념에 젖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상하다... 분명히 평소 집으로 가는 방향의 반대 방향이었는데... 

(잠시 갸우뚱) 
아하!~ 역시 지구는 둥근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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