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믹스라이스'에 대한 글 Part II
3. 현대미술의 다양한 모습 –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 사회 참여 미술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믹스라이스의 작품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고, 스스로가 현대미술을 어느정도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친숙한 형태의 예술은 아니다. 이러한 작품을 하는 믹스라이스가 2016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고, 이는 세계적인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국의 ‘올해의 작가상’에 해당하는 것이 터너 프라이즈 (the Turner Prize)이다. 그런데, 18명의 작가들로 구성되어 리버풀을 근간으로 활동하는 에셈블(Assemble)이라는 팀이 “그랜비 포 스트릿츠 프로젝트(the Granby Four Streets Project)”로 2015년 터너 프라이즈 수상했다. 이들의 작업은 생활 환경이 열악한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그곳에서 공동으로 낡은 집을 고쳐주거나, 새로 집을 지어주는 작업을 하는데, 그 과정에 사진이나 영상 등 파생되는 예술작품들을 포함하여 집을 짓는 행위 자체까지 모두 그들의 작업에 포함된다. (도판 3)
도판 3) Assemble
이러한 류의 새로운 경향의 예술을 지칭하는 많은 이름들이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명칭으로는 소셜리 인게이지드 프랙티스 (Socially Engaged Practice), 번역하자면, ‘사회 참여 운동’ 정도가 될 것이다. 약칭하여 소셜 프랙티스 혹은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 (Socially Engaged Art)라고도 칭하는데, 공동체와 관련된 문제제기를 의도로 하는 활동을 포괄하는 일련의 예술을 통칭한다. 2004년부터 실행된 터너 프라이즈를 주간하는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홈페이지에 개재된 용어 해설에 따르면, 대부분 협업으로 이뤄지며 공동체와의 공동작업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대부분 봉사활동 (outreach program)이나 교육 프로그램의 결과인 경우가 많고, 사회 운동과 관련이 깊은 이러한 예술 형태의 가장 특징적 요소는 사회참여적 요소이고 따라서 정치적 이슈를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믹스라이스의 작가들이 수년간에 걸쳐 공동체의 주민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의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작업을 해왔듯, 대부분의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 작가들도 그러하다. 2014년 맥아더 그랜트를 수상한 미국작가 릭 로우 (Rick Lowe)도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LA Times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다: “반드시 아주 오랜동안 관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공동체에 뛰어 들어와서, 곧바로 그 곳의 모든 복잡함을 다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만하고 그 공동체를 무시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미국 작가 릭 로우, 영국의 어셈블 그룹, 한국의 믹스라이스 모두 공동 작업을 통해서 사회문제를 제기하므로써 사람들에게 그 문제들을 인식시키고, 나아가서는 문제해결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믹스라이스를 위시한 위에 언급한 이들의 작품을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Socially Engaged Art”라는 타이틀에 자체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작가는 진공상태에 사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자신의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작품을 제작한다.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 말 그대로 하자면, ‘사회와 관련을 맺는 예술’이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러한 타이틀을 달지 못할 예술이 어디 있겠는가? 혹은 그런 기치 아래에서 제작되진 않는 예술작품들은 전부 사회와 유리된 것이라고 할 것인가? 그러한 아이러니를 의식한 탓인지, 믹스라이스의 작업을 지칭하고자 하는 여러가지 시도가 존재한다. 이는 미술 사조내에서의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주의’나 사조들이 실은 그 특정 명칭이 하나로 정착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그 이전에는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렸다는 것을 기억해볼 때,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다. 따라서,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와 같은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예술을 일컫는 용어는 다수 존재하고 아직 확립된 하나의 합의된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4. 공공 미술(Public Art)과 새로운 공공미술 (New Genre Public Art)
먼저, 예술가이자 저자, 교육자인 수잰 레이시(Suzanne Lacy)가 1991년에 처음 만들어낸 용어로 “뉴 장르 퍼블릭 아트 (New Genre Public Art),” 즉 “새로운 장르의 공공 미술”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용어는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서 행해진 공개 퍼포먼스와 수잰 레이시의 저서 『지형의 자리매김: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 (Mapping the Terrain: New Genre Public Art)』이라는 저서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보통 ‘새로운’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은 그 이전이 존재한다는 의미인데, 실제로 ‘공공 미술’이란 단어는 해당 예술작품의 구매자가 개인이든 공공단체이든, 혹은 그것이 설치된 장소가 사유지이든지 공유지이든지 상관없이 공공 영역에 있는 예술을 지칭하는 용어로 폭넓게 사용되어왔다.
공공 미술 (Public Art)라는 용어는 유래를 따져 거슬러 올라가보면, 먼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당시 미국 정부가 구민정책이자 선전정책인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도시의 미화작업에 예술가들을 대거 고용하여 벽화등을 제작하도록 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공공 미술은 1970년대에 이르러 전기를 맞게 된다. 먼저 1960년대 활발했던 인권운동의 결과, 공공 장소에 대한 대중의 권리의식의 대두하게 되는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 시기는 도시 재개발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예술계에서는 대지미술, 미니멀리즘 작품들이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로잘린드 크라우스를 위시한 미술사가와 비평가들의 연구등에 힘입어 예술계와 문화계 전반에 걸쳐 조각의 개념에 대한 재검토를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1977년 공공 아트 기금 (Public Art Fund)가 조성되고, 1979년 ‘건축 속의 예술 프로그램(Art-in-Architecture Program)’이 실행되면서, 미국 전역에 걸쳐 연방 기관의 건축물에는 반드시 미술작품을 함께 조성해야만 하도록 하게 된다. (비슷한 예로, 우리나라의 대형 건물앞의 조각품들, 대표적인 예로 조나단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남자”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공공 미술은 이러한 대형 건물 앞의 조형물과 동일시 되면서, 다시 미술계에서는 이처럼 단순히 장식에 머무는 공공 미술에 대한 비판적 반성도 일어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기념비, 특정인물을 기리기 위한 조각상, 그리고 특정 장소에 설치하기 위해, 그 장소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예술, 즉 사이트 스페시픽 아트 (Site-Specific Art)라는 새로운 경향의 예술이 대두함에 따라 이에 대한 미학적 논의도 활발해졌다. 거기에 1989년 리처드 세라 (Richard Serra: 1938-)의 “기울어진 호 (Tilted Arc)”의 철거를 둘러싸고 법정소송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따라, 공공 미술의 정의와 의의, 나아가서 작가의 권한과 대중의 권리에 대한 미학적, 정치적인 논의가 뜨겁게 펼쳐지게 되고, 사회전반에 걸친 큰 논란을 겪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기울어진 호”는 대표적인 후기 미니멀 아트 작가인 리처드 세라가 건축 속의 예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의뢰를 받아 뉴욕 맨하탄의 한 연방 정부의 건물 (the Jacob K. Javits Federal Building) 앞 광장 (Foley Federal Plaza)에 설치하게 된 작품이다. (도판 4)
도판 4) Richard Serra, Tilted Arc
논란의 발단은 건물의 광장을 가로지르며 놓여진 강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세라의 조각이 그 건물과 주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생활의 방해가 된다는 여론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일어난 것이다. 이에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Site-Specific Art’로 그 장소에 놓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다른 장소에 옮겨진다면 그 작품의 의의가 상실되어버리므로 작품의 이전을 반대한데서 시작한다. 많은 예술계의 인사들이 작가의 편을 들어 언론과 학술 발표를 통해 창작의 자유를 옹호하고, 작가의 의도를 존중할 것을 피력했다. 하지만, 이에 반해, 그곳에서 매일매일을 생활하는 이들의 실질적인 불편함, 그리고 녹슬어 흉물로 변해버린 거대한 강철 덩어리를 봐야하는 시각적인 괴로움을 호소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아, 반대의견도 거셌고 청문회도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공공 미술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 대중의 공익을 위하지 못하는 세라의 작품은 존재가치가 있냐는 것이었다.
결국 여론에 밀려 그의 조각은 철거되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 되었지만, 이후로도 공공 미술의 역할과 의의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는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논의 되고 있는 상황이다. 1991년 수잰 레이시가 “공공미술이란 공원이나 광장에 놓여진 조각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장르의 공공 미술 (New Genre Public Art)”이라는 용어를 창조해 낼 때, 이는 어쩌면 리처드 세라의 조각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일지도 모른다. 과연 예술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고 예술의 자율성을 위해서 그 광장에 계속 두는 것이 옳았던 것인가? 아니면, 예술 작품도 작가도 사회의 일부로서 존재할 뿐이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불편과 혐오감을 주는 것이라면 철거된 것이 정답이었던 것인가? 철거 자체가 여론을 의식한 정치적 행동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공 미술에 대한 리처드 세라의 조각품 사건은 해결점을 제시했다기 보다는 쟁점을 더 많이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수잰 레이시가 정의한 “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에 해당한 일련의 작품이 발표된 대표적인 전시회로는 1993 년 《활동중인 문화컬쳐 인 액션 (Culture in Action)》인데, 시카고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팀의 그룹들이 모여 8개의 프로젝트를 이행하였다. 복잡다단한 이들의 활동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롭고 각 그룹의 관심사도 다양하다. 예를 들면, 메리 제인 제이콥 (Mary Jane Jacob)의 스컬프쳐 시카고(Sculpture Chicago)는 공공미술에 대한 재해석 노력, 도시 빈민지역의 건설에 대한 관심, 그리고 마크 디용 (Mark Dion)과 시카고 도시 생태 활동 그룹 (Chicago Urban Ecology Action Group)이 보여주는 시카고에 국한되지 않는 광범위한 지역의 자연과 생태학에 대한 관심 등이 그것이다. 이들 그룹의 작업은 믹스라이스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다양하고 다채롭고, 예술 작품으로서의 형식이나 주제면에서도 상응하는 점이 많다. 일일이 비교 설명하기는 지면이 부족하기에, 여기서는 참여한 그룹중 하나의 명칭이 ‘Sculpture Chicago’이라는 점만 지적하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여기서 ‘Sculpture’는 조각이고 ‘Chicago’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미국의 도시 시카고이다. 하지만, 그 두 단어의 조합의 의미는 모호하다. 여기서의 ‘sculpture’는 명사로 읽기보다는 ‘시카고를 조각하라’는 동사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들 전시의 이름이 ‘Culture in Action,’ ‘행동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믹스라이스가 ‘섞여 있는 쌀’이 아닌 ‘쌀을 섞어라’라는 뜻에 가까우리라는 추측이 더 타당하게 여겨지는 대목이다.
5. 나가며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 혹은 소셜 프랙티스, 커뮤니티 아트, 사회적 전환 (Social Turn), 액티비스트 아트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 공통적인 특징은 대체로 1) 프로젝트 팀을 이뤄서 작업한다는 점. 2) 사회적, 정치적 이슈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는 점 3) 쉽게 정의내리기 힘든 다양한 형식과 주제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비판은 이미 다다의 포토 몽타쥬에서도 목격했기에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고, 성격은 때로 다를 수가 있다 하더라도 공공 미술의 역사도 꽤 긴 편이라 새롭다고는 할 수 없다. 만화나 낙서 (graffiti)도 팝아트 작가들이 이미 다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놓았기에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리고 구 소련 등의 공산주의 국가의 정치적 선전용으로 제작된 포스터 등의 예에서 보듯 예술이 정치적 이념을 띄고 있는 예도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순수 예술’이란 엄밀한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관람자의 입장에서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는 일견 낯설고 새롭다고 여겨지다가도, 주제나 형식적 측면에서만 보면 친숙하게 여겨지는 부분들이 많다.
이들의 작품이 낯설어지는 부분은 오히려 예술가와 관람객과의 역할과 관계 문제, 그리고 예술 시장에서의 상품으로서의 예술 작품의 가치 문제에 있다. 믹스라이스는 영화에서의 감독과 같은 존재인가 (분명 이 관점은 부정할 것이라 짐작한다) 아니면 그냥 (해당 지역의 주민들과) 공동 제작자라고 불릴 것인가? 아니면, 페스티벌에 동참하는 참가자로서의 ‘관람객’인가? 그들의 작품은 어디서부터이며 어디까지인가? 페스티벌에서의 춤, 노래, 대화도 작품에 포함되는가? 아니면, 그러한 일련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긴 메모, 사진, 영상 등 일정한 포멧을 지닌것으로 한정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구입한다’거나 ‘소장한다’는 의미가 통할 것인가? 아니면, ‘후원한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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