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요즘 볼만한 전시회를 추천해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 말을 듣는 빈도가 높을 때면, '아닌게 아니라 궁금하군!' 하는 맘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여기저기 나도 물어보며 물색을 해보곤 한다. 그러다가 좋은 전시다 싶은게 있으면 추천을 하고. 그런데 최근에 꽤 자주 전시회 추천 요청을 받았으나, 정작 다른 일들의 우선 순위에 밀려 딱히 찾아보지를 못했다.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소개를 살펴보고 전시도 보시고 하시라고 추천! 2012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도라고 한다. 아직 전시를 보지는 못했는데, 요새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공부와 강의를 하다보니, 현대 작가들에 대해 더욱더 관심이 가기도 하고, 한국 현대미술의 동향 및 현대작가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져서인지 이 전시가 궁금해졌다.
영국의 ‘올해의작가상’에해당하는것이터너프라이즈 (the Turner Prize)이다. 그런데, 18명의작가들로구성되어리버풀을근간으로활동하는에셈블(Assemble)이라는팀이 “그랜비포스트릿츠프로젝트(the Granby Four Streets Project)”로 2015년터너프라이즈수상했다.이들의작업은생활환경이열악한지역을찾아다니면서, 그곳에서공동으로낡은집을고쳐주거나, 새로집을지어주는작업을하는데, 그과정에사진이나영상등파생되는예술작품들을포함하여집을짓는행위자체까지모두그들의작업에포함된다. (도판 3)
믹스라이스의작가들이수년간에걸쳐공동체의주민들과깊은유대관계를맺고서로의신뢰관계를바탕으로작업을해왔듯, 대부분의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작가들도그러하다. 2014년맥아더그랜트를수상한미국작가릭로우 (Rick Lowe)도이점을분명히하고있다. 그는 LA Times의인터뷰에서이렇게밝힌다: “반드시아주오랜동안관계를발전시켜야합니다…. 어떠한공동체에뛰어들어와서, 곧바로그곳의모든복잡함을다파악할수있다고생각한다면그것은오만하고그공동체를무시하는행위가될것입니다.” 미국작가릭로우, 영국의어셈블그룹, 한국의믹스라이스모두공동작업을통해서사회문제를제기하므로써사람들에게그문제들을인식시키고, 나아가서는문제해결을모색한다는점에서공통적인목표를가지고있다고볼수있을것이다.그런점에서믹스라이스를위시한위에언급한이들의작품을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의범주에넣을수있을것이다.
물론 “Socially Engaged Art”라는타이틀에자체에대한비판이없는것은아니다. 모름지기작가는진공상태에사는것이아니고, 자신이속한사회와자신의환경의영향을받으며작품을제작한다.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 말그대로하자면, ‘사회와관련을맺는예술’이라는뜻인데, 그렇다면그러한타이틀을달지못할예술이어디있겠는가?혹은그런기치아래에서제작되진않는예술작품들은전부사회와유리된것이라고할것인가? 그러한아이러니를의식한탓인지, 믹스라이스의작업을지칭하고자하는여러가지시도가존재한다. 이는미술사조내에서의우리가알고있는유명한 ‘주의’나사조들이실은그특정명칭이하나로정착될때까지는시간이걸렸고, 그이전에는여러가지명칭으로불렸다는것을기억해볼때, 그다지드문일은아니다. 따라서, 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와같은사회적, 정치적문제에대한언급을하면서대중들의관심을환기시키는예술을일컫는용어는다수존재하고아직확립된하나의합의된명칭은존재하지않는다는말이다.
4. 공공미술(Public Art)과새로운공공미술 (New Genre Public Art)
먼저, 예술가이자저자, 교육자인수잰레이시(Suzanne Lacy)가 1991년에처음만들어낸용어로“뉴장르퍼블릭아트 (New Genre Public Art),” 즉“새로운장르의공공미술”이라는용어가있다.이용어는샌프란시스코미술관에서행해진공개퍼포먼스와수잰레이시의저서『지형의자리매김: 새로운장르의공공미술 (Mapping the Terrain: New Genre Public Art)』이라는저서를통해처음소개되었다. 보통 ‘새로운’ 이라는수식어가붙는다는것은그이전이존재한다는의미인데, 실제로‘공공미술’이란단어는해당예술작품의구매자가개인이든공공단체이든, 혹은그것이설치된장소가사유지이든지공유지이든지상관없이공공영역에있는예술을지칭하는용어로폭넓게사용되어왔다.
이 글은 작년에 쓴 글로 2016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들 중 "믹스 라이스"라는 팀에 관한 것이다. 기존에 알고 있는 회화나 조각, 심지어 설치미술이나 비디오 아트가 아닌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팀'의 작품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글이다.
하지만, 대략이라도 현대미술이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가끔씩 아주~현대적 미술에 대해서도 쓸까 생각중인데, 이 글이 그 첫 포문을 여는 글이 되겠다.
그《올해의작가상》전이라는전시회는원류를따져올라가보면, 국립현대미술관이주관하는대표적인전시로 1995년부터 2010년까지정기적으로개최되었던《올해의작가》전을모태로하고있다. 이를국립현대미술관이 SBS 문화재단의협력을통해, 2012년부터독창성과역량을갖춘작가들을후원하는수상제도로변경하여운영하고있다.어느덧올해로 5회째를맞은《올해의작가상》전은재능있는작가들의발굴을통해한국현대미술의발전을모색해가면서이제는대한민국의대표수상제도로제대로자리매김해가고있는듯하다.
과연 60여년전에한독일철학자의에세이가어떤식으로오늘날한국의한프로젝트팀의작품을비추어주는렌즈가될수있을까에대한의문은믹스라이스를다루는한방송국의다큐멘터리에서언급한 “혐오의시대예술의역할”이라는부제에서일말의실마리를발견하게된다. (2017년 1월 22일일요일밤 11시 5분방영, SBS 아트멘터리 ‘남을위한행진곡’)하이데거의글이씌여진시대도 “혐오의시대”를겪고전후이제막화해를모색하던시기였을것이고, 이는 2017년의오늘날의현실과도일맥상통하고있기때문이다.
하지만, 고정된장소를전제로하는주거는정체성을지켜주는수단이된다는점에서는유용하지만, 본질적으로배타적이고향수를불러일으키는개념이라고봤을때중대한문제를야기한다.그정체성은우리에게고정된정체성을부여하고, 과거에뿌리를내리기위해취해진것으로미래와의진정한관계를방해하는본질적으로후진적인방향성을내표하고있다고도볼수있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