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2019/01 글 목록 (2 Page)
2019. 1. 15. 00:30 미술 이야기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자들이 고안한 협동 작업 방식 중에는 "정교한 시체" 라는 것이 있다. 불어로는 "Cadavre exquis" 영어로는 "Exquisite Corpse"라고 불리는 이 기법의 방식은 간단하다. 

종이를 4등분하여 아코디언처럼 접는다. 함께 참여하는 작가들은 각각 주어진 종이의 1/4에 그리고 싶은 그림을 자유롭게 그린다. 원칙적으로 자신이 그리는 화면 이외 부분은 컨닝하기 없기다.  1/4 만큼의 종이를 사용하지만, 본의 아니게 자신이 그리는 그림에서의 선이 그 다음 칸에 조금씩 번지거나 삐쳐나와 보일 수도 있다. 

그러면 그 다음 칸에 그리는 작가는 그 선들 내지는 흔적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맘대로 그림을 그린다.  그런 식으로 각각이 위나 아래 연관없이 자유롭게 그린 그림들을 펼쳐보면, 제작 단계에서는 전혀 상관없지만, 완성된 그림에서는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작품이 된다.  

그러면 대략 아래와 같은 그림이 된다. 

Man Ray (Emmanuel Radnitzky), Joan Miró, Yves Tanguy, and Max Morise, Exquisite Corpse, 1928. © 2018 Man Ray Trust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 2018 Sucessió Miró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Courtesy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André Masson, Max Ernst, and Max Morise, Exquisite Corpse, 1927. © 2018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Courtesy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왜 이들이 이런 작업을 했냐고?  그건 관습과 도덕에 얽매여 있는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진정한 해방을 획득하기 위함이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인간의 정신 중에서 '의식'이라는 것은 관습에 얽매여 있어 '무의식'과 '잠재의식'이라는 본연의 정신을 억누르고 있다고 믿었다. 물론 이것은 다 프로이트 선생께 얻은 아이디어다. 이 "정교한 시체"라는 놀이와도 같은 작업 방식은 의식의 조정을 최소화 시키기 위한 하나의 장치인 것이다.  

아래는 내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그려본 작품들이다.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달리, 우리 학생들이 시도해본 작품들은 12색짜리 색연필을 나눠서 그렸기 때문에, 의식의 제한은 덜받았는지 몰라도 두 가지 색상이라는 색상의 제한을 받았음이 보인다. ㅋㅋㅋ  하지만, 마치 함께 의논하고 그린 듯한 작품들도 나와서 놀랍기도 한 작품들도 있었다.  (학생 여러분~~~ 우리, 저작권 운운하지는 맙시다~) 


심심하다면, 친구들 모였을 때 한번씩 해보세요~ 누가 압니까? 여러분들의 눌려 있던 의식이 한껏 자유로와지실지?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14. 00:30 옛날 이야기

오늘 나는 이 서양의 유명한 '빨간 두건'과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왠 뜬금포냐구?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일단 읽보시길~


엊그제 살펴봤듯이, "빨간 두건"에서는 늑대와 소녀의 반복적인 문구로 주고받는 대화: 소녀의 '할머니의 ~는 왜~ ?'와 늑대의 '너를 더 잘~ 하기 위해서지.'라며 문장의 리듬을 완성시킨다면, 우리의 '해와 달' 이야기에서는 비슷하게 '엄마 목소리가 왜 그렇게 쉬었어요?" "엄마 손이 왜 이렇게 거칠어요?' 등의 질문들에 대해서, "하루 종일 논에서 참새 쫓느라 고함을 질러서 그렇단다." "하루종일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렇단다.' 이런 식으로 반복되면서 리듬이 완성된다. 

또한 고개를 하나 넘을 때마다 짜잔~ 등장한 호랑이가 산너머 부잣집에서 일을 해주고 오는 엄마를 막아서며 말하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의 반복이 추가된다. 


물론 "빨간 두건"과 마찬가지로 잔혹 동화 버전도 존재해서, 소쿠리의 떡을 다 빼앗긴 엄마에게 계속 등장한 호랑이가 이번에는 '팔 하나만 주면 안잡아먹~지,' '다리 하나만 주면 안잡아먹~지'를 외치다 결국 몸통만 남은 엄마가 데굴데굴 굴러 고개를 넘고 있는 것을 마지막에는 그냥 '꿀꺽' 해버린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어쨌든 엄마를 잡아먹고 재주를 폴짝폴짝 넘어 오누이의 엄마로 변장한 호랑이가 엄마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는 오누이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가서 아이들을 잡아먹으려 한다. 이 때 오누이는 때로는 순진하게 속고, 때로는 재치를 발휘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늘에 기도를 드린 뒤 내려온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 해와 달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우물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 아이들이 우물 속에 있다고 생각하고 속고, 두번째에는 나무를 오르는 데 참기름을 나무에 바르고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하다 쭐딱쭐딱 미끄러진 호랑이가 순진한 누이가 도끼로 찍으며 올라왔다는 비결을 듣고 따라 올라가는 등이 그것이다.) 

호랑이도 뒤늦게 기도를 드렸고, 하늘은 이번에는 썩은 동아줄을 내려줘서 그걸 타고 하늘로 오르던 호랑이는 떨어져 죽었는데, 그곳이 수수밭이라 이후 수수는 호랑이의 피 때문에 붉어졌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빨간 두건" 이야기의 연결점은 무엇인가?  먼저 두 이야기를 일종의 'Rite of passage' 즉, 통과의례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통과의례는 보통 세단계로 나뉜다.  

1. (기존 존재 내지 사회와의) 분리, separation, 

2. 경계선 상에서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이전과 이후의 사이의 과도기를 의미하는 전이, transition, 

3. (이전보다는 성숙하고 독립된 존재로서의) 전체와의 통합 incorporation 

이러한 세 단계를 거치면서 비로소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독립된 존재로서 독립적인 사회적 조직원이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빨간 두건 소녀도 오누이들도 할머니를 찾아가고, 일 나간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소녀와 아이들에서 늑대나 호랑이와 맞닥뜨리면서 변화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오늘은 신화나 전래동화, 혹은 민담을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그리스 신화도 마찬가지지만, 많은 종류의 신화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환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매일 낮이면 떠오르는 태양과 밤이면 자리를 바꾸어 등장하는 달의 기원을 그들이 가진 지혜를 한껏 발휘하여 이해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일견 잔혹해보이는 신화의 내용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자연의 현상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에서 우라노스와 크로노스가 각자 자신의 아들에 의해 주요부분을 잘리거나 신체부분을 잘려 땅에 흩뿌려짐으로써 죽음을 당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리가 감자를 씨가 있는 부분들을 조각조각 나누어 땅을 뿌리는 행위를 연상해보면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제우스가 천하의 바람둥이로 등장하는 이유는 태초의 신으로서 세상의 만물을 생산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설정이었다는 것도 이해해볼 수 있다.  

"빨간 두건"에서 늑대에게 잡아 먹힌 할머니와 소녀가 사냥꾼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설정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등장한다. 티탄족이었던 크로노스는 자신도 아버지를 거세시킴으로써 왕이 된 인물. 그런데,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자신도 자신의 자식에 의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게 된다. 이를 피하고자 그는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잡아먹어 버린다.  이 장면의 끔찍함을 충격적 화면을 즐겨 제작하던 스페인 화가 고야가 그리기도 했다. 

Francisco Goya, Saturn Devouring His Son (c. 1819-23) oil mural transferred to canvas ; 143 × 81 cm,  Museo del Prado, Madrid

이를 보다 못한 크로노스의 부인이자 대지의 여신이었던 가이아는 제우스가 태어나자 제우스 대신 큰 돌멩이를 주고, 이를 모르고 크로노스는 돌덩이를 꿀꺽 삼켜버린다.  제우스는 무럭무럭 자랐고 결과적으로 신탁대로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  그리고 이제까지 크로노스가 꿀떡꿀떡 삼켜버렸던 그의 자식들은 그의 뱃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나중에 제우스가 그의 배를 가르자 다 무사히 살아나온다.  "빨간 두건"에서, 늑대의 배 속에 있다가 무사히 살아나오는 할머니와 빨간 두건 소녀처럼 말이다. 

다시 오늘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서양에서는 "빨간 두건", 한국에서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라는 이야기에서 태양이 나타나게 된 것을 이해하고자 만들어낸 이야기로 해석해보자. "빨간 두건"이 태양이 등장하게 된 이야기라는 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프랑스의 전래동화 중에서 "Blanchette," 영어로 번역하면, "The Little Golden Hood"라는 이야기가 있다.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빨간 두건"과 유사하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소녀의 이름이 "Blanchette" 즉 "blanc"이라는 흰색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그녀의 이름은 달과 연결지어 볼 수 있는데, 그 근거로는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달을 흰색이라고 여겼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의 독특한 점은 그녀가 입고 있는 망토가 마법이 깃들여 있는 특별한 것인데, 그 옷의 색상이 바로 황금색이다. 

이 이야기에서 "황금색"과 연관되어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하는데, 어떤 버전에서 이 소녀는 결국 태양이 된다.  서양에서 태양은 (붉은색으로 여겨지는 동양에서와는 달리) '황금색' 혹은 '노랑색'과 연관된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빨간 두건"이라는 이야기는 각각 다른 변형의 버전에서 각각 태양과 달과 연관된다는 점, 심지어 한 버전에서는 달이자 태양이었던 점을 알 수 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는 소년과 소녀가 등장하고, 이들은 해와 달이 되어 번갈아가며 하늘을 비추게 된다.  서양에서의 "빨간 두건"에서는 소녀가 버전에 따라 소녀가 번갈아가며 해와 달을 다 상징하는 반면,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는 어둠을 무서워하던 소녀가 태양이, 소년은 달이 되었다는 점에서 차이는 있다. 

등장한 주인공 어린이(들)을 노리는 악당이 이 각각 늑대와 호랑이로 나타나는 점은 다르지만, 서양 우화에서는 늑대가 대부분 악당으로 등장하지만, 때때로 꾀보 여우에게 당하는 어리숙한 상대로 등장하는 점은 우리나라 동화에서 호랑이가 악당으로 등장하지만, 토끼같은 꾀돌이에게 당한다는 면에서는 일면 상통한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떨어진 곳에서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칼 융의 이론으로 읽어보면 흥미롭기도 하고 이해되기도 하지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이상 나름 비교 분석해본 서양의 "빨간 두건"과 한국의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였습니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13. 00:07 영화 이야기

며칠 전 지인이 앙코르와트 여행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갑자기 떠올랐다. "화양연화 (花樣年華)"  영어판 제목으로는 In the Mood for Love.

사실 이 포스터가 요약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자는 남자가 다가올 여지를 주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만, 남자는 용기가 없어 다가가지 못한다. 그리고, 여자는 돌아서서 떠난다. 

유명한 영화다 보니, '화양연화'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곳에 설명이 있다. 인생에서 꽃을 피운 가장 아름다운 시절, 춘삼월과 같은 호시절이라는 해석이다. 그리고 193-40년대 상하이에서 유행했던 '화양적연화'라는 제목의 중국 노래가 영화에 삽입되기도 한다는 깨알 지식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내 생각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꽃과 같은 시절'이 의외로 '한 때'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Ambrosius Bosschaert the Elder (1573-1621), Still-Life of Flowers (1614) 

서양 회화에 빗대자면 '바니타스 회화'라고나 할까?  아름다운 꽃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지만, 다음 순간, 그 꽃의 찬란한 아름다움은 곧 스러질 것이라는 아련한 안타까움.  물론 바니타스 회화에서는 따라서 영원한 아름다움과 진리를 추구해야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하지만 말이다. 

이 영화는 냉정히 상황만 놓고 보면, '불륜'에 관한 영화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연애 영화는 아니다. 이별에 관한 영화이다.  사실 자세히 보면 어정쩡한 불륜에, 시작은 제대로 없고 이별의 끝만 있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실 줄거리는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싯구에서 다 요약해주는... 스토리 자체에서는 그다지 쨍~한 것은 없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빈약한 스토리라인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이야기를 하는 방식과 섬세하고 시각적인 연출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것은 1962년 홍콩의 한 아파트.  그 곳으로 이사온 상하이 출신 주민들. 엄청 좁은 아파트에 좁은 복도. 그 사이를 부딪치지 않고 스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용하다 했는데...  거기로 이사오고 나서일까? (아님 사단이 나고 의도적으로 같은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일까?) 여하튼 사건은 불거지는데... 

공교롭게도 그 아파트에 사는 두 커플이 어느날 한 사람은 자신의 남편이,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아내가 바람을 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것이 알고보니 크로스 불륜.  이 둘은 머리 맞대고 상담하다가 연애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줄거리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영화의 주인공, 장만옥과 양조위.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왕가위 감독이다.  

이 영화는 전체 플롯이나 스토리 전개보다는 미장센이 훨씬 돋보이는 영화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별 일 아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미술 장치나 화려하면서도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또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주인공들의 의상, 그리고 중요한 장면에서 얼굴 대신 비추는 손의 섬세한 떨림. 때로는 얼굴보다 손이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어느 드레스 사이트에서는 장만옥의 드레스만 따로 스틸을 모아서 포스팅을 했을 정도로 그녀도 그녀의 드레스도 아름답다. 그리고 그 드레스와 아파트나 사무실, 그리고 홍콩 뒷골목의 벽과 잘 조화를 이룬다. 

배우자의 불륜이라는 충격적 사건 앞에서 같은 (정말 같은)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며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는 두 남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앞에서 요약본으로 다 밝힌듯 하지만, 굳이 한 번 더 밝히자면, 힌트는 '앙코르와트'

우리 나라식으로 하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다.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있으면 벽의 구멍에다 대고 이야기 하고 나서, 그 구멍을 진흙으로 막아버리는 것.  눈빛만으로 10번쯤 실연한 연기를 하는 양조위가 앙코르와트에서 하는 행동이다. 

마지막 싯구처럼 어차피 과거는 '먼지 낀 창으로 들여다볼 수 있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기만 한것.'  영어 번역에서는 'glass darkly'라는 구절이 나오는 데, 고린도 전서에 나오는 구절로 인간의 지식이 불완전 한 것을 빗대는데 사용된 구문이다.  불완전한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 그리고 찰나같은 아름다운 시절.  '화양연화'는 그런 아름답지만 짧고 허무하고, 그래서 더더욱 아련한 것에 대한 영화이다.  


물론 앙코르와트 여행 갈 친구는 그럴 일 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여행을 하고 오겠지만, 그리고 내가 그곳을 여행한다고 해도 즐거운 추억 담뿍 쌓고 올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 속에서 앙코르와트는 영원히 '화양연화'와 함께 할 것 같다.   

그리고 좁은 복도를, 홍콩의 좁은 골목을 아름다운 치파오를 입고 누비던 장만옥의 뒷모습을 슬로우비디오로 잡으면서 흘러나오던 'Yumeji's Theme'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작곡가 우메바야시 시게루 (梅林 茂)가 1991년 일본 영화 유메지 (夢二)를 위해 작곡한 곡을 '화양연화'에서 재사용한 것이라 한다. 시각적인 영화인 화양연화에 일본화가 타케히사 유메지 (竹久夢二)에 관한 영화에 사용되었던 곡을 사용했다는 것도 왠지 의미심장하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12. 06:01 일상 이야기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사느냐, 참느냐'가 문제다. 

우리가 추상미술에 이끌리는 이유를 뇌과학으로 풀었다는 책의 광고를 보았다.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환원주의의 매혹과 두 문화의 만남


짐정리 힘겹게 겨우 대충 끝난지 얼마 안된다.  넣을데 없는 책들 겨우겨우 밀어넣고 집어넣고 하면서, '내 집에 있는 책들 어느 정도 다 읽고 버리기 전까지 다시 내 새 책 사나 봐라' 했는데, 나왔다, 궁금한 책이...

그렇다!  도서관서 빌려 봐야지... 했는데...

도서관엔 없.다.

사느냐, 참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여기다 북마크 해놓고 조금만 더 생각해보기로......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12. 02:17 옛날 이야기

며칠 전 '아기 돼지 세 마리'에 대한 글을 올리다보니, 크고 못된 악당 늑대, Big Bad Wolf가 등장한 또 다른 이야기가 떠올랐다. '빨간 두건' 혹은 Little Red Riding Hood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도 대부분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엄마가 만들어준 빨간 망토를 입은 소녀는 숲 속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를 찾아가게 되는데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소녀의 엄마가 음식 바구니를 내밀며 편찮으시다는 할머니께 갖다 드리라는 퀘스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아기 돼지 삼형제' 이야기에서는 '커다란 악당 늑대 (Big Bad Wolf)'는 폐활량이 엄청났지만, 이번 늑대에는 일단 식욕이 엄청나고 그 엄청난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변장도 불사하는 것으로 등장.  숲 속에서 만난 소녀에게 들은 말 만으로 지름길을 이용해서 할머니 집에 먼저 도착해서 할머니를 '꿀꺽' 삼켜버리는 것으로 보아 길눈도 엄청 밝은 걸로. 

늑대가 소녀를 잡아 먹으려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나,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할머니를 먼저 잡아 먹고 할머니로 변장하여 소녀를 속여 그녀마자 잡아먹는 것은 동일하나, 그 과정이나 결말에 있어서는 다양하게 변형된 버전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원래 구전되던 이야기이던 만큼 현재 남아있는 이야기에도 구전시 암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채용했을 리드미컬한 반복이 많이 남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할머니의 옷과 나이트 캡을 쓰고 침대에 누워서 빨간 두건 소녀를 맞이한 늑대를 향해 소녀가 할머니의 정체를 확인하는 과정은 반복적인 구문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구전동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할머니로 변장한 늑대를 보며, 할머니의 신체 부분이 왜 이렇게 크고 기냐며, 팔, 다리, 귀, 눈, 입에 대해 질문하는데, 이 모든 특징이 다 소녀를 잘 안기위해서, 빨리 뛰기 위해서, 소녀의 소리를 잘 듣고, 소녀의 모습을 잘 보기 위해서라고 설명을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커다란 입은 그녀를 잘 잡아먹기 위해서라며 소녀도 '꿀꺽' 잡아먹는데, 이 둘의 대화가 리드미컬하게 반복되고 점층법을 사용해 긴장을 고조시킨 다음에 결국 소녀를 잡아먹어버리는 것이다. (이 과정을 냉정하게 보면, 아 빨간 두건 소녀는 눈이 엄청 나쁘구나....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어떤 버전에서는 할머니의 정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할머니로 변장한 '늑대'는 이번에는식인을 빨간 두건 어린이에게도 종용하는 것으로도 나오는데, 이 과정이 모두 리드미컬한 구문으로 진행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방송, 아니 블로그 심의 규정상 아래쪽에 따로 마련하였다. 정 궁금하면 맨 아래쪽에서 읽어보시길.) 

이야기에 교훈을 주입하는 것은 사실 후대의 노력으로 '구전동화'란 원래 주방의 화로 주변에 모여 하인과 하녀들의 오락거리였기에, 딱히 교훈이 필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지루한 겨울 밤, 할 일을 막 끝내고 피로를 풀려고 하던 그들에게는 충격적인 얘깃거리가 그들 사이에서는 더 인기가 있었으리라.  보다 더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는 매번 이야기에 살을 덧붙이다보니 점점 더 자극적이 되어 갔을 것이다.  

이를 글로 처음 옮긴 이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 1628-1703)이고, 이후 우리들에게 '페로 동화'라고도 널리 알려진 “어미 거위” 이야기가 탄생한다.  1697년 출판 당시의 원제는 "과거와 도덕에 관한 이야기들"로 "어미 거위"는 부제였다. [Histoires ou Contes du Temps passé: Les Contes de ma Mère l'Oye] 그리고, 이야기에 교훈을 본격적으로 주입시킨 이도 페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이야기의 주제는 '좋은 집안 출신의 아름답고 젊은 규수들은 친절하게 접근하는 낯선 '늑대'들을 조심하라'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이전의 자극적이고 충격적 이야기를 좀 순화시키면서 손녀의 식인부분은 생략하였지만, 교훈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  소녀가 변장한 늑대의 침대로 오르는 것에서 이야기가 끝을 맺는다. 

우연히 지나가던 사냥꾼이 늑대의 계책과 만행을 눈치채고, 잠든 늑대의 배를 갈라, 할머니와 소녀를 구하고, 자신은 늑대의 가죽을 얻는다는 윈윈 전법으로 변형된 이야기는 이후의 또 다른 유명 동화, '그림 동화'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이 그림 동화는 '그림이 있는 동화'라는 뜻이 아니라, 야콥 그림 (Jacob Grimm: 1785-1863)과 빌헬름 그림 (Wilhelm Grimm: 1786-1859) 형제의 합작으로 전래 동화를 집대성하여 만든 Children's and Household Tales, Grimm's Fairy Tales이다.  독자가 어린이들임을 염두에 둔 만큼 우리의 주인공들이 무참하게 늑대에게 먹혀버린 것으로 끝내기에는 못내 찝찝했었음에 분명하다. 



물론 구전 동화라면 다 그렇듯 여러가지 버전이 있어서 이 밖에도 다양한 변형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는 할머니와 소녀가 합작하여 복수하는 버전도 있다. 앞의 부분까지는 그림 동화와 동일하여 할머니와 소녀가 구조되었으나, 숲 속에 사는 늑대가 한 마리가 아니라는게 함정. 이번에는 할머니와 소녀는 오히려 늑대를 굴뚝으로 유인, 그 아래에는 펄펄 끓는 물이 가득 담긴 솥이 놓았다는 이야기.  늑대는 안을 들여다보려고 목을 쭈욱~ 빼고 내려다보다 몸의 균형을 잃어 굴뚝 밑으로 쑥 떨어져 물이 끓고 있는 솥에 풍덩 빠지고, 결과적으로 사냥꾼은 늑대의 가죽을, 소녀와 할머니에게는 늑대 스프를 한 솥 가득 갖게됨으로써 복수가 완성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초기 이야기에는 할머니께 갖다 드리고자 한 음식들도 변주가 다양하다. 처음엔 커스터드와 버터 한 덩어리였다가, 스프였다가, 빵과 와인이었다가....(그러나 뭣이 중헌디... 말을 옮기다보면 그 정도야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초기의 이야기에는 아이의 옷차림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가, 그냥 두건으로만 나오거나, 옷의 색상도 빨강이 아닌 노랑색인 경우도 있고 말이다.  북구쪽의 유사한 이야기에서는 마법이 깃든 황금으로 만든 것이었다는 것  

이 유명한 이야기에 대해 여러가지 분석이 존재한다소녀가 입고 있는 것이 붉은 'riding hood'는 주로 말을 탈 때 여성들이 덧입는 옷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장옷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이러한 옷으로 주인공 소녀가 등장하는 것은 후대의 버전으로 이전에는 빨강색 두건이었지만, 앞서 언급했듯 노랑색으로도 존재한다는 것

대부분 붉은 색에서의 상징에 주목하여 소녀가 여인이 되는 가정에 겪는 '생리혈'의 상징으로 보고, 늑대가 소녀를 침대로 이끈다는 점에 주안하여 이것에서 성적인 상징을 읽는 경우도 있다.  이는 아이가 빨간 두건을 쓰고 등장한 이후, 그리고, 교훈이 첨가된 이야기일 경우에는 적용가능하지만, 두건의 색이 다르거나, 주인공 소녀가 붉은색의 의상을 착용하지 않은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 맹점이 있다.  

그보다는 이러한 이야기는 '낯선 자를 경계하라'는 교훈의 cautionary tale라는 데서 의미를 찾는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cautionary tale'이란,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조심시키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보통 이러한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어른이나 신성한 존재에게 '~만은 절대 하지마라'는 경고를 듣는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주인공은 꼭 그 하지말라는 행동을 하고, 그 때문에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빨간 두건' 소녀의 경우, 할머니와 소녀 자신의 목숨이 댓가였던 셈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구전동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인데, 예전의 사회가 서양이나 동양이나 대부분 농본사회로 소규모 이웃이 모여사는 고정된 사회였음을 반영한다. 따라서, '낯선 사람' 혹은 '이방인'은 경계의 대상이자, 그 작은 커뮤니티의 이질적인 존재로 그 사회에 흡수되기 어려웠음을 반영한다.      

오늘은 '아기 돼지 삼형제'와 마찬가지로 늑대가 악당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이야기 '빨간 두건'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내일은 '빨간 두건'과 관련해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럼 내일 다시~



이하는 블로그 심의 규정상 다소 잔인한 버전의 "빨간 두건" 이야기. 노약자나 임산부, 맘 약한 사람들은 주의하시고,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건너뛰심이....

이태리 버전에는 늑대 대신 오거 (orge)가 나오는데, 할머니의 내장을 걸어두고, 찬장에 할머니의 이를 담아두고, 컵에 할머니의 피를 담고, 탁자의 접시 위에 할머니의 살을 발라 놔두고 차례로 마시고 먹으라고 시킨다. (오거란 슈렉과 같은 종류의 괴물. 우리 슈렉이야 좀 더러워서 그렇지 엄청 착하지만, 원래 그의 조상은 잔혹한 괴물이다.)  

에 들어선 빨간 두건 소녀가 말한다. "할머니, 배고파요."

오거가 대답한다. "부억 찬장에 가보렴. 거기 쌀이 좀 있단다."

빨간 두건이 찬장에서 이를 담아둔 접시를 꺼내곤 이야기 한다. 

"할머니, 이 쌀들이 무척 딱딱해요!"

"닥치고 먹기나 해! 그건 네 할미의 이니까!"

"뭐라고요?" 

"닥치고 먹기나 하라고!" 

이런식으로 전개되면서 "닥치고 먹기나 해! (Eat and keep quiet!)"가 반복된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10. 00:30 미술 이야기

예전에 진주는 눈물을 상징하므로 '결혼 안 한 아가씨들은 진주 목걸이 하는게 아니다'라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나야 진주 목걸이가 없어서 안하고 다녔기에 본의 아니게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듣는 '아가씨'가 되어버렸지만. 

원래 진주란 것이 특정 조개 속에 들어간 이물질을 몸 안에서 삭히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이니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된 내력은 짐작할 만하긴 하다. 그래서 '진주'는 때때로 각고의 노력 끝에 맺는 결실을 비유하기도 한다.  양식 진주가 등장하기 전, 진주는 100% 천연 진주였기에, 엄청나게 귀해서 한때는 다이아몬드보다도 비쌌다고도 하는데...

미술 작품 중, '진주' 하면 유명한건 역시,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1632-1675)(요즈음 표기법으로는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 (1665)일 것이다. 

Johannes Vermeer, Girl with a Pearl Earring (c. 1665), oil on canvas ; 44.5 × 39 cm,  Mauritshuis, The Hague, Netherlands    [여담이지만, 베르메르의 소녀가 하고 있는 진주는 진짜 진주가 아니라, 당시에 막 개발되던 기법들로 만들어진 모조 진주다.  갈치 같은 은빛 나는 생선의 표면에서 나온 색소들을 주석에다 문질문질 채색하여 만든 것 (그게 가능하게 하는 것이 개발된 기술이란 말씀. 집에서 실험해보고 그러지 말자.)  만약 실제 저 정도 크기의 진주 귀고리라면 가격이 너무나도 어마무시 했을 것이고, 당시로선 무명 화가였던 베르메르 같은 일개 화가가 소품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늘은 베르베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가 주인공이 아니다.  그렇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우연히 발견한 이 장식품!  

'진주는 눈물'이라는 것을 이 브로치만큼 성공적으로 시각화한 작품이 있을까 싶어 좀 살펴보았다. 

             Eye Miniature, early 19th century. ©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관련기사: The Mysterious History of Lover’s Eye Jewelry)


이 브로치는 18세기말의 영국 왕 조지 4세 (George IV: 1762-1830)가 아직 왕위를 계승하기 전 프린스 조지 오브 웨일즈 (Prince George of Wales)로 불리던 왕자 시절에 짝사랑하던 여인 마리아 앤 피처버트 (Maria Anne Fitzherbert: 1756-1837)에게 연애편지에 동봉해서 보낸 선물이라고 한다. 

한 쪽 눈은 왕자의 초상에서 눈 부분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다이아로 표현한 눈물 한 방울 또로록~

여기까지만 들으면 '꺄악! 너무 로맨틱하잖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눈 한 쪽이 주는 느낌은 로맨틱하지만은 않을 뿐더러, 다소 기괴한 느낌도 없잖아 있다.  그리고 알고 보면 둘의 사랑도 그렇게까지 순애보적인 것 같지만은 않다. 

좀 들여다보면, 이들의 로맨스는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다. 

영국의 왕자가 사랑한 여인이 두 번이나 결혼했다가 두 번 다 남편을 잃은 평민 출신의 미망인인데다 카톨릭 집안 출신이라 영국 국교와는 종교도 다른 여인이라는 점.  국법으로 왕자와 결혼할 수 없는 처지의 몸이었다 한다. 하지만, 첫 눈에 이 여섯 살 연상녀에게 반한 왕자는 끈질기게 구애를 하여, 결국 둘은 비밀리에 결혼식까지 감행하지만, 왕의 집안에서 그것을 용인할 리 없었고, 국왕의 윤허가 없었기에 법적으로 둘의 결혼은 무효. 

게다가 이 왕자님이 워낙 씀씀이가 크셔서 파산 위기라 그 재정난을 이기고자 친척이자 부자인 신부를 맞이하게 되고... 이런 연유로 결혼한 둘 사이에 애정이 있을리 만무해서, 결국 첫 아이를 낳자마자 둘은 별거 상태. 왕비는 왕비대로 애인이 생기고, 왕은 왕대로 열손가락 모자라게 수많은 여인들과 연애행각을 벌였다고 한다. 

귀족 집안의 여성들도 결혼하지 않으면 상속권이 없고, 결혼해야만 상속을 받을 수 있는데, 상속 된 재산이 남편의 명의가 되고, 그 남편이 부인보다 먼저 죽는 경우, 부인이 아닌 자식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19세기 말까지의 법이었다. 사실 마리아 앤이 두번째 결혼을 서둘러야 했던 것도 첫번째 결혼 후 얼마되지 않아 남편이 말에서 떨어져 죽는 바람에, 아내에게 따로 재산을 남긴다는 유서를 쓸 틈이 없었기에 무일푼으로 생활고에 시달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왕자와 인정 받지 못한 결혼을 한 그녀는 '연금을 제 때 주지 않으면, 둘의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나 문서를 공개해버리겠다'고 왕실에 협박을 해서 생활비를 받았다고도 전해진다.  

조지 4세는 문화와 예술에는 관심이 많아 '영국 최초의 신사'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지만, 한 수행원이 남긴 글에는 '백성을 생각하는 왕이나 귀족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조지 4세는 그 중에서 최악'이라는 구절이 있다는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다지 훌륭하고 인기있는 왕은 아니었던 듯하다.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이기적이고 성격 나쁘고, 행실 나쁘고, 낭비벽 심한' 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4세의 마리아 앤 피처버트 사이의 사랑에 대한 일화들은 절절한 면들도 있다.   

마지막 왕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피처버트가 보낸 편지를 읽고는 베게 아래 지니고 있었고, 피처버트는 피처버트대로 왕의 건강이 악화된 것은 모르고 답장이 없음에 무척이나 가슴아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위의 '눈물 한방울 똑! 진주 브로치' 선물에 대한 화답이었는지 피처버트도 자신의 눈동자가 담긴 펜던트를 선사했던 듯한데, 유언이 그 펜던트를 자신의 목에 걸어달라는 것이었다고. 그리고 조지 4세가 죽은 뒤, 마리아 앤 피처버트에게 왕실에서 귀족 작위를 수여하려 했으나, 그것은 반려하는 대신, 자신이 상복을 입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오늘 날 우리들의 눈에는 다소 기괴해 보이는 '외눈 브로치,' 혹은 Eye miniature는 당시에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며 귀족들 사이에 유행을 했다. 

Memorandum Case with a Portrait of a Women's Left Eye. Courtesy of the Philadelphia Museum of Art.

Portrait of a Right Eye (mounted as a ring). Courtesy of the Philadelphia Museum of Art.  

조지 4세와 마리아 앤 피처버트와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렇게 연인들이 은밀하게 주고 받았을 선물이었을 이 '외눈 브로치' (가끔 양쪽 눈이 다들어가 있는 것도 있긴하다)는 따라서, 브로치나 반지 등과 같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형식이 많다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러한 작품들의 주문 내역이나 혹은 제작자의 이력 등 배경역사가 제대로 남아 있을리 없다. 클리브랜드 뮤지엄 (Cleveland Museum of Art)이나 필라델피아 미술관 (the Philadelphia Museum of Art), 그리고 세계적인 공예 미술관인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미술관 (Victoria and Albert Museum) 등에 이러한 작품들이 다수 소장되었다고 하는데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연구를 할래도 기록이 있어야 뭐래도 덤벼보지, 그렇다고 생존자들이 있어 녹취를 딸 수 있나...)  

글 첫머리에 다소 기괴하다고 했으나, 만약 사랑하는 이에게 그의 눈동자가 담긴, 게다가 거기 눈물 한방울 또르륵! 브로치를 받았다면 '심쿵'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도 없이 남겨진 다른 'Eye miniature'들의 사연이 무척 궁금해진다. 

미래의 미술사학자나 역사학자들, 아니면 나같이 호기심 많은 후손들을 위해서 연인들이여, 은밀한 선물을 하더라도 어디엔가는 기록을 남겨주시라~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9. 00:30 일상 이야기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도.... 내 천성이 천지개벽하게 바뀌지 않는한 엇비슷하게 살았을거 같긴하다.  어쩌면, 미래가 어떻게 될 지 알기라도 한다면, 반드시 바람대로만은 되지 않았을 일을 미리 더 괴로워하며 지낼지도 모른다. 따라서, 가끔씩 내 어린 시절, 젊은 시절 그립기도 하고, 어릴 적 어리석은 판단들에 대한 후회가 남긴 하지만, 다시 살아내는 것이 더 큰일인지도 모르겠기에 난 그냥 지금 이대로 사는게 낫다 싶다. 어쩌면 어릴 때 몰랐던 것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인생의 더 큰 묘미인지도.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내게 주어진 일이라면 열심히, 그리고 "제대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자면, 내가 인생의 전환점마다 배워야 했던 불어에 관한 경험이다. 

대학 때 교양 한 학기 배우는 '불어'라 무시하고 시험 전날 벼락치기로 배워서 땜빵해서 대~충 시험 치르고는 그걸로 나랑 불어와의 인연은 끝! 인줄 알았다.   

그런데, 대학원 입학 시험 때 한 학교는 입학 시험 때, 또 한 학교는 졸업 전까지는 또 불어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 대학 교양 불어 때 좀 열심히 할걸~' 후회를 했다. 부랴부랴 몇 달 간 알리앙스를 다니며 나름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 때 시험을 치렀고.... 또 그로서 나랑 불어와의 인연은 이제야말로 끝! 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미국 가서도 대학원 과정에서 불어 시험은 또 봐야 했었고, 영어랑은 다르게 실생활에서 쓸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다 까먹어버린 불어를 시험을 위해 또다시 문법책을 꺼내들고, 다시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나마, 저녁마다 '알리앙스' 쫓아다녔던 시절이 있어 기억을 되살리는데 비교적 짧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그 뒤로도 불어를 사용할 일은 많이 없어서 이제는 발음 규칙이나 불어 동사 규칙 같은 것만 아련히 기억에 남아 있을 뿐, 대부분 까먹어 버렸다.  그런데, 또 불어를 알고 있다면 편리한 상황에 부딪쳤다.  이번에 다시 공부를 하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매번 문법책을 다시 펼쳐봐야 할 어중간한 단계가 아닌 제대로 된 어학으로서 기본을 다지고 싶다. 




이와 연관되어 '토익' 시험을 준비하는 어린 학생들을 보며 느꼈던 단상이 떠오른다. 예전 공공 도서관에서 토익 준비를 하느라 토익 문제집을 산더미같이 쌓아놓은 학생을 보고 이 중에 베스트셀러는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시 난 한국에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다들 '토익 몇 점 이상'이 되어야 취업을 하네마네 하길래, 도대체 어떤 시험이길래 다들 그렇게 목숨을 거나 싶어 시험의 내용과 구성이 궁금했고 (당시 그 도서관 자리를 차지한 대부분의 학생은 '토익'을 공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내용을 파악하기엔 토익 문제집 베스트셀러가 제격이라 여겨져서이다.  

그 학생이 건네 준 책을 살펴보니, 전반적인 시험의 구성에 대해서는 알 수 있었다.  시험 문제로 나오는 내용은 예전 내가 학교 다닐 때의 영어시험이나 토플보다는 실생활에 관련된 내용이 많았고, 독해의 수준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는 정도가 파악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책의 본 내용이었다. 기억 나는 것은 테니스 복 차림의 여성이 보도블럭에서 도로 쪽으로 다리를 내리고 앉아 신발을 고쳐 신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나와있었고, 아래 해석에는 '인물의 사진이 전경에 있을 때에는 현재 완료형은 답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이 그 챕터의 주제 문구였다!  

물론 자세한 내용은 이제는 잊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문법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람이 주어가 되어 그 사람이 행위를 하고 있다면 동작 중이기 때문에 시제 상, 행위가 완료된 것을 의미하는 현재완료형을 사용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틀리기 때문일 터이다. 문법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아는 것이 그 의미없는 공식들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 당시 내 느낌이었다. 그렇게 챕터별로 이해하자면 이해할 수 있지만, 이후에 전혀 쓰임이 있을 것같지 않은 요령들로만 채워진 그 책이 베스트셀러라니... 의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책이 베스트셀러일까? 책 날개에는 저자가 '미국 물 한번 먹지 않고도 토익에도 우수한 점수를 얻었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뭐, 이런 식으로 광고 문구가 있었던 것 같다.  다들 한 학기라도 해외 연수를 가거나, 혹은 하다못해 워킹 홀리데이도 간다고 하는 때였는데, 그런 때 혼자 자력으로 국내에서만 영어 공부를 해서 다들 고득점을 목표로 하고 있는 영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은 점에서는 크게 칭찬해줄 만 한 일이다. 

문제는 그 책으로 공부한 학생들이 과연 일 년 후, 자신들의 전공 교재나 혹은 실무에 필요한 영어 자료들을 읽을만한 실력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난 내가 지금 하는 공부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다져서, 수 년 후에도 내가 지금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난 내가 지금 하는 공부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다져서, 수 년 후에도 내가 지금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만약 어린 내가 '토익'을 공부해야만 한다면, 난 그 시험을 치르고 나서도 영어로 읽고 쓰고 하는 것이 체화되어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서, 지금 내가 쏟아붓고 있는 나의 젊음이 헛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점수'만 잘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 길지 않은 내 인생의 시간을 가치있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당장 적은 노력으로 (내가 보기엔 그 베스트셀러의 공식을 외우는 노력이 실제로 영어 공부를 하는 것보다 딱히 쉬운 것같지도 않았다) 눈 앞의 성과를 꾀하는 요령은 단기적으로는 이득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손해이다. 요령으로 쌓은 지식은 쓰려고 조금만 힘을 줘도 금방 찢어지는 습자지 같아서 쓸모가 없다.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다 엇비슷하기에 기초 없이 요령만으로 이어가기엔 인생이 길고, 그것만으로 버티기엔 밑천은 금방 드러나는데, 그것을 새롭게 따라잡기엔 인생이 짧다. 

'요령 없이' 우직하게 기초를 다지는 것이 지금 당장은 어리석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가장 확실한 요령이다.  시험 수준보다 좀 더 어렵게 공부하고, 내가 지금 하는 공부가 나중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땜빵으로 공부하고, 그때그때 무사히 넘어갔지만, 또 다시 공부해야 하는 사람의 조언이니 믿어도 좋을 것 같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8. 01:47 미술 이야기

어제 글을 올렸다. 앞으로는 종종 '미술사적 사전 조사'없이 흥미를 일으키는 그림에 대한 글을 올려보겠노라고. 

엊그제 올린 '술취한 원숭이' 그림에 대한 글이 처음이고, 이번 글이 두 번째이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미술사 공부한 사람치고는 한국 작가를 많이 아는 편은 아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한국에서도 서양미술사를 공부했고 외국 생활이 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좀 웃긴 변명을 또 하나 붙이자면, 한국 사람의 이름은 2~3자 밖에 안되어서 상대적으로 변수가 적어서 그 점이 역으로 비슷비슷해서 외우기 힘들다는 점이다. (글로 적고 보니 참 지지부진한 변명이다)  

그런데 위의 작품은 맘에 들어 작가 이름을 검색해 봤는데, 그 작가 이름은 한번 듣고 까먹을 수가 없게 독특했다.  '이왈종' 화백.  

이름을 듣고 보니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이름이고, 표피적인 네이버링 ('녹색창에서 검색하는 일')만 해봐도 수십 년 간 인기를 누려온 유명 작가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전 추계예대에서도 그림을 가르치셨다고. 그리고, 위와 같은 작품의 시리즈의 제목하야, ‘제주생활의 中道와 緣起’.

왠지 불교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타이틀이다. 그리고 제목에서 짐작하듯 작가는 제주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그 곳에 무려 작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도 있다고... 원체 저명한 작가이신데, 명색이 미술사 공부하면서 못 알아 봬서 죄송하기 그지 없다. (울 엄마도 가끔 어떻게 미술사 공부한 애가 '도자기의 "도" 자'도 모르느냐며 나의 안목의 부재를 탓하시는 터라, 나의 무식이 충격적이지는 않다.) 

다만, 다시 옹색한 변명을 하나 덧붙이자면, 미술사에도 여러 분야가 있고, 그 속에 몸을 담고 있으면 있을수록 어떤 면에서는 시야가 좁아져서, 예전의 개론 수업에서 알았던 타 분야의 지식은 야곰야곰 까먹어서 그렇다.  (미술사에는 크게는 한국미술사, 동양미술사, 서양미술사가 있고, 전공으로 들어가면 각각 다시 시대별로 나뉜다. 예. 고대, 르네상스, 바로크, 19세기, 모더니즘, 현대미술 등등)  

그리고 이상적으로는 갤러리 전시들 쫒아다니고, 미술계 소식은 발빠르게 찾아다니고 해야하겠지만, 현실은 내 코가 석자라 학생 때에는 세미나 수업 과제하랴 발표 준비하랴 바쁘고, 지금은 다시 내가 당면한 일들을 처리하다보면 쉽지 않다. 다시 말해, 공부를 오래할수록 자신의 분야만 파고 들게 되어서 점점 시야는 좁아지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무식하게 되게 쉽다. 

어쨌든 위의 그림을 누가 카톡의 대문 그림으로 쓰는 것을 보고 작가가 누구냐 물어서 알게된 이왈종 작가의 작품은 재미있고도 정감이 넘치는 그림이다. 알록달록하게 선명한 색상들로 그려진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누구나 한번쯤 꿈꿔본 평화롭고 여유로운 전원 생활을 시각화한 것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과 안정감을 선사한다.  

평화롭고 한적한, 일종의 전원시와도 같은 작품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의 인물들은 골프를 치고 있기도 하고, 저 멀리 바다에는 크루즈가 떠 있기도 하고, 앞마당에는 빨간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기도 한, 엄연한 현재의 모습이다.  그러한 현대적 모습은 당의정적인 이상향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의 생활에서도 이상향을 꿈꿀 수 있음을 역설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미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는 러시아 화가 샤갈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아래의 그림은 샤갈이 그리는 고향 풍경과 유사한 느낌이다. (특히 윗쪽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부분은 조형적으로도 그렇지만, 두 작가가 추억을 바탕으로 정감있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왈종, <제주생활의 중도> (2011), 장지 위에 혼합재료 ; 130 x 162 cm, 현대화랑. (이미지: 현대화랑)

Marc Chagall, I and the Village (1911), oil on canvas ; 192.1 x 151.4 cm, MoMA 

이왈종, <제주생활의 중도> (2011), 장지 위에 혼합재료 ; 130 x 162 cm, 현대화랑. (이미지: 현대화랑) (세부)

Marc Chagall, I and the Village (1911), oil on canvas ; 192.1 x 151.4 cm, MoMA (세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아닌게 아니라 이왈종 화가와 에콜 드 파리 화파를 대표하는 마르크 샤갈의 작품세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그의 작품이 마치 아이의 그림과 같은 천진함과 순수함이 묻어나는 그림들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이왈종은 제주도를, 샤갈은 그의 고향 비쳅스크를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두 작가 모두 판화 작품이 많다는 점도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으로는, 샤갈이 에콜 드 파리 시절 1910년대부터 1985년 세상을 뜰 때까지 참 한결같은 작풍을 유지했듯이, 이왈종의 화풍도 참 한결같다는 점이다. 이는 인기 화가의 입장에서는 피치못할 상황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샤갈다운 샤갈 작품을 원했고, 이왈종스러운 이왈종의 작품을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동어반복적 화풍은 결과적으로 비판을 야기하게 되기도 한다는 문제가 있다. 

비평적인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또 한 사람의 미술 애호가로서 동일한 화풍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작가의 작품을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지켜보도록 하면서, 지금으로서는 그냥 새롭게 알게된 작품의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맘껏 빠져보기로 한다.  

이상이 나만 새롭게 알게 된 유명한 작가의 유명한 작품에 대한 내 맘 내키는대로 그림보기였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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