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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7. 00:30 영화 이야기

좋아하는 영화를 꼽다보면 그 좋아함에도 여러가지 층이 있음을 알게 된다.  '로마의 휴일'처럼 매번 볼 때마다 왠지 아련하면서도 즐거워지는 영화가 있는 반면, '블레이드 러너'처럼 제목을 떠올릴 때마다 그 묵직한 감동에 맘까지 무거워지면서 '명작'이라고 꼽기엔 주저함이 없지만, 여유로운 휴일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에는 포함시키지 않을 영화도 있다. 물론 미술 작품도 마찬가지다.  (예술가의 제작 당시의 맘과는 별개로 내가 내 거실에다 걸어놓고 매일매일 보면서 가까이 두고 싶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전시회가 열린다면 반드시 가서 보고 싶긴 하지만, 내 거실에 걸라고 누가 줄까봐 겁나는 작품들도 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포스터

블레이드 러너는 원래 필립 K. 딕이 "앤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감독 리들리 스콧이 1982년 "블레이드 러너"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영화이다.   소설에서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공감능력'인가 아닌가 하는게 주제였다고 하는데, 영화에서의 관건은 '기억' 내지 '추억'의 유무이다. 

결이 좀 다르긴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패러랠 월드 러브 스토리'와도 비슷하긴 하다. 내가 믿고 있는 기억과 추억이 실은 내 것이 아니라면, 나를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는 대부분의 혼란과 의문은 해결되지만,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Philip K. Dick,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Doubleday, 1968) 필립 딕의 소설 <앤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의 초판 커버


리들리 스콧은 워낙 유명한 감독이기도 하지만, 그가 <블레이드 러너>에 쏟은 애정도 남다른 듯 한게, 이번 기회에 찾아보니까 무려 7가지 버전이 있다.  '감독판' 혹은 '최종판'등이 상영된 버전과 함께 존재하는 영화는 적지 않지만, 이런저런 변주를 거쳐 7가지나 버전이 존재하는 영화는 드물지 않을까 싶다.  

사태가 이렇다보니, 딱히 영화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은 그냥 영화보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내가 예전에 몇 번 봤던 그 <블레이드 러너>가 몇 번째 버전인지, 아니면 그 몇 번 봤던 영화가 모두 동일한 버전의 것인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다만, 내 기억에는 유니콘을 본 기억이 확실히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1992년 발표된 감독판이 아니었나 짐작만 할 뿐이다)

심지어 다시 생각해보니, 새삼스럽게도 그 '블레이드 러너'라는 것의 정확한 의미도 불분명하고, 좀 조사를 해봤으나 그 의견도 분분한듯 한데 대체로 아래와 같다. 

1. 정의의 첫번째로 등장한 것은 놀랍게도 대부분, 이 영화로 근원이 돌아오면서, 수명이 다한 레플리칸트 (외형적 모습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감정선까지 인간과 유사하게 만들어진 인조인간)들을 처리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정의이다. 

2. 1번과 연결되는 정의로 칼 (blade)을 잽싸게 놀려 (run) 처리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 (-er)

3. 칼날 위를 달리는 듯한 위험천만한 일을 하는 사람

4. 하반신이 불구라서 의족을 단 사람 (요새 특수 제작되는 의족들의 모습이 날렵하기도 하고, 얼음 위를 달리는 스케이트 날을 연상한 데서 온 것인 듯한데, 칼날 같은 다리를 단 사람이라는 뜻인 듯하다) 


난 소설은 읽지 못했고, 그렇게 홈을 파듯 여러 버전 섭렵하면서 영화를 연구하며 보지는 못했지만, 처음 그 영화를 봤을때 묵직한 감동과 충격을 받았고, 그 감동은 이면은 일종의 강렬한 공포감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유로 한 두번 더 봤던 것 같은데, 약간씩 느낌이 다르긴 했지만, 비슷한 감정이었던 것 같다. 한동안은 그 공포감의 원인을 정리할 수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는 궁극적이고도 핵심적 척도가 추상적이고 주관적이기 짝이 없는 '기억'내지 '추억'일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영화에 대한 감상과 비평은 훨씬 다양하겠지만 말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안드로이드와 레플리칸트, 타이렐과 레플리칸트와의 관계의 신학적 해석 등등) 

결국, 인간은 생물적으로나 물리적, 화학적으로, 또 사회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척도로 다른 방식의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가장 피부에 닿는 정의는 지난 날의 경험의 축적과 그 경험에 대한 기억으로 이뤄진 유기체라는 것이다.  극중에서 레플리칸트이었던 레이첼이 이식된 기억을 추억이라 믿으며 따라서 자신은 인간이라고 믿는 대목.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나중에 보물 찾으러 다니시며 긴 채찍을 휘날리실 해리슨 포드가 분한 대커드가 어린 시절의 추억과 어우러진, 숲 속을 자유롭게 달리는 아름다운 유니콘의 꿈을 떠올리며 피폐한 현실에서 인간성을 회복하곤 했는데, 그것이 마지막의 종이접기로 만든 유니콘 하나로 그 인간이라는 확신이 흔들릴 때.  그건 공포영화에 가까운, 간담서늘한 느낌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영화의 키워드인, '과연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와 관계 있는 종이로 접은 유니콘.  


대커드를 관리감독하던 개프가 대커드의 가장 사적인 기억이자 추억인 유니콘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자, 결국 대커드도 그가 제거해왔던 레플리칸트, 즉 주입된 기억으로 인간이라 착각하며 사는 레플리칸트였던 것은 아닌가 하는 논란의 불씨가 되는 중요한 장면이다.  

인간이 인간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언제인가?  나라는 존재는 결국 무엇인가?  남자이냐 여자이냐, 성인이냐 아이이냐, 어떠한 직장을 갖고 어떠한 음식을 먹고, 어떠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어떠한 집에서 살다가 죽는가? 이런 모든 것이 '나'를 정의해 주는가? 그러한 공통 분모 내지는 보편적 변별 요소들을 다 제거해나가다 보면, 나는 결국 내가 태어나서 경험한 것들의 축적체이고, 그 기억과 추억은 그런 축적체의 나의 존재를 확신하게 해주는 증거들이 아닌가? 그러한 경험들로 사고와 가치관이 형성되고 나의 정신을 지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하며 살다가 죽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주변에 의한 영향으로 형성된 유약한 존재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에서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할지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6. 01:30 영화 이야기

제목 속에는 원제가 담겨져 있지 않다. Au revoir là-haut

에콜 드 파리 (École de Paris)에 대한 자료 조사를 하다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하나 발견. 원래 프랑스 작가 피에르 레메트르 (Pierre Lemaitre)가 쓴 소설이 원작인데 그 책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진 것. 

원작이 프랑스어인 책과 그리고 영화, 여기에 영어 번역까지 뒤섞여 제목이 무척 복잡한데, 내가 알아낸 것만 무려 5종류. 

먼저 원작과 동명 영화: 
1) Au revoir là-haut - 프랑스 작품이라 동명 소설과 같은 불어 제목이 원제. '저기 위에서 다시 만나요'라는 직역이겠으나, '죽어서 다시 만나자'라는 뜻. 이 책으로 작가 피에르 레메트르는 2013년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 감독은 Albert Dupontel인데, 극 중 두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2) The Great Swindle (2015) - 영어로 번역된 소설의 제목, 주인공들이 하는 일이 '거대 사기극'이긴 하지. 
3) See You Up There (2017) - 미국에서의 영화의 제목은 이렇게 소설과는 달리 원제에 충실하게 붙여졌다. 
 
4) 오르부아르 (2015) - 소설이 공쿠르 작을 받고 나서 번역된 듯한데, 한국어로는 '오흐부아 라오'가 원 발음에 근접할 듯 한데, 이렇게 번역되었다. 작가 이름 및 기타 설명 없이 이 소설과 원래 소설을 연결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5) 맨 오브 마스크 - 한국어 제목으로는 이렇게, 어중간하게 달렸다.  번역도 아니고 원어 제목을 발음대로 한 것도 아니고...  저 영화를 찾으려고 했는데, 한국어 제목을 미리 알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 제목으로는 짐작도 못했으리라. 
 
영화를 한다는 광고를 본 기억이 없는데, 아마도 영화제에 출품했었던 작품이었나? 소위  상업영화 범주에 들어갈 영화는 아니므로 한국에서는 디비디가 먼저 유통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극장서 영화를 본 게 구석기 시대였나 싶은 나니까,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다.) 여하튼, 제목이야 어떻든간에, 영화를 보고나서 이 영화를 보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영화에 대한 자세한 평은 영화 평론가들이 어디엔가 자세히 해두셨을 것이라 짐작하고, 오늘은 무엇보다 이 영화가 시각적 효과가 뛰어난 영화라는 것만 강조해두고자 한다. 앞서 밝혔듯이, 에콜 드 파리에 대해서 조사를 하다가 발견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의 파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전쟁을 좋아하는 상관 탓에 다치지 않아도 되는 큰 부상을 얼굴에 입은 주인공 에드아르와 알베르, 그와 나이와 신분은 큰 차이가 있지만 좋은 친구였던 전우 알베르가 전쟁을 돈벌이로 생각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큰 사기를 친다는 게 큰 스포없는 대략적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라, 소설이 얼마나 시각적으로 묘사를 했는지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영화에서는 시각적 효과가 영화의 스토리를 살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주인공인 에드아르가 화가 지망생이라서도 그렇겠지만, 영화에서는 시각적 아름다움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에콜 드 파리, 20세기 초 모더니즘에 관한 어휘들이 넘칠만큼 등장한다. 

감독 자신이 에두아르가 사용할 가면을 만들기 위해서 Musée du quai Branly–Jacques Chirac 를 수차례 방문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실제로 브랑쿠지, 뒤샹, 피카소의 작품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특히, 에드아르와 소녀, 그리고 알베르가 세 명이서 사기를 치기로 결심하고 즐겁게 춤을 추는 장면에서 에드아르의 스튜디오를 자세히 비추는 데, 그가 쓰고 나오는 가면들, 그리고 비춰지는 조각들은 다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증거'들을 발견할 때 그것을 알아채는 기쁨이란!)  

그리고, 잠시잠시 비추는 당시의 파리 풍경과 카바레, 카페등의 장면에서는 '벨 에포크'와 '세기말'을 넘나드는 명암을 잘 살리고 있고, 또한 당시에 유행했던 아르누보 스타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에드아르가 그리는 드로잉의 화풍은 에곤 쉴레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반면, 그가 전쟁 기념비를 구상할 때 사용한 구도와 색상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흑색 회화' 시리즈의 그것처럼 불길하고 짙은 흑백이 대비되게 나타난다.  

Egon Schiele (1890-1918), Self-Portrait with Chinese Lantern Plant (1912), oil on painting ; 32.2 x 39.8 cm, Leoold Museum


극중에서, 알베르가 에드아르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인 파울린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장면은 정원 앞의 철책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는데, 연대도 좀 많이 내려가고, 소장처도 프랑스가 아니긴 하지만, 왠지 마네의 '철길'을 연상시킨다. 

Édouard Manet, The Railway (1873) oil on canvas ; 93.3 cm × 111.5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또한, 미술적 안목이 없는 이들이 벌이는 공공 조각 및 기념비에 대한 비판
도 신랄한데, 결국 공공 기념비란 '추하고 진부하고 비싼 것'이라야 한다고 에드아르가 말했다고 알베르에게 전하는 어린 소녀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이 영화는 짧은 트레일러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렇게 밝고 경쾌한 의적단의 통쾌한 복수극은 아니다.  군데군데 코믹적 요소들은 있지만.  

우선 사랑하지만 원체 복잡해지기 쉬운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다. 한번도 보통의 전쟁영화들처럼 직접적으로 전쟁을 자세히 묘사하거나, 참상을 자세히 비추며 목소리 높여 비판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의 추악한 탐욕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전쟁이란 지배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으켜 무고한 희생을 낳게 하는 야만적 행위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해준다.  

영화 <맨 오브 마스크>는 한편으로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코믹한 유머를 잃지 않고, 또 한편으로는 그 절박한 시절에 폭발하듯 꽃을 피웠던 에콜 드 파리의 예술성도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일석삼조를 이룬 작품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30. 01:13 영화 이야기

한동안 누군가 내게 가장 감명깊게 본 영화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 대답은 항상 '개같은 내 인생 (My Life as a Dog)'이었다. 

주인공인 잉게말이 자신보다 불행했을 우주선을 탄 강아지 라이카를 떠올리며 애써 자신의 처지를 위안삼고 있다.

영화의 내용을 모르고 들으면 조직이 등장하는 다소 거친 영화인가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1959년 스웨덴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하는 서정성 뿜뿜 돋는 내용의 영화이다. 이 영화를 만든 라세 할스트룀 (Lasse Hallström) 감독의 대표작으로는 길버트 그레이프, 쇼콜라 등이 있고, 다들 유명한 영화지만,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좋았다.  레오나르도 드 카프리오 오빠 (잘 생기면 다 오빠)가 나오는 길버트 그레이프를, (내입장에서 보자면) 무명인 스웨덴의 아역 배우가 이긴 셈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영화는 Reidar Jönsson이라는 작가의 같은 제목의 자전적 소설 (1983년작)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어쩐지... 사소한 스토리에 생활적 디테일이 있더라니...]

소위 '성장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 사는 잉게말이라는 소년의 성장기를 그의 시선에 따라 바라본 영화이다. 잉게말에겐 자신만큼이나 장난꾸러기인 형이 있어 이 둘이 매일 합이 1+1=3인 강도의, 살아있는게 다행일 정도의 사고를 치며, 열심히 성장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결핵을 앓던 엄마의 병이 깊어지면서, 부득이 엄마가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형과 잉게말 각각 다른 친척집으로 가게 되는데, 잉게말은 순박하고 착하나 결코 어른스럽다고 보기는 힘든 삼촌에게 맡겨지게 되면서 영화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삼촌이 살던 동네로 와서도 잉게말은 장난꾸러기 소년이 칠 수 있을 만한 크고 작은 장난과 사고를 치고, 엄마 없는 소년이 겪을 만한 외로움을 겪으며, 처음엔 낯설어서 텃세를 당하던 동네 꼬마들과 하나둘 친해져 가며, 때론 대책 없는 어른들의 행동들을 지켜 봐가며, 어느새 동네의 이쁜 소녀에게 신경을 더 쓰게 되는 사춘기로 접어 들어간다는 얘기이다. 

영화 첫 장면 잉게말의 독백으로 이런 대목이 나온다. 뜬금없이 '라이카는 어땠을까? 사람들이 우주선에 자기를 태웠을 때.  내가 봤을 때엔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어. 걘 먹이통이 비워질 때까지 우주를 뱅글뱅글 돌아다녀야 했다구. 그리곤 굶어 죽었지. 거기에 비하면, 나는 괜찮아....'  이런 생각을 하며 잉게말은 자신이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강아지나 엄마와 형과 떨어져 낯선 동네로 가서 지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소련이 우주로 쏘아 올린 1957년의 우주선 스푸트니크 호에 실험용으로 실린 강아지 라이카 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삼는다.  

삼촌네 헛간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라이카를 생각하는 잉게말. 작은 헛간에 난 좁은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잉게말의 모습은 묘하게 작은 우주선에 실렸을 라이카의 처지와 오버랩된다. 

12살의 소년이라 주변의 사람들 뿐 아니라 엄마에게도 자신의 풍부한 감수성을 이해 받기 힘든 소년(그걸 이해 받기에 그가 치는 사고의 강도가 대부분 너무 높다)은 그렇게 외로운 밤 엄마 생각이 나거나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외롭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라이카를 떠올리며 자신의 처지가 낫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영화 내내, 자신보다 더 불운했을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거리곤 한다. 이를테면, 지름길로 가려던 어떤 사람이 창던지기 대회를 하는 경기장을 지나게 되어 운 나쁘게 창에 맞아 죽는 이야기. 그 사람보다는 자신의 처지가 낫다, 뭐 이런 식이다.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그 모양새가 너무나도 아이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또래 소년으로서는 할 수 있는 한껏 어른스러워서 짠하면서도 감동스럽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 작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스웨덴 선수인 잉게말 요한슨과 미국의 플로이드 패터슨간의 권투 경기의 라디오 중계에 귀기울이고 있다. 이 장면은 우리의 주인공 잉게말과 선머슴같은 귀여운 소녀 샤가와의 권투 경기와 오버랩된다.  온 마을에 터지는 함성으로 보아 잉게말 선수가 승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어느새 잉게말과 샤가는 소파 위에서 새근새근 낮잠을 자고 있는 장면을 비추곤 줌아웃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권투선수와 주인공 잉게말의 이름이 같은것, 그리고 둘다 권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쟤가 커서 권투선수가 될려나 했는데, 소설가의 자전적 소설이므로 그건 아닌걸로...)       

1959년의 스웨덴이 배경인 관계로 문화적, 시대적 차이로 이해못할 정서도 없잖아 있었지만, 감수성 풍부한 소년이 몰이해 속의 세상을 자기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며 한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자리했었다. 

그러다, 최근에 좀 충격적인 뉴스를 봤다. 무인 우주선을 쏘아보내면서, 떠돌이 강아지 라이카를 무려 3년이나 훈련시켜 스푸트니크 호에 태웠다는 것은 이 기사로 처음 알았다. 무려 3년이나!  그리고, 그 우주선은 어차피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일주일치의 사료를 다먹고 나면 라이카는 어차피 굶어죽을 운명이었다는 것도 처음 생각이 미쳤다. (지금 생각해보니, 잉게말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라이카를 떠올리며 자신의 불행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 라이카가 우주선을 쏘아 올린지 불과 다섯 시간 만에 압력과 온도 차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일주일치의 사료도 다 먹지 못하고... 일주일 후에 죽으나 발사 후 다섯시간 후에 죽으나, 그게 무슨 차이냐 싶기도 하고, 또 그렇게 일주일동안의 비행이면 끝날 인생, 아니 견생인데, 3년의 고된 훈련은 또 웬 말이냐 싶기도 하고... 허탈하고 무의미하고.... 슬프고 잔혹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도 결국은 그런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만약 일주일 후의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미래를 알거나, 내 인생의 끝을 알고 있다면 오늘의 인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  

'라이카의 진실'이라는 뉴스를 접하고 갑자기 생각나서 적어봤다. '개같은 내 인생'에 대해서...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