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미술 이야기' 태그의 글 목록
2019. 4. 2. 12:21 미술 이야기

엊그제 올린대로 내가 티스토리 블록의 편집에 익숙해질 때까지, 초기 글을 하나씩 올려보기로 했다.  얼마전까지 내가 사람들이 내 글을 얼마나 읽었는지도 몰라서 알지 못했는데, 초창기 글은 읽은 사람이 아주 적다는 것을 깨달아서이다. 그리고 현재 블로그 상태로는 전체 목록이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고쳐야 일목요연하게 목차가 보일 수 있게 만드는지도 모르겠어서이다.  물론 새 글도 계속 올리겠지만, 묻혀있는 옛 글들도 한번씩 퍼올려 다시 싣는 걸로.

그 제목하야, 이쁘면 진리다~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https://sleeping-gypsy.tistory.com/9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2. 13. 00:13 미술 이야기

우연히 발견했다. 갖고 싶은 양말.  Keith Haring (1958-1990)의 Happy Socks!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판매중인 상품이다. 가격은 $42.00불, 5만원 남짓한건가?  다른 예술도 아니고 팝아트인데, 5만원에 키스 해링 소장이라.... 

누굴 탓할 입장인가 싶은 뱅크시가 미술관에서 전시실을 가려면 기념품 샵을 들러야한다고 비판 했지만, 아닌게 아니라, 기념품 가게가 전시실에서 들어가는 길목이던 나오는 길목이든 사람들이 오가는 동선 상에 있는 미술관이 대다수이다. 요는 앞이든 나중이든 샵을 지나지 않고서는 미술관 밖을 드나들 수 없다는 것.  

나도 간혹 체력 떨어질때에는 샵에 먼저 들러서 둘러보기도 한다.  이쁘고 독특한 기념품을 '득템'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꽤나 즐거운 경험이다.  물론, '진짜' 작품이 아닌 기념품 용으로 제작된 '가짜'를 먼저 구경한다며, 함께 미술관을 간 지인들과 농담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무엇인가를 '소장'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 그것이 아주 오래도록 고민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금액이면 부담도 그만큼 줄어드는 행위이다.  또하나의 장점으로는 기념품 샵에 전시된 상품들을 대충 훑어보면, 그 미술관이 자랑스럽게 '밀고 있는' 작품이 무엇인지 금방 알수 있다.  따라서, 미술관 기념품 샵 구경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특히 '요새 미술'은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다 '팝 아트'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런 기념품 제작과 작품과의 관계는 더욱더 밀접해지는 것 같다. 예술의 상업화를 논하지만, 뒤집어보면, 반 고흐나 피카소의 작품이 몇 천억하는 것이 더한 예술의 상업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2019년에는 유난히 유명한 해외 작가들의 전시가 많다.  

키스해링전 : 예술은 삶, 삶은 곧 예술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

날짜를 보니 3월 17일까지다. 이 전시는 못가봤지만, 저번에 앤디 워홀 전시때 가보니 기대이상으로 충실한 전시였던 기억이었기에 이번 전시도 기대해본다.  그곳에 가면'행복한 '양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양말을 신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2. 5. 22:40 미술 이야기

2019년 2월 3일 슈퍼보울 광고에 앤디워홀 (Andy Warhol: 1928-1987)이 등장했다. 그냥 등장한게 아니라 버거킹의 햄버거를 포장지에 케첩 퐁퐁 뿌려서 콕콕 찍어 냠냠 먹는 장면이 45초간 방영된다. 원래 덴마크 출신 감독 요한 레츠 (Jørgen Leth: b.1937)의 실험적인 영화 66 Scenes From America의 일부를 버거킹의 광고에 사용한 것이라고.  

2019년 2월 3일 슈퍼보울의 버거킹 광고에 등장한 앤디 워홀의 모습 

감독 요한 레츠 (Jørgen Leth: b.1937)의 실험적인 영화 66 Scenes From America에는 66 장면의 '전형적인 미국의 모습'을 담은 영화이다.  그 중 한 세그먼트에 워홀이 햄버거를 먹는 장면이 담겨있는데, 이 부분을 이번 광고에 사용한 것이다.  무미건조하게 먹고나서 '나 앤디 워홀이 햄버거를 먹었다'는 무미건조한 멘트를 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의 부분을 다시 활용한다는 면에서는 내 블로그에서 몇 번 이야기한 '차용' 기법에 해당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실제로 '광고'에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과연 티브이 광고를 예술 작품으로 간주하느냐 마냐에 따라 이를 '차용'이라고 명명할 수 있냐 없는가가 나뉠 수는 있다.  한편으로는 '차용' 기법이라는 것 자체가 '공허한 복제'인데 그렇게 엄격하게 정의하고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요는, 팝 아트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앤디 워홀이 세상을 떠난지 30년도 훌쩍 넘은 이 시점에 광고주들이라면 모두 눈독을 들일만한 미국에서 가장 핫한 광고 시간대인 슈퍼 보울 광고 시간대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등장한 것은 광고 출연이 아니라 원래는 영화의 창작에 참여했던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이 자아내는 아이러니.   


감독 요한 레츠 (Jørgen Leth: b.1937)의 실험적인 영화 66 Scenes From America에는 66 장면의 '전형적인 미국의 모습'중 하나인 워홀이 햄버거를 먹는 장면 


사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충분히 성공한 뒤, 그는 예술가로 전향했고, 팝 아티스트로 충분히 유명해지고 부를 거머지고 나서는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가 제작한 영화들을 다 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무성 영화들은 하나같이 엄청나게, 무지하게 지루하다. 그가 이러한 영화의 제작의 이유를 '권태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한다. (짐작컨데, 천재가 분명한 워홀은 분명 일상이 무지 권태롭긴 했으리라.)  

그 무성 영화라는 것인 앰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한자리에서 8시간 촬영하거나 (Empire, 1964), 한 남자가 45분간 천천히 버섯을 먹는 모습을 촬영하거나 (Eat, 1964), 한 남자가 자는 모습을 촬영하거나 (Sleep, 1963)....  

앤디 워홀의 초기 흑백, 무성영화 중 최강자는 단연 <Empire>(1964)일 것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고정된 카메라로 무려 8시간 5분 동안 촬영한 것이다.  무려 8시간 5분 동안 한 장면이 지속되는 것이다.  사실 그런 영화를 안봐도 '권태'라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은데....  한편으로는 '멍때리기'가 우리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 용도로 사용해보는 게 좋을 수도 있을까? 


앤디 워홀 (Andy Warhol), 잠 (Sleep)(1964년 출시, 러닝타임 5시간 20분), 요하네스 메카스 (Jonas Mekas) 촬영, 워홀 필림즈 배포. 워홀의 친한 친구이자 시인인 존 지오르노가 잠자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촬영한 것.   

Eat (1963)은 앤디 워홀 (Andy Warhol)이 제작 한 화폭 45 분짜리 언더 그라운드 영화로 1964 년 2 월 2 일 일요일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가 팝아티스트 로버트 인디애나의 스튜디오에서 그가 버섯을 먹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사운드 트랙도 없이 흑백 필름으로 촬영된 이 무성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마지막에 등장한 고양이를 로버트 인디애나가 웃으면서 안는 장면이리라.  


<엠파이어>(1964)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고정된 카메라로 무려 8시간 5분 동안 촬영한 것. 지루함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작년부터 올해 3월까지 휘트니에서 워홀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관심이 있고, 그 곳에 갈 일이 있다면 방문해보면 좋을 것 같다.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홈피 참고할 것) Andy Warhol—From A to B and Back Again  (Nov 12, 2018–Mar 31, 2019)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2. 3. 00:30 미술 이야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다음으로 유명한 작품은 아마도 노르웨이의 국민 화가라고 할 만한 에드바르드 뭉크의 <절규>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전에 잠시 언급한 적이 있다.)

Edvard_Munch, The Scream (1893) oil, tempera and pastel on cardboard, 91 x 73 cm, National Gallery of Norway

心臓の「叫び」(支援キャンペーン)원본 페이지

 

뭉크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은 일본의 공익광고가 유일한 것은 아니다. 내가 본 것만 몇 가지 된다. 지금와서 찾아보니 검색이 되는 것은 방향제 광고 하나이지만 말이다.  광고를 보다보면 우리의 절규 청년의 지시대로 방향제를 얼른 플러그에 꽂아야 할 것 같지 않은가?  꽂아주니 저렇게 행복해하니 더더욱!  

90년대 글레이드 플러그 인 (콘센트식 방향제)의 광고에 사용된 뭉크의 <절규> 이미지

 

엊그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패러디하여 (예술적 평가에 대해서는 아직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경제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일레인 스터트번트에 대해서 언급한 김에 패러디에 대한 예를 하나 들어보았다.  아래가 엊그제 올린 두 작가의 작품들.    

Roy Lichtenstein, Crying Girl (1963), lithograph on lightweight, off-white wove paper, 40.6 cm × 61.0 cm 

Elaine Sturtevant (1926-2014), Lichtenstein, Frighten Girl (1966), oil and graphite on canvas ; 115.6 x 161.9 cm. 

  '무의미한 복제', '차용'이 하나의 특징이 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컴퓨터 그래픽, 포토샵의 기술은 나날이 발달하다보니, 정말 누구나 다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시대에 도래했다고 볼 수 있다.  결은 다르지만, 알고 있는 예술 작품을 광고에 활용하는 것은 적절히 이용하면 확실히 효과가 높다고 할 수 있다.  패러디의 효과란 이런 것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2. 1. 00:30 미술 이야기

어제 Anish Kapoor에 대해서 글을 올리고 (어제 올린 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좀 더 검색해보았다. 인스타그램의 폐해라고나 할까?  이미지 하나 달랑 올라와 있어서 그걸 보고 오만가지 상상력의 나래를 폈으나, 그 다음 곰곰 생각해보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공 조각을 목적으로, 그것도 알루미늄으로 만든 설치 작품이 알루미늄 호일도 아니고 그렇게 쪼그라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이후 짬짬히 다른 뉴스 사이트를 뒤져봤지만, 그랬다는 뉴스는 한 군데도 없었다. 

낚인거 같다! 거의 확실하게...

덕분에 난 '내 맘대로 작품 보기' 시리즈에 포스팅 하나 더 올리고, 블로그 읽고 아니쉬 카푸어라는 작가에 대해서 알고 그의 작품에 공감하며 좋아했을 독자들도 있을 것이니 그닥 손해보는 일은 아니다, 위안하며.... 어제 포스팅은 그냥 두고 다시 하나 글 올리기로 한다. 

하지만, 가짜 뉴스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다시한번 경각심을 가져야겠다 생각해본다. 이게 일개 조각상의 뉴스가 아니라 좀더 중대한, 이를테면 우주인들의 지구침공이라던지 아틀란티스의 반격이라던지 이런 뉴스였는데, 내가 홀라당 믿어서 글을 퍼날랐다면 얼마나 큰 후폭풍이 있었겠는가!  (반성.반성.)

눈오는 날의 <구름 문>

 

바람으로 유명한 시카고의 한겨울, 진짜 '구름 문'의 모습.  어제 글을 읽은 분들께 혼란을 야기했다면 진정 쏴리~ 

 

사과의 의미라면 뭣하지만, 이왕 내친 김에 <구름 문>의 다른 모습도 몇 개 보너스로 올려보자면. 

이 정도 규모의 설치 작품은 사실상 제작에 있어서는 건축에 가깝다. 설계도와 함께. 

<구름 문>이 모형 단계를 지나서는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을 받아 제작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위에서 바라본 <구름 문>  위에서 이렇게 바라본 적은 없지만, 하늘의 풍경도 한아름 다 담고 있는 모습은 내가 아래서 느꼈던 감상을 또 한번 확신에 가깝게 해준다.  

 

배꼽이라고도 불리는 가운데 옴폭 파인 부분에서 올려다 본 <구름 문>

 

다시한번 느끼지만, 분위기에 따라서는 세기말 적이기도 하고, 외계에서 내려온 비행선 같기도 하고, 생명체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제이크 질렌할이 주연으로 등장한 2011년 영화 <소스 코드 (Source Code)>에 SF스럽게 등장하기도 했다.  

Kapoor’s Chicago work figured in the 2011 movie “Source Code” starring Jake Gyllenhaal.

 

덧붙이자면, 아니쉬 카푸어의 <구름 문>과 너무도 흡사한 중국 짝퉁이 있어서 작가가 격노해서 소송 중이라고도 들었다... (이것도 자세히 나온 기사가 없어서 확실한 전말은 알수 없고, 어제 낚이고 난 직후라 기사의 진위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 

중국의 커라마이시에 있다고 하는데...  위그르어로 '검은 석유'라는 뜻의 도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전이 있는 도시라고 한다.  이 중국 작품의 작가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 지역에서 자주 발견되는 유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름 방울들의 거품'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자세히보면, 카푸어의 작품과 유사한 큰 덩어리 주변으로 자잘한 알루미늄 반구체들이 늘어서 있는데, 작가의 말을 믿자면 (혹은 그렇게 말했다고 하는 기사를 믿자면), 기름 방울들 중에 큰 놈을 묘사한게 어쩌다 보니,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과 유사한 것이 된다.  

 

중국의 커라마이시에 설치된 '기름 방울들'이라는 제목의 설치 작품. 이 작품의 존재를 알고 아니쉬 카푸어가 격분해서 항의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설에는 소송 중이라고도 하는데 자세한 것은 알수 없지만 그가 화가 난건 이해가 된다. 

누가 봐도 비슷하다고 할 것 같은데, 아류 작가도 아니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품을 대놓고 카피하다니! 대범하다고 해야할지.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그대로 모사한  일레인 스터트번트 (Elaine Sturtevant)의 경우, 전체적인 작품세계가 그러하지 않은가?  그리고 예술계에서 실제 리히텐슈타인 작품보다 그의 작품을 모사한 스터트번트의 작품이 열 배가까이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었던 것이 현실이니까. 

Roy Lichtenstein, Crying Girl (1963), lithograph on lightweight, off-white wove paper, 40.6 cm × 61.0 cm

Elaine Sturtevant (1926-2014), Lichtenstein, Frighten Girl (1966), oil and graphite on canvas ; 115.6 x 161.9 cm. 

리히텐슈타인의 <우는 소녀>는 2007년 경매에서 $78,400에 낙찰되었다. 반면, 스터트번트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모사한 <Lichtenstein, Frighten Girl>(1966)의 경우, 2011년 경매에서 무려 $710,500에 판매되었다. 이어, 그녀가 사망한 2014년 이 작품의 가격은 예상 최고액 $800,000을 가볍게 뛰어 넘고 $3,413,000에 팔렸다. 물론 중국의 복제품과 스터트번트의 경우 차이는 있다. 중국의 복제품의 경우, 인터뷰 (혹은 인터뷰라고 알려진 글)에서조차 아니쉬 카푸어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않는 반면, 스터트번트의 경우 제목에서조차 대놓고 리히텐슈타인의 이름을 넣고 있다. 이러한 이유없는 모방, 복제를 '차용 (appropriation)'이라고 하는데,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혹 아는가, 향후 수십년 지나면 중국의 짝퉁 (?) 설치작품이 다시금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회자되면서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 어떨지...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24. 00:30 미술 이야기

어제는 음악에 대한 글을 하나 올렸다. 거기에 탄력을 받아서 음악과 미술에 대한 글을 하나 올려보려한다. 

2018년 제18회 송은미술대상의 대상작으로 선정된 김준 작가의 작품은 무려 '사운드' 작품이다.  이름하여, '사운드스케이프'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의 작품이다.  사운드스케이프, 즉, Soundscape란 음악이라는 뜻의 단어 'sound'에 '-scape'라는 접미어를 붙인 단어이다. 여기서 '-scape'는 'landscape'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넓게 펼처진 경치, 풍광이라는 뜻이나, '그러한 풍광을 묘사한 그림'을 의미한다. 같은 어미를 사용한 단어로는 도시 풍경을 의미하는 cityscape, 달의 표면의 경치를 뜻하는 moonscape, 바다의 풍경이라는 뜻의 seascape 등이 있다.  따라서, '사운드스케이프 (soundscape)'란 이를테면, '소리로 표현한 풍경'이라고나 할까? 

에코시스템: 도시의 신호, 자연의 신호, 2018 12채널 사운드, 스피커, 앰프, 나무, 사진, 이미지 북, 돌, 식물 450 x 300 x 220cm [사진=송은문화재단]

신문방송학과 미디어학을 공부한 이례적 이력을 갖고 있는 김준 작가는 흔히 시각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미술에 청각을 들여온 다소 생소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서울, 런던, 시드니, 베를린 등 여러 곳에서 수집한 소리들과 함께 그 장소에서 채집한 다양한 사물들을 서랍 속에 넣어 전시한다. 감상자는 설합을 빼고 넣는 행위를 하면서 설합 속의 사물이 위치했던 장소의 소리를 듣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작품 <에코시스템: 도시의 신호, 자연의 신호>(2018)은 관람자의 참여를 이끈다는 점, 그리고 found object의 활용한다는 점에 있어서 미술사적으로는 '다다'의 영역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소리'가 추가됨으로써 인간의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을 모두 총체적으로 활용하여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바로크적 종합예술을 구현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바로크적 종합예술의 경험은 건축, 인테리어, 미술이 총체적인 조화를 이룬다는 개념이지만, 김준의 작품이 구현하는 바로크는 인간의 오감과 기억과 추억, 정서와 감정을 모두 통합하고자하는 '내적인 바로크'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제18회 송은미술대상전 김준, 박경률, 이의성, 전명은 2018/12/21-2019/02/28

(참고로 '송은미술대상'은 역량있는 국내 작가들의 활동을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재)송은문화재단이 시행하는 공모전으로 2001년부터 시작되어 매년 수상자들을 배출해오고 있었다.  송은문화재단은 현재 송은아트스페이스도 운영하고 있고, 수상자들의 전시가 2월말까지 진행되고 있다.)

도시와 자연에서 수집한 소리와 함께 해당 지역에서 수집한 사물들을 함께 전시하므로써 관람자들로 하여금 청각과 촉각, 시각이 함께 작용하는 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관람자 각각의 기억과 추억을 소환하거나 상상력을 발현하도록 이끈다. 

많은 관람객에게는 낯선 이러한 작품은 실은 예술계에서 최근 많이 주목받고 있다.  일례로 2010년 터너 상을 수상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 수잔 필립스의 작품이 있다.  2014년에는 작위까지 받은 그녀의 경우,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녹음하여 특정 장소에서 그 녹음된 음악을 트는 식의 작품을 한다. 그녀의 노래는 어떻게 들어도 가수의 음성과는 거리가 멀고, 녹음도 어떠한 보정이나 수정도 하지 않아 불안정한 음정은 물론 그녀의 호흡도 다 담겨있다.  

2010년 터너 상을 수상한 수잔 필립스의 <저지대 (the Lowlands)>라는 작품을 한번 감상해보자. 


Susan Philipsz, Lowlands (2008/2010), Clyde Walkway, Glasgow. photo: Eoghan McTigue

위의 사진은 수잔 필립스의 작품을 원래 설치했던 글래스고의 클라이드 워크웨이라는 곳, 아래는 수잔 필립스의 작품을 2010년 10월 영국의 테이트에 설치했을 때의 사진.  같은 작품을 테이트 갤러리에 설치했을 때와 원래 설치한 글래스고우의 한 다리 아래 설치했을 때 그 음악으로 인해서 감상자가 느끼는 감정이나 불러 일으켜지는 정서는 사뭇 다른 것이리라.  

1950년대 중반의 Psychogeography와도 연관되는 그녀의 작품은 지리학적 위치가 인간의 정서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그녀의 작품과 김준의 작품이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Susan Philipsz, The Distant Sound (2014), Three channel radio transmission, Installation view Moss, Norway, 2014. Photograph: Eoghan McTigue


예술의 경험을 시각에 국한하지 않고 청각과 촉각 등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하여 감상자가 인간으로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일깨운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감각은 또한 얼마나 쉽게 주변 환경에 의해 영향받는가를 실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총체적 경험과 자각이 김준이나 수잔 필립스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게 되는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이러한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왜 요즘에 들어 예술계에서 부상하고 인정받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생각해볼만한 흥미로운 현상이다. 



※ 참고로 2019년 제19회 송은미술대상의 공모요강에 대해서는 송은 아트스페이스의 웹사이트를 참고하기 바란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22. 08:19 미술 이야기

작년 12월 초 순경에 한 기사에서 서도호 작가의 작품이 "The Best Public Art of 2018"으로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브릿징 홈, 런던(Bridging Home, London)’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예전 그의 'Seoul Home'과 유사하구나 생각하면서, 잠깐 훑어보았다.  UAP라는 단체가 제정한 3년차 되는 상이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일단 그 단체가 뭔지 자세히 모르겠고, 3년차니까 상자체가 자리를 잡은 건 아니겠구나 하면서 그냥 지나긴 했다. 서도호는 원체 내가 관심있어 하는 작가라 일단 북마크를 해두고 나중에 다시 한번 살펴봐야지 하다가 연말 바쁜 통에 잠시 잊고 있었다. 

Do Ho Suh, Bridging Home, 2018, London. Co-commissioned by Art Night and Sculpture in the City, and curated by Fatoş Üstek.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Victoria Miro Gallery, and Gautier Deblonde (관련기사: https://www.artsy.net/article/artsy-editorial-best-public-art-2018)

오늘은 한동안 블로그 글도 못올리고 있다가 다시 '내 맘대로 작품 보기' 시리즈(?)의 두번째 시간에 올리기로 맘 먹었다. 

내가 서도호 작가의 작품과 처음 접한 것은 뉴욕에서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PS1이라는 곳에서 신생 유망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아둔 전시회였다.  그 때 전시되었던 작품은 하나는 'Who Am We?'(2000)라는 작품이었고, 또 하나는 'High School Uniform'(1997)이었다.  

당시 인상은 참 참신하다는 인상과 함께, 아이러니하게 참 '한국적'이라는 느낌이었다.  라벨로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기도 전이었고, 작가에 대한 정보도 없던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작가의 이름을 보고도 발음상으로는 한국 사람 이름 같지만, 작가의 성장배경, 교육과정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한참 이후의 일이었기에 당시로는 확신을 갖지 못했었다.)  

(PS1은 Public School 1이라는 뜻인데, 폐교가 된 뉴욕의 공립학교를 미술관으로 바꾸어서 전위적인 작품들을 전시하는 곳이다.

Do Ho Suh, Who Am We? (Multi) (2000) Offset wallpaper ; sheet (each): 61 x 90.8 cm, MoMA ; 아래 사진은 위 작품의 세부 (image from MoMA)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얼굴 하나 없는데, 벽지로 제작된 이 사진첩(?)은 멀리서보면 모두가 같은 모양의 점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뽀인트라고 할 수 있다.  제목도 'Who am I?'가 아니다. 'Who ARE We?'도 아니다. 'Who AM WE?'이다. 여럿이지만 하나로 뭉뚱그려진 존재들.   


Do Ho Suh, High School Uniform (1997) (인터넷에서 가져온 이미지로 내가 본 전시장의 모습은 아니지만, 대략 분위기는 전달되리라 생각한다)

아, 이 이상 한국의 교육 환경을 잘 표현한 작품이 있을까 하는 느낌.  물론 요새는 학령인구가 줄어들어 한 반 학생 수가 소수이기도 하고, 교복 자율화를 거쳐 교복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훨씬더 다양하고 이쁜 교복들이 많지만, 국민학교를 나온 세대라면 윗 작품에서는 코딱지 만하게 얼굴이 실리던 '국민학교 졸업앨범'을 떠올릴 것이고, 아래 작품을 보면, 예전 고등학교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을 방문한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발언의 패러디 급의 문구가 유행한 적이 있었고, 그 여세를 몰아 뉴욕 빌보드에 비빔밥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리기도 했었다.  미술계에서도 저 화두에 맞춰 여러 작가들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많았었던 것으로 안다.  그 고민에 결정적인 해결방법은 없었던 듯, '이제는 단청 문양과 오방색은 그만 보고 싶다' 는 소망이 생길만큼 천편일률적인 '한국적임'에 지쳤던 관람객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에 반해, 서도호의 작품에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저 작품들을 본 외국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무엇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천편일률적인 규격에 맞추어 넣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임을 다 알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신하면서도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라 크게 인상 깊었다. 벽지 작업은 앤디 워홀은 물론 로버트 고버 등 유명한 팝 작가들이 많이 사용한 작품 기법이기도 하고, 마네킹들의 설치들도 수많은 작가들이 사용한 방법이라 기법만으로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로버트 고버 Robert Gober 의 설치 작품 (1989)

서도호의 작품들을 두번 째로 만난 것은 수년 후의 그의 개인전이었는데, 이것도 꽤 오래전의 일이다. 

그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Karma"라는 제목의 설치 작품인데, 커다란 인물의 조상을 다리 부분만 크게 만들어 갤러리 전체를 차지하게 만들어 놓고 그의 내딛는 구둣발 아래로는 어릴적 남자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초록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그마한 군인 인물상들이 그 발걸음을 떠 받치고 있는 형상이었다. 

Do Ho Suh (b.1962), Karma (2003), Urethane paint on fiberglass and resin, 389.9 × 299.7 × 739.1 cm, 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두번째로 인상 깊은 작품으로는 'Some/One' (2001)이라는 애매모호한 제목의 작품으로, 얼핏 멀리서 보면 이순신 장군이 입으셨을 법한 갑옷 같은 조각품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셀 수없이 많은 군인들의 인식표 (Dog tag)들을 이어 만든 설치 작품이었다. 

Do Ho Suh, Some/One (2001) at the Seattle Art Museum, Washington

Do Ho Suh installs Some/One (2001) at the Seattle Art Museum, Washington, 2002. Production still from the Art in the Twenty-First Century Season 2 episode, Stories, 2003. © Art21, Inc. 2003.

Do Ho Suh, Blue Green Bridge (2000), plastic figures, steel structure, polycarbonate sheets, 1137.9 x 129.5 x 61 cm, Edition of 2, LM2466 (위)와 그 세부 (아래) https://www.lehmannmaupin.com/artists/do-ho-suh  이 작품에서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의를 위한 소의의 희생에 대해서 좀 더 확실히 표현하고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이 작은 군상들이 커다란 청록색의 다리를 만들기 위해 힘겨운 몸놀림으로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들에서는 공통적으로 한 명의 위인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이 떠받들고 희생을 해야하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한국의 현대사와 나란히 생각해보면, '군 독재의 군화에 짓밟힌 민중'이라는 이미지일 것이라는 짐작도 할 수 있게 해준다.  두번째 전시회는 작품의 모습과 형식적인 면에서는 첫번째 내가 봤던 전시회의 것들과 전혀 달랐지만,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점에서도 놀라왔다.  전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개별성과 그로 인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그러던 그의 작품 세계가 확연히 달라진 것은 그의 집 시리즈에서였다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대학원과 군복무까지 마친 그가 미국에서 다시 학업을 하면서 느꼈던 '노마드'적인 정서를 담았다는 평을 얻고 있는 작품들이다. 

Do Ho Suh, Seoul Home/Seoul Home/Kanazawa Home (2012) silk, metal armature, 1457 x 717 x 391 cm, LM16332 https://www.lehmannmaupin.com/artists/do-ho-suh 

Do Ho Suh, Seoul Home/L.A. Home/New York Home/Baltimore Home/London Home/Seattle Home 1999, silk, 149 x 240 x 240 inches, Installation view at the Korean Cultural Center, Los Angeles, 1999 

이 작품들도 한편으로는 팝아트적인 어휘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라는 촉감과 질감의 전복을 통해 유용성을 제거함으로써, 충격과 신선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클레즈 올덴버그 (Claes Oldenburg: b.1929)가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있다. 

클레즈 올덴버그의 작품들, Soft Sculptures

서도호는 올덴버그의 촉감과 질감의 전복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땅에 굳건히 자리한 집'이 공중에 떠 있게 만듦으로서 굳건함과 부유함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충돌하게 만들었다.  또한 불투명한 건축물을 재질상 거의 투명한 올 고운 모시나 명주천을 사용함으로써 투명/불투명 사이의 전복도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전복을 통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과 경험, 그리고 미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오가면서 느끼는 방랑자적인 입장을 투영하고 있다.  

이 작품들을 통해서 서도호는 개인적인 것으로 세계적인 것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쿠로자와 아키라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말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성장했던 한국의 한옥을 위주로 설치 작업을 했지만, 점점 더 영역을 확대해서 외국의 건축물은 물론 가전제품과 가재도구들에까지 제작하고 있다. 

Do Ho Suh,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2013) silk, metal armature, polyester fabric, metal frame, 1530 x 1283 x 1297 cm, LM22819 https://www.lehmannmaupin.com/artists/do-ho-suh


Do Ho Suh, (left) “Specimen Series: 348 West 22nd Street, APT. New York, NY 10011, USA - Toilet”; (right) “Specimen Series: 348 West 22nd Street, Apt. A New York, NY 1011, USA - Stove,” both polyester fabric. (Courtesy Do Ho Suh and Lehmann Maupin Gallery)

이번에 UAP (Urban Art Project: 뉴욕과 상하이 등 다양한 지역에 거점을 두고 공공 미술을 제작하고 있는 조직)에서 선정한 그의 작품은 그의 Seoul Home에서 발전해 온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시간을 두고 조사를 해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고 그렇게 해보고 싶다.     

내가 블로그에 첨언할 필요도 없이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훌륭한 작품세계를 펼치고 있는 작가이지만, '내 맘대로 작품 보기' 코너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서 올려보았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8. 01:47 미술 이야기

어제 글을 올렸다. 앞으로는 종종 '미술사적 사전 조사'없이 흥미를 일으키는 그림에 대한 글을 올려보겠노라고. 

엊그제 올린 '술취한 원숭이' 그림에 대한 글이 처음이고, 이번 글이 두 번째이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미술사 공부한 사람치고는 한국 작가를 많이 아는 편은 아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한국에서도 서양미술사를 공부했고 외국 생활이 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좀 웃긴 변명을 또 하나 붙이자면, 한국 사람의 이름은 2~3자 밖에 안되어서 상대적으로 변수가 적어서 그 점이 역으로 비슷비슷해서 외우기 힘들다는 점이다. (글로 적고 보니 참 지지부진한 변명이다)  

그런데 위의 작품은 맘에 들어 작가 이름을 검색해 봤는데, 그 작가 이름은 한번 듣고 까먹을 수가 없게 독특했다.  '이왈종' 화백.  

이름을 듣고 보니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이름이고, 표피적인 네이버링 ('녹색창에서 검색하는 일')만 해봐도 수십 년 간 인기를 누려온 유명 작가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전 추계예대에서도 그림을 가르치셨다고. 그리고, 위와 같은 작품의 시리즈의 제목하야, ‘제주생활의 中道와 緣起’.

왠지 불교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타이틀이다. 그리고 제목에서 짐작하듯 작가는 제주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그 곳에 무려 작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도 있다고... 원체 저명한 작가이신데, 명색이 미술사 공부하면서 못 알아 봬서 죄송하기 그지 없다. (울 엄마도 가끔 어떻게 미술사 공부한 애가 '도자기의 "도" 자'도 모르느냐며 나의 안목의 부재를 탓하시는 터라, 나의 무식이 충격적이지는 않다.) 

다만, 다시 옹색한 변명을 하나 덧붙이자면, 미술사에도 여러 분야가 있고, 그 속에 몸을 담고 있으면 있을수록 어떤 면에서는 시야가 좁아져서, 예전의 개론 수업에서 알았던 타 분야의 지식은 야곰야곰 까먹어서 그렇다.  (미술사에는 크게는 한국미술사, 동양미술사, 서양미술사가 있고, 전공으로 들어가면 각각 다시 시대별로 나뉜다. 예. 고대, 르네상스, 바로크, 19세기, 모더니즘, 현대미술 등등)  

그리고 이상적으로는 갤러리 전시들 쫒아다니고, 미술계 소식은 발빠르게 찾아다니고 해야하겠지만, 현실은 내 코가 석자라 학생 때에는 세미나 수업 과제하랴 발표 준비하랴 바쁘고, 지금은 다시 내가 당면한 일들을 처리하다보면 쉽지 않다. 다시 말해, 공부를 오래할수록 자신의 분야만 파고 들게 되어서 점점 시야는 좁아지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무식하게 되게 쉽다. 

어쨌든 위의 그림을 누가 카톡의 대문 그림으로 쓰는 것을 보고 작가가 누구냐 물어서 알게된 이왈종 작가의 작품은 재미있고도 정감이 넘치는 그림이다. 알록달록하게 선명한 색상들로 그려진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누구나 한번쯤 꿈꿔본 평화롭고 여유로운 전원 생활을 시각화한 것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과 안정감을 선사한다.  

평화롭고 한적한, 일종의 전원시와도 같은 작품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의 인물들은 골프를 치고 있기도 하고, 저 멀리 바다에는 크루즈가 떠 있기도 하고, 앞마당에는 빨간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기도 한, 엄연한 현재의 모습이다.  그러한 현대적 모습은 당의정적인 이상향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의 생활에서도 이상향을 꿈꿀 수 있음을 역설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미술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는 러시아 화가 샤갈의 작품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아래의 그림은 샤갈이 그리는 고향 풍경과 유사한 느낌이다. (특히 윗쪽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부분은 조형적으로도 그렇지만, 두 작가가 추억을 바탕으로 정감있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왈종, <제주생활의 중도> (2011), 장지 위에 혼합재료 ; 130 x 162 cm, 현대화랑. (이미지: 현대화랑)

Marc Chagall, I and the Village (1911), oil on canvas ; 192.1 x 151.4 cm, MoMA 

이왈종, <제주생활의 중도> (2011), 장지 위에 혼합재료 ; 130 x 162 cm, 현대화랑. (이미지: 현대화랑) (세부)

Marc Chagall, I and the Village (1911), oil on canvas ; 192.1 x 151.4 cm, MoMA (세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아닌게 아니라 이왈종 화가와 에콜 드 파리 화파를 대표하는 마르크 샤갈의 작품세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그의 작품이 마치 아이의 그림과 같은 천진함과 순수함이 묻어나는 그림들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이왈종은 제주도를, 샤갈은 그의 고향 비쳅스크를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두 작가 모두 판화 작품이 많다는 점도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으로는, 샤갈이 에콜 드 파리 시절 1910년대부터 1985년 세상을 뜰 때까지 참 한결같은 작풍을 유지했듯이, 이왈종의 화풍도 참 한결같다는 점이다. 이는 인기 화가의 입장에서는 피치못할 상황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샤갈다운 샤갈 작품을 원했고, 이왈종스러운 이왈종의 작품을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동어반복적 화풍은 결과적으로 비판을 야기하게 되기도 한다는 문제가 있다. 

비평적인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또 한 사람의 미술 애호가로서 동일한 화풍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작가의 작품을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지켜보도록 하면서, 지금으로서는 그냥 새롭게 알게된 작품의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맘껏 빠져보기로 한다.  

이상이 나만 새롭게 알게 된 유명한 작가의 유명한 작품에 대한 내 맘 내키는대로 그림보기였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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