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1882-1967)에 대해서는 나의 길지 않은 블로그 역사 중에서도 몇번이나 다루었다. 개인적으로도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대중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나 평판도 인기도 좋은 작가이기 때문에 할 말이 원체 많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그의 매니저이자 조수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그의 부인 조세핀 (별칭 Jo)이 그의 사후 대부분 휘트니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따라서 대부분의 그의 주요 작품들은 휘트니 미술관에서 많이 소장하고 있고, 유명한 "나이트 호크스(Nighthawks)"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워낙 인기 있는 화가인데다가 그의 주요 작품들은 이미 유명 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라 그의 작품이 경매에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2018년 11월 13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찹 수이 (Chop Suey)"(1929년 작)이 $91,875,000(약 1,040억 상당)에 판매되었다. 이로서 이 작품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중 가장 비싼 작품이 되었다. 역대 경매가로 비교해보자면, 인플레를 고려했을 때, 가격 47위에 해당하는 마크 로스코의 "주황, 빨강, 노랑 (Orange, Red, Yellow)" (1961년작)의 바로 뒤를 잇는 48위에 해당하게 된다. [마크 로스코의 "주황, 빨강, 노랑"은 2012년 같은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86.9-millions [인플레 고려가격 $92.6-millions]에 판매된 바 있다]
호퍼의 "찹 수이"는 식당 안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테이블에서 마주한 두 여인이 화면의 주를 이룬다. 두 여인 모두 화가의 아내인 조세핀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밝혀진 바에 따르면 호퍼가 생전에 자주 가던 뉴욕시의 콜럼버스 서클에 위치한 저가의 중국 음식점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의 제목이 된 찹 수이 (Chop Suey)는 미국화된 중국 음식의 이름 중 하나이자, 그림 속의 간판으로 미루어 식당의 이름이기도 하다. 중국 음식이 현지화 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찹수이는 그런 관점에서는 미국식 자장면. 조리법에서 보자면, 우리나라의 잡채와 비슷한 음식이다. 찹 수이란 원래 雜碎에서 나온 단어로 미국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대중적인 음식에 속한다. 조리법도 비교적 간단해서 고기나 해산물, 그리고 잘게 썬 야채를 볶다가 간장, 참기름, 피쉬 소스, 칠리 페이스트 등 여러가지 소스를 넣어 후루룩 볶은 stir fry라는 총칭으로 불리는 조리법을 사용한 요리다.
이러한 대중적 음식, 그리고 그 요리 이름을 딴 음식점, 그리고 그 속의 마주한 두 인물. 미국의 일상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그의 기존 작품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호퍼의 작품은 당시 미국의 일상과 풍경이긴 하나,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도심의 일요일 오전 풍경이나 깊은 밤의 간이 식당, 그리고 변두리의 한적한 주유소 등, 현대인의 고독을 도드라지게 표현되게 그려왔다. 따라서, 이 "찹 수이"라는 작품은 호퍼로서는 예외적으로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이 모두 일행이 있다는 점이 차이가 있는데, 따라서 이 작품은 호퍼의 작품 중에는 가장 따뜻한 작품이라고도 평가되기도 한다.
Edward Hopper, Chop Suey (1929)oil on canvas ; 81.3 × 96.5 cm 세부 화면 왼쪽 가장자리 중간의 여인의 측면이 절묘하게 잘려나간 것도 재미있는 한 측면.
오랜 시간 생계를 위해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다가 매니저의 역량이 탁월한 아내 조를 만나면서 작품 판매가 순조로워지면서 호퍼는 후반의 작가 생활 동안 경제적으로는 성공한 화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과묵하고 내성적인 호퍼는 연극과 영화를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하던 그가 극장에 자주 가는 것이 가장 큰 사치라고 밝힐 정도로 경제적인 성공 후에도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보다 작품에서도 드러나는 그의 세계관은 부귀영화나 세속적 가치에 대한 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한 호퍼가 지금 살아서 자신의 자그마한 작품이 1천억도 훌쩍 넘는 가격에 거래된 것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따라서, 제프쿤스는 한편으로는 직접 제작하는 수고없이 수많은 조수들에게 일을 시켜 제작하면서(한때수백명에이른조수들의수를최근수십명해고했었다는것이뉴스가되기도했다), 아이디어를 짜내는 고뇌 따윈 집어치고 광고나 이미 유명한 작품들의 패러디와 차용을 해서 제작하면서, 헐리우드 스타만큼이나 유명세를 톡톡히 누리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 그는 생존화가중가장비싼작품을제작하는것으로유명하기도하지만, 반면에일부러싸구려처럼보이게만든작품은현대미술의‘질’과‘수준’을염려하는진지한미술비평가와애호가들에게늘비판과경멸의 대상이 되어왔다.
광고크리에이티브디렉터프랭크다비도피치(Franck Davidovici)가제기한소송에쿤스가저작권위반으로€300,000 (£270,000) [약4억원상당]을배상하도록최종판결을받았다. 아이러니한점은제프쿤스의이작품은2007년크리스티경매에서프라다재단이무려3.7 million (£2.8m) [30억5천만원상당]에 구매했었다는사실이다.
나프나프의광고를보면젊은여인이눈밭에누워있는데, 설정상눈사태의희생양으로보이고, 그녀를구하기위해서 마치 조난자를구조하는세인트버나드와같이돼지가목에럼주가담긴작은통을매고그녀의곁에다가서고있는모습이다. 이작품은‘나프나프’가아기돼지삼형제에서벽돌집을지었던막내돼지의이름인데서딴설정이리라.
두작품모두, 조각작품이라는유사점이외에도, 프랭크다비도비치가주장한바대로소녀의표정과목에통을매단돼지가자신의작품과동일함하다. 굳이전문가의식견을묻지않더라도, 두작품은보통사람들의눈에도놀랍도록유사하다. 제프쿤스의경우, 추위를강조하기위한것인듯, 펭귄두마리를덧붙였다는점, 쿤스의 돼지가 선물 포장의 리본 같은 것을 두르고 있는 것이외에는여인과돼지라는등장인물과구도까지동일하다. 게다가제목까지‘Fait d’Hiver’라는동일하게달았는데, 이는영어로굳이번역하자면“The Fact of the Winter”라고 해석 할수있는 뜻이 명확하지는 않은 불어단어인데, fait divers (‘짧은뉴스’라는뜻)와동일한발음에서딴언어유희이다.
엊그제 "단순화한 현대미술 한 컷 - Simplified Modern Art"라는 제목으로 일러스트레이션 하나를 올렸다. 내가 그린 것은 아니고, 재치 있는 그림을 늘 올려서 간혹 들러서 작품들을 구경하고는 후훗 즐거워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 (참고로 그 포스팅은 여기http://sleeping-gypsy.tistory.com/75)
거기에 소개된 미술사조는 다음과 같다.
Impressionism
Pointillism
Art Nouveau
Fauvism
Expressionism
Cubism
Futurism
Dada
De Stijl
Constructivism
Surrealism
Abstract Expressionism
Pop
Minimalism
Conceptualism
Postmodern art
실제로 해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나씩 소개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생각 중이다.
오늘은 먼저 빅픽처 소개.
원래 현대미술의 계보를 처음으로 만든 건 뉴욕의 현대미술관 (MoMA)의 관장이었던 알프레드 H. 바, 주니어 (Alfred H. Barr, Jr.)이다. 그가 그린 계보도는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이라는 전시회의 카탈로그의 표지에 쓰이면서 널리 알려졌고, 이후 거의 모든 개론서나 미술사 수업이 그의 분류에 따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가 알프레드 바의 현대미술 계보도.
Philippe de Champaigne, Vanitas or Still Life with a Skull, 17th century. Oil on panel, 28 × 37 cm. Musée de Tessé, Le Mans
‘바니타스’라는라틴어는영어로는‘vanity’에해당하지만, 이용어는‘헛되고헛되니모든것이헛되도다(Vanity of vanities, saith the Preacher,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 라는전도서의도입부 (Ecclesiastes 1:2;12:8)에서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니타스회화 혹은 바니타스 정물화는특정종류의정물화장르를지칭하는용어로, 이성서의구절과연관하여, 기독교적인가치의영원함에비해서세속적삶은덧없다는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상징적인사물들을그린정물화라고정의해볼수있다.
이시기는유럽을오랫동안지배해온종교카톨릭교회의부패와타락에반발해야기된종교개혁과이에따라카톨릭교회의반-종교개혁대한반작용으로이어지는시기였다. 네덜란드의경우, 카톨릭국가였던스페인의식민지통치에대한반발로더적극적으로개신교를받아들였고, 결과적으로 1620-1650년사이네덜란드의부유하고신실한중산층들사이에서크게유행했다.
신이 17세기네덜란드의국운에축복을증거하셨는지아닌지는모르겠지만, 해상무역과도시화로인해생활이윤택해진중산층이많이늘어난것은확실한사실이다. 주로상공업에종사했던이들은이전의귀족이나교회의관직자들과같이오랫동안철학이나예술을공부하여조예를쌓을만한시간이나여력은없었지만, 예술애호에의열정은높았던것으로알려져있다.
경제적여유를갖게된중산층은이제까지귀족과왕실가족의전유물이라고만여겼던예술작품을소유하는것에대해큰만족감을느꼈음에분명하다. 한조사에따르면중상류층의가정에는평균53점의작품을, 보통중산층의가정도평균7점의작품은소장하고있었다고한다. 이는작품크기가비교적작았음을감안하더라도오늘날우리의상황과비교해봐도상당한소장량이라고볼수있다.그렇다면, 이러한 중산층이 고객의 주를 이루는 가운데, 바니타스 정물화가 유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여러가지상황이겹쳐서일어난사회현상이라고볼수있다.
대표작가들로는 Jan Davidszoon de Heem (1606–1684, 혹은Jan Davidsz de Heem 이라고도 표기됨), Willem Kalf (1622-93), Willem Claesz Heda (1594-1681), Abraham Hendriksz van Beijeren (c. 1620-1690 혹은 Beyeren이라고도 표기됨)이 있다.
이들은 보통 가족 간에 기술을 전수하는 가내 기업 형태라, 아들 형제들이 함께 화가로 활동한 경우도 많기에 동일한 성을 가진 작가들이 엄청 많다. 게다가 외국어 중에서는 영어에만익숙한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에게 이들의 이름의발음이란 무척이나어렵고추측하기도쉽지않다 (나도 포함해서). 여기에 영어식 표기와 발음까지 섞이면 더더욱 혼란은 가중된다. 그러니,이번에는그냥그림들만쭈욱살펴보는걸로~.^^;;;
아래는 해골, 모래시계, 척도계, 시계, 촛불, 꽃 등의 메멘토모리 (Memento Mori)의주제를 다룬 정물화의 예들
Pieter Claesz, Vanitas Still Life with Oil Lamp and Writing Utensils (1628)
Jan Davidsz. de Heem(1606–1683/1684), Vase of Flowers (ca. 1645), oil on canvas ; 69.6 × 56.5 cm, National Gallery of Art
금은보화, 금화, 지갑 – 직접적으로부를상징 - 등이 등장하는 정물화의 예
Evert Collier(ca. 1640-1708), Vanitas Still-life (1705) oil on canvas ; 98 x 124 cm
Abraham van Beyeren (1620/21–1690), Still Life with Lobster and Fruit, probably early 1650s, Oil on wood; 96.5 x 78.7 cm
Jan Davidsz. de Heem (1606–1683/1684), A Table of Desserts (1640), oil on canvas ; 149 x 203 cm, Louvre 이러한잔치음식들을그린바니타스정물화를특화하여네덜란드어로는“Pronkstilleven”, 영어로말하면‘ostentatious', 'ornate' 또는 'sumptuous' still-life라고하는데, ‘사치스러운정물화’라는의미이다. 이러한독특한정물화는1640 년대앤트워프지방을중심으로발전한스타일이다.
Antonio de Pereda (1611-1678), Allegory of Vanity (1632-36) oil on canvas ; 139.5 x 174 cm, Kunsthistorisches Museum - 바니타스 정물화에 등장하는 소재들의 종합선물 같은 이 작품은 엄밀히 말해 스페인 작가에 의해 그려진 스페인의 바로크 작품에 해당한다. 이처럼 남 유럽 쪽의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천사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한동안 비트 코인 신드롬에 대해서 튤립 매니아 (Tulip Mania)와 비유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오늘은 새로운 시리즈 전에 잠시 단편극 형태로 튤립 매니아와 미술사와의 관련에 대해서……
"튤립 매니아" 혹은 "튤립 광풍"이 용어를 역사적으로 살펴보자면, 소위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라고 일컬어지던 시기, 희귀 품종의 튤립의 구근에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어 상상을 초월한 고가로 거래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렇게 과열된 투기로 일대 열풍이 일었다가, 1637년 갑자기 가격이 폭락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도산하거나 빚더미에 올랐다고 한다.
1636년~37년 사이의 튤립 가격 그래프
이 사회적 현상에 대해, 역사상 최초의 투기가 관련된 버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특정 품종의 구근 하나의 가격이 크기에 따라 3,000~4,200 길더나 되었다는데, 이 가격은 당시 숙련된 기술공의 1년치 월급이 불과 300 길더였다니, 10년치 월급을 훨씬 웃도는금액이라고 한다.
Admirael van der Eijck from the 1637 catalog of P.Cos., sold for 1045 guilders on February 5, 1637. 1637년 1045 길더에 판매된 튤립. 이게 거의 튤립 광풍의 끝자락의 꽃. 같은 해 열기는 폭삭무너지게 되니까.
이런 투기의 배경에는 우선 식물학의 발전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카롤러스 클루시우스 (Carolus Clusius)라는 분이 일찌감치 왕실의 개인교사로 일하다가 라이덴 대학의 식물학 교수로 임명되면서 식물학 연구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는데, 그 중 그가 몰두한 분야가 튤립의 연구였다고 한다. 그렇게 연구에 몰두하던 중, 그는 튤립에서 일종의 돌연변이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귀족들 사이에서는 수집벽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밝혀진 바로는 그 돌연변이로 알려졌던 희귀품종은 사실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그런 모양이 나온 거라고 하는데, 당시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웃돈이 붙게 된 배경에는 튤립의 독특한 생태계도 한몫을 했다. 튤립이라는게 원체 씨를 뿌려서 제대로 된 꽃으로 자라는데 무려 4~5년이 넘게 걸린다 한다. 그리고 그렇게 키워도 씨를 받아낸 엄마 꽃과는 다른 모양의 꽃으로 자라는 게 또 함정. 그래서, 보통의 경우, 구근을 받아서 그 구근에서 꽃을 피워야 엄마 꽃과 비슷한 모양이 될 확률이 훨씬 높고, 자라는 시간도 훨씬 단축이 된다고. 그렇지만, 구근이라는게 한 꽃에서 그다지 많이 나올 수 없는 것이고, 구근에서 싹이 나서 잎과 꽃으로 완전히 자라는데 시간이 걸리니, 거기에 웃돈이 막 걸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구근을 거래 하는 시장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밝은 태양 아래, 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꽃밭에서 우아하게 이뤄지는것도 아니었다. 거래는 음침하고 은밀한 주점의 뒷방, 담배연기로 가득한 밀실에서 암암리에 은밀하게. 그렇게 음성적인 거래였기에, 나중에 탈이 났을 때, 그 거래에 대한 보상을 받을 기회도 적었다.
어쨌든 한 십수년 네덜란드 전역에 튤립 광풍을 일으키다가 무슨일인지 갑자기 거품이 쫘악 빠지면서 갑자기 가격이 떨어지게 되고, 그로 인해서 판돈을 미리 맡겼던 중산층의 매수인들의 가정이 줄줄이 도산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고! 국가에서 빚을 탕감하는 정책도 폈다고는 하는데, 피해자들을 다 구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동안 뜨거웠던 비트 코인의 열풍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 튤립 매니아, 튤립 광풍이 역사적으로 되풀이 되는 건 아닌가 염려하는 것이었으리라.
위의 그림은 유명한 화가 피터 브뤼헬 더 엘더의 아들이었던 얀 브뤼헬 더 엘더의 꽃 정물화. 아래는 아이러니하게도 튤립 광풍에 대한 희화화를 그린 브뤼헬인데, 이번엔 피터 브뤼헬 더 엘더의 손자이자 얀 브뤼헬 더 엘더의 아들인 얀 브뤼헬 더 영거의 작품. 아래의 풍자화에서는 상류층의 귀족들이 얼빠진 원숭이들로 묘사되었는데, 이들도 하나같이 튤립에 열광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중 더 얼빠진 원숭이가 튤립 꽃밭에 오줌을 누는 바람에 붙잡혀서 혼나고 있는 장면도 보이고 있다.
위의 그림은 튤립 광풍에 맥없이 휘둘린 사람들에 대한 풍자화. ‘바보들의 마차’라는 제목의 작품속 인물들을 보면 마차 위의 인물들은 튤립 열풍에 휩싸여 흥청망청하고 있고, 그 마차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인물들도 보인다. 그 마차가 향하고 있는 곳은 죽음의 세계. 결국 멸망의 길로 기꺼이 가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들에 대한 신랄한 풍자화이다. 이 작품이 그려진 것이 1637년 인걸 보면, 튤립 가격의 폭락이 있고 나서 그려진 그림일까? 아니면, 그 폭락의 직전, 폭락을 예견한 그림이었던 것일까?
위의 그림은 돌연변이 종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젬퍼 아우거스터스 튤립 Semper Augustus tulip 으로 가득 찬 화병이 그려진 작품이다. 이 이상 확실한 인생무상, ‘바니타스’* 교훈의 화병이 또 있을까 싶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튤립 시장이 폭락했던 1637년 동안은 꽃의 정물화의 제작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거슨~~ 꽃들을 볼 때마다 튤립 때문에 돈을 잃은 사람들이 맘이 너~무 아파서 꽃 그림 조차도 보고 싶어하지 않아서였다고.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은 역사에서 무엇인가를 배워서 지난 과오는 반복해서 범하지 않는 슬기로운 존재일까? 앞으로 비트 코인의 열풍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지 자못 궁금해진다. 어차피 소심한 나는 그냥 궁금해만 하겠지만.
*바니타스 정물화에 대해서는 글이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다음 기회에 따로 다뤄야겠다. ^^
가요 순위처럼 인플레 고려한 가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순위를 20위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봐 왔고, 오늘 드디어 대망의 1위 발표~
두구두구두구두구 짠~~~
예수 그리스도가 왼손에는 수정구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내리는 제스춰를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이 작품은 제목하야 '세계의 구원자, Salvator Mundi'이다. 이 작품은 1500년경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다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인정하고 있는 반면, 일부 전문가들은 여전히 진위 여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오늘날까지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하나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사랑 받고 있는 대부분의 유명 화가들이 생전에는 가난과 몰이해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창조하기 위한 고독한 투쟁을 하고, 사후에나 인정을 받곤 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러하고, 모딜리아니가 그러하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생전에 이미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을 받아 유럽의 각국의 왕실에서 스카우트 경쟁 속에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살았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임종은 프랑소아 1세가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인데, 그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그가 왕과 친밀한 관계였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던 것 같다. (바사리에 따르면 그의 임종 때, 왕이 그의 머리를 안고 손을 쥐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많은 화가들이 그 장면을 상상하여 그렸으나 그 진위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우리말로 하자면 팔방미인, 진정한 르네상스 맨이라고 할 수 있는데, 회화와 조각, 그리고 건축은 물론, 과학, 음악, 수학, 공학, 문학, 해부학, 지질학, 천문학, 식물학, 작문, 역사 및 지도 제작 등 그가 관심을 갖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이다. 1480년 Duke of Milan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면서 군사 공학자라고 강조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는 여러가지 무기를 고안하기도 했다. 오늘날은 화가로 알려진 그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의 다양한 관심사와 활동 중 극히 일부였을 뿐이었고, 유럽 각지의 러브콜에 이끌려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완성작은 더더욱 줄어들었다. 오늘날 확실하게 그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작품은 20여점에 불과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작품은 적으나, 그의 놀라운 그림 솜씨에 대해서는 전설처럼 여러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될성 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도제 시절부터 그의 실력은 남달랐다고 한다.
위의 작품은 초기에 그가 그의 스승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를 도와 어린 제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작품이다. 이 중에서 레오나르도가 천사 한 명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는데, 스승인 베로키오가 그린 천사가 그 동네 사는 소년같이 그렸던 것에 비해 레오나르도가 그린 그림에는 기품과 신성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후 스승은 천사는 그리지 않았다나 어쨌다나.... (레오나르도가 그린 신성이 담긴 아름다운 천사는 아래 두명 중 어느쪽일까요? 궁금하신 분은 맨 아래 정답을 확인하세요~)
대망의 1위를 차지한 레오나르도의 <세계의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2017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의 황태자가 아부다비의 문화관광부를 대신해서 $451.3-millions (약 5,138억 상당)에 구입한 것으로 되어있다. 2018년 가을에는 아부다비의 루브르에서 전시된다고.
그의 작품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있는 작품은 한 두 작품이 아닌데, 이 작품은 최근 대다수의 전문가가 진품으로 인정한 작품 중 하나이다. 최근들어 그의 작품이라고 인정받은 또 하나의 작품이 있는데, 그것은 그 유명한 모나리자의 또 다른 버전. 오랫동안 레오나르도의 위작으로 여겨졌으나, 2015년부터 16년에 거쳐 수많은 검증을 거쳐 비로서 그의 진품임을 인정 받은 작품이다.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구별하여 소장자의 거처를 따 Isleworth Mona Lisa라고 불린다.
사실 우리는 모두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모나리자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얼마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당시부터 유명했던 그를 둘러싼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도 원체 많고, 이후 그를 연구한 학자들은 차고 넘치면서 담론은 더욱더 증가하지만, 대중들은 이미지와 이름으로 워낙 친숙해서 모두가 알기도 전에 질려버려 그다지 더 알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가 남긴 회화의 작품 수는 얼마되지 않지만, 그가 임종을 왕의 무릎위에서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생전에 높은 지위를 지녔고 거기에 걸맞는 학식과 견문을 갖춘 만능 학자로서, 이전의 장인의 위치에 있던 화가의 위치를 인문학자의 위치로 끌어올리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위의 정답: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는 우리가 바라봤을 때, 왼쪽의 천사. 아름다운 눈빛과 곱슬거리는 빛나는 금발은 이후 그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