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미술 이야기' 카테고리의 글 목록 (113 Page)
2018. 10. 29. 00:30 미술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 연재가 계속 되고 있어요.  처음에 전체 랭킹에 관한 포스팅은 요 바로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leeping-gypsy.tistory.com/51

가요 순위처럼 인플레 고려한 가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순위를 20위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봐오고 있죠.  어느새, 오늘은 3위 작품을 살펴볼 시간이네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보면 3위때부터는 두둥두둥 소개할 때 음악부터 달라지던데.  ^^ 


 

인플레 고려 3위) Paul Cézanne, "The Card Players" (ca. 1890) estimated $250- to $300-million (2011 private sale)  $272 +-millions 

미술사에서는 폴 세잔 (Paul Cézanne: 1839-1906) 은 폴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와 함께 후기 인상파로 분류되는 화가이다.  그렇다고해서, 이들이 한날 한 장소에 모여서, '우리 오늘부터 후기 인상파 창립하는 거다! 으샤으샤!' 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을 단체 여행이라도 가서 한 방을 쓰게 했다면, '왜 하필 쟤랑 같은 방이람!' 하면서 못마땅해 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예술에서 지향하는 방향이 각각 다르고, 화풍도 많은 차이가 난다.  이들을 '후기 인상파'로 묶은 것은 이후의 미술사학자들로 순전히 분류 목적이다. 인상주의는 아니고, 그렇다고 이후에 오는 추상의 경향과는 또 다른, 그렇다고 그냥 두기에는 너무 거물들. 따라서 이렇게 모아서 '후기 인상파'

폴 세잔은 이 후기 인상파 작가들 중에서 아마도 후대 화가들에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라 할 수 있다.  20세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피카소조차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며 세잔을 칭송했고, 야수파의 거장이라고 불린 마티스도 아직 젊은 화가 시절, 결혼해서 어린 자식들까지 부양하느라 쪼들리던 시절에도 세잔의 욕녀 작품들의 소품들을 세 점이나 사 모을 정도였다.  

세잔은 생전에 이미 그의 작품이 평가를 받았지만, 초반에 파리 화단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고향인 엑상 프로방스에서 은둔아닌 은둔을 하며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대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사과가 있는 정물, 생트 빅투와르 산, 목욕하는 여인들 등 시리즈 물로 주로 그렸는데, 카드 놀이 하는 사람들도 그 중 하나이다. 

세잔은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다섯점을 제작하였고, 그것은 미국에 2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필라델피아의 반즈 파운데이션, 그리고 프랑스의 오르세이 미술관, 영국의 코트올드 미술관, 이렇게 4점이 있고, 이 작품은 2011년 카타르의 왕족이 구입하므로써 유일하게 개인 소장 작품이 되었다.  

다섯 작품 중 두 명만 그려진 작품은 위의 작품을 포함 영국과 프랑스의 미술관들, 이렇게 세 작품이 있다. 그 중 크기는 가장 작지만 구도가 가장 안정되고 색상도 가장 아름답고 조화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은 오르세이 미술관 소장 중인 작품 (아래)으로 개론서 같은데서 대표로 실릴 때 주로 이 작품이 실리고, 이 작품은 기념 우표 제작때에도 대표로 발탁되었다. 

     

분명히 모델이 된 것은 그의 고향마을 농한기에 심심풀이로 카드놀이를 하는 농부들일터인데, 어찌된 셈인지 이들의 자세와 태도는 고요하고 분위기는 적막하고, 심지어 자세는 경건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특징때문에, 세잔의 초상화는 '인간으로 그린 정물화 (human still-life)'라고 불리는데, 이는 세잔의 관심사가 원체 인간관계가 아닌 형태들의 상호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세잔도 원체 사회관계에는 서툴기도 하고 크게 관심없었던 사람이었던듯 하기도 하다.)  

원류를 따라가자면 풍속화 장르 중에 '카드 놀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소 장르가 있고, 이는 또 원류를 좇아가보면, 성서에서의 '돌아온 탕아'에서 파생된 주제이다. 하지만, 처음 착안은 그렇다고 해도 정작 세잔이 추구한 것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형태와 주변 사물이 이루어내는 조화, 형체들간이 구축해가는 구도, 이러한 것이었다는 것. 

참고로 다른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들은 아래와 같다.

 메트로폴리탄 소장품

필라델피아의 반즈 파운데이션 소장품

영국의 코트올드 미술관 소장품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28. 00:30 미술 이야기

오늘은 어제 고갱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잠시 나온 '전원 풍경화 (Pastoral Landscape)'에 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티치아노 (이전 조르조네), 전원교향곡 (c. 1509), oil on canvas ; 105 x 137 cm, Musée du Louvre, Paris 


티치아노 (이전 조르조네), 잠자는 비너스 (일명 드레스덴 비너스) (c.1510), oil on canvas ; 108.5 x 175 cm,  Gemäldegalerie Alte Meister, Dresden


위의 두 작품은 모두 조르조네 작품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연구들에서는 실은 조르조네의 뛰어난 수제자이자 베니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 티치아노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위의 작품은 <전원 교향곡>, 불어로는 Fête champêtre 영어로는 Pastoral Concert 라고 알려진 작품인데, 오늘 살펴볼 '전원 풍경화'라는 장르의 대표적 작품이다.  또 그 변주로 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잠자는 비너스>는 소장처의 이름을 따서 일명 <드레스덴 비너스>라고 불리는데, 역시 전원 풍경화에 아름다운 여인의 누드상이 결합된 형태이다.  이 작품은 '누워있는 비너스'라는 서양미술에서의 널리 알려진 도상 중 최초의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말로 하자면, '안빈낙도' 정도 될까? 고대부터 문인들과 귀족들 사이에서 소위 '전원시' 혹은 '목가'로 번역될 수 있는 'Pastoral poetry'라는 장르는 존재해왔다. 번잡한 도회에서의 생활일랑 벗어버리고, '청산에 살으리랏다'의 서양 버전, 양이나 치면서 자연과 벗하고 시나 짓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이는 회화에서는 '전원 풍경화 (Pastoral Landscape)'이라는 장르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맨 위의 작품, 티치아노의 <전원 교향곡>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티치아노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스승에 대한 추모 작품이라고 한다. 그림속의 두 청년은 티치아노와 조르조네, 즉 옷을 세련되게 잘 입고 계신 분이 스승인 조르조네를 그린 것이고, 더벅머리 시골 총각은 자신 티치아노를 묘사한 것이라고.  누드의 두 여인에 대해서 두 남성이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뮤즈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누드로 앞에서 왔다갔다하는데, 저렇게 남자 둘이서 얘기하고 여성들에게 눈길조차 안돌린다는 건 좀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  

그 해석의 근거로는 최근 세상을 떠난 조르조네가 들고 있는 루트의 현이 없게 그려진것 (그는 이젠 더이상 창조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의미), 또한 뮤즈 중 한명이 물병의 물을 다시 우물 속에 되돌리고 있는 것 (이는 조르조네의 뮤즈로 조르조네가 더이상 창조의 샘에서 물을 길어낼 수도 없는 상태이므로)

이처럼 의미가 풍부한 작품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도상은 '전원 풍경화'의 전형이다. '시골 가서 양이나 치면서 풍월을 읊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도시 귀족들의 로망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로 치면, 다 때려치고 시골가서 농사'나' 짓고 살고 싶다라는 맘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의 유유자적하게 근심걱정없이 지내는 단조로운 삶을 그린 것이 '전원 풍경화'이고, 이러한 작품들은 대개 귀족들의 서재에 걸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자연 속에 사는 것을 꿈꾸는 남성 귀족들의 로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문되고 제작되어온 장르가 <전원 풍경화>이다.  여기에 아름다운 미녀가 있으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잠자는 비너스>는 그러한 로망을 충족시킨 그림이다. 

어제 고갱의 그림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전원 풍경화>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 속에서 세상의 치열한 경쟁과 권력에의 암투 이런 것 없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평화롭게 사는 삶.  그러한 로망은 21세기를 사는 많은 이들에게도 유효한 것같아 보인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27. 00:30 미술 이야기

가요 순위처럼 인플레 고려한 가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순위를 20위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봐오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 연재 계속~ 처음에 전체 순위에 대해서 살펴본 포스팅은 아래를 참고해보세요~  

http://sleeping-gypsy.tistory.com/51

매일매일 한 작가씩 살펴보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오늘은 4위를 차지한 폴 고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죠~

 

인플레 고려 4위) Paul Gauguin, "Nafea Faa Ipoipo (When Will You Marry?)" (1892) $210-million (2014 private sale)  $217-millions [약 2,471억원 상당]

타락한 문명사회를 버리고 물질주의에 찌들지 않은 자연을 찾아 떠난 자유로운 영혼.  그것이 일반적인 폴 고갱의 이미지였다.  그리고 그가 타히티에 정착한 뒤 제작한 그림들은 그러한 이미지에 부합하는 원주민들의 모습과 자연의 모습.  그 이후 그는 '종합주의 (Synthetism)' 혹은 '구획주의 (Cloisonnisme)'라고 칭해지기도 하며 이후 상징주의의 효시로 수많은 화가들의 추종을 받았다.  이들은 색과 선을 통해 화가의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자연현상의 묘사에 초점을 맞춘 인상주의자들과 차별화하는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화가들은 스스로를 '나비파(Nabis)'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히브루어로 예언자라는 뜻이라고.]  

사실 그의 역할과 영향은 미술사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은 부정할 수 없으나, 눈치빠른 독자나 관람자라면 알아챘겠지만, 요즈음 폴 고갱에 대한 전시회나 개론서에서의 그에 대한 언급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식민사관을 반영하는 듯한 타이티에 대한 견해, 그리고 오늘날이면 소아성애자라고 처벌받을 수 도 있었을 타이티에서 미성년자들과의 사실혼 관계 등은 전시를 준비하거나 그에 대한 에세이를 쓸 때 무시하기는 힘든 사실이고, 그러한 불편함 때문에 점점 교묘히 그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게 되어온 것이다. 

그가 예술을 위해 잘 나가던 직장을 때려친 것은 아니고, 당시 우리나라의 IMF에 해당할 만큼의 경제 붕괴 사태가 있었을 당시 실직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십수년간 가정을 책임지며 다섯명의 아이를 키워왔던 부인을 버리고 자유롭게 타히티로 건너가버린 무책임한 가장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건너간 타히티가 실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상당한 문명화가 이뤄져 있어 그가 기대한 만큼의 '순수한 자연'의 상태는 아니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럽인들의 환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원시 상태의 타히티를 그려서 '이국 취향'을 선호하는 파리 화랑에서 팔려고 했다는 점....  속속 드러나는 그의 삶과 예술의 이면이 아름답지만은 않다. 

위의 작품은 2014년 카타르의 왕족에게 약210-millions에 판매되면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는데, 이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2,471억원 상당한 금액이다.       

"Nafea Faa Ipoipo?" 원제는 타히티의 원주민어로 굳이 달아놨다. 이것도 아마도 이국 취향 저격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해석을 하자면 '언제 결혼할래?' 라는 뜻이라고.  우리나라도 명절마다 듣는 이 말이 듣기 싫어 가족모임 자체가 괴로울 젊은이들이 많을텐데, 거기도 예외는 아니었나보다.   화면에는 어느새 장성해 결혼할 나이가 된 두 명의 원주민 소녀가 그려져 있다.  앞쪽의 소녀는 그 질문을 받자 자리를 피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뒷 쪽에 자리한 여성이 입고 있는 옷은 원주민들의 전통 의상이 아니라 유럽의 현대 의상.  생각보다 현대화 되어 있어서 실망스럽다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던 고갱은 파리 화랑에 그림을 팔 때에는 당시 유럽인들의 이국 정취에 대한 환상을 만족시킬만한 작품을 제공하고자 애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던 고갱은 이 작품에서 현대화 된 타히티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누설해버린 것일까?   

이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문명사회와는 다른 원시적이지만 순수한 자연의 상태에서의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으나 평온한 삶에 대한 동경은 고대 그리스부터 있어왔고,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이 극에 이른 로코코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 인기가 있었다.  이러한 장르를 문학에서는 '전원시' 혹은 '목가' 미술에서는 "전원적 풍경화" "전원의 교향곡"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데, 고갱의 타히티 풍경화는 일종의 19세기 말 버전의 '전원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시간에는 이러한 '전원시' 장르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25. 00:30 미술 이야기

한 번 시작한 순위 프로그램, 계속 진행해가고 있습니다.  가요 순위 프로그램처럼 인플레 고려한 가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순위를 20위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 연재 계속~ 쭈욱~  

전체 랭킹에 대해서 올린 포스팅은 여기를 참고!  http://sleeping-gypsy.tistory.com/51



지난 2차례 걸쳐서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에 대해서 살펴봤다. 오늘도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햐는 화가 마크 로스코 (Mark Rothko: 1903-1970)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그의 작품 중 순위에 포함된 작품은 아래와 같다. 

 

인플레 고려 7위) Mark Rothko, "No. 6 (Violet, Green and Red)" (1951) $186-million (2014 private sale via Yves Bouvier) $192-millions


앞의 포스팅들 (윌렘 드 쿠닝잭슨 폴록 편 참고)에서도 밝혔지만,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들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émigré, 이민자들이었다. 마크 로스코도 본명은 Markus Yakovlevich Rothkowitz. 유태계 혈통인 그는 러시아 내에서의 반유태정서를 염려한 부모를 따라 오레곤주의 포틀랜드로 이민을 왔다. 이주 후 곧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낯선 땅, 낯선 언어 속에서 빈곤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비록 가정형편 탓에 자퇴를 하긴 했지만, 예일대학에 입학을 할 수 있을 정도였고, 어릴 때에는 출신지인 러시아의 언어는 물론, 이디시, 히브루어를 공부했고, 시나고그에서 탈무드를 배우기도 했던 로스코는 상당히 지적인 화가였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 뉴욕에 이주한 후, 그는 다양한 배경의 화가 지망생들과 어울리는 한편,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와 융 심리학은 물론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의 철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다른 추상표현주의자들처럼 로스코도 시그니처 스타일이 있었는데, 전형적으로 직사각형의 캔버스 위에 두 세개의 사각형이 그려진 단순한 구조다. 그의 작품을 묘사할 때는 'floating rectangles'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경계선이 명확한 사각형이 아닌 가장자리가 번져 있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마치 물 속에서 떠오르는 듯한, 그 위를 부유하는 듯한 사각형이라는 의미이다.   

'멀티폼 (multiform)'이라고 알려진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이 등장하게 된 것은 그가 다른 추상표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융 심리학의 영향을 반영하는 단계를 거치고 난 후, 1940년대 말, 1950년대 초였다.  

그의 회화 작법은 로스코가 생전 스튜디오에 사람을 들이기를 극도로 꺼리며 비밀을 유지한 덕분에 아직까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그의 회화작품을 수복을 위해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짐작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밑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 천 위에 엷은 물감을 여러차례 바르는 기법을 사용했다. 따라서 흰색 캔버스 천의 흰색이 여러가지 색상의 엷은 물감이 서로 섞이는 와중에 비쳐나오면서 마치 사각형이 떠오르는 듯한 효과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인 이 작품도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로 그려진 것인데, '이런 것을 그림이라고...'라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물을 평면화 시켜버리는 사진으로가 아니라, 직접 보면 생각보다는 '복잡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단 조그만 썸네일이나 작은 사진으로 보면 그냥 사각형 두세개가 그려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사각형 하나하나가 단색이 아닌 명도와 채도가 색상들이 여러 층에 걸쳐 그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엷은 물감은 밑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에 번지면서 스며들어 가장자리에는 번진 자국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floating'이라고 묘사하는 사각형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각형이 캔버스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빛에 따라 일렁거리는 물결 아래 잠겨 있다가 떠오르다가 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후기에 이를수록 점점 색상이 짙고 어두워지긴 하지만, 전성기 그의 작품 속의 사각형은 밝고 아름다운 색상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해 일부 비평가들은 그를 'colorist'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작 본인은 그러한 평가에 대해 펄쩍 뛰면서 '내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작품앞에서 통곡을 하게될 것이라' 천명하였다. 

그의 전기를 쓴 작가 제임스 브레슬린은 서문에서, 어떻게해서 로스코의 전기를 쓰게 되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자신이 힘든 시기였을 때, 우연히 로스코의 작품을 보고 그 앞에서 펑펑 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작가의 위의 언급을 읽고 로스코라는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전기를 쓰게 되었다고. 

자신의 작품은 결국, 비극과 환희,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운명 (tragedy, ecstasy, doom)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던 로스코도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굴복한 것일까?  68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의 부호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 (Dmitry Rybolovlev)가 고갱과 로댕의 작품을 포함해, 스위스의 아트딜러 이브 부비에 (Yves Bouvier)로부터 구매한 고가의 미술품 중 하나이다.  [이들과 관련한 논란 및 법정공방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24. 00:30 미술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 연재 계속~ 쭈욱~  

http://sleeping-gypsy.tistory.com/51

가요 순위처럼 인플레 고려한 가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순위를 20위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봐오고 있다.  

오늘 다룰 작품은 순위에 든 작품들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바로크 시대 작품이다. 

인플레 고려 8위) Rembrandt van Rijn, "Pendant portraits of Maerten Soolmans and Oopjen Coppit" (1634) oil on canvas ; 208 x 132 cm. 

Louvre and Rijksmuseum (joined-ownership) 

 $180-million (2015 private sale)  $186-millions [약2,106억원 상당]

마르텐 술만스와 우펜 코핏이라는 어려운 이름의 인물들은 갓 결혼한 커플로, 이 두 작품은 이들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한 쌍으로 제작된 것이다. 물론 각 작품은 따로따로 제작되었지만, 이처럼 한 곳에 나란히 걸릴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렘브란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피카소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또한 화가들의 화가라고도 할 수 있다. 화가들 중에서는 화가들 사이에 더 폭넓게 회자되고 존중받는 화가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 예가 벨라스케스, 고야, 카임 수틴, 렘브란트 등이 있다.  

렘브란트는 그의 자화상과 초상화로 유명한데, 자화상에는 자신의 당시 상황과 심리 상태를, 또 초상화의 경우 그림의 모델이 되는 이의 심리 상태를 잘 표현하는 화가이다.      

이러한 전통적 초상화의 경우, 경매에 나오는 경우는 정말 드문데, 이는 유명 화가의 작품들은 이미 대형 미술관들이 소장 중이고, 그러한 작품들은 여하한 이유없이는 경매에 나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렘브란트의 결혼 기념 초상화는 2015년 비공개 경매에서 루브르 미술관과 암스텔담에 있는 릭스뮤지엄 (Rijksmuseum)이 공동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들은 앞으로 이 두 군데에서 번갈아가며 전시되리라 생각된다. 새롭게 복원 과정을 거쳐, 2018년 9월부터는 루브르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러한 결정은 한정된 예산 안에서 이 작품을 구매함에 있어서 두 미술관이 함께 결정을 내린 것일텐데, 이 두 작품이 펜던트 작품이었다는 것이 공동 구매 결정을 하게 된 이유가 된다. 이처럼 두 작품이 한쌍을 이루는 작품을 펜던트 작품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함께 걸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판단이 참 성숙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산 맞춰서 작품 하나씩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작품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판단하에 두 미술관이 협의하에 함께 구매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이하는 지난 6월까지의 Rijksmuseum에서의 전시회 광고.  전시회 제목도 광고도 아이디어 굿~  사실 셀카로 가볍게 찍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초상화를 유명화가들에게 제작하게 한다는 자체가 그림의 모델들이 'High Society'에 포함되었다는 의미. 게다가 그들이 그렇게 작정하고 초상화를 제작하는데, 아무 옷이나 걸치고 포즈를 취하겠는가.  

 

2019년 7월부터 Rijksmuseum에서 렘브란트의 대표작인 <야경>(1642)의 수복작업을 대중에게 공개한 상태로 진행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읽었다. 만약 내년 여름 유럽 방문할 생각이라면 이곳의 수복 진행사항을 지켜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일 것이다. 

Preliminary research on Rembrandt van Rijn’s The Night Watch (1642) at the Rijksmuseum. Photo by Daniel Maissan, courtesy the Rijksmuseum.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23. 00:30 미술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 연재를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된 작품 랭킹 20위'로 포스팅을 한 후로 하나씩 짚어가고 있는 중.   처음의 전체 랭킹을 논한 포스팅으로는 여기를 클릭!   

http://sleeping-gypsy.tistory.com/51

가요 순위 프로그램처럼 인플레 고려한 가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순위를 20위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봐오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이제까지처럼 한 작가의 작품이 다수 포함 된 경우, 중복되는 언급을 피하기 위해서 이처럼 묶어서 진행하려고 한다. 

두둥~

인플레를 고려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에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 1912-1956)의 작품도 두 작품이 들어가 있다. 그 두 작품은 아래와 같다. 

인플레 고려 5위) Jackson Pollock, "Number 17A" $200-million (2015 private sale)  ~$206-millions [약2,333억원 상당]

인플레 고려 11위) Jackson Pollock's "No. 5” (1948) oil on fiberboard ; 2.4 × 1.2 m,  $140 million (2006 Sotheby’s auction)   $170.0-millions [약1,585억원 상당]

잭슨 폴록의 경우, 윌렘 드 쿠닝과 함께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추상표현주의는 미국이 미술사상 최초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미술사조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나치의 압박이나 전쟁을 피하여 많은 예술가들과 지성인들이 뉴욕으로 망명을 오게 되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에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든 결과, 에콜 드 파리를 형성하게 된 것과 유사한 현상이었다. 

실제로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이 정착되기 이전에, 이들을 '뉴욕화파 (The School of New York)'로 부르기도 했다. 따라서, 에콜 드 파리를 구성하는 화가들의 국적이 다양한 만큼이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포함되는 작가들의 원래의 국적 또한 다양하다.  미국이 주도한 현대미술사조라고  미국이 그렇게까지 으쓱으쓱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직전에 살펴본 윌렘 드 쿠닝이 네덜란드에서 밀입국하여 뒤늦게서야 (1961년) 미국 국적을 획득하였고, 마크 로스코의 본명은 마르커스 로스코비치, 즉 이민 1.5세대였다. 이처럼 대부분의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실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었다.  

이에 반해, 오늘 살펴볼 잭슨 폴록의 경우, 미국 토박이로 와이오밍주 출신이다. 즉, 진정한 미국인인 것이다.  폴록은 어릴 적 불우한 환경 탓에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못하였고, 가정 형편상 서부 지역을 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그의 이미지와 이후의 성공한 그의 모습은 거칠면서도 자유롭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는 미국에 대한 선입견적 이미지에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가 스튜디오 바닥에 넓게 펼쳐 놓은 캔버스 천 위를 야생마처럼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물감을 뿌리는 모습은, 드넓은 대륙 위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미국의 이미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냉전 시대, 소련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정치적인 선전으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즉, 폴록이 자유롭게 펄쩍거리면 펄쩍거릴수록,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규제되는 구 소련과 강하게 대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추상표현주의가 이러한 정치적 선전으로 이용되었다는 의견은 당시 유난히도 해외순회전이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상당히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해외순회전 덕분에, 추상표현주의자들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의 명성도 드높이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폴록의 작품은 보그지에도 등장할 만큼 문화현상이 되었고, 그가 작업하는 모습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되거나, 한스 나무스라는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으로 유명해져서, 그의 이름과 그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당시 미국 사람들 중에는 없었으리라.  

클래식한 드레스를 떨쳐입은 모델들의 뒷쪽에 폴록의 작품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묘하게 어울리고 아름다운 이러한 사진들로 명실공히 그는 미술계 뿐 아니라, 대중문화 속에서의 인기까지 얻는 이례적인 화가가 되었다.  

Jackson Pollock in the act of painting (1950)  Photographed by Hans Namuth 몰아 상태에서 자유롭게 바닥에 눕혀놓은 캔버스 천위르 뛰어다니며 작업을 하는 그의 모습은 실존주의에서의 인간의 모습과도 잘 맞아떨어지고, 자유민주주의의 표상에도 부합하는 모습이었다. 

이전 윌렘 드 쿠닝의 포스팅에 대해서 밝혔듯이, 폴록의 <Number 17A>는 데이비드 게픈 재단 (the David Geffen Foundation)이 헤지 펀드 재벌 케네스 그리픈 (Kenneth C. Griffin)에게 판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혹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윌렘 드 쿠닝의 작품에 대한 포스팅을 함께 읽으면 폴록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처럼 유명한 잭슨 폴록이긴 하지만, 아마도 잭슨 폴록의 작품은 피카소의 작품과 함께, '세살짜리 꼬마'들이 가장 많이 소환되는 작품일 것이다. 즉, '우리집 세살짜리도 이것보다는 잘그리겠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 현대 미술 작품 중 하나라는 얘기다.  

하지만, 호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폴록의 작품을 바라보다 보면, 처음에 봤을 때에는 chaos였던 그의 작품이 나중에는 cosmos로 느껴지는 순간이 올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 회화에서의 figure/ground, 즉,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그 외의 바탕이 되는 부분의 경계가 모호한 현대 미술 작품 중 대표적인 작품이다.  붓이 아닌 막대기나 심지어 대형 스포이드를 이용해 물감을 흘리거나 흩뿌린 그의 작품에서 어떤 것이 주된 형태이고 어떤 것이 배경을 이루는 바탕인가를 구분해내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선들 속에 드러나는 작가의 움직임과 일견 엇비슷해보이는 색상들의 미묘한 얽힘은 자세히 바라보다보면 그 속에서 색다른 조화와 균형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뉴욕의 현대미술관 (MoMA)과 엘에이의 현대미술관 (MoCA)를 위시해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는 널리 소장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폴록이 창의성과 독창성이 뛰어난 작가였다고는 해도 시대를 잘 타고 난 것도 맞다고 생각된다.  마치 제임스 딘 같은 반항아의 이미지와 드넓은 캔버스 위로 뛰어다니는 그는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표현하기 더할나위 없는 적합한 아이콘이었고, 전후 냉전시대 필요한 이미지였던 것이다. 거기에 그의 작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미술비평계의 헤밍웨이'라 불리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존재도 한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국 국내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그 자체로 문화적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폴록 자신의 경우, 그러한 유명세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지독한 가난과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간절히 성공을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엄청난 성공과 유명세가 자신이 바라고 기대하던 것보다 지나치게 과하다고 느꼈을까?  만나는 이들마다 눈을 반짝이며, '이번에는 얼마나 더 놀라운 것을 창조해낼까?'라는 기대의 눈빛에 견딜 수 없는 부담을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그가 지닌 독창성과 창의성을 초창기에 너무 남김없이 발휘해버린 것일까? 

1954년부터 그는 더 이상 말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부터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알콜중독이 더욱더 심해졌고 (애당초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알콜중독 치료의 일환이었다), 결국 음주운전의 결과로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자기파괴로 성급한 결말을 맞이한 잭슨 폴록이지만, 그는 앞으로도 미국 현대미술을 세계에 알린 대표적 인물로, 또한 이후 앨런 카프로우 (Allan Kaprow)등이 주도한 퍼포먼스 아트의 대두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인물로 미술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22. 05:11 미술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 연재 쭈욱~ 계속 됩니다~ 

먼저, 전체 랭킹을 논한 포스팅은 여기를 클릭!  

http://sleeping-gypsy.tistory.com/51

가요 순위 프로그램처럼 인플레 고려한 가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순위를 20위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은 추상표현주의자들 중 잭슨 폴록과 함께 소위 액션 페인팅 분야를 대표하는 작가 윌렘 드 쿠닝 (Willem de Kooning: 1904-1997)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순위에 포함된 드 쿠닝의 작품은 두 점인데, 이제까지처럼 한 작가의 작품이 다수 포함 된 경우, 중복되는 언급을 피하기 위해서 이처럼 묶어서 진행하려고 한다.  

인플레를 고려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에 무려 2위와 12위에 빛나는 윌렘 드 쿠닝의 작품은 아래와 같다. 

인플레 고려 2위) Willem de Kooning, "Interchange" (1955) $300-million (2015 private sale)  ~$310-millions [약3,511억원에 상당]

인플레 고려 12위) Willem de Kooning, Woman III (1953) (2006 private auction via Larry Gagosian)   $166.9-millions [약1,890억원에 상당]


위의 두 작품은 각각 대표작으로 평가 받는 작품은 아니지만, 윌렘 드 쿠닝의 두 가지 관심사를 잘 나타내는 작품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여인의 인체에 대한 관심이고, 또 하나가 회화에서의 형과 바탕, 즉 figure/ground의 관계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였다.    

먼저, 인플레를 고려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으로 12위를 차지한 <여인 III> (1953)을 살펴보자. 윌렘 드 쿠닝은 <여인> 시리즈로 가장 유명한 작가이다.  대표작으로는 현재 뉴욕의 현대미술관 (MoMA) 소장 중인 <여인 I>이 있다.   

20살 되던 해에 밀항으로 네덜란드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드 쿠닝은 초반에 생활이 어려워 같은 캔버스에 여러차례 그림을 그리고 지우곤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의 경우, 적외선, x-ray등으로 검사해 본 결과, 무려 70차례의 채색을 한 흔적이 보인다고! 힘찬 붓질 탓에 캔버스 더러 구멍이 난 부분도 있다고 한다.  시민권이 없던 관계로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예술가 구제책이던 FAP (연방 예술 프로젝트)에도 자격 미달이었던 그는 남의 집 페인트 칠해주는 일로 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알려졌는데, 따라서 그가 사용한 물감도 회화 전문용 물감이 아닌 가정용 페인트였다. 

윌렘 드 쿠닝의 대표작, <여인 I>   Willem de Kooning, Woman I (1950-52) oil and metallic paint on canvas ; 192.7 x 147.3 cm, MoMA 

이 작품은 비평가 헤롤드 로젠버그가  ‘액션 페인팅’ 이라는 명칭을 만들게  계기가  작품이다. 거친 붓질로 구현해놓은 여인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도 전형적 미인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큰 눈과 날카로운 이, 그리고 큼지막한 손과 가슴에서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긴 한다.  이여인의 모습을 융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여인의 '원형'상에 가깝다고 이해할 수 있다.  드 쿠닝의 <여인 I>은 세계사나 미술사 초반에 등장하는 고대의 여인상과 유사한데, 그 대표적인 예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있다. (아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 구석기 시대의 유물로 여성의 생산에 관련된 신체부분이 강조된 여인상. 독일의 빌렌도르프 지방에서 출토되어 붙은 별명.  원형의 여인상이라고 여겨진다.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로 제작되었다고도 여겨진다. 

한편, 인플레를 고려했을 때, 랭킹 2위를 차지한 <나들목 (Interchange)>(1955)의 경우,  그가 여인 시리즈 뿐 아니라, 그가 중반기에 몰두했던 풍경화에서도 지속적으로 몰두했던 figure/ground 관계에 대한 관심을 잘 드러낸다.   

figure/ground 관계란, 그림을 그릴 때 주제가 되는 형태 (figure)와 그 주변 및 바탕 (ground)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전통적 회화에 있어서는 그 관계가 뚜렷한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 추상에 오면 그 관계가 모호해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잭슨 폴록의 작품이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그의 그림에서 주를 이루는 형태와 바탕을 구분해내기란 불가능하다. 

이에 반해, 드 쿠닝의 경우, 인체를 포기하지 않은 추상화가로서 그로서는 추상에서 구현된 figure/ground 관계를 자신의 작품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관심이 높았음에 분명하다.  이 <나들목>이라는 작품에서는 입체교차로라는 대상과 그 주변 배경과의 관계를 탐구했다고 볼 수 있다.    

데이비드 게픈 재단 (the David Geffen Foundation)이 헤지 펀드 재벌 케네스 그리픈 (Kenneth C. Griffin)에게 판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 번에 살펴볼 잭슨 폴록의 <Number 17A>과 함께 $500-million 패키지로 판매했다고. (드 쿠닝의 작품이 $300-million, 폴록의 작품이 $200-million. 드 쿠닝에 대한 경쟁심이 남달랐던 폴록이 살아있었더라면 분통을 터뜨렸을지도. 

이 작품은 현재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대여 전시 중이므로 시카고 여행 중이고, 직접 보고 싶다면, 그곳에서 한번 찾아보시길.    

드 쿠닝은 92세의 나이에 별세하였는데, 만년에는 알츠하이머를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규칙적으로 작업실에 나가 작업을 계속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그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본능이자 습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가 투병 중에 그린 작품들도 놀라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아보인다. 

뉴욕주 이스트 햄튼 작업실에서의 윌렘 드 쿠닝과 만년의 작품들

그의 예술가로서의 공적과 지치지 않는 창작열을 담은 드 쿠닝의 전기는 2005년 플리처 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는데, 밀항자였던 네덜란드 예술가의 전기 제목이 '미국인 대가'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de Kooning: An American Master, by Mark Stevens and Annalyn Swan (Alfred A. Knopf)]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21. 00:30 미술 이야기

얼마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의 순위를 인플레를 고려한 가격을 적용해서 20위까지 매겨보았다.  

http://sleeping-gypsy.tistory.com/51 

거기서 착안해서 이 놀라운 순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가들에 대해서 순차적으로 설명해나가고 있다. 오늘은 앤디 워홀과 나란히 팝아트의 거장으로 알려진 로이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 1923-1997)의 작품에 대해서 알아볼까 한다.   우선 오늘 다룰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아래와 같다. 

13) Roy Lichtenstein, "Masterpiece" (1962) $165-millions (2017 private sale) [약 1,869억]   말풍선 내용: '어머나, 브래드~ 자기, 이 그림이야말로 '걸작'이에요!  세상에나~ 이제 곧 뉴욕의 모든 이들이 당신 작품을 구하려고 난리가 날 거에요.' 

이 작품은 원래 소장자 아그네스 건트의 맨하탄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아파트에 수년간 걸려있던 작품이었다.  사법 개혁을 위한 Art for Justice fund의 자금 모금의 일환으로 내놓았고, 이를 예술계의 큰손 스티븐 코헨 (Steven A. Cohen)이 2017년에 $165-millions에 구매하였는데, 이는 약 1,869억원에 상당하는 금액이다.   

아마 '로이 리히텐슈테인'이라는 작가의 이름까지는 좀 길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특징적인 연재 만화의 한 장면을 확대하여 그린 작품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친숙하다고 느낄 것이다.  위의 작품은 그가 생애 최초의 개인전을 열 당시 출품했던 작품으로 작가의 장난기가 가미된 것 제목이다.  물론 농담의 이면에는 젊은 화가의 자부심도 약간은 담겨 있었으리라.    

리히텐슈타인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만화의 장면에서 차용한 이미지에 말풍선과 벤데이 닷츠 (Ben-Day dots)*를 활용해서 그린 작품으로 유명한데, 앤디 워홀과 함께 60년대 예술계를 풍미했던 팝아트의 거장 중 한 명이다.  그는 대중 매체에서 가져온 주제를 캔버스에 유화라는 전통적 방식으로 그렸다는 데 특징이 있는데, 신문같은 인쇄 매체에서나 볼 수 있는 벤데이 기법을 활용한 그의 그림에서 개인의 감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1962년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당시의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 at Castelli Gallery sitting with Spray (1962), Masterpiece (1962), Engagement Ring (1961) and Aloha (1962), 1962. Photograph by Bill Ray.  

왼쪽: 원본 만화  ; 오른쪽: 리히텐슈타인의 <걸작> 

리히텐슈타인의 <걸작 (Masterpiece)>은 테드 갈린도라는 만화가의 삽화를 자신이 재해석 한 것인데, 원래 만화에서의 말풍선 내용은 다음과 같다: "But someday the bitterness will pass and maybe I'll be the girl to change your heart! But for now at least I can be near you!

즉, 지금은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남자에 대해 언젠가는 자신을 좋아해 줄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고, 지금 당장은 곁에 있는 것 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내용. 당시 유행했던 닭살돋는 연애 소설적 내용인데, 이런류 만화의 대부분의 대사가 60년대 한국의 영화 대사 같이 다소 감정과잉적인 내용이 많다. 이를 리히텐슈타인은 재치있게 내용을 바꾸었고, 원래 설정 상은 차 안이지만, 리히텐슈타인의 경우, 설정이 화가의 스튜디오 안이라 짐작할 수 있다. 

아래는 그의 초기 '만화 차용' 작품이자 이후 그의 대표적 작품들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미키, 이것 좀 봐! (Look, Mickey)'이다.  리히텐슈타인이 벤데이 닷츠 기법을 활용하기 전에는 보통 유화를 그리듯이 채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원래 만화와 비교해봤을 때, 구도에 있어서 원본의 주변을 조정을 하였고, 말 풍선을 삽입하므로서 만화같은 효과를 이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화와 미교해보면, 대화창이 아래에 자리한 원래의 삽화보다는 리히텐슈타인의 유화 작품이 훨씬더 만화 컷 같다.) 

왼쪽: 원본 만화 ; 오른쪽: Roy Lichtenstein, Look Mickey (1961), oil on canvas ; 121.9 x 175.3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 Estate of Roy Lichtenstein/DACS 2012 

아래의 작품들은 리히텐슈타인이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확립하고 나서의 작품들의 예이다. 원본이 되는 만화들과 비교해보자.  원본의 만화에서는 그 당시의 멜로 만화가 그러하듯이 감정 충만한 때로는 과잉인 내용이 말풍선 안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리히텐슈타인은 의도적으로 그 '감상적' 대사를 제외함으로써 감정을 배제하고 기계적 복제를 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이러한 기계 복제와 수작업, 감정과잉과 이성적 표현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다리기를 하면서 작업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작품이 인쇄매체를 이용하여 제작한 만화 컷보다 더 드라이해 보인다는 점. 그리고, 그는 이렇게 차가와보이는 작품을 수작업으로 제작하였다는 점. 이러한 대조적 특성들을 이용해서 예상을 뒤엎는 식으로 작업했다는 것이다. 

위: Roy Lichtenstein, In the Car (1963); 아래 원본 만화. 이 경우에 리히텐슈타인은 말 풍선 속의 대사를 생략해서 그렸다.  참고로, 말풍선 내용은 '(병원이나 미용실 등) 예약 해둔 것은 어기지 않겠다고, 그와 드라이브 따위는 가지 않겠다고 맹세했건만.... 그런데 어느샌가 난...' 이다. 도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랑에 빠져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여인의 심리가 드러난 말 풍선이다. 

 참. 그리고 이 그림의 복제판 (?)이 한국에도 있다.

이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다면, 이전의 글 참고 *^^*



맨 위: Lichtenstein, Crying Girl (1964), porcelain enamel on steel ; 116.8 × 116.8 cm. 중간: 리히텐슈타인, 스케치 ; 맨 아래: 원본이 된 만화. 여기서의 말풍선 내용도 감정감정하다.  아마도 데이트 약속을 잊어버리고 어긴 남자친구에게 화를 내고서는 나중에 눈물 펑펑 흘리면서 후회하는 여자친구인가보다. 

말 풍선 내용: '(흐흑...)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난...난 내일 사과를 해야지... 생각해보면...이번이 그 사람이 처음 성공한 것인걸...그는 너무 신나있었던거야...(그래서 약속을) 잊어버린거야...'

리히텐슈타인 재단(Lichtenstein Foundation)이 발행한 온라인 카탈로그 레조네 (Catalogue raisonné)**를 살펴보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로 발전된 것은 1962년부터로 신기하게도 1961년도까지 그러한 경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아들이 만화책을 보다가 '아빠는 이런 그림 못그리지?'라고 질문에 울끈불끈 해서 이러한 만화에서 착안해서 그렸다고는 하나, 거기에 대한 사실확인은 못했다.  

다만, 미술사적으로 살펴보면, 팝아트의 대두 배경 자체가 그렇지만, 그의 팝아트로의 전향도 그가 활동하기 이전 미술계에서 명성과 권위로 그 아성이 깨질것 같지 않던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에의 반동이라는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는 철학적으로는 실존주의, 칼의 융 심리학 등의 영향을 받아 전후의 상황과 인간의 조건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외형적으로는 거대한 캔버스의 추상화로 특징지어지는 미술 사조이다. 미국으로서는 최초로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예술을 인정받은 사조였기에 국내에서는 물론 국제적인 명성과 위용은 대단했다. 캔버스를 화가의 실존이 내던져진 투쟁의 장으로 해석하던 경향에서 알 수 있듯이,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젊은 화가들이 보기에 추상표현주의는 너무 심각하고 무거운 것이었고, 생각만 엄청 복잡하고 허세 쩔은 것이었다.    

실크 스크린을 애용한 앤디 워홀과 벤데이 닷츠를 이용한 로이 리히텐슈타인, 이들 모두 기계적 방식을 사용한 복제를 택한 이면에는 너무 심각하고, 말끝마다 실존 실존 하는 아버지들에 대한 반항이었는지도 모른다.  개개인 화가의 실존이 드러나는 회화 (추상표현주의)와 정반대되는 대량생산으로 몰개성인듯해 보이는 기계적 작품에 착안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지가 언젠데.... 변화한 사회 속의 대중들도 그러한 심각하고 무거운 추상표현주의의 대안들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리히텐슈타인으로서는 그 계기가 무엇이었든지간에, 요새 말로 치면 콘텐츠 개발에 대성공을 이룬 셈이다.  




*벤데이 닷츠: 벤자민 헨리 데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 겸 판화가가 발명한 인쇄기법으로 균일한 원들의 분포 밀도를 조절함으로서 명암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신문의 삽화, 5-60년대 만화등의 인쇄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 기법을 유명하게 한 것은 단연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다.  

**카탈로그 레조네: 주요 작가의 전 작품을 망라하여 주석과 함께 편찬한 작품 집. 해당 작가의 전문 연구가, 미술사학자들이 집필과 연구조사에 참여하여 제작되므로 신빙성이 높은 연구자료로 활용된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