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2018/09 글 목록 (3 Page)
2018. 9. 15. 08:00 미술 이야기

Pieter Brueghel the Elder  (1526/1530–1569), 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  (ca. 1558), 

oil on canvas mounted on wood ; 73.5 x 112 cm, 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

 

작품의 제목은 <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 번역하자면,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장면이 담긴 풍경화>. 16세기 북유럽 르네상스 작가로 유명한 피터 브뤼헬 (父)*의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루스는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이 다이달로스로 말할 것 같으면 미노타우르스를 가둔 미로를 만든 최고의 장인이지만, 바로 그 뛰어난 재능 탓에 미로의 비밀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왕에 의해 평생 감금된 채 살아야할 운명에 처해진 인물.  탈출을 계획한 아버지가 만든 날개를 달고 시운전을 해보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너무 태양 가까이에는 가지마! 날개를 이어 붙인 밀납이 녹아버릴테니까'라고 말했건만! 그 말을 듣지 않고 좀 더 높이 좀 더 높이 하면서 우쭐거리고 신나서 날던 이카루스는 그만 밀납들이 다 녹아버려 깃털들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대로 추락해서 죽고 만다는 이야기.  

 

인간의 과욕과 오만을 경계하는 교훈을 담았다고 알려진 이야기이다. 또한, 다른 교훈도 담겨있다. 자고로 어른 말씀은 새겨들어야한다. 옛부터 어른 말씀 잘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했거늘.... 

 

16세기 르네상스 시기에 하이라이트를 받는 이탈리아를 살짝 비켜가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에서 활동했던 브뤼헬의 이 작품은 제목과는 다르게 새하얀 날개를 등에 달고 오르거나 안타깝게 추락하는 아름다운 미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전경의 중앙에는 농부가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고, 그 뒷켠으로는 양치기가 양들을 몰고 나와 풀을 먹이고 있으며, 화면에 등을 보인채 둑에 앉은 남자는낚시에 몰두하고 있다.  저 멀리 바다에는 빵빵하게 바람 맞은  돛을 한껏 올린채 순조로운 항해를 하고 있는 배도 보이고,  왼쪽 원경으로는 높은 산들에 둘러싸여 발전한 평화로운 도시도 보인다.  도대체 이카루스는 어디에~?

 

 

자세히 보면, 낚시꾼이 자신의 낚시대와 물고기에 정신을 빼앗겨 미처보지 못한 조금 깊은 바닷쪽에 거꾸로 메다꽂혀 바다에 빠진 사람의 다리가 보인다.  그리고 좀더 자세히 보면, 밀납이 떨어져 흩어져 버린 깃털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다. 

 

놀랍게도 이 역사적, 아니 신화적 순간을 아무도 주목하기는 커녕, 알아채지도 못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몇 분후면, 애처로운 이카루스는 물 속에 가라앉을 것인데 말이다.  그러든 말든, 사람들은 변함없이 하던 일을 할 것이다. 농부는 계속해서 밭을 맬 것이고, 양치기는 양을 돌볼 것이고, 낚시꾼은 계속 낚시를 할 것이다. 그리고 돛을 단 범선은 정해진대로 항해를 계속 할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통렬한 관찰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군중 속의 고독'을 논하기 훨씬 이전 16세기의 한 작가에 의해 한 장면으로 요약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1938년 한 영국 출신의 미국 시인에 의해 시로 다시 탄생했다.  아래는 윌리엄 오든이 벨기에의 미술관에서 브뤼헬의 작품을 보고 쓴 시이다. 

 

Musée des Beaux Arts   
W. H. Auden 

About suffering they were never wrong, 
The old Masters: how well they understood 
Its human position: how it takes place 
While someone else is eating or opening a window or just walking dully along; 
How, when the aged are reverently, passionately waiting 
For the miraculous birth, there always must be 
Children who did not specially want it to happen, skating 
On a pond at the edge of the wood: 
They never forgot 
That even the dreadful martyrdom must run its course 
Anyhow in a corner, some untidy spot 
Where the dogs go on with their doggy life and the torturer's horse 
Scratches its innocent behind on a tree. 

In Brueghel's Icarus, for instance: how everything turns away 
Quite leisurely from the disaster; the ploughman may 
Have heard the splash, the forsaken cry, 
But for him it was not an important failure; the sun shone 
As it had to on the white legs disappearing into the green 
Water, and the expensive delicate ship that must have seen 
Something amazing, a boy falling out of the sky, 
Had somewhere to get to and sailed calmly on.

 

그렇다.  농부는 뭔가가 물 속에 떨어지는 '풍덩' 소리를 들었을 지도, 살려달라는 외침을 들었을지만 모르지만, 그들의 조용한 일상을 지속해간다. 호화로운 배에 탄 사람들도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지만, 배는 경로를 바꾸는 일 없이 목적지를 향해 조용히 항해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20세기의 시인이 언급한 이래, 최근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그 누군가가 다시 언급하였다.  

그 이름이 바로 방탄 소년단 (BTS). 


그들의 '피, 땀, 눈물'이라는 곡의 뮤직비디오에는 미술사적 어휘가 풍부하게 담겨 있는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나르시서스의 도상 등),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멤버 중의 한명인 뷔가 발코니의 난간에 걸쳐 앉아있다가 뛰어내리는 장면의 뒤로 비치는 풍경이 바로 부뤼겔의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결과적으로 그로 야기된 인간으로서의 고독감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존재하는 인간조건인가보다.  [3분18초의 장면]

 

BTS (방탄소년단) '피 땀 눈물 (Blood Sweat & Tears)' Official MV 

물론 이카루스의 추락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방탄소년단의 뮤비는 전세계가 알아차린듯하다.  이카루스는 추락했지만, 방탄소년단은 계속 비상하고 있는듯 하다.  

 

Pieter Brueghel the Elder 는 흔히 피터 브뤼겔이라고도 표기되곤 했는데, 요새 표기법으로는 피터르 브뤼헬이라고 표기하는 듯하다.  the elder라는 꼬리가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아들도 유명한 화가. 장남인 Pieter Brueghel the younger는  환상적인 지옥의 모습을, 차남인 Jan Brueghel the younger는 아름다운 꽃을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14. 08:00 일상 이야기

미국 채널 중에 Turner Classic Movie라는 영화 전문 채널이 있는데, 주로 옛날 클래식 영화를 많이 상영해주는 채널이다.  그 중에서 많이 상영되는 것이 '필름 느와르'인데,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 영화의 미장센으로 많이 이용된다는 것은 지난 번에 밝혔다. 그래서였을까?  


우리나라의 방송에서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채널 로고송이 들어가는 것처럼 미국 방송도 그런데, TCM의 경우, 영화 채널의 특징을 살려 짧은 영화같은 동영상이 중간중간에 들어간다. (그것을 영어로는 bumper라고 한다고...)  쳇 베이커 (Chet Baker)의 "Look for the Silver Lining"이 흐르면서,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을 애니메이션처럼 제작해서 보여준다.  


감미로운 목소리의 쳇 베이커의 재즈를 들으면서, 평화로운 호퍼의 작품 속 인물들과 풍광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 본 적 없는 그 곳과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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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13. 08:00 미술 이야기

Edward Hopper, Nighthawks (1942)  oil on canvas ; 84.1 x 152.4 cm, Art Institute of Chicago

'도시 군중 속의 고독'을 탁월하게 묘사했다고 평가받는 에드워드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이다.  대중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은 이 작품은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였고, 느와르 영화 감독들이 영화의 미장센으로 많이 차용하기도 하였다.  Nighthawks라고 불리고 있으나, 원제는 'Night Hawks'였고, 이는 직역하면, '밤의 매'라는 뜻인데, 신사들이 쓰는 모자의 모양이 매의 부리와 닮아서라는 설, 혹은 nighthawk라는 단어가 올빼미족 (밤에 잠안자고 활동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설 등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위 작품의 배경이 된건 뉴욕의 그리니치 애비뉴와 W 11가의 교차로 선상 (70 Greenwich Avenue  at West 11th Street의)의 코너에 자리한 가게라고 한다. 호퍼는 시각적 효과를 위해 실제의 모습과는 변형된 식당의 모습으로 변모시켰지만 말이다.  

한밤 중, 뉴욕의 어느 다이너 (간단한 식사와 커피와 케익 등을 파는 카페겸 식당) 안에는 4명의 사람이 있다. 그 중 한 명은 그 카페의 점원이고, 또 한명은 홀로 카페에 들른 사람, 또 하나는 남녀 커플이다. 점원과 혼밥족은 그렇다 하더라도, 일행임이 분명한 남녀도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다. 여럿이 있어도 지극히 고독하고 외로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들이 어떤 사연으로 한밤중에 그 카페에 들르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홀로 앉은 이는 실은 마주 앉은 커플 중 남자를 저격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암살범일 수도 있다 (느와르 영화에서 있을 법한 설정).   

다음 휴가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은 남녀 커플은 어쩌면 헤어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슬픈 로맨스 영화에 있을 법한 설정).  

아니면, 낮밤 바꾸어 일하지만 집안에 문제가 많아 고통받는 카페 점원의 고달픈 생활에 대한 영화 (사회비판을 겸한 성장 영화에 있을 법한 설정)일 수도 있다.  

Robert Siodmak의 1946년 작 영화 <The Killers

실제로 호퍼는 이 작품을 구상할 때, 헤밍웨이의 'The Killers'라는 1927년작 단편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다 했다. 그리고, 호퍼의 작품을 미장센으로 십분 활용한 'The Killers'라는 느와르 영화가 실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림을 감상하는 이는 이러한 상상력을 마구 펼치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아니면, 비록 한 밤 중에  그런 카페 같은 곳에 가 본 적은 없다하더라도, 분위기로 공감할 수 있는, 자신의 인생 안에서 있었던, 그런 고독의 순간에 대해 회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회화에서의 서사를 최대한 절제하는 한편, 깊은 통찰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 외로움을 포착해내는 것이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의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보는 이들에게 그 빈 서사의 장에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려넣을 수 있도록, 또 볼 때마다 다른 기억과 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봐도봐도 또 보고 싶은 그림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묘한 위안 같은 것을 받게 만든다.  아~ 나만 그렇게 외로운 건 아니었어......

호퍼의 <나이트 호크스>를 감상하는 이들은 그 비어 있는 서사 공간에 자신의 스토리를 채워넣으면서도 인간 본연의 조건에 대한 동질감을 공유하게 됨으로써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12. 13:11 일상 이야기

1930년대말, 미국의 외딴 마을 한적하기 이를때 없는 주유소.   때는 바야흐로 해가 숲 저너머로 막 져버린 황혼, 마찬가지로 인생의 황혼길의 점원은 손님이 오긴 오는 걸까 싶은 주유소를 홀로 지키고 있다.  길은 

숲 속으로  접어들수록 어두워지고 숲은 깊어진다. 반면, 방금 해가 진 하늘은 화면의 오른쪽이 가장 밝고 왼쪽으로 갈수록 어둠이 짙다. 그리고 그 자연광은 주유소의 사무실에서 비쳐 나오는 인공광과 대비를 이루며 전체 화면에 균형을 이룬다.  

꾸미지 않고 진솔하게 그린 그림임은 분명하지만, 생각없이 그린 그림은 아니다.  작품을 보는 이는 누구라도 적막한 시골길 한 켠에 자리한 주유소, 거기서 홀로 일하는 점원의 고독과 평온함을 함께 나누게 된다. 별다른 설명없이, 여백을 남겨둠으로써 보는이가 채워가게 하는 것 그것이 그가 취한 영리한 전략이다.   

 

Edward Hopper, Gas (1940), oil on canvas ; 66.7 x 102.2 cm, MoMA 

위의 작품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들을 보유한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1882-1967)의 <주유소>라는 작품이다.  

 

나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사랑한다.  나는 호퍼의 그림을 참 좋아하지만,  항상 '그의 그림은 서툴지만 왠지 사람의 맘을 끄는 무엇이 있다'라고만 생각해 왔다.  

 

But, 그러나.....

 

그려보니 어려웠다.

내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좋아하는 건 그가 그림을 잘 그려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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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12. 08:00 일상 이야기

외국어를 사용하다 보면, 사전에는 나오지 않을테지만, 한국어로 하면 이런 뜻이겠거니 할 때가 있는데, 미국 가서 처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대표적인 표현이 'Sue me!'였다.  그리고 거기에 적합한 우리말 표현은 '배째!'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직접 듣거나 써본 경험은 없고, 시트콤에서 들은 표현이다. 친구들 사이에 '어쩜 그럴 수가 있냐?' '왜 그랬냐?' 한 사람이 막 따질때,  궁지에 몰린 상대방이 'Sue me!' 라고 다소 단호하게 말하면, 대부분 상대방이 아연실색하게 되면서 상황이 정리되는 수순으로 전개되는 식이다.  물론 한국어 표현도 실생활에서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표현상으로 적당한 것은 '배째!'가 아닐가 싶다.  

미국은 원체 소송이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다소 언성은 높아질 경우가 있을 지언정, 보통 당사자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은데, 미국은 정말 사소한 것도 직접 이야기 하기보다는 변호사를 통해 소송을 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나온 표현 법이라고 생각되는데, 물론 심각하게 정말 소송을 걸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언어에 원체 관심이 많기도 했고, 외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많아서였기도 하지만, 언어마다 고유의 표현들이 많은데, 그런 외국어의 표현법들과 국어와 비교를 해보면 참 흥미롭다. 

그렇게 비교를 하다보면, 많은 경우, 어디서 사나 사람 사는 것 참 비슷비슷하다 여기고 있을 때 즈음, '아~ 확실히 정말 다른 문화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기도 했다.  

아주 오래된 얘기지만, 내가 어학연수 수업때 숙제로 낸 영어 작문에서, '기차를 타고 어디어디를 다녀왔다'는 표현을 하면서, 'in the train'이라고 쓴 표현을 선생님이 in 위에 빨간 가위표를 하고는 그 위에 on 이라고 고쳐준 적이 있었다. 나중에 내 교정문을 읽던 친구가 'in the train'이라고 쓰면, 마치 내가 기차 엔진 속에 쪼그리고 들어가 있는 것이 상상이 돼서 너무 귀엽다고 했다. 나는 'on the train'이라고 쓰면 마치 내가 미션 임파서블의 탐 크루즈처럼 달리는 기차의 지붕위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서로 막 웃었다.   (나중에 다른 선생님은 in 과 on 둘 다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해줬다.)

언어가 문화의 차이를 만드는 것인지, 문화의 차이가 다른 언어를 만들어낸 것인지... 오묘하고 재밌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11. 11:00 일상 이야기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체육 시간 달리기 경주라도 할라치면, 난 누군가가 내 운동복 끄트머리를 뒤에서 잡아 끄는 것 같았고, 기록만 보면 반드시 누군가 그랬었던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이해가 되는 기록을 남기곤 했었다.  못하니 싫어하고, 싫어해서 안하니 나아지지를 않고, 그런 악순환으로 여지껏 살아왔다.  숨을 안쉬고 살아갈 수 만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숨도 안쉬고 지낼지도 모르겠다 싶다. 얼마 전에 등산 가는 친구들이 함께 가자고 권해서 겁없이 따라 나섰는데, 도중에 내 다리가 스스로 로그 오프하는 현상을 경험했다. 머리로는 움직이고 싶은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심각한 운동 부족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앉아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운동은 해야한다고 생각해서 동네 요가 학원에 신청을 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한동안 일주일에 두번 가면서 세상 운동 다하는 것처럼 뿌듯한 것도 잠시...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달 내내 안가면서 등록했다는 사실만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미국에 가서 인상깊었던 것 중에, 조깅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는 것이었다. 동네에서도, 학교에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꼭 한 두명 씩은 내 주변을 뛰어가는 사람을 보곤 했다.  세상 호화롭게 지어놓은 학교 체육관을 가면 더했다.  국민들 운동의 생활화 범 국민 캠페인이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햄버거는 물론이고 약사에게 조제한 약을 받을 때에도, 차에서 내리는 법 없이 차창만 내리고 받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된 셈인지 차에서 내려서 세발자국만 멀어지면 죄다 뛰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신기하게 느꼈었다. 

한국에 있을 때엔 작정하고 새벽 운동을 가는사람들 이외에는 길거리에서 조깅하는 사람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그 때에는 일부러 시간 내서 저러지 말고, 그냥 걸어서 음식 사러가고, 차에서 내려서 약국에 걸어들어가 약 타오고 하면 될 것을... 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 돌아와서도 나는 예전만큼 전철과 버스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생활 속의 운동도 잘 안하게 되었다. 결국 일부러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지속적으로 계속 하려면 그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 안될텐데... 누가 운동을 좋아하면서 지속하는 방법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요새는 핸드폰 앱도 잘 나오던데, 운동하는 앱을 하나 깔아서 사용해볼까?   

#운동앱추천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11. 08:00 미술 이야기

Norman Rockwell (1894-1978). The Problem We All Live With, 1964. Story illustration for Look, (January 14, 1964). oil on canvas. 36 x 58 in. (91.4 x 147.3 cm). From the permanent collection of the Norman Rockwell Museum. © The Norman Rockwell Estate / Licensed by Norman Rockwell Licensing Company, Niles, Illinois


위의 작품은 1964년 1월 14일 발간된 격주지 Look의 표지 삽화이다. 

미국의 인기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락웰 (Norman Rockwell : 1894-1978)은 장장 47년간 가벼운 오락 잡지인 Saturday Evening Post의 삽화를 그렸는데, 그 삽화의 주제는 대부분 미국의 보통 사람들이 사는 일상의 모습을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그려냈고, 그의 작품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런 그의 화풍에 혹자는 '설탕을 바른 그림' 즉, 현실을 외면한 채, 이상적 사회로 미화해서 그린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문제는 작가 자신도 느꼈던 듯 하다. 만년의 그는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지를 떠나 그보다는 좀 더 시사문제를 다루는 '룩'이라는 잡지의 삽화를 맡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 작품인 것이다. 


The Runaway, Cover illustration for  The Saturday Evening Post, September 20, 1958

세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표지 삽화에서는 유머러스하면서도 따뜻한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단면을 담아 묘사해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맨 위의 그림에서 노먼 락웰은 당시 인종 분리 정책을 폐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회 문제에 대해서 뉴 올리언즈에 사는 루비 브릿지라는 6살 먹은 흑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1960년 11월 14일,  루비 브리짓은 인종분리 정책을 폐지함에 따라, 이전까지는 백인학교 였던 초등학교에 등교하게 된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그림을 보는 관람자 쪽에는 아마도 이를 반대하는 시위대가 자리 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화면의 가운데에는 어린 소녀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고, 그녀의 앞과 뒤에 완장을 찬 경찰관들이 시위대로부터 어린 소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호위하여 걸어가고 있다. 벽에는 인종 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던진 것으로 짐작되는 토마토가 터진 채 떨어져 있고, KKK, Nigger 등 보기 거북한 낙서들이 커다랗게 써 져 있다. 



우리는 부모님들에게서, 또 학교에서 가르치는대로 지식은 물론 예절과 법규를 배우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한 지식과 예절, 법규를 잘 익히고 배울수록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 줄 것이라 믿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상식을 쌓고, 신념을 갖게도 되고, 자연스럽게 관례와 관습에 대해서도 익숙해지고 동화된다. 그리고, 사회적 관습과 관례 속에서 산다는 것은 상당한 안정감과 소속감을 갖게 해준다.   

시위대에 속한 이들도 그러한 '관례 속의 상식'을 지닌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음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고, 자신들의 싸움은 옳은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정의로운 투쟁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55년 후에 어떻게 세상이 변하고, 자신들의 생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평가받게 될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1957년 노스 캐롤라이나의 15세의 소녀가 백인 학교에 등교할 때에도 그랬다. 뒤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흑인 소녀를 조롱하던 소년은 자신이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죄 없는 소녀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지던 사람들도... 


그 때에는 그 소녀를 비웃고 있던 저 소년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었을 때에 자신의 어린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차별은 내면화 될 뿐, 좀처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서, 오늘날도 맘 속에 저런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의 한계는 감안하더라도 적어도 저런 결정적인 오류를 가진 신념은 갖지 않고 살고 싶다. 


백인학교에 등교한 흑인 학생들은 백인 학생들이 던진 돌멩이나 나무 작대기를 맞았고, 선생님들은 그것을 모른척 하거나 묵인하는 일이 허다했고, 심지어 선생님들 조차도 흑인 학생을 무시하곤 했다고 한다.  


#노먼락웰 #NormanRockwell #DorothyCount #역사속책임 #인종분리정책 #SaturdayEveningPost #Look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10. 08:00 미술 이야기

어디 늦게 밖을 쏘다녀, 돈은 내가 벌거야. 당신은 조신하게 집에나 있어.’  

무슨 소리야! 운전은 내가 해야지. 도시락은 싸오려나…’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면 시대착오적인 발언이라고 빈축을 샀을지도 모르는 말은 개그 우먼 숙의 입에서 나왔기에 모두에게 웃음을 줬다.  개그맨 정수와의 찰떡 호흡 덕에 그들의 가상 결혼 프로그램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방은 이었다고 하나, 요새도 회자 되는 것을 보면 인기가 있기 있었나보다.  

리가 김숙의 가모장적인 말을 듣고 웃을 있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상식 위배되기 때문이다.  , 개그 우먼 숙은 전통적인 남녀의 역할을 전복시킨 발언을 통해서, 통념의 허점을 찌르고,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불러 일으키면서 듣는 이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말을 남자 개그맨이 여자 개그맨을 상대로 했다면, 절대로 재미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논란을 불러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 만약 우리 사회가 남녀의 역할이 (많이 바뀌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비교적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아, 남녀 구별없이 경우에 따라 경제활동과 가사를 분담하는 사회였다면, 말은 누구 입에서 나온 것이든 전혀 재미없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개그 우먼 숙의 유머코드는 현실 전복 있다고 있다그녀의 유머를 통해 남성 우위의 억압적 사회에 살고 있다고 여기는 여성들이나, 남성이 부양의 임을 져야하는 남성 압박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에게 일종의 코믹 릴리프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전복적 남녀관계를 묘사한 미술 장르 내지 표현법이 존재한다

이름하여여성 파워 (Power of Women)”!

남성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전통적 서구에서도 남녀의 역할을 전복시켜 문학과 시각 예술에서의 수사법 내지 시각적 장치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Weibermacht” 혹은 “Power of Women,” 여성 파워 이다이는 12세기 경부터 문학에서 수사학적 장치로 사용되면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으로 시각 예술에서 인기를 얻었던 것은 15세기에 이르러 독일과 네덜란드에서였다당시 유행했던 주제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타는 필리스, 삼손과 데릴라, 살로메와 그녀의 어머니 헤로디아스, 시세라를 죽이는 야엘, 바구니 속의 버질 등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Phyllis and Aristoteles” , 요부인 필리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을 무릎 꿇린 , 말을 타듯이 등에 올라탄 장면을 묘사한 것이 그것이다.


Lucas Cranach the Elder, Phyllis and Aristotle (1530), oil on panel ; 55.3 x 35.3 cm 


Hans Baldung, Aristotle ridden by Phyllis (1515) woodcut  

다음으로는 유명한 이미지는 유명한 대시인 버질이 아름다운 공주의 속임수에 넘어가, 한밤 중에 그녀를 만나려고 바구니를 타고 성을 오르다가 중턱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처지가 되고, 날이 밝자 동네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비웃음거리가 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Lucas van Leyden (1494-1533), Virgil in His Basket (1512-16) woodcut ; 41 × 28.7 cm. Rijksmuseum Amsterdam 


이러 작품들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인기를 끌게 되었던 것일까?  작품의 제작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 1. 자고로여자란 요물!  남성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 2. 사랑의 앞에선 세상 유명한 학자나 현자라도 없다. 위대한 사랑의

  • 3. 결혼이라는 시련 (?)’ 풍자했다는

의미가 무엇이든 위의 가지 도상은 그림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웃음을 주는 코믹적 요소가 강하다.  

한편, 같은 여성 파워 주제로 제작된 미술 작품들 중에서, 신체적으로 힘이 약한 여성이 남성을 제압하는 표현은 미술사에서 손꼽히게 드물다.  크게 가지 정도? 

대표적인 예로, 유디트와 야엘이 있다.  이들 같은 경우, 신체적으로 힘이 약한 여인의 몸으로 전쟁에 잔뼈가 굵은 적장들과 대적하기 위해, 우선 미인계로 접근하여 술을 진탕 먹인 다음, 적장이 취해서 잠든 사이 거사를 치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디트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멱을 따고, 야엘은 드러누워 있는 적장 시세라의 귀에다 커다란 못을 박아 넣는다.  일견 잔혹하기 그지 없는 방식의 살인을 저지르는 여인들은, 하지만, 유대판 논개들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적군을 살해하는 인물들이기에 악인이라기 보다는 의인으로 묘사된다.  


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 Judith with the Head of Holophernes (1530), on beech wood ; 74.9 x 56 cm, Jagdschloss Grunewald 


 

Lucas van Leyden (1494-1533), Jael Killing Sisera, ornamental frame (c.1517) woodcut; second state ; 34.3 x 23.2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세례 요한의 목을 가지고 있는 살로메  Titian  (1490-1576), Salome (c.1515), oil on canvas ; 90 x 72 cm, Doria Pamphilj Gallery 


이에 반해, 같은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이긴 하지만, '요물'로 묘사되는 살로메는 연회 때 의붓 아버지인 헤롯왕 앞에서 섹시 댄스를 추고 나서, 그 상으로 쟁반에 담긴 세례 요한의 목을 하사 받는다. (이 경우, 살로메는 어머니 헤로디아의 눈 밖에 난 세례 요한에게 괘씸죄를 적용하길 원한 어머니의 소원을 대신 들어준 것이다) 

서구 미술에서 여성이 남성을 압도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대략 정도라고 있는데, 따라서 도상학 적으로 손에 칼을 들고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이 담겨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주머니를 들고 있으면 유디트, 남자의 목이 담긴 쟁반을 들고 있으면 살로메라고 구분한다. (야엘 경우, 직접 살해 장면이 묘사된다

이러한 Power of Women 수사는 여기에 관능성과 성적인 암시를 더하면서,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19세기 말의 팜므 파탈 (femme fatale) 이미지로 이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19세기의 대표적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재부상한 살로메의 경우, 유혹적 모습으로 남자의 목숨을 앗아간 요부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추정이 가능해보인다.   


Henri Regnault  (1843–1871), Salomé (1870), oil on canvas ; 160 x 101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그녀와 함께, 단골 모델이 되었던 것은 사이렌.  로렐라이 언덕에서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뱃사공들을 모조리 물에 빠뜨렸던 여인의 모습이다.  

John William Waterhouse, Siren (1900)  oil on canvas ; 81 × 53 cm 


그리고, 그의 유혹에서 벗어날 없는 것은 오늘날, 비단 남자 뱃사공 만은 아닌 하다.   


우리 모두 조신하게 .벅에서 커피 한잔

스타벅스 로고 변천사 – 꼬리가  달린 사이렌의 형상화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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