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2018/10 글 목록 (2 Page)
2018. 10. 23. 00:30 미술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 연재를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된 작품 랭킹 20위'로 포스팅을 한 후로 하나씩 짚어가고 있는 중.   처음의 전체 랭킹을 논한 포스팅으로는 여기를 클릭!   

http://sleeping-gypsy.tistory.com/51

가요 순위 프로그램처럼 인플레 고려한 가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순위를 20위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봐오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이제까지처럼 한 작가의 작품이 다수 포함 된 경우, 중복되는 언급을 피하기 위해서 이처럼 묶어서 진행하려고 한다. 

두둥~

인플레를 고려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에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 1912-1956)의 작품도 두 작품이 들어가 있다. 그 두 작품은 아래와 같다. 

인플레 고려 5위) Jackson Pollock, "Number 17A" $200-million (2015 private sale)  ~$206-millions [약2,333억원 상당]

인플레 고려 11위) Jackson Pollock's "No. 5” (1948) oil on fiberboard ; 2.4 × 1.2 m,  $140 million (2006 Sotheby’s auction)   $170.0-millions [약1,585억원 상당]

잭슨 폴록의 경우, 윌렘 드 쿠닝과 함께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추상표현주의는 미국이 미술사상 최초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미술사조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나치의 압박이나 전쟁을 피하여 많은 예술가들과 지성인들이 뉴욕으로 망명을 오게 되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에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든 결과, 에콜 드 파리를 형성하게 된 것과 유사한 현상이었다. 

실제로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이 정착되기 이전에, 이들을 '뉴욕화파 (The School of New York)'로 부르기도 했다. 따라서, 에콜 드 파리를 구성하는 화가들의 국적이 다양한 만큼이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포함되는 작가들의 원래의 국적 또한 다양하다.  미국이 주도한 현대미술사조라고  미국이 그렇게까지 으쓱으쓱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직전에 살펴본 윌렘 드 쿠닝이 네덜란드에서 밀입국하여 뒤늦게서야 (1961년) 미국 국적을 획득하였고, 마크 로스코의 본명은 마르커스 로스코비치, 즉 이민 1.5세대였다. 이처럼 대부분의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실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었다.  

이에 반해, 오늘 살펴볼 잭슨 폴록의 경우, 미국 토박이로 와이오밍주 출신이다. 즉, 진정한 미국인인 것이다.  폴록은 어릴 적 불우한 환경 탓에 제대로 된 교육은 받지 못하였고, 가정 형편상 서부 지역을 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그의 이미지와 이후의 성공한 그의 모습은 거칠면서도 자유롭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다는 미국에 대한 선입견적 이미지에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가 스튜디오 바닥에 넓게 펼쳐 놓은 캔버스 천 위를 야생마처럼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물감을 뿌리는 모습은, 드넓은 대륙 위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미국의 이미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냉전 시대, 소련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정치적인 선전으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즉, 폴록이 자유롭게 펄쩍거리면 펄쩍거릴수록,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규제되는 구 소련과 강하게 대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추상표현주의가 이러한 정치적 선전으로 이용되었다는 의견은 당시 유난히도 해외순회전이 많았다는 기록을 보면 상당히 설득력을 갖는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해외순회전 덕분에, 추상표현주의자들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의 명성도 드높이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폴록의 작품은 보그지에도 등장할 만큼 문화현상이 되었고, 그가 작업하는 모습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되거나, 한스 나무스라는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으로 유명해져서, 그의 이름과 그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당시 미국 사람들 중에는 없었으리라.  

클래식한 드레스를 떨쳐입은 모델들의 뒷쪽에 폴록의 작품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묘하게 어울리고 아름다운 이러한 사진들로 명실공히 그는 미술계 뿐 아니라, 대중문화 속에서의 인기까지 얻는 이례적인 화가가 되었다.  

Jackson Pollock in the act of painting (1950)  Photographed by Hans Namuth 몰아 상태에서 자유롭게 바닥에 눕혀놓은 캔버스 천위르 뛰어다니며 작업을 하는 그의 모습은 실존주의에서의 인간의 모습과도 잘 맞아떨어지고, 자유민주주의의 표상에도 부합하는 모습이었다. 

이전 윌렘 드 쿠닝의 포스팅에 대해서 밝혔듯이, 폴록의 <Number 17A>는 데이비드 게픈 재단 (the David Geffen Foundation)이 헤지 펀드 재벌 케네스 그리픈 (Kenneth C. Griffin)에게 판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혹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윌렘 드 쿠닝의 작품에 대한 포스팅을 함께 읽으면 폴록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처럼 유명한 잭슨 폴록이긴 하지만, 아마도 잭슨 폴록의 작품은 피카소의 작품과 함께, '세살짜리 꼬마'들이 가장 많이 소환되는 작품일 것이다. 즉, '우리집 세살짜리도 이것보다는 잘그리겠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 현대 미술 작품 중 하나라는 얘기다.  

하지만, 호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폴록의 작품을 바라보다 보면, 처음에 봤을 때에는 chaos였던 그의 작품이 나중에는 cosmos로 느껴지는 순간이 올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 회화에서의 figure/ground, 즉,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그 외의 바탕이 되는 부분의 경계가 모호한 현대 미술 작품 중 대표적인 작품이다.  붓이 아닌 막대기나 심지어 대형 스포이드를 이용해 물감을 흘리거나 흩뿌린 그의 작품에서 어떤 것이 주된 형태이고 어떤 것이 배경을 이루는 바탕인가를 구분해내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선들 속에 드러나는 작가의 움직임과 일견 엇비슷해보이는 색상들의 미묘한 얽힘은 자세히 바라보다보면 그 속에서 색다른 조화와 균형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뉴욕의 현대미술관 (MoMA)과 엘에이의 현대미술관 (MoCA)를 위시해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는 널리 소장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폴록이 창의성과 독창성이 뛰어난 작가였다고는 해도 시대를 잘 타고 난 것도 맞다고 생각된다.  마치 제임스 딘 같은 반항아의 이미지와 드넓은 캔버스 위로 뛰어다니는 그는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표현하기 더할나위 없는 적합한 아이콘이었고, 전후 냉전시대 필요한 이미지였던 것이다. 거기에 그의 작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미술비평계의 헤밍웨이'라 불리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존재도 한 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국 국내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그 자체로 문화적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폴록 자신의 경우, 그러한 유명세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지독한 가난과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간절히 성공을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엄청난 성공과 유명세가 자신이 바라고 기대하던 것보다 지나치게 과하다고 느꼈을까?  만나는 이들마다 눈을 반짝이며, '이번에는 얼마나 더 놀라운 것을 창조해낼까?'라는 기대의 눈빛에 견딜 수 없는 부담을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그가 지닌 독창성과 창의성을 초창기에 너무 남김없이 발휘해버린 것일까? 

1954년부터 그는 더 이상 말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부터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알콜중독이 더욱더 심해졌고 (애당초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알콜중독 치료의 일환이었다), 결국 음주운전의 결과로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자기파괴로 성급한 결말을 맞이한 잭슨 폴록이지만, 그는 앞으로도 미국 현대미술을 세계에 알린 대표적 인물로, 또한 이후 앨런 카프로우 (Allan Kaprow)등이 주도한 퍼포먼스 아트의 대두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 인물로 미술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22. 05:11 미술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 연재 쭈욱~ 계속 됩니다~ 

먼저, 전체 랭킹을 논한 포스팅은 여기를 클릭!  

http://sleeping-gypsy.tistory.com/51

가요 순위 프로그램처럼 인플레 고려한 가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순위를 20위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은 추상표현주의자들 중 잭슨 폴록과 함께 소위 액션 페인팅 분야를 대표하는 작가 윌렘 드 쿠닝 (Willem de Kooning: 1904-1997)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순위에 포함된 드 쿠닝의 작품은 두 점인데, 이제까지처럼 한 작가의 작품이 다수 포함 된 경우, 중복되는 언급을 피하기 위해서 이처럼 묶어서 진행하려고 한다.  

인플레를 고려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에 무려 2위와 12위에 빛나는 윌렘 드 쿠닝의 작품은 아래와 같다. 

인플레 고려 2위) Willem de Kooning, "Interchange" (1955) $300-million (2015 private sale)  ~$310-millions [약3,511억원에 상당]

인플레 고려 12위) Willem de Kooning, Woman III (1953) (2006 private auction via Larry Gagosian)   $166.9-millions [약1,890억원에 상당]


위의 두 작품은 각각 대표작으로 평가 받는 작품은 아니지만, 윌렘 드 쿠닝의 두 가지 관심사를 잘 나타내는 작품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여인의 인체에 대한 관심이고, 또 하나가 회화에서의 형과 바탕, 즉 figure/ground의 관계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였다.    

먼저, 인플레를 고려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으로 12위를 차지한 <여인 III> (1953)을 살펴보자. 윌렘 드 쿠닝은 <여인> 시리즈로 가장 유명한 작가이다.  대표작으로는 현재 뉴욕의 현대미술관 (MoMA) 소장 중인 <여인 I>이 있다.   

20살 되던 해에 밀항으로 네덜란드에서 뉴욕으로 건너온 드 쿠닝은 초반에 생활이 어려워 같은 캔버스에 여러차례 그림을 그리고 지우곤 했다고 한다.  이 작품의 경우, 적외선, x-ray등으로 검사해 본 결과, 무려 70차례의 채색을 한 흔적이 보인다고! 힘찬 붓질 탓에 캔버스 더러 구멍이 난 부분도 있다고 한다.  시민권이 없던 관계로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예술가 구제책이던 FAP (연방 예술 프로젝트)에도 자격 미달이었던 그는 남의 집 페인트 칠해주는 일로 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알려졌는데, 따라서 그가 사용한 물감도 회화 전문용 물감이 아닌 가정용 페인트였다. 

윌렘 드 쿠닝의 대표작, <여인 I>   Willem de Kooning, Woman I (1950-52) oil and metallic paint on canvas ; 192.7 x 147.3 cm, MoMA 

이 작품은 비평가 헤롤드 로젠버그가  ‘액션 페인팅’ 이라는 명칭을 만들게  계기가  작품이다. 거친 붓질로 구현해놓은 여인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도 전형적 미인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큰 눈과 날카로운 이, 그리고 큼지막한 손과 가슴에서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긴 한다.  이여인의 모습을 융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여인의 '원형'상에 가깝다고 이해할 수 있다.  드 쿠닝의 <여인 I>은 세계사나 미술사 초반에 등장하는 고대의 여인상과 유사한데, 그 대표적인 예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있다. (아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 구석기 시대의 유물로 여성의 생산에 관련된 신체부분이 강조된 여인상. 독일의 빌렌도르프 지방에서 출토되어 붙은 별명.  원형의 여인상이라고 여겨진다.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로 제작되었다고도 여겨진다. 

한편, 인플레를 고려했을 때, 랭킹 2위를 차지한 <나들목 (Interchange)>(1955)의 경우,  그가 여인 시리즈 뿐 아니라, 그가 중반기에 몰두했던 풍경화에서도 지속적으로 몰두했던 figure/ground 관계에 대한 관심을 잘 드러낸다.   

figure/ground 관계란, 그림을 그릴 때 주제가 되는 형태 (figure)와 그 주변 및 바탕 (ground)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전통적 회화에 있어서는 그 관계가 뚜렷한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 추상에 오면 그 관계가 모호해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잭슨 폴록의 작품이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그의 그림에서 주를 이루는 형태와 바탕을 구분해내기란 불가능하다. 

이에 반해, 드 쿠닝의 경우, 인체를 포기하지 않은 추상화가로서 그로서는 추상에서 구현된 figure/ground 관계를 자신의 작품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관심이 높았음에 분명하다.  이 <나들목>이라는 작품에서는 입체교차로라는 대상과 그 주변 배경과의 관계를 탐구했다고 볼 수 있다.    

데이비드 게픈 재단 (the David Geffen Foundation)이 헤지 펀드 재벌 케네스 그리픈 (Kenneth C. Griffin)에게 판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 번에 살펴볼 잭슨 폴록의 <Number 17A>과 함께 $500-million 패키지로 판매했다고. (드 쿠닝의 작품이 $300-million, 폴록의 작품이 $200-million. 드 쿠닝에 대한 경쟁심이 남달랐던 폴록이 살아있었더라면 분통을 터뜨렸을지도. 

이 작품은 현재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대여 전시 중이므로 시카고 여행 중이고, 직접 보고 싶다면, 그곳에서 한번 찾아보시길.    

드 쿠닝은 92세의 나이에 별세하였는데, 만년에는 알츠하이머를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규칙적으로 작업실에 나가 작업을 계속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그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본능이자 습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가 투병 중에 그린 작품들도 놀라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아보인다. 

뉴욕주 이스트 햄튼 작업실에서의 윌렘 드 쿠닝과 만년의 작품들

그의 예술가로서의 공적과 지치지 않는 창작열을 담은 드 쿠닝의 전기는 2005년 플리처 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는데, 밀항자였던 네덜란드 예술가의 전기 제목이 '미국인 대가'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de Kooning: An American Master, by Mark Stevens and Annalyn Swan (Alfred A. Knopf)]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21. 00:30 미술 이야기

얼마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의 순위를 인플레를 고려한 가격을 적용해서 20위까지 매겨보았다.  

http://sleeping-gypsy.tistory.com/51 

거기서 착안해서 이 놀라운 순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가들에 대해서 순차적으로 설명해나가고 있다. 오늘은 앤디 워홀과 나란히 팝아트의 거장으로 알려진 로이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 1923-1997)의 작품에 대해서 알아볼까 한다.   우선 오늘 다룰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아래와 같다. 

13) Roy Lichtenstein, "Masterpiece" (1962) $165-millions (2017 private sale) [약 1,869억]   말풍선 내용: '어머나, 브래드~ 자기, 이 그림이야말로 '걸작'이에요!  세상에나~ 이제 곧 뉴욕의 모든 이들이 당신 작품을 구하려고 난리가 날 거에요.' 

이 작품은 원래 소장자 아그네스 건트의 맨하탄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아파트에 수년간 걸려있던 작품이었다.  사법 개혁을 위한 Art for Justice fund의 자금 모금의 일환으로 내놓았고, 이를 예술계의 큰손 스티븐 코헨 (Steven A. Cohen)이 2017년에 $165-millions에 구매하였는데, 이는 약 1,869억원에 상당하는 금액이다.   

아마 '로이 리히텐슈테인'이라는 작가의 이름까지는 좀 길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의 특징적인 연재 만화의 한 장면을 확대하여 그린 작품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친숙하다고 느낄 것이다.  위의 작품은 그가 생애 최초의 개인전을 열 당시 출품했던 작품으로 작가의 장난기가 가미된 것 제목이다.  물론 농담의 이면에는 젊은 화가의 자부심도 약간은 담겨 있었으리라.    

리히텐슈타인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만화의 장면에서 차용한 이미지에 말풍선과 벤데이 닷츠 (Ben-Day dots)*를 활용해서 그린 작품으로 유명한데, 앤디 워홀과 함께 60년대 예술계를 풍미했던 팝아트의 거장 중 한 명이다.  그는 대중 매체에서 가져온 주제를 캔버스에 유화라는 전통적 방식으로 그렸다는 데 특징이 있는데, 신문같은 인쇄 매체에서나 볼 수 있는 벤데이 기법을 활용한 그의 그림에서 개인의 감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1962년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당시의 리히텐슈타인   Roy Lichtenstein at Castelli Gallery sitting with Spray (1962), Masterpiece (1962), Engagement Ring (1961) and Aloha (1962), 1962. Photograph by Bill Ray.  

왼쪽: 원본 만화  ; 오른쪽: 리히텐슈타인의 <걸작> 

리히텐슈타인의 <걸작 (Masterpiece)>은 테드 갈린도라는 만화가의 삽화를 자신이 재해석 한 것인데, 원래 만화에서의 말풍선 내용은 다음과 같다: "But someday the bitterness will pass and maybe I'll be the girl to change your heart! But for now at least I can be near you!

즉, 지금은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남자에 대해 언젠가는 자신을 좋아해 줄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고, 지금 당장은 곁에 있는 것 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내용. 당시 유행했던 닭살돋는 연애 소설적 내용인데, 이런류 만화의 대부분의 대사가 60년대 한국의 영화 대사 같이 다소 감정과잉적인 내용이 많다. 이를 리히텐슈타인은 재치있게 내용을 바꾸었고, 원래 설정 상은 차 안이지만, 리히텐슈타인의 경우, 설정이 화가의 스튜디오 안이라 짐작할 수 있다. 

아래는 그의 초기 '만화 차용' 작품이자 이후 그의 대표적 작품들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미키, 이것 좀 봐! (Look, Mickey)'이다.  리히텐슈타인이 벤데이 닷츠 기법을 활용하기 전에는 보통 유화를 그리듯이 채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원래 만화와 비교해봤을 때, 구도에 있어서 원본의 주변을 조정을 하였고, 말 풍선을 삽입하므로서 만화같은 효과를 이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화와 미교해보면, 대화창이 아래에 자리한 원래의 삽화보다는 리히텐슈타인의 유화 작품이 훨씬더 만화 컷 같다.) 

왼쪽: 원본 만화 ; 오른쪽: Roy Lichtenstein, Look Mickey (1961), oil on canvas ; 121.9 x 175.3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 Estate of Roy Lichtenstein/DACS 2012 

아래의 작품들은 리히텐슈타인이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확립하고 나서의 작품들의 예이다. 원본이 되는 만화들과 비교해보자.  원본의 만화에서는 그 당시의 멜로 만화가 그러하듯이 감정 충만한 때로는 과잉인 내용이 말풍선 안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리히텐슈타인은 의도적으로 그 '감상적' 대사를 제외함으로써 감정을 배제하고 기계적 복제를 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이러한 기계 복제와 수작업, 감정과잉과 이성적 표현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다리기를 하면서 작업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작품이 인쇄매체를 이용하여 제작한 만화 컷보다 더 드라이해 보인다는 점. 그리고, 그는 이렇게 차가와보이는 작품을 수작업으로 제작하였다는 점. 이러한 대조적 특성들을 이용해서 예상을 뒤엎는 식으로 작업했다는 것이다. 

위: Roy Lichtenstein, In the Car (1963); 아래 원본 만화. 이 경우에 리히텐슈타인은 말 풍선 속의 대사를 생략해서 그렸다.  참고로, 말풍선 내용은 '(병원이나 미용실 등) 예약 해둔 것은 어기지 않겠다고, 그와 드라이브 따위는 가지 않겠다고 맹세했건만.... 그런데 어느샌가 난...' 이다. 도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랑에 빠져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여인의 심리가 드러난 말 풍선이다. 

 참. 그리고 이 그림의 복제판 (?)이 한국에도 있다.

이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다면, 이전의 글 참고 *^^*



맨 위: Lichtenstein, Crying Girl (1964), porcelain enamel on steel ; 116.8 × 116.8 cm. 중간: 리히텐슈타인, 스케치 ; 맨 아래: 원본이 된 만화. 여기서의 말풍선 내용도 감정감정하다.  아마도 데이트 약속을 잊어버리고 어긴 남자친구에게 화를 내고서는 나중에 눈물 펑펑 흘리면서 후회하는 여자친구인가보다. 

말 풍선 내용: '(흐흑...)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난...난 내일 사과를 해야지... 생각해보면...이번이 그 사람이 처음 성공한 것인걸...그는 너무 신나있었던거야...(그래서 약속을) 잊어버린거야...'

리히텐슈타인 재단(Lichtenstein Foundation)이 발행한 온라인 카탈로그 레조네 (Catalogue raisonné)**를 살펴보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로 발전된 것은 1962년부터로 신기하게도 1961년도까지 그러한 경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아들이 만화책을 보다가 '아빠는 이런 그림 못그리지?'라고 질문에 울끈불끈 해서 이러한 만화에서 착안해서 그렸다고는 하나, 거기에 대한 사실확인은 못했다.  

다만, 미술사적으로 살펴보면, 팝아트의 대두 배경 자체가 그렇지만, 그의 팝아트로의 전향도 그가 활동하기 이전 미술계에서 명성과 권위로 그 아성이 깨질것 같지 않던 추상표현주의 (Abstract Expressionism)에의 반동이라는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추상표현주의는 철학적으로는 실존주의, 칼의 융 심리학 등의 영향을 받아 전후의 상황과 인간의 조건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외형적으로는 거대한 캔버스의 추상화로 특징지어지는 미술 사조이다. 미국으로서는 최초로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예술을 인정받은 사조였기에 국내에서는 물론 국제적인 명성과 위용은 대단했다. 캔버스를 화가의 실존이 내던져진 투쟁의 장으로 해석하던 경향에서 알 수 있듯이,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젊은 화가들이 보기에 추상표현주의는 너무 심각하고 무거운 것이었고, 생각만 엄청 복잡하고 허세 쩔은 것이었다.    

실크 스크린을 애용한 앤디 워홀과 벤데이 닷츠를 이용한 로이 리히텐슈타인, 이들 모두 기계적 방식을 사용한 복제를 택한 이면에는 너무 심각하고, 말끝마다 실존 실존 하는 아버지들에 대한 반항이었는지도 모른다.  개개인 화가의 실존이 드러나는 회화 (추상표현주의)와 정반대되는 대량생산으로 몰개성인듯해 보이는 기계적 작품에 착안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지가 언젠데.... 변화한 사회 속의 대중들도 그러한 심각하고 무거운 추상표현주의의 대안들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리히텐슈타인으로서는 그 계기가 무엇이었든지간에, 요새 말로 치면 콘텐츠 개발에 대성공을 이룬 셈이다.  




*벤데이 닷츠: 벤자민 헨리 데이라는 일러스트레이터 겸 판화가가 발명한 인쇄기법으로 균일한 원들의 분포 밀도를 조절함으로서 명암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신문의 삽화, 5-60년대 만화등의 인쇄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 기법을 유명하게 한 것은 단연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다.  

**카탈로그 레조네: 주요 작가의 전 작품을 망라하여 주석과 함께 편찬한 작품 집. 해당 작가의 전문 연구가, 미술사학자들이 집필과 연구조사에 참여하여 제작되므로 신빙성이 높은 연구자료로 활용된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20. 00:30 일상 이야기

우연히 'Why do Koreans~?' 라는 디지털 콘텐츠가 있는데, 외국인들이 한 질문 중 첫 번째가 왜 한국인들은 첫 만남에 웃지 않죠?” 였다라는 기사를 읽었다. 사실 이런 얘기는 나도 사적인 자리에서도 몇 번 들어봤다. 

나도 미국 가서 얼마 되지 않아서 첨 보는 사람들간의 'Hi~'를 교환하는 문화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고, 그게 이와 비슷한 맥락의 의문이라고 생각하기에 거기에 대해서 적어볼까 한다.  (문화 연구자들과 얘기해본 적도 없고, 그냥 나혼자 일정기간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므로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1) 우선 처음 느낀 것은 내가 한국에서 살던 곳과 내가 살기 시작한 미국의 도시에서의 인구차이였다.  서울은 하루종일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만나서 다 미소를 교환하면서는 일상생활을 진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점심 때즈음 되면 안면근육의 마비가 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살던 도시는 그 주의 주도 였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보는 이들과 마주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큰 도시임에도 인구가 비교적 적고, 대부분은 차를 이용해 이동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 산책이라도 나갈라치면, 한 2-30분 길 위에 아무도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보면, 미소짓게 된다. 저 쪽 앞에서 한 사람이 맞은편에서 오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게 되면. 그리고 내심 진심 살짝 반갑기도 하다. 아, 한국서 사람들이 굳은 표정으로 다니고, 눈을 마주치는 이들에게 'Hi~'라고 한마디 건네거나, 미소를 교환하지 않는 이유는 첫 만남의 빈도가 너무 높기 때문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러한 생각이 내 안에서 설득력을 얻은 것은 내가 뉴욕에 갔을 때이다. 처음엔 낯설기만 하던 '낯선 사람과의 미소 교환'에 이제 막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그런데, 거기서는 처음보는 이들에게 미소를 띄면, '뭐야? 너 나 아니?'하는 듯한 눈길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마주보고 웃어주는 건 '시골 관광객'뿐이라는 얘기를 소위 '뉴요커'들에게 들은 것은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난 후였다.  결국 뉴욕은 서울 같은 곳이었다. 거기도 엄청난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이고, 거리며 지하철이며 버스며 항상 붐빈다. 거기서 매번 낯선 사람들과 미소를 교환하다가는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친.다. 

2)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생각할 때는, 문화 차이인데, 한국인들이 타인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너그러운 문화라는 점이 작용하는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국은 공동체 의식이랄까, 우리와 남의 구분이랄까? 이런게 좀 강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차도 있고, 가정이나 조직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관점을 줌 아웃해서 전반적인 한국인으로 생각해봤을 때의 이야기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우리'의 영역 속에 들어온 사람들은 '확대된 나'이다. 남들에게는 무관심해도 일단 '남 아닌 우리'가 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간이나 쓸개를 직접 빼주는 사람은 본 적도 없고 그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실제로는 절대 그래서는 안되겠지, 건강에 안좋으니까...)  

따라서, 잠재의식 속에서 한국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고 평가 기간을 가져야 한다. 내가 만나는 이 사람이 '우리'가 될 것인가 아니면 '남'으로 남을 사람인가? 그래서 선뜻 웃지 못하는 것이다. 일단 웃고 나면 이젠 '간이고 쓸개고 빼줘야' 할 일만 남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왜 한국인들은 첫 만남에 웃지 않죠?'라고 질문했던 외국인들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한국 사람들은 처음엔 무뚝뚝한데, "일단 알고나면," "일단 친해지면," 무척이나 친절하고 정이 많다.'라고 평가를 덧붙일 것이라 믿는다.  어느 지점, 그가 '우리'라고 평가받는 그룹에 포함되는 경험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경험한 미국의 경우는 국가의 구성 자체가 다민족 다문화를 기반으로 했고, 그 때문에 개성과 차이를 존중하고자 하는, '개인주의'가 지배적인 나라이다. 따라서, '우리'도 있고 '조직'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 유대가 우리나라 같지 않고, 따라서 결국은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개인주의가 강하다. 따라서, 개체로서 또 다른 개체인 인간을 만나면, 일단 상대에게 자신이 우호적인 존재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사는데 이롭다.  그러다보니, 처음 보는 사람을 보면 일단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 미소의 의미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첫 만남에 웃는 것에 그다지 부담이 가지 않는 것이다.  나는 처음 미국 갔을 때, 은행인가 관공서인가에서 미소를 교환하고 날씨 얘기부터 자신이 이혼한 얘기까지 갑자기 다 쏟아내더니, 기다리던 순서가 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한 여인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물론 그 사람의 경우는 미국인 중에서도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카페나 음식점, 마트나 거리에서 미소를 교환하고 나서 바로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내가 당시 받은 인상으로 따지면, '나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인 듯한 반응을 너무도 많이 겪었다.  

따라서, 첫 만남에 웃는 것만으로 외국인들이 더 친절하다거나 더 인성이 좋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  다만, '미소'의 무게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처음 무뚝뚝했지만, 나중에 친절하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별이 더 '정이 깊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유보해봐야 될 판단이다. 

한국인들이 '우리'에 갖는 이러한 결속감과 유대감에서 한국인의 '정'이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물론 동일한 민족으로 한 국가를 이룬 사람으로서는 그 안의 일원에게는 커다란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는 일이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오류나 부정은 그 연대감 때문에 선뜻 지적하거나 고치기 힘들다는 것은 큰 단점이 아닐까 생각한 적은 있다.  또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소외감을 줄 수 있는 정서 체계이기도 하다. 

만약 어떠한 외국인이 'Why do Koreans~?'라며 첫만남에 웃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 내지 불만을 이야기 하면, 난 위와 같이 설명해줄 것이다. 물론 다 설명해주려면, 그때 내가 가진 시간이 좀 많아야겠지만....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19. 01:00 미술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 연재.  시작했으니 계속 달리는 걸로~  

처음 밝힌 대로, 가요 순위처럼 인플레 고려한 가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순위를 20위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공약을 지켜가고 있는 겁니다.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지만~  ^^  (처음 소개 포스팅은 여기!)

오늘은 인플레를 고려했을 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 9위와 15위를 차지한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1981-1973)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9위와 15위를 차지한 작품은 각각 아래와 같다. 

9) Pablo Picasso, "Les Femmes d' Alger" ("Version O") (1954-55) $179.4-millions (2015 Christie's auction)   $185.2-millions

15) Pablo Picasso, "Le Rêve" (1932) $155-million (2013 private sale)   $162.8-millions 

20세기 화가로 가장 유명한 화가를 꼽자면 단연 파블로 피카소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20세기 태어나고 활동한 화가 중에 피카소의 영향을 받지 않은 화가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모두가 피카소를 추앙하고 따랐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 화가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누자면, 그를 숭배하고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와 그의 작품을 너무 싫어해서 의식적으로 그런 작풍과 경향을 피한 화가들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인플레 고려 9위) Pablo Picasso, "Les Femmes d' Alger" ("Version O") (1954-55) $179.4-millions (2015 Christie's auction)   $185.2-millions [약 2,082억에 상당]

피카소는 자신이 거장임을 잘 알고 있었고 마티스가 자신의 적수가 될만한 상대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마티스가 세상을 뜨고 난 뒤, 그는 '나는 내일부터 두배 열심히 일해야 한다, 마티스의 몫까지.'라고 멋있는 말을 하고 난 뒤, 이제는 세상을 뜬 동시대의 적수를 대신해 서양미술사 내에서 존재하는 거장들에게 차례차례 시합을 신청했다.  위의 작품은 낭만주의의 대가로 알려진 외젠 들라크로아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알제리의 여인들>을 재해석한 작품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알려진 작품이다.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대가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볼 때까지 해보는 타입이었다.  '알제리의 여인들'이라는 주제로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고, 이후 미술사가들은 그 작품들을 연구하기 위해 작품들에 알파벳의 별칭을 붙였다. 위의 작품은 이름하여 '버전 O'.  그 외에도 다양한 스케치, 유화, 석판화 등으로 동일한 주제의 작품들이 남아있다.   

피카소는 현대미술의 포문을 열었고 추상미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입체파 (Cubism)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초로 '입체파' 양식의 작품을 제작한 것은 초기에 피카소의 룸메이트로 지내며 공동작업을 했던 조르주 브라크라는 것도 입체파 전문가들 다수가 인정하는 바이다. (이후에도 브라크는 조용히 입체파적 작품을 평생 꾸준히 제작하며 독자적 영역을 확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왕성한 창작열과 창의성에 있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작품 수는 어마어마해서 그의 긴 인생의 나날들로 나누어봐도 하루 20여점은 제작한 것으로 나온다고도 한다. 그는 '창의적인 진공청소기'라 불리며 항상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작품을 창조해냈고, 회화 뿐 아니라 판화, 도자기, 조각, 무대 장치,시, 희곡 등 다양한 부문에서 열정적으로 창작활동을 펼쳤다.  자타공인 그의 이미지를 '황소'에 비유한 것은 단지 그가 스페인 출신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카소는 왕성한 창작열 뿐 아니라 그의 엄청난 '연예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잘 알려진 그의 여자친구만 해도 무려 7명, 두번의 결혼을 했고, 세명의 자손을 남겼다.  물론 그외 잘 알려지지 않은 여자친구는 수도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가 15세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사창가를 드나들기 시작한 이래, 여인들은 그의 삶과 예술의 동력이기도 했다.  미술사학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한 연구에 따르면, 그의 유명한 '아비뇽의 여인들' (1907)은 당시 유럽에 널리 퍼졌던 성병, 매독에 대한 공포와 그의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의 딜레마, 그리고 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부적'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Picasso, Demoiselles d’Avignon (1907) oil on canvas; 243.9 × 233.7 cm, MoMA

오늘의 주제인 <꿈>이라는 작품은 Marie-Thérèse Walter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피카소는 그림으로 일기를 쓰는 화가여서, 그의 연애 변천사는 작품 속에 다 드러나서 그의 작품을 조금만 연구하다보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마리-테레즈 월터의 경우, 그의 7명의 애인들 중 4번째의 여인에 해당한다.  (그녀와 연애를 할때에는 그는 첫번째 부인 올가 코클로바와 결혼상태였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녀와 사는 집은 본가 살림 집 근처에 따로 구해야만 했었다.  이후 올가가 집을 나가고 이혼을 신청했지만, 위자료가 주기 싫어서 '끝까지 이혼은 안했다'는 후문이 있다.) 

공교롭게도 마리-테레즈 월터를 그린 초상화는 모두 경매에서 고가로 거래되었다.  이 작품은 예술계의 두 큰 손 사이에 거래되어서도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을 뿐 아니라, 호텔 재벌 윈 (Wynn)이 증권계 큰손 스티브 코헨 판매 직전에 작은 흠집을 내어서 한때 거래가 중지되었다가, 수리 후 처음보다 훨씬 고액으로 결국 다시 코헨에게 팔았다는 에피소드가 더해져 더 유명해졌다.  

인플레 고려 15위) Pablo Picasso, "Le Rêve" (1932) $155-millions (2013 private sale)   $162.8-millions [약1,834억원에 상당]

마리-테레즈 월터를 모델로 한 또 다른 작품이 아래. 생전, 피카소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인이 있지. 한 종류는 여신이고 또 한 종류는 발닦개 (doormat)'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는데, 여기에는 여신 (흉상으로 묘사)과 발닦개 (바닥에 누운 여인으로 표현)가 다 등장한다.  이 작품은 개인 소장으로 한동안 대중의 눈에서 사라졌다가 소장자 Frances Brody가 2009년 사망 후, 현재는 장기 대여형식으로 테이트 모던에서 전시 중이다.  

Picasso, Nude, Green Leaves and Bust (1932)  oil on canvas; 162 × 130 cm (2010년 경매 $106.5-millions) (private collection ; 현재 런던의 테이트 모던에 장기 대여중)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18. 04:27 미술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 연재 계속~ 쭈욱~  

가요 순위 프로그램처럼 인플레 고려한 가격으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순위를 20위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보고 있다. 이제까지처럼 한 작가의 작품이 다수 포함 된 경우, 중복되는 언급을 피하기 위해서 이처럼 묶어서 진행하려고 합니다. 

먼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을 다루었던 포스팅은 아래를 참고!    

http://sleeping-gypsy.tistory.com/51


오늘은 모딜리아니 (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1920)에 대해서 살펴볼까 한다.  

어제 살펴 본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우, 매니아 층의 팬들은 있었지만, 대중적인 관심에서는 벗어난 작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모딜리아니는 그의 작품 뿐 아니라 작가 자체까지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 받아온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미남 화가, 잔느 에뷔테른느와의 순애보, 가난과 싸우며 예술혼을 불태우다가 각혈을 쏟으며 요절한 화가. 그가 죽은 뒤, 임신한 몸을 던져 자살한 그의 연인까지. 흔히 막연히 생각하는 고뇌하는 천재 예술가에 이 이상 부합잘되는 화가도 드문 것이다.  (반 고흐, 프리다 칼로와 함께, 삶이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할수록 대중적인 인기가 더 높은 경향이 있는듯 하다.)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있기에 극적이고 파란만장한 화가의 삶은 신화화되고, 이후 사실이 밝혀져도, 대다수는 자신이 사랑해마지 않는 작가의 삶이 좀 더 드라마틱한 영화같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인지, 사실보다는 '~카더라'일지도 모르는 통설을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믿음은 반복되어 재생산되고 이후 통설은 어느샌가 진실로 탈바꿈하게 된다.  

모딜리아니의 경우, 고뇌하던 천재 (게다가 미남)가 세상의 몰이해와 가난과 싸우며 피를 토해가며 예술혼을 불태운 화가의 이미지를 대표한다.  잔느 에뷔테른느와의 순애보는 거기에 드라마를 더했던 것은 물론이다. 눈동자가 없는 초상화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은 '이발소 그림'이라고 일컬어지는 밀레의 작품만큼이나 복제품으로 제작되어 여기저기서 많이 접할 수 있어왔다.  그리고 그러한 인기는 경매에서도 위력을 발휘하여, 그의 작품은 경매에 나오기만 하면 연신 고가로 판매되어 예술부문의 기사에 실리곤 했다.  죽고 나서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천재화가의 신화는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딜리아니의 작품도 랭킹 20위 안에 두 작품 포함되어 있고, 그 작품은 아래와 같다. (그리고 대략 100위 안에 적어도 4점은 포함되어 있다.) 

인플레 고려 10위) Amedeo Modigliani, "Nu couché" (1917) $170.4-millions (2015 Christie's auction)   $175.9-millions 

우선 위의 작품은 모딜리아니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2015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중국의 대부호 리우 이치안이 $170.4-millions (약 1,920억)에 구매하였다. 이는 현재 인플레를 고려해서 대략 $175.9-millions (약 1,982억)에 상당하는 금액이다. 당시 그가 아멕스 (아메리카 익스프레스) 카드로 대금을 지불했다는 것까지 보도할만큼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공개 당시에도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경우에는 '외설논란'이었지만 말이다.   

1914년부터 몇년간 여성 누드를 집중적으로 그렸던 모딜리아니는 1917년에는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열었는데, 그 당시 여성 누드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덕분에 '외설죄'로 경찰이 출동하고 전시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한다. 하지만, 알려진 것처럼, 모딜리아니가 이 좌절과 함께 건강을 더 해치게 된 것 같지는 않다. 경찰 출동 및 전시회가 일시적으로 중지되긴 했지만, 이후, 갤러리 앞 창가 쪽의 작품들을 치우고는 전시는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는 에콜 드 파리 화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최초의 아방가르드 화가로 일컬어지는 인물이지만, 상당기간 전통적 아카데미 미술 교육을 받은 인물이다. 오늘 살펴보는 여인 누드상들은 모두 전통적인 비너스 상의 도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화법, 원근법을 무시한 시점과 공간처리 등에서 아방가르드 미술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물론 파리에 와서의 생활이 곤궁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탈리아 출신 유태인인 그는 상당히 유복한 유년생활을 보냈다. 어릴때부터 병약하여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는 없었으나, 그런 그의 소양을 키워주기 위해 그의 모친은 베니스, 로마, 플로렌스 등 여러 곳을 데리고 다니며 폭넓은 여행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후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미술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시키기도 하고 말이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곱게 자랐고, 전통적 아카데미 훈련을 받아왔던 그는, 웬일인지 파리에 와서 일년이 채 되지 않아서부터는 갑자기 아방가르드적 보헤미안으로 변신하여 폭음과 약물 과용은 물론, 폭넓은 연예를 하는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에 대한 이유로는 그가 어릴적부터 앓았던 결핵의 증세를 감추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다. [당시, 결핵은 불치병이자 감염성이 강한 병으로 인식되어, 결핵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주변에서 소외당하기 일쑤였다한다.]  

인플레 고려 16위) Amedeo Modigliani, "Nu couché (sur le côté gauche)" (1917) $157.2-million (2018 Sotheby's auction)  $157.2-millions 

위의 '왼쪽으로 돌아누운 누드'의 경우, 올해 소더비 경매에서 $157.2-millions (약1,771억)에 판매되었다.  이 작품은 다른 모딜리아니의 작품에 비해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누드이기도 하고, 여타 작품보다 크기도 크고 전신을 다 포함하고 있는 이례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앞서 밝혔듯이, 그의 작품은 경매에서 항상 고가로 거래되어 유명한데, 비슷한 누드 작품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아래 두 작품을 들 수 있다. 

모딜리아니, 푸른 쿠션에 기대누운 누드 Amedeo Modigliani, "Modigliani Nu Couché au coussin Bleu" (1917) oil on canvas ; 60.1 x 92.1 cm,  Rybolovlev collection $118-millions (2012 private sale via Yves Bouvier) 인플레 고려 $126-millions (약 1,420억)에 상당  [Steven A. Cohen to Dmitry Rybolovlev, Private sale via Yves Bouvier]

이 작품은 금융계의 큰손이자 아트 콜렉터로 유명한 스티븐 코헨이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에게 이브 부비에를 통해 2012년 판매한 것인데, 인플레를 고려하면 약 1420억원에 상당하는 작품이다.  [이브 부비에와 러시아의 부호 리볼로프레프를 연관한 법적 사건에 대해서는 클림트의 작품 소개글에 언급했다.]  

아래의 작품은 모딜리의 작품 중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2010년 소더비 경매에서 거래된 작품이다. 누워있는 누드가 많으나, 이 작품의 경우, 모델은 고대 비너스 조각의 포즈와도 비슷한 손동작을 짓고 있으나, 정작 현대적인 긴의자 (혹은 매트리스 침대)에 걸터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렸고, 배경과 인물사이의 공간은 없어 화면은 상당히 평면적이다. 이러한 화면의 평면화는 이후 현대미술의 특징 중 대표적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처럼, 모딜리아니는 전통과 아방가르드 사이에서 작업한 화가로, 그가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딜리아니, 긴의자에 앉아 있는 누드  Amedeo Modigliani, Nude Sitting on a Divan ("La Belle Romaine") (1917), $69-millions (2010 Sotheby's New York) 인플레 고려 $77.4-millions에 상당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17. 00:03 일상 이야기

お仕事頑張ってください라는 일본어 표현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은 여기를 클릭!)

그런데, 어제 우연히 일본 드라마을 보다가, 요새는 일본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간밧테 (頑張って)' 혹은 '頑張れ' [우리로 치면 파이팅 정도일까...]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파와 하라' (power harrassment의 일어식 표현), 즉 권력을 악용해서 남을 괴롭히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얘기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게 모르게, 일본도 서구의 문화 혹은 서구적 사고방식으로 전이되는 것일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일이나 직장에 대한 태도는 참 다르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전에 내가 일본과 미국의 차이에 대해서 재밌다고 생각하던 점이었는데, 이런 현상은 왠지 서구의 사고방식이 1승?  이런 느낌적인 느낌?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16. 01:30 미술 이야기

며칠전 올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작품들 랭킹 꼼꼼히 살펴보기 시간!

오늘은 인플레를 고려한 순위 18위에 당당히 자리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 블로흐-바우어 의 초상 I" 을 살펴보는 시간이지만, 편의상 그의 작품을 한데 모아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사실 클림트에 대해서는 일전에 포스팅을 한 적이 있으므로 그 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100주년이라니....빈 모더니즘을 기념하는 2018년  

http://sleeping-gypsy.tistory.com/52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우리가 살펴보는 인플레를 고려했을 때 2018년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작품 순위 20위 안에서 빈 모더니즘을 주도했던 클림트의 작품이 무려 세 작품!!!  따로 따로 이야기 하자면 중복되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아 하나로 통일해서 올리도록 한다.  그 세 작품은 아래와 같다. 

인플레 고려 6위) Gustav Klimt, Wasserschlangen II (Water Serpernt II) (1904) $183.8-millions (2012 private sale)  $193.1-millions

인플레 고려 14위) Gustav Klimt,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135-millions (2006 Christie’s auction)   $163.9-millions

인플레 고려 18위) Gustav Klimt,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I (1912)  $150-millions (2016 private sale via Larry Gagosian)  $153.0-millions 

올해 서거 100주년이라 세계 곳곳에서 행사도 많이 진행되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는 구태의연한 아카데미를 박차고 나와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고자 한 열혈 화가들의 모임인 비인 분리파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비인 모더니즘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의 예술은 프랑스에서는 '아르 누보 Art Nouveau ('새로운 예술'이라는 의미)라는 명칭으로 통용되었고,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유겐트 스틸 Jugend Stil' ('젊은 스타일'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예술의 주요 작가이기도 하다.  

당당히 6위를 차지한 <물뱀 II>의 경우, 클림트의 그의 '황금기'의 작품 중 하나로, 금박을 사용해서 그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또한 다른 그의 작품의 특징인 '여인의 관능성'의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물뱀 I>이 유화 작품이 아니라는 점도 있어 두 작품의 매제의 차이가 느껴지는 점도 흥미롭다. 

이 작품은 러시아의 재벌인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 (Dmitry Rybolovlev)가 고갱과 로댕의 작품들과 함께 스위스의 아트 딜러인 이브 부비에(Yves Bouvier)에게서 고가로 구매한 작품들 중 하나 이다. 이후 이 둘은 예술품의 위조, 예술품 도난, 자금 세탁 및 탈세 등의 문제에 연루되게 되는데, 이를 "부비에 사건"이라고 부른다.    

6) 구스타프 클림트, <물뱀 II> Gustav Klimt, "Wasserschlangen II (Water Serpernt II)" (1904) $183.8-millions (2012 private sale) 현재 가치 $193.1-millions 

구스타프 클림트, <물뱀 I> Gustav Klimt, "Wasserschlangen I (Water Serpernt I)" (1904)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였을까?  그의 황금 빛 사랑은 남달랐는데, 찬란한 금박을 배경으로 화려하게 그려진 인물화가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이다.  여성의 묘사에 있어서 혁신을 일으킨 그의 대표작 <키스>와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1907)가 그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Gustav Klimt, The Kiss (1907), oil on canvas ; 180 x 180 cm,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이 작품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일전에 포스팅을 참고하세요~  http://sleeping-gypsy.tistory.com/52

아델 블로흐-바우어 초상 I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이 그려진 이후, 5년 후, 같은 모델을 대상으로 II를 그린 것인데, 첫번째 작품이 2006년 기록을 세우며 판매된 이후 10년 만에 두번째 작품도 나란히 기록을 세우게 된다.  아델의 경우, 구스타프가 유일하게 같은 인물을 대상으로 두번 초상화를 그린 대상이라는 점에서도 유명하다.  

첫번째 초상화는 한때 나치에 의해 몰수되었다가 전후 비인의 갤러리 벨베데어 (Galerie Belvedere) 미술관에 넘겨졌다. 이후 기나긴 법정 소송 끝에 비로소 블로흐-바우어 가문이 소유권을 회복하게 되었고, 그 길로 바로 2006년의 경매에 등장.  그 해 최고가를 기록하며  에스티 로더 화장품 회사를 소유한 재벌 Ronald S. Lauder가 구매하게 되어, 그들의 소유인 뉴욕의 노이 갤러리 (Neue Galerie)에 걸리게 되었다.   

두번째 초상화의 경우, 한때 오프라 윈프리가 소장했었으나 2016년 가고시안 갤러리를 통해 비공개 경매로 익명의 중국인에게 판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4) 클림트,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I  Gustav Klimt,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135-millions (2006 Christie’s auction)  현재 가치 $163.9-millions   판매자: Maria Altmann 구매자: Ronald Lauder

18) 클림트,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II   Gustav Klimt,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I" (1912)  $150-millions (2016 private sale via Larry Gagosian)  현재 가치 $153.0-millions 

이 둘의 사이에 대한 소문도 무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영화도 제작되었다고 하나, 원체 클림트는 에밀리 플뢰게 (Emilie Flöge: 1874-1952)를 위시해 수많은 여성 편력으로 유명한 화가였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모친이 사망할 때까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알려졌는데, 일설에는 그의 사생아가 14명이 된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신비주의를 유지하며, 인터뷰 때 사생활에 대한 질문을 받아도, '내 인생은 내 예술만큼 재미가 없다.'며 극도로 말을 아꼈었다.  

클림트의 작품을 전체적으로 보면, 초기 작품의 주제는 불안과 회의, 그리고 여인의 관능성, 혹은 죽음과 같은 무거운 주제가 주를 이루었던데 반해, 후기에 이르면, 자연을 빛의 효과와 추상적 형상을 통해 나타낸 풍경화가 주를 이루게 된다.  1908년 그는 회장을 맡기도 했던 비인 분리파에서 탈퇴를 하면서 보다 개인적인 감성과 직관에 충실한 작품활동을 하게 되는데, 자연에 눈을 돌리게 되면서 화풍의 변화를 갖게 된다.  인물화를 그릴 때처럼 주문자의 심기를 살피지 않아도 되어서 그랬을까? 이후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에 심취하여 풍경화를 위주로 그리게 된다.  그의 풍경화도 오늘 살펴보는 인물화 만큼의 고액은 아니지만, 경매에서 항상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곤 한다.   아래의 작품만 해도 2006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31,375,000 (약 351억원)이라는 높은 가격에 거래가 성사되었다.  

Klimt, Houses at Unterach on the Attersee (1916) oil/canvas,  110x110cm, Private Collection [Christie's - Price Realized $31,376,000 - 8 November 2006 (약 351억)]

온 종일 숲속을 그의 유니폼 같은 가운을 입고 어슬렁거리는 그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숲속의 악마'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할 정도로 자연에 심취하여 많은 풍경화를 남겼고, 그의 풍경화는 에곤 쉴레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대표적 풍경화로 알려진 아래의 작품의 경우, 빨강과 녹색의 보색 대비, 치밀하고 자잘한 원색의 붓질 등에서 인상파의 영향이 느껴지기도 한다.  

Gustav Klimt (1862–1918), A Field of Poppies (1907),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클림트는 상징주의 Symbolism, 아르누보 Art Nouveau, 예술공예운동 Arts and Crafts Movement, 그리고 자포니즘 Japonisme 등 20세기 초의 다양한 사조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독특한 회화 세계를 확립함으로써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지나치게 높은 그의 작품 가격에 대해서는 다소 이의가 있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 점에 대해서만은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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