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친구가 필라델피아에 출장을 갈 건데, 거기서 볼 만한 게 없는지 알려 달라고 하네요.

여러분은 ‘필라델피아~’ 하면 뇌리에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크림치즈가 젤 먼저 떠오르시나요?  

고기를 좋아라 하신다면, 필리 치즈 스테이크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게 될 수도 있겠군요.  

교육열 높으신 분이라면, 아이비리그 학교 중 하나인 ‘유펜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가 있는 곳으로 기억될 수도 있겠구요.  연배가 좀 되시는 분이라면 덴젤 워싱턴과 탐 행크스의 영화 <Philadelphia>가 떠오르실지도 모르겠네요. 좀 최근에는 케서방이라고 불리던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을 한 재미있는 영화 <National Treasure>의 배경이었다는 것에 기억이 미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실제로 필라델피아 출신이라는 친구들을 만나보면 출신지에 대한 자부심이 은연 중에 드러나는 경우가 있어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에게게? 싶지만, 역사가 일천한 미국 안에서 필라델피아는 유서 깊은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미국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이 많은 곳입니다. 미국 최초의 비즈니스 스쿨인 ‘와튼,’ 미국 최초의 병원, 미국 최초의 동물원, 미국 최초의 미술학교 등등….

영화 얘기를 다시 돌아가보면, 많은 남자분들에게는 <필라델피아>나 <내셔널 트레져>보다는 <록키>가 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영화 속에서 재기를 꿈꾸는 왕년의 챔피언 실베스터 스텔론이 ‘빰빠라 빰빠 빰빠~~’ 유명한 OST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계단을 우다다다 뛰어 올라선, ‘훅훅, 훅훅, 이건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여’라며 특훈에 매진하던 장면이 떠오르시나요?  그 특훈의 현장이 바로 필라델피아 미술관 (Philadelphia Museum of Art) 건물 계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유명세에 힘입어 현재에는 록키의 커다란 동상도 세워져 있습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동쪽 입구]

록키 팬이고 미술에 딱히 관심이 없다시면 바깥 쪽에서 동상 앞에서 잽 날리는 포즈로 사진 하나 멋있게 찍고 돌아서도 상관없겠죠.  

아니면, 그 곳에서 방문 당시 열리는 특별전이나 맘에 드는 작품들을 골라 보셔도 상관은 없어요.  하지만,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미국 세번째로 큰 미술관이고, 훌륭한 컬렉션으로 유명합니다.  미술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을 위해서, 혼자서 모르고 보면 휘익~ 지나칠 것만 같은 작품 중 두 점을 소개합니다.   

1. Marcel Duchamp,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The Large Glass) (1915-23), oil, varnish, lead foil, lead wire, dust, two glass panels, 277.5 × 177.8 × 8.6 cm

2. Paul Cézanne (1839-1906), The Large Bathers (1906), oil on canvas ; 210.7 x 251.0 cm, the Philadelphia Museum of Art,

아, 그전에 잠깐~!

이 곳에는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 전통을 미국내에서 최초로, 또 성공적으로 이식했다고 평가받는 토마스 이킨스 (Thomas Eakins: 1844-1916)의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요. 미국 최초의 미술학교로 유명한 펜실바니아 미술 아카데미 (Pennsylvania Academy of the Fine Arts)에서 우여곡절은 있었고 당시에는 논란을 야기한 적도 있긴 하지만, 명실공히 미국에서 미술 아카데미에서의 미술교육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미국 미술사에서 사실주의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필라델피아 미술관 안에는 마르셀 뒤샹의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벌거벗겨진 신부, 심지어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라 작품이 있는데요. 이 작품의 또 다른 버전…이라기보다는 복제품은 총 3점 – 각각 스톡홀름의 현대 미술관 (Moderna Museet),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 일본 동경대 코마바 미술관 소장 – 이 있습니다.   

Marcel Duchamp,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 (The Large Glass), 1915-23, oil, varnish, lead foil, lead wire, dust, two glass panels, 277.5 × 177.8 × 8.6 cm © Succession Marcel Duchamp (Philadelphia Museum of Art)

공사하다 부서진 것 같은 구조물이기에 주변에 펜스가 없었다면 작품인지도 모르고 지나쳐버리기 십상입니다. 작품의 제목도 길긴 엄청 긴 제목인데, 심지어 말조차 되지 않는… 사정이 이렇다보니, 글을 쓰거나 토론할 때 너~무 힘들어서 그냥 <큰 유리 (the Large Glass)>라고 엄청 짧은 별칭을 더 자주 씁니다.   

마르셀 뒤샹은 철물점에서 구입한 변기를 R. Mutt라는 서명만 한 채로 전시회에 출품한 것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이후, 미술관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 (?)들이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구요, 고전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요새 미술이란~’이라는 한탄을 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하죠.  

거두절미하고 이야기 하자면, 이 큰 유리의 주제는 ‘남녀간의 사랑은 힘든다’ 정도가 될런지요. 신부의 영역인 위쪽과 남자들의 영역은 아래쪽으로 나눠져 있고, 이 둘은 의사소통에 많은 어려움을 보이고 있죠. 그 근거로는 상단과 하단은 각기 다른 유리로 만들어져 이어져 있고 그 가운데는 단절이 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하는 말은 남자들이 알아듣기 힘들고, 남자들의 구애는 번번히 운에 따라 성공하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합니다. 20세기 초 버전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입니다.   

제목도 해괴하고 작품도 괴상하지만, 미술사 적으로 유명해서 관련된 서적이나 아티클이 너무 많은 작품입니다. 뒤샹도 그냥 맘 가는대로 막 만든건 아닌 것이라는 증거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형체들 – 코코아 그라인더, 세개의 실린더 (독신자들에 해당) – 의 드로잉이 수 점 남아있고, 작품 구성에 대한 아이디어 노트를 모아서 녹색 상자(그 이름하여, ‘Green Box’)에 고이 모셔두었습니다. 이들은 다시 유명 미술관 소장품들이 되었구요.  

노트들을 보면, 과학에도 관심이 많던 뒤샹은 원래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기계들이 움직이는 것들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만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유명세가 대단한 작품인 것은 이렇게 보그 지 표지에 아름다운 모델과 함께 실린 것만 봐도 아시겠죠?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또 하나의 명물은 세잔의 작품인데요. 후기 인상파의 일원이자, 모더니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폴 세잔의 <목욕하는 여인들> 시리즈 중 가장 큰 작품 중 하나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같은 주제로 많이 그린데다가 이 곳의 작품이 그 중 가장 유명하다보니 통칭 ‘필라델피아 수욕도’라고 부릅니다.  

[‘욕녀들’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작품은 한정된 주제로 지속적 작품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세잔의 주제들 중 하나죠.  세잔의 단골 주제로는 ‘목욕하는 여인들,’ ‘상트-빅트와르 산,’ ‘사과들이 있는 정물,’ ‘카드 놀이 하는 사람들’이 있죠]

[세잔의 대수욕도]ㅡ통칭, 필라델피아 수욕도

Paul Cézanne (1839-1906), The Large Bathers (1906), oil on canvas ; 210.7 x 251.0 cm, the Philadelphia Museum of Art,

영화 <아저씨>의 원빈은 ‘난 한 놈만 노린다’ 하시지만, 세잔은 주제에 하나 꽂히면 그것만! 그렸습니다. 워낙 많은 수욕도를 그린 탓에 세계 곳곳에 비슷비슷한 ‘수욕도’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뉴욕의 MoMA,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같은 필라델피아의 반즈 파운데이션,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가 있습니다.]    

신화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특정 에피소드가 없고, 일견 특별할 것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삼각형으로 비워진 공간 한 가운데 멀어지는 말 탄 이의 뒷모습이 너무 현대적이라, 누드로 묘사되는 여인들은 보통 여신이라는 회화적 언어와 상반됩니다. 도대체 저렇게 19세기 말 프랑스에 저렇게 많은 수의 여인들이 야외에서 목욕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누드의 여성이 저렇게 떼로 몰려 있는데, 관능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이 작품은 세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조형성에 대한 관심이 아주 잘 나타납니다.

최근 들어서는 유명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건물의 레노베이션에 착수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도 정말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