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공지드렸는데, 연기되어서 이제서야 드디어! 공지와 더불어 추석 인사도 드립니다. 다들 즐거운 추석 보내시고, 이 포스팅을 보시고 새롭게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나, 기존 수강생 분들 다 반갑게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현대백화점 문화센터는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4분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
봄 학기: 3~5월
여름 학기: 6~8월
가을 학기: 9~11월
겨울 학기: 12~2월
But,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가을학기가 정상적으로 9월에 개강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방침 때문에 모임 자체가 금지된 상황이었으니까요. 첫주 금지 된 지점에 아예 가을학기 개강을 한달 통째로 미뤄서 10월에 개강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두둥~ 드디어 가을학기 개강을 합니다~ 진짜로!
여느 때처럼 9월에 가을 학기를 개강한 경우, 추석 연휴로 수업이 휴강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엔 아예 추석을 잘 보내고 개강을 하게 되었으니 느낌이 새롭기도 합니다.
난 특히 거기서 출제되는 미술관련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거기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서 몇번 포스팅하였다. 이 프로그램을 모르는 분들에게 잠깐 소개를 하자면, '옥탑 방의 문제아들'은 고정으로 출연하는 다섯명의 패널과 매주 바뀌어 출연하는 초대손님이 총 10문제를 맞추어야 옥탑방에서 나갈 수 있다는 설정으로 진행하는 퀴즈 프로그램이다. 그 퀴즈라는 것이 거기서 문제가 나오기 전엔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문제일 뿐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해답 모른다고 세상사는데 아~무런 지장없는 그런 문제들이다. 그런데 일단 문제를 듣고 나면 또 그렇게 해답이 알고 싶고, 그래서 끝까지 보게 되는 그런 프로그램이다. 물론 그 해답을 알아맞추는 과정에 패널들의 기상천외한 발상에 크게 웃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언급했듯이 난 주로 미술에 관련된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져 왔었다. 그런데 지난주 나왔던 새틴 바우어새에 대한 문제는 분명 자연의 새에 대한 문제인데 예술에 대해서 또 나아가서는 창작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는 문제였다.
질문은 호주에 사는 새틴 바우어새 (Satin bowerbird)는 구애를 위해서 하는 특이한 행동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였고, 해답은 수컷이 암컷을 위해서 아름다운 둥지를 짓고 장식을 한다는 것이었다.
색상을 구분할 수 있는 새인듯 같은 색상의 폐품들을 모아서 집을 꾸미는데, 인테리어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디자인도 색상도 그렇게 다양할 수가 없다. 물론 파란색을 주로 모은 둥지의 경우, 그것이 인간들이 버린 플라스틱 폐품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 조금 씁쓸하기는 했다. 하지만, 얼마나 놀라운 본능인가? 이걸 미대에서 가르쳐서 저정도의 구성능력과 감각을 갖출때까지 교육을 마치려면 아마 새의 수명이 다할때까지 끝마칠 수 있을까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예들을 살피다가 아래의 둥지를 봤고, 왠지 데쟈뷰 같아서 곰곰히 생각했는데, 내가 전에 조사했던 작가의 작품과 너무 유사하다.
벨기에 출신의 작가 밥 베르슈어렌 (Bob Verschueren: b.1945)의 <혼돈 이후 (After the Chaos)>가 바로 그 작품이다. 새틴 바우어새가 그 누구에게 배운적 없듯이, 이 작가 또한 독학으로 예술가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또한 자연의 소재만을 이용해서 작업한다. 난 그의 작품을 접하고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조합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리 자연처럼 보여도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을 모를수 없겠다 했는데, 새틴바우어새의 둥지를 보니까 (더군다나 인간이 버린 폐품을 활용한) 예전의 그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미처 몰랐지만, 밥 베르슈어렌이 제작한 작품과 똑같은 둥지를 만드는 새가 지구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지 또 누가 알겠는가?
밥 베르슈어렌이 어떤 새의 둥지 혹은 비버의 둑을 모방했나는 잘모르겠지만, 진짜 새의 둥지를 모방해서 작품을 만든 작가가 없는 건 아니다. 독일 출신 작가 닐스-우도 (Nils-Udo: b. 1937)의 <클렘슨 진흙-둥지 (Clemson Clay – Nest)> (2005)가 그 예이다. 이 작품은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 소재의 클렘슨 대학의 정원에 설치한 대규모 구조물이다. 내부는 대나무로 틀을 잡고 바깥쪽은 소나무 기둥으로 만든 커다란 둥지 모양의 구조물은 2년간 유지되다가 나중엔 설치에 이용되었던 나무들을 갈아 구멍을 메꾸어서 흔적을 없앴다고한다.
닐스-우도의 경우, 때로는 고대의 스톤 헨지를 연상시키는 설치물, 때로는 자연현상과도 같은 설치물을 세계 곳곳에 설치해오고 있다. 그의 작품은 거대한 규모의 설치물이라 인간이 만든 것이 분명하지만,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면서 자연 환경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밥 베르슈어렌과 상통한다 할 수 있다.
밥 베르슈어렌 역시 주로 광활한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자연물을 이용한 조형작품을 제작해왔다. 초기에 그는 자연 염료를 들판에 펼쳐놓고 바람에 의해 완성되는 <바람 그림 (Wind Painting)>을 시도하기도 하였는데, 1978년부터 지속적으로 자연과 식물 생장에 관심을 둔 작업을 해왔다.
반드시 천연재료, 특히 1980년대 이후로는 식물 재료만 사용해온 밥 베르슈어렌의 작품은 조형적으로도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그 속에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주기에 대한 깊은 성찰, 자연과 인간의 상관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철학적인 작품이다. 대지위에 분말 염료를 뿌린 <바람 그림>이외에도 자연과 빛의 관계를 이용한 <빛 그림 (Light Painting)> 등, 그의 작품은 넓은 의미에서는 대지 미술 (Land Art)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환경에 관한 관심에서 부상한 '환경미술 (Environmental Art)' 혹은 비교적 새로운 명칭인 '에코 아트 (Eco Art)'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다. 한 작가의 다양한 작품의 스펙트럼과 그 작가가 다양한 장르와 사조에 걸쳐서 활동하는 것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라고 볼 때, 닐스 우도와 반 베르슈어렌 역시 명실공히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작가들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의 작품과 더불어 화요일 밤에 알게된 호주에 서식하는 새의 한 종류가 창조해내는 세계의 오묘한 평행선의 발견은 답을 알아맞히던 못맞히던 간에 내가 '옥탑 방의 문제아들'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백화점을 가도 쇼핑을 나온 손님들보다 매장 직원 수가 더 많은 진풍경이 연일 연출되는 기현상이 계속되는 요즈음... 프라다 매장이 너무 가고 싶다면?
해외여행 가능한 국가가 제한적이고 그나마 그때그때 다르고,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자가격리 2주를 입국과 출국시 감내해야하는 요새 쉬운 일은 아니지만, 텍사스의 마르파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프라다 매장은 어떠신지?
다만 그곳에서 프라다 상품을 구입할 수 없다는 게 함정. 사방에 아무 것도 없는 사막지역인 이곳에 자리한 프라다 매장이라 궁금증이 막 솟구치지 않는가?
넓디 넓은 텍사스의 한 구석,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프라다 매장.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듯, 프라다 매장을 눈 앞에 두고 들어가보지도, 프라다 신상을 살 수도 없다니?! 그 매장은 실제 매장이 아니라 설치 작품이기 때문이다. 프라다 마르파는 엘름그린 앤 드라그셋 (Elmgreen & Dragset)이라는 명칭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이 공동작업으로 2005년 제작하여 영구 설치 작품이다. 마르파는 텍사스의 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텍사스 오스틴과 댈러스에 몇년 살았던 나도 들어본 적 한번 없는 변두리 지역이다. 작가들은 이 작품을 "팝 건축 랜드 아트 프로젝트 (pop architectural land art project)"이라고 묘사했다. 실제로 미국의 건축가 로널드 라엘 (Ronald Rael)과 버지니아 산 프라텔로 (Virginia San Fratello)의 협조로 실현된 작품이다.
제작 경비는 $120,000 (약 1억 4천만원 정도)였고, 원래 의도는 일체의 보수 작업 없이 처음의 상태로 둠으로써 세월과 함께 주변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낡아가는대로 놔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누군가가 외벽에 낙서를 하고, 내부 물건들을 다 훔쳐가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본의 아니게 수정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곳은 관광명소로 자리잡게 되어 수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방문하게 이르렀고, 유명 연예인들도 방문하여 그들의 인스타그램에 인증샷을 남기기도 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작품답게 뭐라 부르기 애매한) 이 조각 (?) 작품은 원룸 형식의 프라다 매장처럼 제작하면서 외벽은 흰 스터코 석회벽으로 만들고 주변 삼면은 울타리를 둘러 마무리하고, 매장 안 쪽에는 (프라다 측에서 기증을 받은) 실제 프라다 제품들을 전시한 것이다. 물론 완벽한 건축물은 아니기 때문에 가게 앞쪽의 문은 실제로 드나들 수 있도록 작동하는 문은 아니다. '엘름그린 앤 드라그셋'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작가들은 덴마크 출신의 마이클 엘름그린 (Michael Elmgreen)과 노르웨이 출신의 잉가르 드라그셋 (Ingar Dragset)으로 둘은 1995년 이래 공동작업을 해오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작가들이다. 현재 베를린을 기점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은 주로 건축의 양식을 택한 조각/건축 작품을 제작하는데, 이렇게 제작된 가상의 공간을 통해 풍자가 담긴 유머와 위트를 담아 사회문화적 이슈를 언급하는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2013년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을 가상의 건축가 노만 스완의 저택으로 변모시키는 작업을 하기도 했고, 2015년에는 서울의 플라토 미술관 (예전의 로댕미술관)을 철학가 질 들뢰즈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아 공항으로 변모시키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과연 그들의 작품은 '조각'인가 '건축물'인가? 그들의 작품은 '설치 미술'인가 '대지 미술'인가? 아니면, '개념 미술'인가? 그들의 '가상 공간 만들기'라는 개념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장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리티'라는 개념과도 상통한다는 면에서 명실공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이들의 인스타그램의 화면을 장식한 프라다 마르파. 언제 찍었나 누가 어떻게 찍었냐에 따라 그때 그때 다른 그의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이들의 셀카 속에서 또 다른 형태의 예술 작품으로 탄생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다른 각도 다른 시각의 프라다 마르파의 모습을 몇 개 더 보너스로 싣는다.
아쉬운대로, 답답한 요새 사진으로라도 쇼핑도 하고 여행도 하는 기분 만끽하십사~ 올려봅니다~
아이스크림 트럭에 친숙한 미쿡 아이들이 봤다면 통곡을 할 장면이 연출되었다. 다행히 진짜 아이스크림 트럭은 아니고, PET (Polyethylene terephthalate)라고하는 플라스틱 수지로 만들어진 작품. 2006년 호주의 시드니 한 해변가에 등장한 독특한 작품이다.
회화 작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조각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굳이 규정 짓자면, 설치 작품이라고 불릴만한 작품이다. <<더운 날씨, 늦게 폭풍우의 가능성 있음 (Hot With a Chance of a Late Storm)>>이라는 제목이고, 개인 작가가 아닌, '접착제 협회'라고 번역해야하나? "글루 소사이어티 (The Glue Society)"라는 그룹의 작품이다. (일부 기사에는 그 그룹에 속하는 제임스 다이브(James Dive)라는 작가의 작품이라고도 나와있다). 1998년 설립된 이 그룹의 경우 전직 광고 제작자였던 조나단 니본 (Jonathan Kneebone)과 게리 프리드만 (Gary Freedman)이 설립한 크리에이티브 콜렉티브 (예술가 공동체)로 뉴욕과 시드니에 회사를 두고 있다. 이 그룹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많지는 않지만,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작업을 하고 있어서 미디어 작업부터 그래픽 디자인과 조각, 설치, TV 광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환경문제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작품 역시, 지구온난화를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듯 하다. 일례로 최근 글루 소사이어티의 작품으로 알려진 '오렌지나 캐논볼 (Orangina Canonball)' (2013)이라는 작품은 오렌지나라는 음료수의 광고로 사용된 미디어 작품이다.
이 글루 소사이어티 혹은 제임스 다이브라는 작가가 제작한 플라스틱 수지 작품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우선 모더니즘 시대라면 작가의 이름이 이렇게 불분명한 경우란 상상하기 드물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은 피카소 아니면 마티스 혹은 에콜 드 파리 작가들의 작품입니다'라고 설명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나 있는가? 위의 작품의 원료인 PET 역시 전통적으로 조각의 재료로 사용되는 제품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예술은 모더니즘 시대의 예술과는 확고한 중심이 없다는 것, 그리고 기본이 되는 규범이 부재하거나 그러한 틀을 부정하는 것으로 간략히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조각을 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는 모더니즘 시대 규정되어왔던 딱딱한 틀을 탈피하려는 노력의 와중에 '장르의 파괴'가 큰 특징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회화와 조각 사이의 구분이 애매해지고, 더이상 '캔버스에 유화'나 '대리석'과 같은 명확한 매체의 사용도 드물어졌다.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 옆 라벨에는 '혼합매체'라고 표기된 것이 더 많아진 연유다. 그리고, 조각이라고 규정짓기 애매한 '설치 미술'도 늘어났기 때문. 그리고 이 '글루 소사이어티'의 여타 작품들을 봐도 장르를 규정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 수 있다. 이런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열심히 부정하려는 틀과 장르, 규범. 그런데 모더니즘식으로 규정된 수업의 내용으로는 그 범주를 어렴풋이나마 만들어서 진행시켜야한다는 점. 그것이 힘들면서도 재미있는 점 중에 하나라고 수업을 준비하면서 생각해보았다.
아마 현대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르셀 뒤샹의 '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작가의 이름이나 제목인 '샘 (Fountain)'은 모르더라도 '남성 소변기를 엎어둔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이번 여름 학기 수업 시간에도 꽤 긴 시간을 할애해서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연기되어버린) 가을 학기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일련의 수업도 이 '샘'과 함께 열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나 자초지종은 다 알고 있으리라 믿지만, 혹 기억이 가물가물한 분들은 이전 포스팅을 참고하시길.
글의 흐름을 위해서 여기서 다시 간략하게 설명을 하자면,
마르셀 뒤샹은 1917년 약간의 참가비 ($6)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그런 전시에 철물점 변기를 하나 사서는 거기에 R. Mutt 라는 서명을 하고는 《샘》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하게 된다. (이 R. Mutt라는 이름은 도자기로 만든 변기를 제조하는 회사의 이름 Mott Iron Works와도 비슷하지만, 'mutt'라는 단어 자체는 '잡종개'라는 의미도 있고, '바보 멍청이'라는 의미도 있다. 말장난을 즐겨하던 그다운 작명이다.) 이렇게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상품' 그것도 그닥 우아하지 않은 '변기'를 미술전시회에 떡 하니 내려고 하면서, "예술작품이 예술작품이 되는 것은 작가의 '손'으로 '제작'된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선택' 즉 그의 '아이디어'에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결국 그 문턱 낮은 전시에서조차도 퇴짜를 맞았지만, 그의 그러한 황당무계한 행동과 그 이면의 개념은 이후 미술의 판도를 바꾸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모더니즘 미술에서 그토록 중시하던 '독창성 (originality)'과 '진품성 (authenticity)'이라는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우리가 <모나리자>를 철통같은 경비하에 유리액자에 넣은 상태로 전시를 해도, 바글바글 모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도 조금이라도 가까이 한번 보겠다고 애를 쓰는 이유는 그 작품이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일무이'한 걸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에서의 ‘아우라’의 아성이 위협받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사진과 영화 때문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1936년 발터 벤야민의 “기계적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라는 중요한 에세이에서 다뤄진 바 있다.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은 이후 작가들이 창작을 하는 태도에 획기적 변화를 야기했고, 문자그대로 '변기'를 제작하는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 일례로 이탈리아 작가 모리조 카텔란 (Maurizio Cattelan)이 <아메라카>라는 제목으로 구겐하임 화장실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전시한 황금변기가 그 예이다.(관련 포스팅은 여기를 참조!)
그렇다면 뒤샹은 왜 하고많은 대량생산된 공산품 가운데 남성용 소변기를 택한 것일까? 여기에 대한 연구서가 그 많고 많은 뒤샹에 대한 글들 중 어디엔가는 있을지 모르지만, 난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다. 다만, 개인적으로 제목이 '샘 (fountain)'이라는데서 힌트를 얻어 짐작해보곤 했다. 우리나라 개론서에는 주로 '샘'이라고 쓰고 있지만, 원제는 Fountain. 번역한대로 '샘'이라는 뜻도 있고 '분수'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식음용으로 설치해둔 수도를 지칭하기도 한다. (좀 더 친절하게 Drinking Water Fountain이라고도 한다.) 발 쪽의 페달을 밟거나 측면의 버튼을 누르면 물줄기가 퐁퐁퐁 솟아 올라 거기에 입을 갖다대면 물을 마실수 있는 장치이다.
우리나라는 공공 시설이나 건물에 가면 큰 정수통이 엎어져 있는 정수기나 정수기 기계가 따로 설치되어 있어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많은데, 미국의 경우, 수도랑 직접 연결된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명칭이 '샘 (fountain)'이다. 비교적 최근 건물의 경우, 스테인레스로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의 경우 흰색 도자기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 더 많다.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모르긴몰라도, 뒤샹이 뉴욕에서 살았을 당시 스테인레스 재질보다는 흰색 도자기로 만들어진 '샘'이 더 많았을 것 같은데, 어쩌면 뒤샹이 남성 소변기를 엎어놓은 것은 이 식음용 샘의 형태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닐까 한다. 파리 다다에 참가했고, 이후 뉴욕으로 건너와서는 뉴욕 다다를 이끈 뒤샹으로서는 놀랍지도 않은 삐딱함이다. 소변기를 가져다가 물마시는 장치와 같은 모양으로 배치하고 제목까지 '샘'이라고 붙인다. 이러한 상식의 전복은 다다의 기본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소변기를 뒤집어 '제시'한 것은 '배설'을 위해 만들어진 장치를 '섭취'를 위한 장치로의 변모를 꾀하는 전복도 함축된 것은 아닌가 하는게 내 생각이다. 물론 여기에는 성적인 함축도 있는 것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뒤샹이 성장기에 프로이트 선생이 말씀하시는 '항문기' 시절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이후 미술 분야에서 유독 '변기'를 활용하는 작가가 많은 것은 뒤샹의 유산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2020년 올해는 이래저래 일이 많습니다. 겨울부터 봄까지는 코로나로, 여름에는 수해로... 모쪼록 더이상 피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하루 빨리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는 바람입니다.
어렵사리 시작한 여름 학기가 어느새 마지막을 향하고 있고, 어느새 가을 학기를 등록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어려움이 없지는 않지만 모두 가급적 평정을 유지하며 일상을 활기차게 이어나가길 바라며, 가을 학기 강의 공지를 올립니다.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가을학기 미술사 강의 안내(클릭하시면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홈페이지로 연결되면서 제가 하는 강의가 일괄로 다 뜹니다. 사이트에는 강의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학기 제가 미술사 수업을 진행할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지점은 신촌점, 천호점, 압구정본점, 무역센터점, 미아점입니다.
모든 지점 정규 강의 1주 전 (이번에 신촌점은 정규개강 2주 전) 특강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요일과 시간은 정규 강의와 동일합니다. 특강 주제와 정규 강의 주제는 이번학기에는 전 점 동일합니다. (단 전 8주로 진행하는 지점과 전 10주로 진행하는 지점 간에 일정관계로 약간의 조정은 있습니다.) 각 지점의 강의 진행일자를 요일 순으로 정리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한동안 안하던 팝 퀴즈~ 한번 나갑니다. 이번 학기에 다룬 초현실주의에 관련된 문제이죠? 아래 작품에서 사용된 기법을 뭐라할까요? 초현실주의 미술에 자주 이용되었던 것이죠? 이 기법은 시각예술 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활용되었습니다. 로트레아몽 (Lautréamont: 1847-1870)이라는 시인의 "수술대 위에서의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운~"이라는 싯구가 잘 알려져 있죠.
요새는 가재 아래 쪽 검은색의 물건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를 질문해도 훌륭한 팝 퀴즈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답변 및 해설
아래의 작품은 유명한 초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í: 1904-1989) 의 '전화기'라는 작품입니다. 의식에 꽉꽉 눌려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해방시키자는 것이 초현실주의자들의 목표였구요. 이 작품 역시 그 선상에서 만들어진 전화로 기법상 데페이즈망 (dépaysement)이라고 합니다. 'dépaysement'이라는 단어에서 'pays'는 불어로 나라라는 뜻인데요, 부정 접두사 'dé'가 붙으면서 '추방, 유배'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낯선 환경, 낯설음'이라는 뜻입니다. 영영사전에는 'Change of scnery'라고 나오기도 하네요.
데페이즈망 기법은 요새 말로 '니가 왜 거기서 나와~'로 요약됩니다. 전혀 맥락이 맞지 않는 이질적 사물의 결합을 통해 낯설음을 유발하며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죠.
초현실주의는 영어로는 'Surrealism', '쉬르리얼리즘'이라고 하는데, 원래 불어 surréalisme에서 온 것입니다. 초현실주의의 종주국은 프랑스라는 것을 보여주죠. 이번 학기 수업을 들어셨다면 더 자세한 설명도 들으실 수 있었겠지만... 물론 수업을 한 번 듣는다고 다 기억하고 있다는 보장은 못하긴 하죠. ^^
기회가 되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올리기로 하고, 오늘은 짤막한 팝 퀴즈로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