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Hockney,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1972), Acrylic on canvas ; 2.1 m × 3.0 m 이 작품이 최근 경매에서 현존작가 작품으로서는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 아쉽게도 이번 전시회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 글에는 2편이 있어요. 1편만 읽고 오류를 지적하시지 마시고~ (뭐 하셔도 괜찮습니다만), 어쨌든 2편까지 꼭 읽어주세요~ 혼란을 야기했다면 죄송합니다.
인도계 영국작가인 아니쉬 카푸어 (Anish Kapoor)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아마도 시카고의 밀레니엄 파크에 설치된 <구름 문 (Cloud Gate)>라는 작품일 것이다. 나만 해도, 아니쉬 카푸어라는 외우기 힘든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이 작품을 통해서였다.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 파리에 가면 에펠탑 앞에서 사진 찍듯이, 너나없이 모두 이 거대한 강남콩 앞에서 포즈를 취하곤 했다. 물론 나도 이 앞에서 몇 차례.... 선촬영 후감상.
공공설치인 탓에 이 작품은 당시의 기후의 변화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에 따라 비춰지는 풍경의 모습도 매번 변한다. 일단 거대한 조각품은 전통적 조각에서 느낄 수 없는 규모와 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그 아름다움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개인차가 있으니 패스.
이 작품이 인상적인 작품은 알루미늄이라는 현대적 매체를 사용하고 형상도 도우넛 모양의 충분히 현대적 형상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전달하는 미학은 지극히 동양적이라는데 있을 것이다. 'bean'이라는 별칭처럼 도우넛 같기도 하고, 콩의 형상을 하고 있는 형태의 특징과 거대한 규모 탓에 주변의 풍경이 오롯이 다 비춰진다. 따라서 삼라만상을 다 담고 있는 우주와도 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그 속에 비춘 나의 작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우주 속에 갖힌 또다른 나와 마주하게 되고, 과연 진정한 나란 누구인가...하는 '장자의 나비'같은 생각도 하게 한다. 한편 거대한 <구름 문>과 대비되는 그 속에 비친 조그마한 내 모습에서 내 존재의 미미함을 느끼면서 철학적 사유를 하게 된다고나 할까?
Anish Kapoor, Cloud Gate (2006), Stainless steel sculpture, 10 × 13 × 20 m, Millennium Park, Chicago. 고광택제의 알루미늄으로 제조한 조각으로 아니쉬 카프어의 대표작. 북쪽의 마천루를 비추고 있는 모습을 동쪽에서 촬영한 것. 북쪽으로는 East Randolph Street을 따라 마천루들이 즐비하다.
Anish Kapoor, Cloud Gate (2006), Stainless steel sculpture, 10 × 13 × 20 m, Millennium Park, Chicago
그러던 작품이었으나, 최근 영하를 밑도는 강추위에 이렇게 쪼그라들었다는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댓글 중에는 '이제야 작품 같아졌네.'라는 글도 있더라마는, 나같은 경우는 원상회복이 될 것인지 심히 걱정이 되었다. 나의 추억도 담겨 있는 조각품이 또 다시 아름답게 삼라만상을 비추어줬음 좋겠다는 바람.
1980년대부터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명실공히 세계적 작가인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세계는 시기별로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시카고의 <구름 문>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 내가 한차례 아핫! 하고 아이디어에 감탄했던 작품은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되었던 <승천 (Ascension)>이라는 작품.
‘ascension’ by anish kapoor, basilica di san giorgio, venice image by oak taylor-smith
서양의 중세때부터 수도 없이 그려졌던 예수 승천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런 신박한 표현을 착안해내다니! 어떤 의미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가장 '리얼리즘'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쉽게도 나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은 고사하고, 직접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목도한 경험도 없지만, 영혼이라는 것은 본래 형상을 지닌 것이 아니니, 만약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니시 카푸어의 작품과 가장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원을 따지자면, 뒤샹의 '남성 소변기'에서 출발했고, 이후 팝아트와 네오팝 작가들이 끊임없이 시도해온 '발상의 전환'과 '사고의 전복'을 통해 유발되는 '충격'이 예술의 목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충격 요법'을 지향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중 하나라면, 그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참고로 아래는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그려졌던 예수 승천의 다양한 예들 중 일부. 아래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얼마나 참신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Rembrandt (1606–1669), The Ascension (1636), oil on canvas ; 93 x 68.7 cm, Alte Pinakothek
Master of the Rabbula Gospels, The Ascension of Christ (586) Parchment, 34 × 27 cm, Biblioteca Medicea-Laurenziana
Benvenuto Tisi da Garofalo, Ascension of Christ, 1510-20. Source: Wikimedia Commons
Gebhard Fugel, Ascension of Christ (1893/94), Catholic Parish Church of St. John Baptist, Obereschach, Ravensburg
쪼그라든 강남콩 모양의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을 보고 써본 내맘대로 작품 보기 세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어제는 음악에 대한 글을 하나 올렸다. 거기에 탄력을 받아서 음악과 미술에 대한 글을 하나 올려보려한다.
2018년 제18회 송은미술대상의 대상작으로 선정된 김준 작가의 작품은 무려 '사운드' 작품이다. 이름하여, '사운드스케이프'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의 작품이다. 사운드스케이프, 즉, Soundscape란 음악이라는 뜻의 단어 'sound'에 '-scape'라는 접미어를 붙인 단어이다. 여기서 '-scape'는 'landscape'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넓게 펼처진 경치, 풍광이라는 뜻이나, '그러한 풍광을 묘사한 그림'을 의미한다. 같은 어미를 사용한 단어로는 도시 풍경을 의미하는 cityscape, 달의 표면의 경치를 뜻하는 moonscape, 바다의 풍경이라는 뜻의 seascape 등이 있다. 따라서, '사운드스케이프 (soundscape)'란 이를테면, '소리로 표현한 풍경'이라고나 할까?
에코시스템: 도시의 신호, 자연의 신호, 2018 12채널 사운드, 스피커, 앰프, 나무, 사진, 이미지 북, 돌, 식물 450 x 300 x 220cm [사진=송은문화재단]
신문방송학과 미디어학을 공부한 이례적 이력을 갖고 있는김준 작가는 흔히 시각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미술에 청각을 들여온 다소 생소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서울, 런던, 시드니, 베를린 등 여러 곳에서 수집한 소리들과 함께 그 장소에서 채집한 다양한 사물들을 서랍 속에 넣어 전시한다. 감상자는 설합을 빼고 넣는 행위를 하면서 설합 속의 사물이 위치했던 장소의 소리를 듣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작품 <에코시스템: 도시의 신호, 자연의 신호>(2018)은 관람자의 참여를 이끈다는 점, 그리고 found object의 활용한다는 점에 있어서 미술사적으로는 '다다'의 영역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소리'가 추가됨으로써 인간의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을 모두 총체적으로 활용하여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바로크적 종합예술을 구현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바로크적 종합예술의 경험은 건축, 인테리어, 미술이 총체적인 조화를 이룬다는 개념이지만, 김준의 작품이 구현하는 바로크는 인간의 오감과 기억과 추억, 정서와 감정을 모두 통합하고자하는 '내적인 바로크'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참고로 '송은미술대상'은 역량있는 국내 작가들의 활동을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재)송은문화재단이 시행하는 공모전으로 2001년부터 시작되어 매년 수상자들을 배출해오고 있었다. 송은문화재단은 현재 송은아트스페이스도 운영하고 있고, 수상자들의 전시가 2월말까지 진행되고 있다.)
도시와 자연에서 수집한 소리와 함께 해당 지역에서 수집한 사물들을 함께 전시하므로써 관람자들로 하여금 청각과 촉각, 시각이 함께 작용하는 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관람자 각각의 기억과 추억을 소환하거나 상상력을 발현하도록 이끈다.
많은 관람객에게는 낯선 이러한 작품은 실은 예술계에서 최근 많이 주목받고 있다. 일례로 2010년 터너 상을 수상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 수잔 필립스의 작품이 있다. 2014년에는 작위까지 받은 그녀의 경우,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녹음하여 특정 장소에서 그 녹음된 음악을 트는 식의 작품을 한다. 그녀의 노래는 어떻게 들어도 가수의 음성과는 거리가 멀고, 녹음도 어떠한 보정이나 수정도 하지 않아 불안정한 음정은 물론 그녀의 호흡도 다 담겨있다.
2010년 터너 상을 수상한 수잔 필립스의 <저지대 (the Lowlands)>라는 작품을 한번 감상해보자.
Susan Philipsz, Lowlands (2008/2010), Clyde Walkway, Glasgow. photo: Eoghan McTigue
위의 사진은 수잔 필립스의 작품을 원래 설치했던 글래스고의 클라이드 워크웨이라는 곳, 아래는 수잔 필립스의 작품을 2010년 10월 영국의 테이트에 설치했을 때의 사진. 같은 작품을 테이트 갤러리에 설치했을 때와 원래 설치한 글래스고우의 한 다리 아래 설치했을 때 그 음악으로 인해서 감상자가 느끼는 감정이나 불러 일으켜지는 정서는 사뭇 다른 것이리라.
1950년대 중반의 Psychogeography와도 연관되는 그녀의 작품은 지리학적 위치가 인간의 정서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그녀의 작품과 김준의 작품이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Susan Philipsz, The Distant Sound (2014), Three channel radio transmission, Installation view Moss, Norway, 2014. Photograph: Eoghan McTigue
예술의 경험을 시각에 국한하지 않고 청각과 촉각 등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하여 감상자가 인간으로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일깨운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감각은 또한 얼마나 쉽게 주변 환경에 의해 영향받는가를 실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총체적 경험과 자각이 김준이나 수잔 필립스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게 되는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이러한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왜 요즘에 들어 예술계에서 부상하고 인정받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생각해볼만한 흥미로운 현상이다.
※ 참고로 2019년 제19회 송은미술대상의 공모요강에 대해서는 송은 아트스페이스의 웹사이트를 참고하기 바란다.
영국의 ‘올해의작가상’에해당하는것이터너프라이즈 (the Turner Prize)이다. 그런데, 18명의작가들로구성되어리버풀을근간으로활동하는에셈블(Assemble)이라는팀이 “그랜비포스트릿츠프로젝트(the Granby Four Streets Project)”로 2015년터너프라이즈수상했다.이들의작업은생활환경이열악한지역을찾아다니면서, 그곳에서공동으로낡은집을고쳐주거나, 새로집을지어주는작업을하는데, 그과정에사진이나영상등파생되는예술작품들을포함하여집을짓는행위자체까지모두그들의작업에포함된다. (도판 3)
믹스라이스의작가들이수년간에걸쳐공동체의주민들과깊은유대관계를맺고서로의신뢰관계를바탕으로작업을해왔듯, 대부분의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작가들도그러하다. 2014년맥아더그랜트를수상한미국작가릭로우 (Rick Lowe)도이점을분명히하고있다. 그는 LA Times의인터뷰에서이렇게밝힌다: “반드시아주오랜동안관계를발전시켜야합니다…. 어떠한공동체에뛰어들어와서, 곧바로그곳의모든복잡함을다파악할수있다고생각한다면그것은오만하고그공동체를무시하는행위가될것입니다.” 미국작가릭로우, 영국의어셈블그룹, 한국의믹스라이스모두공동작업을통해서사회문제를제기하므로써사람들에게그문제들을인식시키고, 나아가서는문제해결을모색한다는점에서공통적인목표를가지고있다고볼수있을것이다.그런점에서믹스라이스를위시한위에언급한이들의작품을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의범주에넣을수있을것이다.
물론 “Socially Engaged Art”라는타이틀에자체에대한비판이없는것은아니다. 모름지기작가는진공상태에사는것이아니고, 자신이속한사회와자신의환경의영향을받으며작품을제작한다.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 말그대로하자면, ‘사회와관련을맺는예술’이라는뜻인데, 그렇다면그러한타이틀을달지못할예술이어디있겠는가?혹은그런기치아래에서제작되진않는예술작품들은전부사회와유리된것이라고할것인가? 그러한아이러니를의식한탓인지, 믹스라이스의작업을지칭하고자하는여러가지시도가존재한다. 이는미술사조내에서의우리가알고있는유명한 ‘주의’나사조들이실은그특정명칭이하나로정착될때까지는시간이걸렸고, 그이전에는여러가지명칭으로불렸다는것을기억해볼때, 그다지드문일은아니다. 따라서, 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와같은사회적, 정치적문제에대한언급을하면서대중들의관심을환기시키는예술을일컫는용어는다수존재하고아직확립된하나의합의된명칭은존재하지않는다는말이다.
4. 공공미술(Public Art)과새로운공공미술 (New Genre Public Art)
먼저, 예술가이자저자, 교육자인수잰레이시(Suzanne Lacy)가 1991년에처음만들어낸용어로“뉴장르퍼블릭아트 (New Genre Public Art),” 즉“새로운장르의공공미술”이라는용어가있다.이용어는샌프란시스코미술관에서행해진공개퍼포먼스와수잰레이시의저서『지형의자리매김: 새로운장르의공공미술 (Mapping the Terrain: New Genre Public Art)』이라는저서를통해처음소개되었다. 보통 ‘새로운’ 이라는수식어가붙는다는것은그이전이존재한다는의미인데, 실제로‘공공미술’이란단어는해당예술작품의구매자가개인이든공공단체이든, 혹은그것이설치된장소가사유지이든지공유지이든지상관없이공공영역에있는예술을지칭하는용어로폭넓게사용되어왔다.
이 글은 작년에 쓴 글로 2016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들 중 "믹스 라이스"라는 팀에 관한 것이다. 기존에 알고 있는 회화나 조각, 심지어 설치미술이나 비디오 아트가 아닌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팀'의 작품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글이다.
하지만, 대략이라도 현대미술이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가끔씩 아주~현대적 미술에 대해서도 쓸까 생각중인데, 이 글이 그 첫 포문을 여는 글이 되겠다.
그《올해의작가상》전이라는전시회는원류를따져올라가보면, 국립현대미술관이주관하는대표적인전시로 1995년부터 2010년까지정기적으로개최되었던《올해의작가》전을모태로하고있다. 이를국립현대미술관이 SBS 문화재단의협력을통해, 2012년부터독창성과역량을갖춘작가들을후원하는수상제도로변경하여운영하고있다.어느덧올해로 5회째를맞은《올해의작가상》전은재능있는작가들의발굴을통해한국현대미술의발전을모색해가면서이제는대한민국의대표수상제도로제대로자리매김해가고있는듯하다.
과연 60여년전에한독일철학자의에세이가어떤식으로오늘날한국의한프로젝트팀의작품을비추어주는렌즈가될수있을까에대한의문은믹스라이스를다루는한방송국의다큐멘터리에서언급한 “혐오의시대예술의역할”이라는부제에서일말의실마리를발견하게된다. (2017년 1월 22일일요일밤 11시 5분방영, SBS 아트멘터리 ‘남을위한행진곡’)하이데거의글이씌여진시대도 “혐오의시대”를겪고전후이제막화해를모색하던시기였을것이고, 이는 2017년의오늘날의현실과도일맥상통하고있기때문이다.
하지만, 고정된장소를전제로하는주거는정체성을지켜주는수단이된다는점에서는유용하지만, 본질적으로배타적이고향수를불러일으키는개념이라고봤을때중대한문제를야기한다.그정체성은우리에게고정된정체성을부여하고, 과거에뿌리를내리기위해취해진것으로미래와의진정한관계를방해하는본질적으로후진적인방향성을내표하고있다고도볼수있기때문이다.
사건은 10월 5일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유명 작품 '풍선을 든 소녀 (Girl with Balloon)가 1백4만 파운드, 한화로 15억을 훌쩍 넘는 가격에 팔리고 난 직후에 일어났다. 직후에 뱅크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이 경매에 나와 팔리게 되면 작동하도록 이 작품에 분쇄기를 장치했음을 밝혔다고 한다. 물론 이는 당시 경매에서 작품이 조각조각 분쇄되는 장면을 보고 진정으로 놀라는 관중들의 모습이 담긴 인스타그램들과 함께 여러 뉴스에 게재되었다.
물론, 이 상황 자체가 과연 어떻게 가능했는지 여러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1. 분쇄기가 액자 속에 장치가 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과연 경매를 준비하는 측에서는 액자에 끼워져 있는 작품을 사전에 살펴보지 않았던 것일까? - 경매 이전 작품의 상태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 한번쯤은 작품을 액자에서 빼보지는 않았던 것일까? 게다가 작품과 액자 무게 외에 그 정도의 장치가 되어 있었다면 작품은 이상할 정도로 상당한 무게였을텐데 말이다.
2. 그 분쇄기는 왜 작품의 절반 정도밖에 분쇄가 진행되지 않은 것일까? 전부다 분쇄되었다면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되었을텐데, 지금 상태로는 미묘하다. 예상했던 대로, 구매자는 이 상태의 작품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은 이 상태로 또 거래가 될 것이라 짐작된다.
3. 그 분쇄기를 장치하고 나서 경매에서 판매될 때까지 수년은 걸렸을텐데, 과연 그 분쇄기는 어떻게 작동했던 것일까? - 뱅크시의 정보원 (?)이 그 작품의 소재를 계속 추적해오다가 소더비 경매장에 잠입하여 경매가 이뤄지는 순간 원격 조정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던 것일까? 건전지 없이 그런 작동을 할 수 있는 장치가 있나? 전기 장치는 잘 모르지만, 여하튼 미스테리다.
경매 관련자들을 깜쪽같이 속였다 치고, 지치지 않는 건전지 에너자이저를 써서 성공적으로 경매사가 경매봉을 두드리는 순간 분쇄기를 작동시켰다 치자. 방법이야 어떻게 되었든, 이번 사건은 미술사에 또 다른 역사를 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퍼포먼스라고도 볼 수 있는 이번의 사건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터무니 없기까지 한 천문학적인 금액들이 오가는 경매에서의 작품거래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를 보내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유명세에 따른 작품 가격이 높아지고 하는 미술계의 통례에 반대하기 위해 자신(들)의 얼굴이나 구체적인 이력을 밝히지 않아 왔던 것이다.
뱅크시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애당초에 그 (혹은 복수의 작가군단?)가 익명으로 활동한 것은 그(들)의 작품이 영국 브리스톨 거리에 그리피티를 그리는 것을 시작해서인데, 영국에서 거리에 낙서를 하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법적인 제재를 피하기 위해서라고도 알려져 있다. 물론 위에 밝힌대로 미술계의 통상적인 관례에 대한 반항이라는 설도 있다.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그가 1974년 영국 출생이라고 밝힌 곳도 있는데, 대부분의 미술관련 사이트에서는 여전히 그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다고 씌여있다.)
이후에 그리피티 이외에도 꾸준하게 기발한 활동을 해온 그의 작품은 많은 논란과 함께 경매에서의 작품의 가격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다분 정치적이고, 반전주의, 반자본주의적 메시지로 가득한 그의 작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그의 명성에 편승해 뱅크시를 자처하는 작품도 적지 않고, 그에 대해 '내 작품 아님'을 홈페이지에서도 밝히기도 한다. (한번 더 꼬아서 생각하자면, 이러한 의사표명 또한 그의 자작극이 아닌가 의심하게도 된다. 왜냐하면, 익명으로 작품활동하는 것 자체가 '작품에 따라다니는 작가의 이름'이라는 관례에 대한 반항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애당초 굳이 저렇게 주인 찾아주기 식의 성명서를 낼 필요가 있나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몸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체제적인 작품을 하는 그가 미술시장에서 몸값을 높이게 된것은 어찌된 영문인걸까?
일례로 2003년 제작되었던 Bomb Hugger라는 그래피티 작품의 경매 경과를 살펴보자.
Sotheby's London
Date:2010-02-11
Lot Number :284
Low Estimate :$39,200[+92%]*
High Estimate :$54,800[+37%]*
Hammer Price :$75,200
Sold For :$92,250*
2010년 2월 11일자 경매를 보면 이 작품의 최종 가격은 최저 예상 가격 4만불을 가볍게 넘어 최종가는 9만2천불, 한화로 1억이 넘는 금액에 거래가 되었다. 애당초 미술 작품에 터무니 없는 가격을 매기는 이러한 미술 시장에 대한 비판은 경매서 고가로 팔린 작품을 거리에서는 60불에 파는 행위를 하거나 직접적으로 아래와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등, 여러차례 그의 작품 속에서 언급되었다.
Banksy – I Can’t Believe You Morons Actually Buy This Shit, 2007 '너희같은 멍청이들이 정말로 이런 쓰레기를 사다니, 나는 당최 믿을 수가 없다.'는 제목으로 경매장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쯤 되면, 그의 작품 값을 올리는 것은 미술 시장이자 미술계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가깝게는 앤디 워홀의 팝아트, 좀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셀 뒤샹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다.
Banksy, Soup Cans (2006) EHC Fine Art 앤디 워홀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인건가? 현대미술가들은 스프캔이라는 상품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미술사 적으로 보면, 이는 마르셀 뒤샹이 1917년 한 전시회에 철물점에서 구입한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라는 서명만 하고, '샘 (The F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출품을 한 것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 되지 않을까?
애시당초 참가비만 내면 전시를 허용하는 허술한 전시회에 출품했음에도 당시에는 그가 출품한 변기는 출품이 거절 당했다. 이후, 작가는 작품을 '제작'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기만 해도 되는 것이라는 면죄부 (?)를 받게 되는 미술사적인 일대사건으로 기록되게 되는 것이다. 이후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 면죄부로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선택'해왔던가.
이번 뱅크시의 첩보전을 방불케할 '퍼포먼스'는 미술사적으로 또 다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경매에서 작품의 가격을 매겨 유통하는 과정에 대한 반항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 퍼포먼스 자체는 또 다른 형태의 예술 형태로 자리잡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절반쯤 분쇄기를 통과한 그 작품은 이번 경매가를 가볍게 뛰어넘으며 더 높은 가격에 판매될지도.
한편, 뱅크시가 자신(들)의 인스타그램에 사전에 분쇄기를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해당 경매에서 작품이 순식간에 분쇄되어 액자밑으로 흘러내리는 과정을 촬영한 것을 올리면서 "The urge to destroy is also a creative urge" - Picasso라는 구문을 함께 실었다. 이는 항상 자신의 이전의 작품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창조를 추구했던 피카소가 '창조적인 진공청소기'라 불렸던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천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 미술계의 황금만능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을 했지만, 그 미술계에서 최고가를 갱신하며 그러한 시스템을 만끽한 피카소에 대해서는 별 저항이 없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