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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5. 24. 16:58 미술 이야기

공지사항)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관련 특강안내

데이비드 호크니 전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전시 관련해서 데이비드 호크니에 관한 특강을 갖습니다. 

장소: 압구정본점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백화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자세한 위치는 네이버 검색을 해보심이...  압구정 장로교회와 붙어있고, 현대아파트 79동 앞쪽에 위치하고 있어요.)

일시: 2019년 5월 30일 목요일 오후 2시 40분 (약 한시간 20분 진행)

회비: 무료는 아니구요. 회비가 있는데 정확한 가격은 제가 책정한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어요.  이후라도 확인되면 수정해서 올리겠지만, 대략 만원에서 만오천원 사이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참고로, 제가 이 블로그에 올린 데이비드 호크니에 관한 글 참고해보시고, 전시보기 전이시라면 예습삼아, 보신 후라면 복습삼아 강의 들어보세요~ 

찾아보니 데이비드 호크니에 대한 글을 몇 개 올렸길래 링크를 함께 붙여둬봅니다.

경매소식 - David Hockney -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데이비드 호크니가 한국에!!!

 

David Hockney,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 (1972), Acrylic on canvas ; 2.1 m × 3.0 m  이 작품이 최근 경매에서 현존작가 작품으로서는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  아쉽게도 이번 전시회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31. 13:52 미술 이야기

이 글에는 2편이 있어요.    1편만 읽고 오류를 지적하시지 마시고~ (뭐 하셔도 괜찮습니다만), 어쨌든 2편까지 꼭 읽어주세요~ 혼란을 야기했다면 죄송합니다. 

인도계 영국작가인 아니쉬 카푸어 (Anish Kapoor)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아마도 시카고의 밀레니엄 파크에 설치된 <구름 문 (Cloud Gate)>라는 작품일 것이다. 나만 해도, 아니쉬 카푸어라는 외우기 힘든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이 작품을 통해서였다.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 파리에 가면 에펠탑 앞에서 사진 찍듯이, 너나없이 모두 이 거대한 강남콩 앞에서 포즈를 취하곤 했다.  물론 나도 이 앞에서 몇 차례....  선촬영 후감상.  

공공설치인 탓에 이 작품은 당시의 기후의 변화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에 따라 비춰지는 풍경의 모습도 매번 변한다.  일단 거대한 조각품은 전통적 조각에서 느낄 수 없는 규모와 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그 아름다움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개인차가 있으니 패스. 

이 작품이 인상적인 작품은 알루미늄이라는 현대적 매체를 사용하고 형상도 도우넛 모양의 충분히 현대적 형상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전달하는 미학은 지극히 동양적이라는데 있을 것이다.  'bean'이라는 별칭처럼 도우넛 같기도 하고, 콩의 형상을 하고 있는 형태의 특징과 거대한 규모 탓에 주변의 풍경이 오롯이 다 비춰진다. 따라서 삼라만상을 다 담고 있는 우주와도 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그 속에 비춘 나의 작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우주 속에 갖힌 또다른 나와 마주하게 되고, 과연 진정한 나란 누구인가...하는 '장자의 나비'같은 생각도 하게 한다. 한편 거대한 <구름 문>과 대비되는 그 속에 비친 조그마한 내 모습에서 내 존재의 미미함을 느끼면서 철학적 사유를 하게 된다고나 할까?  

Anish Kapoor, Cloud Gate (2006), Stainless steel sculpture, 10 × 13 × 20 m,  Millennium Park, Chicago.  고광택제의 알루미늄으로 제조한 조각으로 아니쉬 카프어의 대표작. 북쪽의 마천루를 비추고 있는 모습을 동쪽에서 촬영한 것. 북쪽으로는  East Randolph Street을 따라 마천루들이 즐비하다.   

 

Anish Kapoor, Cloud Gate (2006), Stainless steel sculpture, 10 × 13 × 20 m,  Millennium Park, Chicago 

 

그러던 작품이었으나, 최근 영하를 밑도는 강추위에 이렇게 쪼그라들었다는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댓글 중에는 '이제야 작품 같아졌네.'라는 글도 있더라마는, 나같은 경우는 원상회복이 될 것인지 심히 걱정이 되었다.  나의 추억도 담겨 있는 조각품이 또 다시 아름답게 삼라만상을 비추어줬음 좋겠다는 바람.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은 국내에도 있다. 리움 미술관 야외 정원에 두 점과 실내에 한 점~

하늘 거울 (Sky Mirror)는 여러버전이 있고, 리움의 작품과 대동소이하다. 

예전에 안토니 곰리에 대한 글을 쓰면서 리움 미술관은 종합선물세트와도 같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건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에도 해당이 되네요.  안토니 곰리에 대한 그 글이 궁금하신분 여기를 참고하세요.  

 

아니쉬 카푸어의 공공조각 다른 작품으로는 <하늘 거울 (Sky Mirror)> 있다.  시카고의 <구름 (Cloud Gate)> 마찬가지로 고광택제 알루미늄으로 제작되어 하늘을 비추는 오목한 접시모양의 설치물로 여러가지 버전이 세계 곳곳에 있다.  

최초의 버전은 2001 영국 노팅엄의 웰링턴 서커스 (Wellington Circus, Nottingham, England) 설치된 것이다. 작품은 무게가 10 톤에 육박하고 6 미터 너비의 오목한 접시로 하늘을 향해 고정되어 있어, 거울과도 같은 매끈한 표면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을 반영한다.   버전은 2006 9 19일부터 10 27일까지 한시적으로 뉴욕의 록펠러 센터에 설치되었던 버전이 있는데, 무려 11m 지름으로 3 높이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볼록한 면은 5번가를 오목면은 록펠러 센터의 안뜰 쪽을 향해서 독특한 풍광을 제공했었다

이밖에 영구 설치로는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허미타지 미술관 (Hermitage Museum) 네덜란드 틸버그 (Tilburg) 드퐁 현대미술관 (De Pont Museum of Contemporary Art), 달라스의 AT&T Statium 있다. 그리고, 한국의 리움 미술관.  

아니쉬 카푸어, <하늘 거울 (Sky Mirror)> 2006 9 19일부터 10 27일까지 한시적으로 뉴욕의 록펠러 센터에 설치되었던 버전이 있는데무려 11m 지름으로 3 높이에 해당하는 규모

 

1980년대부터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명실공히 세계적 작가인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세계는 시기별로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시카고의 <구름 문>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 내가 한차례 아핫! 하고 아이디어에 감탄했던 작품은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되었던 <승천 (Ascension)>이라는 작품.  

‘ascension’ by anish kapoor, basilica di san giorgio, venice image by oak taylor-smith

 

 

서양의 중세때부터 수도 없이 그려졌던 예수 승천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런 신박한 표현을 착안해내다니!   어떤 의미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가장 '리얼리즘'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쉽게도 나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은 고사하고, 직접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목도한 경험도 없지만, 영혼이라는 것은 본래 형상을 지닌 것이 아니니, 만약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니시 카푸어의 작품과 가장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원을 따지자면, 뒤샹의 '남성 소변기'에서 출발했고, 이후 팝아트와 네오팝 작가들이 끊임없이 시도해온 '발상의 전환'과 '사고의 전복'을 통해 유발되는 '충격'이 예술의 목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충격 요법'을 지향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중 하나라면, 그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참고로 아래는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그려졌던 예수 승천의 다양한 예들 중 일부.  아래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얼마나 참신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Rembrandt (1606–1669), The Ascension (1636), oil on canvas ; 93 x 68.7 cm, Alte Pinakothek 

 

Master of the Rabbula Gospels, The Ascension of Christ (586) Parchment, 34 × 27 cm, Biblioteca Medicea-Laurenziana

Benvenuto Tisi da Garofalo, Ascension of Christ, 1510-20. Source: Wikimedia Commons

Gebhard Fugel, Ascension of Christ (1893/94), Catholic Parish Church of St. John Baptist, Obereschach, Ravensburg

 

쪼그라든 강남콩 모양의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을 보고 써본 내맘대로 작품 보기 세번째 시간이었습니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24. 00:30 미술 이야기

어제는 음악에 대한 글을 하나 올렸다. 거기에 탄력을 받아서 음악과 미술에 대한 글을 하나 올려보려한다. 

2018년 제18회 송은미술대상의 대상작으로 선정된 김준 작가의 작품은 무려 '사운드' 작품이다.  이름하여, '사운드스케이프'라는 다소 생소한 분야의 작품이다.  사운드스케이프, 즉, Soundscape란 음악이라는 뜻의 단어 'sound'에 '-scape'라는 접미어를 붙인 단어이다. 여기서 '-scape'는 'landscape'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넓게 펼처진 경치, 풍광이라는 뜻이나, '그러한 풍광을 묘사한 그림'을 의미한다. 같은 어미를 사용한 단어로는 도시 풍경을 의미하는 cityscape, 달의 표면의 경치를 뜻하는 moonscape, 바다의 풍경이라는 뜻의 seascape 등이 있다.  따라서, '사운드스케이프 (soundscape)'란 이를테면, '소리로 표현한 풍경'이라고나 할까? 

에코시스템: 도시의 신호, 자연의 신호, 2018 12채널 사운드, 스피커, 앰프, 나무, 사진, 이미지 북, 돌, 식물 450 x 300 x 220cm [사진=송은문화재단]

신문방송학과 미디어학을 공부한 이례적 이력을 갖고 있는 김준 작가는 흔히 시각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미술에 청각을 들여온 다소 생소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서울, 런던, 시드니, 베를린 등 여러 곳에서 수집한 소리들과 함께 그 장소에서 채집한 다양한 사물들을 서랍 속에 넣어 전시한다. 감상자는 설합을 빼고 넣는 행위를 하면서 설합 속의 사물이 위치했던 장소의 소리를 듣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작품 <에코시스템: 도시의 신호, 자연의 신호>(2018)은 관람자의 참여를 이끈다는 점, 그리고 found object의 활용한다는 점에 있어서 미술사적으로는 '다다'의 영역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소리'가 추가됨으로써 인간의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을 모두 총체적으로 활용하여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바로크적 종합예술을 구현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바로크적 종합예술의 경험은 건축, 인테리어, 미술이 총체적인 조화를 이룬다는 개념이지만, 김준의 작품이 구현하는 바로크는 인간의 오감과 기억과 추억, 정서와 감정을 모두 통합하고자하는 '내적인 바로크'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제18회 송은미술대상전 김준, 박경률, 이의성, 전명은 2018/12/21-2019/02/28

(참고로 '송은미술대상'은 역량있는 국내 작가들의 활동을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재)송은문화재단이 시행하는 공모전으로 2001년부터 시작되어 매년 수상자들을 배출해오고 있었다.  송은문화재단은 현재 송은아트스페이스도 운영하고 있고, 수상자들의 전시가 2월말까지 진행되고 있다.)

도시와 자연에서 수집한 소리와 함께 해당 지역에서 수집한 사물들을 함께 전시하므로써 관람자들로 하여금 청각과 촉각, 시각이 함께 작용하는 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관람자 각각의 기억과 추억을 소환하거나 상상력을 발현하도록 이끈다. 

많은 관람객에게는 낯선 이러한 작품은 실은 예술계에서 최근 많이 주목받고 있다.  일례로 2010년 터너 상을 수상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 수잔 필립스의 작품이 있다.  2014년에는 작위까지 받은 그녀의 경우,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녹음하여 특정 장소에서 그 녹음된 음악을 트는 식의 작품을 한다. 그녀의 노래는 어떻게 들어도 가수의 음성과는 거리가 멀고, 녹음도 어떠한 보정이나 수정도 하지 않아 불안정한 음정은 물론 그녀의 호흡도 다 담겨있다.  

2010년 터너 상을 수상한 수잔 필립스의 <저지대 (the Lowlands)>라는 작품을 한번 감상해보자. 


Susan Philipsz, Lowlands (2008/2010), Clyde Walkway, Glasgow. photo: Eoghan McTigue

위의 사진은 수잔 필립스의 작품을 원래 설치했던 글래스고의 클라이드 워크웨이라는 곳, 아래는 수잔 필립스의 작품을 2010년 10월 영국의 테이트에 설치했을 때의 사진.  같은 작품을 테이트 갤러리에 설치했을 때와 원래 설치한 글래스고우의 한 다리 아래 설치했을 때 그 음악으로 인해서 감상자가 느끼는 감정이나 불러 일으켜지는 정서는 사뭇 다른 것이리라.  

1950년대 중반의 Psychogeography와도 연관되는 그녀의 작품은 지리학적 위치가 인간의 정서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그녀의 작품과 김준의 작품이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Susan Philipsz, The Distant Sound (2014), Three channel radio transmission, Installation view Moss, Norway, 2014. Photograph: Eoghan McTigue


예술의 경험을 시각에 국한하지 않고 청각과 촉각 등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하여 감상자가 인간으로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일깨운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감각은 또한 얼마나 쉽게 주변 환경에 의해 영향받는가를 실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총체적 경험과 자각이 김준이나 수잔 필립스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게 되는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이러한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왜 요즘에 들어 예술계에서 부상하고 인정받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생각해볼만한 흥미로운 현상이다. 



※ 참고로 2019년 제19회 송은미술대상의 공모요강에 대해서는 송은 아트스페이스의 웹사이트를 참고하기 바란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10. 01:30 미술 이야기

어제에 이어 '믹스라이스'에 대한 글 Part II


3. 현대미술의 다양한 모습 – 셜리 인게이지드 아트사회 참여 미술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믹스라이스의 작품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고스스로가 현대미술을 어느정도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친숙한 형태의 예술은 아니다이러한 작품을 하는 믹스라이스가 2016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고이는 세계적인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국의 ‘올해의 작가상 해당하는 것이 터너 프라이즈 (the Turner Prize)이다그런데, 18명의 작가들로 구성되어 리버풀을 근간으로 활동하는 에셈블(Assemble)이라는 팀이 “그랜비  스트릿츠 프로젝트(the Granby Four Streets Project)” 2015 터너 프라이즈 수상했다.  이들의 작업은 생활 환경이 열악한 지역을 찾아다니면서그곳에서 공동으로 낡은 집을 고쳐주거나새로 집을 지어주는 작업을 하는데 과정에 사진이나 영상  파생되는 예술작품들을 포함하여 집을 짓는 행위 자체까지 모두 그들의 작업에 포함된다. (도판 3)

도판 3) Assemble

이러한 류의 새로운 경향의 예술을 지칭하는 많은 이름들이 존재한다가장 대표적인 명칭으로는 소셜리 인게이지드 프랙티스 (Socially Engaged Practice), 번역하자면, ‘사회 참여 운동’ 정도가  것이다약칭하여 소셜 프랙티스 혹은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 (Socially Engaged Art)라고도 칭하는데공동체와 관련된 문제제기를 의도로 하는 활동을 포괄하는 일련의 예술을 통칭한다. 2004년부터 실행된 터너 프라이즈를 주간하는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홈페이지에 개재된 용어 해설에 따르면대부분 협업으로 이뤄지며 공동체와의 공동작업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이는 대부분 봉사활동 (outreach program)이나 교육 프로그램의 결과인 경우가 많고사회 운동과 관련이 깊은 이러한 예술 형태의 가장 특징적 요소는 사회참여적 요소이고 따라서 정치적 이슈를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믹스라이스의 작가들이 수년간에 걸쳐 공동체의 주민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의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작업을 해왔듯대부분의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 작가들도 그러하다. 2014 맥아더 그랜트를 수상한 미국작가  로우 (Rick Lowe)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그는 LA Times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다  반드시 아주 오랜동안 관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공동체에 뛰어 들어와서곧바로  곳의 모든 복잡함을  파악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만하고  공동체를 무시하는 행위가  것입니다.”  미국 작가  로우영국의 어셈블 그룹한국의 믹스라이스 모두 공동 작업을 통해서 사회문제를 제기하므로써 사람들에게  문제들을 인식시키고나아가서는 문제해결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믹스라이스를 위시한 위에 언급한 이들의 작품을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의 범주에 넣을  있을 것이다.

물론 “Socially Engaged Art”라는 타이틀에 자체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모름지기 작가는 진공상태에 사는 것이 아니고자신이 속한 사회와 자신의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작품을 제작한다.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 그대로 하자면, ‘사회와 관련을 맺는 예술이라는 뜻인데그렇다면 그러한 타이틀을 달지 못할 예술이 어디 있겠는가?  혹은 그런 기치 아래에서 제작되진 않는 예술작품들은 전부 사회와 유리된 것이라고  것인가그러한 아이러니를 의식한 탓인지믹스라이스의 작업을 지칭하고자 하는 여러가지 시도가 존재한다이는 미술 사조내에서의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주의 사조들이 실은  특정 명칭이 하나로 정착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이전에는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렸다는 것을 기억해볼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다따라서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와 같은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예술을 일컫는 용어는 다수 존재하고 아직 확립된 하나의 합의된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4. 공공 미술(Public Art) 새로운 공공미술 (New Genre Public Art)

먼저예술가이자 저자교육자인 수잰 레이시(Suzanne Lacy) 1991년에 처음 만들어낸 용어로  장르 퍼블릭 아트 (New Genre Public Art),”  새로운 장르의 공공 미술이라는 용어가 있다.   용어는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서 행해진 공개 퍼포먼스와 수잰 레이시의 저서 지형의 자리매김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 (Mapping the Terrain: New Genre Public Art)이라는 저서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보통 ‘새로운’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은  이전이 존재한다는 의미인데실제로 공공 미술이란 단어는 해당 예술작품의 구매자가 개인이든 공공단체이든혹은 그것이 설치된 장소가 사유지이든지 공유지이든지 상관없이 공공 영역에 있는 예술을 지칭하는 용어로 폭넓게 사용되어왔다.

공공 미술 (Public Art)라는 용어는 유래를 따져 거슬러 올라가보면먼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당시  정부가 구민정책이자 선전정책인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도시의 미화작업에 예술가들을 대거 고용하여 벽화등을 제작하도록  것에서 찾아볼  있다이러한 미국의 공공 미술은 1970년대에 이르러 전기를 맞게 된다먼저 1960년대 활발했던 인권운동의 결과공공 장소에 대한 대중의 권리의식의 대두하게 되는데서 원인을 찾을  있다 시기는 도시 재개발 프로그램이 시작되고예술계에서는 대지미술미니멀리즘  작품들이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로잘린드 크라우스를 위시한 미술사가와 비평가들의 연구등에 힘입어 예술계와 문화계 전반에 걸쳐 조각의 개념에 대한 재검토를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1977 공공 아트 기금 (Public Art Fund) 조성되고, 1979 건축 속의 예술 프로그램(Art-in-Architecture Program) 실행되면서미국 전역에 걸쳐 연방 기관의 건축물에는 반드시 미술작품을 함께 조성해야만 하도록 하게 된다.  (비슷한 예로우리나라의 대형 건물앞의 조각품들대표적인 예로 조나단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남자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것이다공공 미술은 이러한 대형 건물 앞의 조형물과 동일시 되면서다시 미술계에서는 이처럼 단순히 장식에 머무는 공공 미술에 대한 비판적 반성도 일어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기념비특정인물을 기리기 위한 조각상그리고 특정 장소에 설치하기 위해 장소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예술 사이트 스페시픽 아트 (Site-Specific Art)라는 새로운 경향의 예술이 대두함에 따라 이에 대한 미학적 논의도 활발해졌다거기에 1989 리처드 세라 (Richard Serra: 1938-) 기울어진  (Tilted Arc)” 철거를 둘러싸고 법정소송이 일어나게 된다이에 따라공공 미술의 정의와 의의나아가서 작가의 권한과 대중의 권리에 대한 미학적정치적인 논의가 뜨겁게 펼쳐지게 되고사회전반에 걸친  논란을 겪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기울어진  대표적인 후기 미니멀 아트 작가인 리처드 세라가 건축 속의 예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의뢰를 받아 뉴욕 맨하탄의  연방 정부의 건물 (the Jacob K. Javits Federal Building)  광장 (Foley Federal Plaza) 설치하게  작품이다. (도판 4) 

도판 4) Richard Serra, Tilted Arc

논란의 발단은 건물의 광장을 가로지르며 놓여진 강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세라의 조각이  건물과 주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생활의 방해가 된다는 여론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일어난 것이다.  이에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Site-Specific Art’  장소에 놓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따라서다른 장소에 옮겨진다면  작품의 의의가 상실되어버리므로 작품의 이전을 반대한데서 시작한다많은 예술계의 인사들이 작가의 편을 들어 언론과 학술 발표를 통해 창작의 자유를 옹호하고작가의 의도를 존중할 것을 피력했다하지만이에 반해그곳에서 매일매일을 생활하는 이들의 실질적인 불편함그리고 녹슬어 흉물로 변해버린 거대한 강철 덩어리를 봐야하는 시각적인 괴로움을 호소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아반대의견도 거셌고 청문회도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공공 미술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 대중의 공익을 위하지 못하는 세라의 작품은 존재가치가 있냐는 것이었다.

결국 여론에 밀려 그의 조각은 철거되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 되었지만이후로도 공공 미술의 역할과 의의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는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논의 되고 있는 상황이다. 1991 수잰 레이시가 “공공미술이란 공원이나 광장에 놓여진 조각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장르의 공공 미술 (New Genre Public Art)”이라는 용어를 창조해  이는 어쩌면 리처드 세라의 조각을 염두에 두고  발언일지도 모른다 과연 예술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고 예술의 자율성을 위해서  광장에 계속 두는 것이 옳았던 것인가아니면예술 작품도 작가도 사회의 일부로서 존재할 뿐이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불편과 혐오감을 주는 것이라면 철거된 것이 정답이었던 것인가?  철거 자체가 여론을 의식한 정치적 행동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공 미술에 대한 리처드 세라의 조각품 사건은 해결점을 제시했다기 보다는 쟁점을  많이 남겼다고   있다.

수잰 레이시가 정의한 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 해당한 일련의 작품이 발표된 대표적인 전시회로는 1993  《활동중인 문화컬쳐  액션 (Culture in Action)》인데시카고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팀의 그룹들이 모여 8개의 프로젝트를 이행하였다복잡다단한 이들의 활동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롭고  그룹의 관심사도 다양하다 예를 들면메리 제인 제이콥 (Mary Jane Jacob) 스컬프쳐 시카고(Sculpture Chicago) 공공미술에 대한 재해석 노력도시 빈민지역의 건설에 대한 관심그리고 마크 디용 (Mark Dion) 시카고 도시 생태 활동 그룹 (Chicago Urban Ecology Action Group) 보여주는 시카고에 국한되지 않는 광범위한 지역의 자연과 생태학에 대한 관심 등이 그것이다이들 그룹의 작업은 믹스라이스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다양하고 다채롭고예술 작품으로서의 형식이나 주제면에서도 상응하는 점이 많다 일일이 비교 설명하기는 지면이 부족하기에여기서는 참여한 그룹중 하나의 명칭이 ‘Sculpture Chicago’이라는 점만 지적하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여기서 ‘Sculpture’ 조각이고 ‘Chicago’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도시 시카고이다하지만  단어의 조합의 의미는 모호하다여기서의 ‘sculpture’ 명사로 읽기보다는 시카고를 조각하라 동사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그들 전시의 이름이 ‘Culture in Action,’ ‘행동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믹스라이스가 섞여 있는  아닌 쌀을 섞어라라는 뜻에 가까우리라는 추측이  타당하게 여겨지는 대목이다.      

 

5. 나가며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혹은 소셜 프랙티스커뮤니티 아트사회적 전환 (Social Turn), 액티비스트 아트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공통적인 특징은 대체로 1) 프로젝트 팀을 이뤄서 작업한다는 . 2) 사회적정치적 이슈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는  3) 쉽게 정의내리기 힘든 다양한 형식과 주제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등을   있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비판은 이미 다다의 포토 몽타쥬에서도 목격했기에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있고성격은 때로 다를 수가 있다 하더라도 공공 미술의 역사도   편이라 새롭다고는   없다만화나 낙서 (graffiti) 팝아트 작가들이 이미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놓았기에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리고  소련 등의 공산주의 국가의 정치적 선전용으로 제작된 포스터 등의 예에서 보듯 예술이 정치적 이념을 띄고 있는 예도 많이 보아왔다그리고 무엇보다 순수 예술이란 엄밀한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있다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관람자의 입장에서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는 일견 낯설고 새롭다고 여겨지다가도주제나 형식적 측면에서만 보면 친숙하게 여겨지는 부분들이 많다 

이들의 작품이 낯설어지는 부분은 오히려 예술가와 관람객과의 역할과 관계 문제그리고 예술 시장에서의 상품으로서의 예술 작품의 가치 문제에 있다믹스라이스는 영화에서의 감독과 같은 존재인가 (분명  관점은 부정할 것이라 짐작한다아니면 그냥 (해당 지역의 주민들과공동 제작자라고 불릴 것인가아니면페스티벌에 동참하는 참가자로서의 관람객인가?  그들의 작품은 어디서부터이며 어디까지인가페스티벌에서의 노래대화도 작품에 포함되는가아니면그러한 일련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긴 메모사진영상  일정한 포멧을 지닌것으로 한정해야  것인가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구입한다거나 소장한다 의미가 통할 것인가아니면후원한다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인가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9. 01:30 미술 이야기

이 글은 작년에 쓴 글로 2016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들 중 "믹스 라이스"라는 팀에 관한 것이다.  기존에 알고 있는 회화나 조각, 심지어 설치미술이나 비디오 아트가 아닌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팀'의 작품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글이다. 

하지만, 대략이라도 현대미술이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가끔씩 아주~현대적 미술에 대해서도 쓸까 생각중인데, 이 글이 그 첫 포문을 여는 글이 되겠다. 

이하는 작년의 글을 그대로 옮기는 식으로~~

 

믹스라이스올해의 작가상 2016 수상 작가의 장소’, ‘주거 대한 고찰

 

작년 8월부터 올해 2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올해의 작가상》전에는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영상 다채로운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 4김을, 백승우, 함경아, 믹스라이스 작품이 전시되었다.  

《올해의 작가상 2016》전( 2016.08.31 - 2017.02.19) 

전시 소개에 관해서는 여기를 참조

 

《올해의 작가상》전이라는 전시회는 원류를 따져 올라가보면,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대표적인 전시로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던 《올해의 작가》전을 모태로 하고 있다. 이를 국립현대미술관이 SBS 문화재단의 협력을 통해, 2012년부터 독창성과 역량을 갖춘 작가들을 후원하는 수상제도로 변경하여 운영하고 있다.  어느덧 올해로 5회째를 맞은 《올해의 작가상》전은 재능있는 작가들의 발굴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발전을 모색해가면서 이제는 대한민국의 대표 수상제도로 제대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위치의 《올해의 작가상》에서는 1 심사를 통과한, 위에 언급한 4팀의 작가들 , 2016 10 2 심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2016년의 수상자로 믹스라이스 선정하였다.  믹스 라이스 조지은과 양철모라는 두명의 작가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으로 지난 15 동안 한국사회의 이주노동자와 재개발에 대한 이슈를 지속적으로 다루어 왔다. 

 

 

 

1. 그룹 명칭에 대한 고찰; 믹스라이스 (Mixrice), mixed rice 혹은 Mix Rice!

 

먼저믹스라이스라는 그룹명을 먼저 살펴보자.  잡지 <미술세계> 2016 11월호에 실린 작가 양철모의 인터뷰에 따르면, ‘믹스라이스비빔밥이라는콩글리쉬라고 밝혔다. 그리고 아시아가 문화권이라서 이러한 용어를 사용했음을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2002년부터 이미 프로젝트 팀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던 조지은 작가에 이어, 2003  자신도 가담하며 공동작업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팀의 명칭에 대한 양철모 작가의 의견을 십분 존중하더라도, 애시당초 정확히 어떠한 의도로 프로젝트 명을 정했는지,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정한 명칭에 내포되었을 다양한 의미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만약비빔밥이라는 정확하고도 단일한 의미를 전달하기를 원했다면믹스라이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의견을 빌자면, 우리의 단어 선택은 우리의 잠재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만이 중요한게 아니라 관객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도 중요하고 작품의 의미에 포함된다는 의견 받아들인다면, 프로젝트 팀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믹스라이스인가?

 

첫째,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작가가 초기 작품 활동에서 주력했던 이주노동자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있을 것이다. 빵과 밥이라는 이분법으로 생각해 보자면, 확실히 쌀은, 작가의 말맞다나, 아시아 문화권을 대유하는 것으로 이해할 있다. 그리고 믹스라이스라는 그룹명이 영어도 한국어도 아니라는 , 그래서 단어자체의 의미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점은 작가가 처음 주목했던 아시아계 노동자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묘하게 맞물려들어간다고도 있다. 국보다는 경제적 상황이 좋지않은 동남아 국가에서 들어와 한국에서 불법체류라는 상태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분명 한국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당당하게 외국인임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불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한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해석은, 단어가 콩글리쉬 혹은 브로큰 잉글리쉬일 경우, 그것이 의도 조어이든 아니든간에 단어자체가 주는 반향은 이처럼섞임혹은어울림이란 쉽지않다는 것을 자체로 드러내준다.  상대방의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오용하기 쉽고 의미도 왜곡되기 쉬울 것이다.  물론 그러한 왜곡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잠시 유보해봐야 한다.  낯선 문화의 몰이해 속에 아름다운 오해가 탄생하고 그것은 또다른 의미의 창조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해석도 물론 가능하다.  그룹명이 믹스드 라이스 (Mixed rice), 잡곡이라는 이미 여러 종류의 쌀이 섞여 있는 상태가 아닌 동사로서의 ‘mix’ 사용한 명령문으로서의 믹스 라이스 (Mix rice), 이제는쌀을 섞으라 의미로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룹명을 통해서 작가들은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동일성에 주목하여 우리 모두 더불어 살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것은 아닌가 생각해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 말고도 또다른 해석들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믹스라이스 작품활동의 다양성과도 상통한다는 것도 염두에 둘만하다.

 

2. 믹스라이스의 다양한 작품 세계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형태의 프로젝트 팀을 이루어, 마찬가지로 낯선 듀오 그룹명으로 활동한믹스라이스 작품행보 또한 현대미술에 아주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들에게는 낯선 것일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믹스라이스는 조지은과 양철모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으로, 이처럼 작가가 아닌 명이상의 작가들이 프로젝트라는 것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일컫는 일련의 현대미술의 형태로,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예술작품에 대한 일종의 대안이라고 있다.  믹스라이스는 이에 머물지 않고 작가 이외에도 이주 노동자들과의 협업을 통한 작업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제작해왔다.  속에는 사진, 영상, 벽화, 퍼포먼스와 같은 기존의 예술의 범주에 넣을 있는 것도 있지만, 메시지를 담은 티셔츠, 핫케이크, 포츈 쿠키의 제작, 주민들과 함께 개최한 페스티벌 작품의 유형을 쉽게 정의할 없는 작품들도 많다.  (자세한 내용은 믹스라이스 홈페이지를 참조해보자. http://mixrice.org/)

 

성남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믹스라이스의 작품은 소외되어 망각된 도시와 그곳에서 생활하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2006 마석가구단지의 이주민공동체와의 협업을 통해 불법체류 중인 이주민들의 인권문제와 그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조명하는 작품이 있다.  (도판 1) 믹스라이스의 작업의 특징은전지적 작가로서 작품을 기획하고 감독하는 위치가 아닌 이주민들과의 협업을 통해 완성해가는 것에 있다고 있다. 때로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이들과 작업을 하기도 하고, 이주민들의 속내를 그대로 반영하기 위한 글들을 작업화하기도 한다.

도판 1) 마석 단지 페스티벌 

 

믹스라이스는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무분별한 도시의 재개발 운동으로 야기되는 사회문제에도 시선을 돌려 작품활동을 하였다. 최근에는 2 채널 영상으로 제작된 《덩굴연대기》에서 있듯이,  나무들의이식(移植)’ 문제를 조명하면서, 도시 재개발과 맞물려 자행되는 변두리 지역 나무들의 무차별적이고도 비자발적인 이식문제를 다룬다.  해묵은 나무들은 오랫동안 자리에서 지역의 풍경이자 나아가서는 공동체의 일부로서 역사를 이루며 함께해 왔던 존재이다.  이들을 무분별하게 파헤쳐 새로 건축된 아파트 단지의 조명을 위해 옮겨심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는 환경문제이자 생태학의 문제에 대한 언급인 동시에, 여러가지 주변 상황들 때문에 자신들의 오랜 보금자리를 떠날 밖에 없는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의 이주 (移住)’ 상황의 은유로도 읽을 있다.  이러한 식물의이식 대한 관심은 비디오 작품 아니라, 실제 재개발 지역에서 채취한 식물들을 갤러리의 거대한 흰벽에 세심하게 늘어붙이는 작업과 같은 설치작업으로도 이뤄지고 있다. 

 

또한이주 문제에 대해서는 재개발 지역에서 파낸 갤러리의 바닥에 깔고집을 위한 으로 재배치하는 설치도 감행한다.  바닥에는 노끈등으로 구획을 만들어주방,’ ‘거실,’ ‘안방등의 푯말을 세워두었는데, 이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 아파트 개발 초기의 분양 당시, 농지로 사용하던 땅에 그런식으로 구획해두고 재개발을 위한 토지 매매가 이뤄지던 것을 풍자하여 재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도판 2)

도판 2) 아주 평평한 공터 

 

일견 일관성이 없어보이는 믹스라이스의 작업은 자세히 들여보면, ‘거주이주,’ ‘동일성차이,’ 그로 인해 생겨나는 경계그리고 나아가서는정체성 대한 질문으로 일관되게 이어져 왔다는 것을 있다.  그리고, 일견 생활과 밀접하여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듯한 그들의 작품은 실은 무척이나 심오한 철학적 주제에 닿아있다는 것을 있다.  글에서는 이처럼 생활에 밀접하면서도 철학적인 믹스라이스의 작품은 묘하게도 독일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1889-1976) 건물, 거주, 사고” ("Building Dwelling Thinking")라는 글의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Martin Heidegger, ‘Building Dwelling Thinking’, in Poetry, Language, Thought (NY: Harper & Row, 1971), pp. 145–61.)

 

독어로는 'Bouen Wohnen Denken'이라는 제목인건물, 거주, 사고라는 에세이는 원래 1951 하이데거가 건축가들이 주축이 되어 열린 '인간과 우주'라는 주제의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다.  과연 작가 믹스라이스가 하이데거의 저작에 친숙한지 특히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에세이의 내용은 지난 수년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믹스라이스의 작품의 주제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일견 일관성있어 보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다소 상충하는듯도 보이는 믹스라이스의 작품 속에 내재한 복잡한 질문들도 하이데거가 논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과 상통하고 있다.

 

과연 60여년전에 독일 철학자의 에세이가 어떤 식으로 오늘날 한국의 프로젝트 팀의 작품을 비추어주는 렌즈가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믹스라이스를 다루는 방송국의 다큐멘터리에서 언급한혐오의 시대 예술의 역할이라는 부제에서 일말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2017 1 22 일요일 11 5 방영, SBS 아트멘터리남을 위한 행진곡’)  하이데거의 글이 씌여진 시대도혐오의 시대 겪고 전후 이제 화해를 모색하던 시기였을 것이고, 이는 2017년의 오늘날의 현실과도 일맥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이데거의 에세이건물, 거주, 사고 1951 건축가들을 위주로 심포지움의 강의를 내용으로 한다.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건축의 개념과 거주의 개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 나가는데 이는 오늘날 믹스라이스가 제기하는 문제와 연결해 보면 흥미롭다.  장소(place)’ 무시하고건물(building)’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었을 건축가들이 모여 개최한 심포지움에서 하이데거는 모름지기건물주거 차이를 명백히 하며, ‘거주한다는 (dwelling) 건물 (building) 선행한다 다소 이색적인 주장을 한다.

 

거주하는 (dwelling) 이라는 개념은 거주의 주체가 어디에소속된다는 (belonging)’ 의미하고 따라서 거주의 주체의정체성 (identity)’ 나아가서는진정성 (authenticity, 독어로는 Eigentlichkeit)’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는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있다.  달리 말하면, ‘거주라는 것은 진정한 존재 (authentic existence)’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발전되는 것이고, 우리가 진정성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과도 상통한다고 있는 있는것이다.  결국 장소 (혹은 거처) 주거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결여했을 정체성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대로라면, 주거란 정체성, 자신, 혹은 의미자체에 대한 감각을 잃을 위험이 있는 현대성에 대한 해독제가 있다.   

 

하지만, 고정된 장소를 전제로하는 주거는 정체성을 지켜주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는 유용하지만, 본질적으로 배타적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개념이라고 봤을때 중대한 문제를 야기한다.  정체성은 우리에게 고정된 정체성을 부여하고, 과거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취해진 것으로 미래와의 진정한 관계를 방해하는 본질적으로 후진적인 방향성을 내표하고 있다고도 있기 때문이다.

 

장소로 인해서 생성된 정체성은 장소의 경계 내에 있는우리라는 소속감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서우리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장소에서 제외시킨다. 정체성이 바로 장소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정체성은 상당부분 장소의 개념에 의존하며우리 통제 밖에 있게 된다.  주거장소 개념을 강조하고 특성적 정체성을 기반으로배타성 정당성을 부여한 점이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동조한 역사적 증거 내지 근거로 비판 받고 있다는 점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믹스라이스의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지난 십수년 동안의 다양한 작품들에 드러난 장소와 거주에 관한 논의는 상반된 문제의식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수있다.  믹스 라이스의 재개발 문제와 식물의 이식의 과정에 촛점을 맞춘 최근의 작품이주거 부여하는정체성 관한 문제라면, 그보다 이전의 마석가구단지 페스티벌을 필두로 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는 바로 주거의 고정성으로 인해 야기된배타성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이 당하는 불이익에 대한 문제,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아 확실히는 알수 없으나 아마도) 원치 않는 곳으로 이식 되는 식물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한 문제와 타국에서 한국에 옮겨와 자리잡고자 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있을 것인가?

 

앞서 밝혔듯, 장소와 거주라는 개념을 소속감과 정체성을 연관시킬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이때, 정체성은 차이를 배제하고, 마찬가지로 장소와 거주라는 개념도 그런 점에서 봤을때에는 배타적일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논지는 배타성으로 점철되어 있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의 1957년의정체성의 원칙 (The Principle of identity)”라는 글에서 그는 정체성에 대해 화해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정체성의 의미를함께 소속하는 (belonging together)’에서 찾는데, 여기서함께 (together)’ 중점을 것인가, 아니면소속됨(belonging)’ 중점을 둘것인가에 따라 차이가 야기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함께 모인이들과의 단결을 강조하게 되면서 단일성이 중시되고, ‘소속됨 강조하게 되면 구성원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되므로자율성 인정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나아가서 정체성이란 동일성에 머물것이 아니라, 함께 소속하는 주변의 사물 (여기에서는 믹스라이스의 작품에서의 나무를 떠올리게 된다)들과 인간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라고 논한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자면, (Earth), 하늘, 유한자 (mortals) (divinities)라는 4(Fourfold) 요소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다양성과 조화의 예를 블랙포레스트 농가에서의 생활을 예로 들며 하이데거는 (강의) 마치고 있는데, 이는 믹스라이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견 상충하는듯 보이는 자연과 인간의 문제, 외국의 이주민과 재개발 지역 주민의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점의 모색 보다는 문제제기의 단계인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어떠한 장소에 소속한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본질이자, 속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 만큼이나 주거와 소속,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영원히 계속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믹스라이스가 제기해 여러가지 방향으로 향한듯 보이는 복잡한 문제들이 실상은 서로의 특이성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소속감을 지니고 주거 있는 조화로운 지점에서 해답을 구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글이 길어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나머지를 올리기로 할게요~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8. 00:18 미술 이야기

예술계의 홍길동이라고 할까 쾌걸 조로라고 할까?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 (Banksy)가 또 사고를 쳤다. (상황은 여기서 확인!)

사건은 10월 5일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유명 작품 '풍선을 든 소녀 (Girl with Balloon)가 1백4만 파운드, 한화로 15억을 훌쩍 넘는 가격에 팔리고 난 직후에 일어났다.  직후에 뱅크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이 경매에 나와 팔리게 되면 작동하도록 이 작품에 분쇄기를 장치했음을 밝혔다고 한다.  물론 이는 당시 경매에서 작품이 조각조각 분쇄되는 장면을 보고 진정으로 놀라는 관중들의 모습이 담긴 인스타그램들과 함께 여러 뉴스에 게재되었다. 

물론, 이 상황 자체가 과연 어떻게 가능했는지 여러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1. 분쇄기가 액자 속에 장치가 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과연 경매를 준비하는 측에서는 액자에 끼워져 있는 작품을 사전에 살펴보지 않았던 것일까? - 경매 이전 작품의 상태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 한번쯤은 작품을 액자에서 빼보지는 않았던 것일까? 게다가 작품과 액자 무게 외에 그 정도의 장치가 되어 있었다면 작품은 이상할 정도로 상당한 무게였을텐데 말이다.

2. 그 분쇄기는 왜 작품의 절반 정도밖에 분쇄가 진행되지 않은 것일까?  전부다 분쇄되었다면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되었을텐데, 지금 상태로는 미묘하다.  예상했던 대로, 구매자는 이 상태의 작품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은 이 상태로 또 거래가 될 것이라 짐작된다. 

3. 그 분쇄기를 장치하고 나서 경매에서 판매될 때까지 수년은 걸렸을텐데, 과연 그 분쇄기는 어떻게 작동했던 것일까?  - 뱅크시의 정보원 (?)이 그 작품의 소재를 계속 추적해오다가 소더비 경매장에 잠입하여 경매가 이뤄지는 순간 원격 조정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던 것일까?   건전지 없이 그런 작동을 할 수 있는 장치가 있나? 전기 장치는 잘 모르지만, 여하튼 미스테리다. 

경매 관련자들을 깜쪽같이 속였다 치고, 지치지 않는 건전지 에너자이저를 써서 성공적으로 경매사가 경매봉을 두드리는 순간 분쇄기를 작동시켰다 치자.  방법이야 어떻게 되었든, 이번 사건은 미술사에 또 다른 역사를 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퍼포먼스라고도 볼 수 있는 이번의 사건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터무니 없기까지 한 천문학적인 금액들이 오가는 경매에서의 작품거래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를 보내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유명세에 따른 작품 가격이 높아지고 하는 미술계의 통례에 반대하기 위해 자신(들)의 얼굴이나 구체적인 이력을 밝히지 않아 왔던 것이다.  

뱅크시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애당초에 그 (혹은 복수의 작가군단?)가 익명으로 활동한 것은 그(들)의 작품이 영국 브리스톨 거리에 그리피티를 그리는 것을 시작해서인데, 영국에서 거리에 낙서를 하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법적인 제재를 피하기 위해서라고도 알려져 있다. 물론 위에 밝힌대로 미술계의 통상적인 관례에 대한 반항이라는 설도 있다.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그가 1974년 영국 출생이라고 밝힌 곳도 있는데, 대부분의 미술관련 사이트에서는 여전히 그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다고 씌여있다.) 

후에 그리피티 이외에도 꾸준하게 기발한 활동을 해온 그의 작품은 많은 논란과 함께 경매에서의 작품의 가격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자세한 활동은 그의 홈페이지를 참고하라.  http://www.banksy.co.uk/out.asp)

다분 정치적이고, 반전주의, 반자본주의적 메시지로 가득한 그의 작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그의 명성에 편승해 뱅크시를 자처하는 작품도 적지 않고, 그에 대해 '내 작품 아님'을 홈페이지에서도 밝히기도 한다. (한번 더 꼬아서 생각하자면, 이러한 의사표명 또한 그의 자작극이 아닌가 의심하게도 된다. 왜냐하면, 익명으로 작품활동하는 것 자체가 '작품에 따라다니는 작가의 이름'이라는 관례에 대한 반항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애당초 굳이 저렇게 주인 찾아주기 식의 성명서를 낼 필요가 있나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몸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체제적인 작품을 하는 그가 미술시장에서 몸값을 높이게 된것은 어찌된 영문인걸까? 

일례로 2003년 제작되었던 Bomb Hugger라는 그래피티 작품의 경매 경과를 살펴보자. 




Sotheby's London 

Date:2010-02-11 

Lot Number :284 

Low Estimate :$39,200[+92%]* 

High Estimate :$54,800[+37%]* 

Hammer Price :$75,200 

Sold For :$92,250*



2010년 2월 11일자 경매를 보면 이 작품의 최종 가격은 최저 예상 가격 4만불을 가볍게 넘어 최종가는 9만2천불, 한화로 1억이 넘는 금액에 거래가 되었다.   애당초 미술 작품에 터무니 없는 가격을 매기는 이러한 미술 시장에 대한 비판은 경매서 고가로 팔린 작품을 거리에서는 60불에 파는 행위를 하거나 직접적으로 아래와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등, 여러차례 그의 작품 속에서 언급되었다. 

Banksy – I Can’t Believe You Morons Actually Buy This Shit, 2007  '너희같은 멍청이들이 정말로 이런 쓰레기를 사다니, 나는 당최 믿을 수가 없다.'는 제목으로 경매장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쯤 되면, 그의 작품 값을 올리는 것은 미술 시장이자 미술계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가깝게는 앤디 워홀의 팝아트, 좀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셀 뒤샹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다. 

Banksy, Soup Cans (2006) EHC Fine Art 앤디 워홀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인건가? 현대미술가들은 스프캔이라는 상품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미술사 적으로 보면, 이는 마르셀 뒤샹이 1917년 한 전시회에 철물점에서 구입한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라는 서명만 하고, '샘 (The F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출품을 한 것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 되지 않을까?    

애시당초 참가비만 내면 전시를 허용하는 허술한 전시회에 출품했음에도 당시에는 그가 출품한 변기는 출품이 거절 당했다.  이후, 작가는 작품을 '제작'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기만 해도 되는 것이라는 면죄부 (?)를 받게 되는 미술사적인 일대사건으로 기록되게 되는 것이다. 이후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 면죄부로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선택'해왔던가. 

이번 뱅크시의 첩보전을 방불케할 '퍼포먼스'는 미술사적으로 또 다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경매에서 작품의 가격을 매겨 유통하는 과정에 대한 반항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 퍼포먼스 자체는 또 다른 형태의 예술 형태로 자리잡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절반쯤 분쇄기를 통과한 그 작품은 이번 경매가를 가볍게 뛰어넘으며 더 높은 가격에 판매될지도. 

한편, 뱅크시가 자신(들)의 인스타그램에 사전에 분쇄기를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해당 경매에서 작품이 순식간에 분쇄되어 액자밑으로 흘러내리는 과정을 촬영한 것을 올리면서 "The urge to destroy is also a creative urge" - Picasso라는 구문을 함께 실었다. 이는 항상 자신의 이전의 작품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창조를 추구했던 피카소가 '창조적인 진공청소기'라 불렸던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천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  미술계의 황금만능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을 했지만, 그 미술계에서 최고가를 갱신하며 그러한 시스템을 만끽한 피카소에 대해서는 별 저항이 없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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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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