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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6. 01:30 영화 이야기

제목 속에는 원제가 담겨져 있지 않다. Au revoir là-haut

에콜 드 파리 (École de Paris)에 대한 자료 조사를 하다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하나 발견. 원래 프랑스 작가 피에르 레메트르 (Pierre Lemaitre)가 쓴 소설이 원작인데 그 책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진 것. 

원작이 프랑스어인 책과 그리고 영화, 여기에 영어 번역까지 뒤섞여 제목이 무척 복잡한데, 내가 알아낸 것만 무려 5종류. 

먼저 원작과 동명 영화: 
1) Au revoir là-haut - 프랑스 작품이라 동명 소설과 같은 불어 제목이 원제. '저기 위에서 다시 만나요'라는 직역이겠으나, '죽어서 다시 만나자'라는 뜻. 이 책으로 작가 피에르 레메트르는 2013년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 감독은 Albert Dupontel인데, 극 중 두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2) The Great Swindle (2015) - 영어로 번역된 소설의 제목, 주인공들이 하는 일이 '거대 사기극'이긴 하지. 
3) See You Up There (2017) - 미국에서의 영화의 제목은 이렇게 소설과는 달리 원제에 충실하게 붙여졌다. 
 
4) 오르부아르 (2015) - 소설이 공쿠르 작을 받고 나서 번역된 듯한데, 한국어로는 '오흐부아 라오'가 원 발음에 근접할 듯 한데, 이렇게 번역되었다. 작가 이름 및 기타 설명 없이 이 소설과 원래 소설을 연결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5) 맨 오브 마스크 - 한국어 제목으로는 이렇게, 어중간하게 달렸다.  번역도 아니고 원어 제목을 발음대로 한 것도 아니고...  저 영화를 찾으려고 했는데, 한국어 제목을 미리 알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 제목으로는 짐작도 못했으리라. 
 
영화를 한다는 광고를 본 기억이 없는데, 아마도 영화제에 출품했었던 작품이었나? 소위  상업영화 범주에 들어갈 영화는 아니므로 한국에서는 디비디가 먼저 유통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극장서 영화를 본 게 구석기 시대였나 싶은 나니까,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다.) 여하튼, 제목이야 어떻든간에, 영화를 보고나서 이 영화를 보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영화에 대한 자세한 평은 영화 평론가들이 어디엔가 자세히 해두셨을 것이라 짐작하고, 오늘은 무엇보다 이 영화가 시각적 효과가 뛰어난 영화라는 것만 강조해두고자 한다. 앞서 밝혔듯이, 에콜 드 파리에 대해서 조사를 하다가 발견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의 파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전쟁을 좋아하는 상관 탓에 다치지 않아도 되는 큰 부상을 얼굴에 입은 주인공 에드아르와 알베르, 그와 나이와 신분은 큰 차이가 있지만 좋은 친구였던 전우 알베르가 전쟁을 돈벌이로 생각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큰 사기를 친다는 게 큰 스포없는 대략적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라, 소설이 얼마나 시각적으로 묘사를 했는지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영화에서는 시각적 효과가 영화의 스토리를 살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주인공인 에드아르가 화가 지망생이라서도 그렇겠지만, 영화에서는 시각적 아름다움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에콜 드 파리, 20세기 초 모더니즘에 관한 어휘들이 넘칠만큼 등장한다. 

감독 자신이 에두아르가 사용할 가면을 만들기 위해서 Musée du quai Branly–Jacques Chirac 를 수차례 방문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실제로 브랑쿠지, 뒤샹, 피카소의 작품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특히, 에드아르와 소녀, 그리고 알베르가 세 명이서 사기를 치기로 결심하고 즐겁게 춤을 추는 장면에서 에드아르의 스튜디오를 자세히 비추는 데, 그가 쓰고 나오는 가면들, 그리고 비춰지는 조각들은 다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증거'들을 발견할 때 그것을 알아채는 기쁨이란!)  

그리고, 잠시잠시 비추는 당시의 파리 풍경과 카바레, 카페등의 장면에서는 '벨 에포크'와 '세기말'을 넘나드는 명암을 잘 살리고 있고, 또한 당시에 유행했던 아르누보 스타일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에드아르가 그리는 드로잉의 화풍은 에곤 쉴레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다.  반면, 그가 전쟁 기념비를 구상할 때 사용한 구도와 색상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흑색 회화' 시리즈의 그것처럼 불길하고 짙은 흑백이 대비되게 나타난다.  

Egon Schiele (1890-1918), Self-Portrait with Chinese Lantern Plant (1912), oil on painting ; 32.2 x 39.8 cm, Leoold Museum


극중에서, 알베르가 에드아르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인 파울린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장면은 정원 앞의 철책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는데, 연대도 좀 많이 내려가고, 소장처도 프랑스가 아니긴 하지만, 왠지 마네의 '철길'을 연상시킨다. 

Édouard Manet, The Railway (1873) oil on canvas ; 93.3 cm × 111.5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또한, 미술적 안목이 없는 이들이 벌이는 공공 조각 및 기념비에 대한 비판
도 신랄한데, 결국 공공 기념비란 '추하고 진부하고 비싼 것'이라야 한다고 에드아르가 말했다고 알베르에게 전하는 어린 소녀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이 영화는 짧은 트레일러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렇게 밝고 경쾌한 의적단의 통쾌한 복수극은 아니다.  군데군데 코믹적 요소들은 있지만.  

우선 사랑하지만 원체 복잡해지기 쉬운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다. 한번도 보통의 전쟁영화들처럼 직접적으로 전쟁을 자세히 묘사하거나, 참상을 자세히 비추며 목소리 높여 비판하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의 추악한 탐욕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전쟁이란 지배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으켜 무고한 희생을 낳게 하는 야만적 행위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해준다.  

영화 <맨 오브 마스크>는 한편으로는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코믹한 유머를 잃지 않고, 또 한편으로는 그 절박한 시절에 폭발하듯 꽃을 피웠던 에콜 드 파리의 예술성도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일석삼조를 이룬 작품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2. 06:33 미술 이야기

걸작이라는 이유로 작품을 평소에 공개하지 않고 커튼으로 막아놓은 작품이 있을까 하는 의문으로 맺은 글, 다시 시작해본다. 


본격적으로 검색에 착수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실제로 그 안트워프의 성모대성당이 그러했다고 알게 되었다. 


김새는 일이다. 


물론, 회화와 커튼은 오랜 인연이 있다.  널리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 Zeuxis 가 파라시우스Parrhasius 와의 경쟁 에피소드부터 존재한다. 그 얘기에 따르면, 둘이 그림을 하나씩 그려와서 서로 실력을 겨뤄보자며 한 자리에 모인다. 제욱시스가 그린 포도의 그림은 너무도 생생하고 진짜 같아서, 새들이 몰려와 그 포도를 쪼아먹으려다가 다 부딪혀 떨어지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의기양양 제욱시스가 '자, 이제 당신 그림을 보여주시지...그 커튼을 거두어보란 말이다~~'라고 하자, 파라시우스가 씨익 웃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커튼이야말로 그가 그린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제욱시스는 '인정!! You Win!!' 외치게 되는데...  쿨한 제욱시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그림은 새들의 눈을 속였지만, 파라시우스는 바로 '자신'의 눈을 속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누가누가 더 잘그리냐의 문제는 전문용어로 '눈속임 (trompe l'oeil)'의 기법에 관한 것을 의미한다. 즉 누가 더 진짜같이 잘 그리냐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커튼을 그려넣은 화가들도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덴마크 출신의 코넬리스 노베터스 기스브레히트 (Cornelis Norbertus Gijsbrechts (ca. 1630-ca.1675)라는 어려운 발음의,  잘 안알려진 화가의 작품이 그 예이다.  


Cornelis Norbertus Gijsbrechts, Trompe l'oeil. Board Partition with Letter Rack and Music Book (1668), oil on canvas ;123.5 × 107 cm, Statens Museum for Kunst 


그리고 보다 유명한 화가로는 베르메르 (요새 표기로 하면 페르메이르)의 작품이 있는데,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작품 47점 중 7점에 커튼이 그려져 있다. 


Johannes Vermeer, Girl Reading a Letter by an Open Window (ca. 1659)

베르메르는 커튼을 자주 이용해서, 이 작품을 포함해 총 7점에 커튼이 등장한다고.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커튼을 자주 이용한다.  그의 경우, 눈에 보이는 것과 안보이는 것, 현실과 진실 사이에 대한 질문을 하는 화가로 유명하기에 왜 그가 커튼을 자주 쓰는지 이해가 된다. 


René Magritte, The Human Condition (1933)

oil on canvas ; 100 x 81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하지만, 이들은 모두 그림안의 커튼들 이야기이다. 


그런데, 찾아보면, 실제로 커튼을 치고 입장료 내지는 구경하는 값을 낸 사람에게만 그림을 보여주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미국 최초의 자생적 화파로 알려진 허드슨 강 화파 (Hudson River School)의 대표자 격이라고 할수 있는 프레드릭 에드윈 처치 (Frederic Edwin Church: 1826-1900)이다.


그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초기 이민자의 자손으로, 부유한 은세공사이자 시계제조자 집안의 자손으로 일찌감치부터 그림을 공부했던 인물이다. 그는 여러차례 미국 대륙은 물론 극지방을 탐험하여 그 곳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 유명해졌는데, 대표적 작품이 <안데스의 중심>, <빙하>, <나이아가라 폭포> 등이 있다.  


Frederic Edwin Church, Niagara (1857), oil on canvas ; 101.6 x 229.9 cm, Corcoran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Frederic Edwin Church (1826-1900), The Heart of the Andes (1859)

oil on canvas ; 168 x 302.9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Frederic Edwin Church, The Icebergs (1861), oil on canvas ; 163.8 x 285.8 cm, Dallas Museum of Art


그 중에서도 <빙하 (The Icebergs)>는 그의 탁월한 역량을 과시하는 역작일 뿐 아니라, 그 전시 방법에 있어서의 영리한 마케팅 전략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자신이 직접 1859년 한 달간의 탐험한 북극지방을 묘사한 작품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한 색상, 매끈하면서도 광택이 나는 화면, 만지면 차가울것만 같은 생생한 빙하의 표현은 보는 이의 맘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처치는 무려  100점이 넘는 사생 스케치를 바탕으로 탐험 경험자들의 생생한 기록들을 읽으며 키운 그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뉴욕 스튜디오에서 위의 <빙하>라는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미국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던 1861년 뉴욕과 보스턴에서 전시되었고, 열광적인 호평을 이끌어내었다. 하지만, 전쟁때문에 구매자를 찾을 수 없었던 처치는 결단을 내려, 1863년 런던으로 건너가 <나이아가라>와 <안데스의 중심>과 함께 그곳에서 이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 때, 처치는 이 <빙하>만은 따로 화려하게 장식된 방안에 별도로 전시를 하면서, 캔버스 앞에 커튼을 장치하였다. 그 작품을 보고자 하는 관람객은 25센트를 내야만 했고, 돈을 낸 관람객은 작품 해설이 적힌 팜플렛을 받고, 작품을 구경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전시는 그럼에도 호황을 누렸고, 결국 그곳의 자산가가 그 작품을 구매하게 되고, 이후 시간이 흘러흘러 경매에 나온 작품을 익명의 구매자가 높은 가격에 낙찰. 이후 댈러스 미술관에 기증. (2010년에야 그 기증자가 Lamar Hunt, 어메리칸 풋볼 리그 AFL을 창시한 인물임이 밝혀졌다고)....  결국 프레드릭 에드윈 처치의 마케팅 전략은 멋지게 성공한 셈이다.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해본 모습


내셔널 지오그래픽도 없고 BBC 다큐멘터리도 없던 시절, 보통 사람들로서는 구경할 수 없던 진풍경을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를 했으니, 누구라도 작품을 보고 싶어 했을 것이다. 짐작컨대, 오늘날 아이맥스 영화나 4D 영화 이상의 경이로운 경험이었으리라.   



여기서부터는 나의 망상 ~ 

안트워프의 성모 대성당 관계자 중 누군가가 처치의 <빙하> 전시회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성당의 재정난을 타파할 혁신적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성당의 유명소장품 루벤스 작품에 커튼을 만들어 걸고 관람료를 받게 하자 제안하고 그 제안은 통과된다.  그리고 안트워프 여행 때, 성당의 입장료 제도를 목격한 "플란다스의 개"를 쓴 소설가 Marie Louise de la Ramée가 이 내용을 소설에 포함시킨다. 그녀도 '그건 쫌 너무한걸 ....'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0년 후 일본에서 그 책은 애니메이션화되어, 그 이래, 안트워프 성모 대성당에는 수많은 일본인과 한국인 관광객의 방문이 이어지고, 심지어 그 성당 앞에는 일본 자동차 회사가 비용을 지원하여 제작한 네로의 동상까지 만들어지게 된다는 이야기....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19. 07:30 미술 이야기

Bartolomé Esteban Murillo, Two Women at a Window (c. 1655–60),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지금 창 밖에 서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귀엽게 생긴 소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하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창 밖의 인물을 바라보고 있고, 그 소녀의 뒷편에는 좀 나이들어 보이는 한 여인이 한 손으로는 창문을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으려는 듯 숄로 입가를 가리고 서있다. 

부드러운 갈색톤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색상이 주는 평안함과 더불어 두 여인의 살아있는 표정, 그리고 소녀의 눈 높이가 관람자의 그것과 일치하는데서 오는 친근감으로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함께 미소짓게 만드는 따뜻함이 깃들어 있다.  더할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이 그림은 세비야 출신 스페인의 바로크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창가의 두 여인'이라는 작품이다.  무리요는 스페인이 낳은 최고의 바로크 화가 벨라스케스보다는 후대의 인물로 당대에서는 종교화로 크게 명성을 날렸던 화가인데, 이런 생활 속의 장면들을 묘사한 장르화도 몇 점 남겼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2차원의 화면과 관람자와의 관계라고 하는데, 이 작품은 관람자를 그림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창틀과 화면을 일치시킴으로서 '회화와 창'이라는 전통적 메타포를 실현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은 전 시대 르네상스 네덜란드 작가들에게서 널리 활용되었었다. 

그 대표적 예로는 한스 메믈링의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가 있다.  창틀과 화면의 하단을 일치시켜 표현한 절묘함을 보라!  

이 작품에서는 예수를 너무 거룩해서 쳐다볼수도 없는 위엄 가득한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검소한 옷을 입고, 창틀에 한 손을 얹은채, 그 그림이 걸려 있는 집안을 들여다보며 축복을 내리는 듯한 친근하고 겸허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Hans Memling (1430–1440 to 1494), Christ Blessing (1481), oil on panel ; 35.1 x 25.1 cm, Museum of Fine Arts, Boston     


무리요의 작품에서도 소녀가 팔을 얹고 있는 창틀은 화면의 하단과 일치하여, 회화 작품이 창문이라는 설정에서, 아름다운 소녀가 창턱에 한 팔을 걸치고 또 한팔은 세워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관람객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스페인 화가는 네덜란드에서의 화법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무리요는 이 작품에서 종교화와 초상화에서 주로 활용되는 화법을 장르화로 옮겨 표현하는데 멋지게 성공했다.   

어쩌면 소녀의 앞에서는 수줍은 청년이 서툴게 구애의 노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꽃다발을 건네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소를 띈 채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는 소녀를 계속 바라보다보면, 왠지 작은 꽃다발이라도 하나 건네야할 것만 같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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