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2020/08 글 목록
2020. 8. 30. 23:48 미술 이야기

아마 현대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르셀 뒤샹의 '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작가의 이름이나 제목인 '샘 (Fountain)'은 모르더라도 '남성 소변기를 엎어둔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Marcel Duchamp, Fountain, (1917) photograph by Alfred Stieglitz (source: Wikipedia)

이번 여름 학기 수업 시간에도 꽤 긴 시간을 할애해서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연기되어버린) 가을 학기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일련의 수업도 이 '샘'과 함께 열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미술사적 평가나 자초지종은 다 알고 있으리라 믿지만, 혹 기억이 가물가물한 분들은 이전 포스팅을 참고하시길.

글의 흐름을 위해서 여기서 다시 간략하게 설명을 하자면, 

마르셀 뒤샹은  1917년  약간의 참가비 ($6)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그런 전시에 철물점 변기를 하나 사서는 거기에  R. Mutt 라는 서명을 하고는 《샘》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하게 된다.  (이 R. Mutt라는 이름은 도자기로 만든 변기를 제조하는 회사의 이름 Mott Iron Works와도 비슷하지만, 'mutt'라는 단어 자체는 '잡종개'라는 의미도 있고, '바보 멍청이'라는 의미도 있다. 말장난을 즐겨하던 그다운 작명이다.)  이렇게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상품' 그것도 그닥 우아하지 않은 '변기'를 미술전시회에 떡 하니 내려고 하면서, "예술작품이 예술작품이 되는 것은 작가의 '손'으로 '제작'된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선택' 즉 그의 '아이디어'에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결국 그 문턱 낮은 전시에서조차도 퇴짜를 맞았지만, 그의 그러한 황당무계한 행동과 그 이면의 개념은 이후 미술의 판도를 바꾸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모더니즘 미술에서 그토록 중시하던 '독창성 (originality)'과 '진품성 (authenticity)'이라는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우리가 <모나리자>를 철통같은 경비하에 유리액자에 넣은 상태로 전시를 해도, 바글바글 모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도 조금이라도 가까이  한번 보겠다고 애를 쓰는 이유는 그 작품이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일무이'한 걸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에서의 ‘아우라’의 아성이 위협받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사진과 영화 때문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1936년 발터 벤야민의 “기계적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라는 중요한 에세이에서 다뤄진 바 있다.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은 이후 작가들이 창작을 하는 태도에 획기적 변화를 야기했고, 문자그대로 '변기'를 제작하는 작가들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 일례로 이탈리아 작가 모리조 카텔란 (Maurizio Cattelan)이 <아메라카>라는 제목으로 구겐하임 화장실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전시한 황금변기가 그 예이다. (관련 포스팅은 여기를 참조!)

 

2016년 뉴욕 구겐하임에 전시되었던 (?) 아니, 구겐하임 미술관의 화장실에 설치되었던 모리조 카텔란 (Maurizio Cattelan)의 <America>. 변기를 <미국>이라 명명해서 논란이 되었고, 이후 영국으로 옮겨서 전시를 하는 와중에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또 한차례 논란이 되었다. 미국의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은 실은 진부하기 짝이 없고, 뒤샹의 <샘>이 없었다면 존재했을까 싶고, 뒤샹의 작품에 대한 참조라는 의미라는 쪽이 작가가 밝힌 제작의도보다 훨씬 재미있다.

 

그렇다면 뒤샹은 왜 하고많은 대량생산된 공산품 가운데 남성용 소변기를 택한 것일까? 여기에 대한 연구서가 그 많고 많은 뒤샹에 대한 글들 중 어디엔가는 있을지 모르지만, 난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다. 다만, 개인적으로 제목이 '샘 (fountain)'이라는데서 힌트를 얻어 짐작해보곤 했다. 우리나라 개론서에는 주로 '샘'이라고 쓰고 있지만, 원제는 Fountain. 번역한대로 '샘'이라는 뜻도 있고 '분수'라는 뜻도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식음용으로 설치해둔 수도를 지칭하기도 한다. (좀 더 친절하게 Drinking Water Fountain이라고도 한다.) 발 쪽의 페달을 밟거나 측면의 버튼을 누르면 물줄기가 퐁퐁퐁 솟아 올라 거기에 입을 갖다대면 물을 마실수 있는 장치이다. 

우리나라는 공공 시설이나 건물에 가면 큰 정수통이 엎어져 있는 정수기나 정수기 기계가 따로 설치되어 있어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많은데, 미국의 경우, 수도랑 직접 연결된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명칭이 '샘 (fountain)'이다.  비교적 최근 건물의 경우, 스테인레스로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의 경우 흰색 도자기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 더 많다.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스테인레스 재질로 만들어진 샘

모르긴몰라도, 뒤샹이 뉴욕에서 살았을 당시 스테인레스 재질보다는 흰색 도자기로 만들어진 '샘'이 더 많았을 것 같은데, 어쩌면 뒤샹이 남성 소변기를 엎어놓은 것은 이 식음용 샘의 형태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닐까 한다. 파리 다다에 참가했고, 이후 뉴욕으로 건너와서는 뉴욕 다다를 이끈 뒤샹으로서는 놀랍지도 않은 삐딱함이다. 소변기를 가져다가 물마시는 장치와 같은 모양으로 배치하고 제목까지 '샘'이라고 붙인다. 이러한 상식의 전복은 다다의 기본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소변기를 뒤집어 '제시'한 것은 '배설'을 위해 만들어진 장치를 '섭취'를 위한 장치로의 변모를 꾀하는 전복도 함축된 것은 아닌가 하는게 내 생각이다. 물론 여기에는 성적인 함축도 있는 것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뒤샹이 성장기에 프로이트 선생이 말씀하시는 '항문기' 시절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이후 미술 분야에서 유독 '변기'를 활용하는 작가가 많은 것은 뒤샹의 유산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클래스 올덴버그의 <부드러운 변기 (Soft Toilet)> (1966) 휘트니 미술관 소장
서도호 작가의 '변기'모양의 설치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20. 8. 28. 20:33 일상 이야기

이번주 일요일을 기점으로 수도권이 사회적 거리두기 2.5 단계 (라고 쓰고 3단계라고 읽는다)로 격상하면서, 체감적으로는 다소 완화되었던 사회분위기가 다시 경직되었다.  때마침 현대백화점 문화센터에서의 특강 및 개강 시기와 맞물리면서 내 강의도 특강은 폐강처리 되고, 정규 강의는 아무래도 개강일이 미뤄질듯하다.     

나만 겪는 답답함도 아니니까, 그리고 나보다 더한 어려움 겪는 분들이 너무 많으니까 어디다 대고 불평을 하거나 하소연하기도 뭣하긴 하지만, 열심히 일정에 맞춰서 수업 준비하다가 이런 소식을 들으면 허탈하긴 하다.  

그러다 불현듯 '개같은 내 인생'의 주인공 잉게말이 라이카를 떠올렸던 것처럼, 더 나쁜 상황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상황을 다행스럽게 느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블로그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내 인생 영화로 꼽았던 영화다. 여기서 불행한 일을 겪는 어린 소년이 소련의 스푸타니크 호에 실험용으로 태웠던 강아지 라이카를 떠올리며 자신의 상황이 그보다는 낫다고 위안을 삼곤 한다.) 

영화 '개같은 내 인생'의 스틸 컷 몇개 

갇힌듯 답답하고, 날개가 접힌듯 갑갑하고, 앞길에 장막이 드리운듯 막막하더라도 항상 긍정적인 맘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거다. 거기에 더해서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궁리해보는거다.  유머를 잃지 않고, 지금 아니면 하기 힘든 것 (사실 그런게 많을 것 같지는 않지만...), 오히려 지금이니까 생각이 미처 시도해보고 싶은 일들 (이런건 몇가지 떠오를 수도 있다)을 해보는거다. 

영화 '개같은 내 인생'에서 유머스러운 한 장면 - 넌 왜 거길 가리니?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20. 8. 11. 19:44 미술 이야기

2020년 올해는 이래저래 일이 많습니다.  겨울부터 봄까지는 코로나로, 여름에는 수해로... 모쪼록 더이상 피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하루 빨리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는 바람입니다. 

어렵사리 시작한 여름 학기가 어느새 마지막을 향하고 있고, 어느새 가을 학기를 등록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어려움이 없지는 않지만 모두 가급적 평정을 유지하며 일상을 활기차게 이어나가길 바라며, 가을 학기 강의 공지를 올립니다.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가을학기 미술사 강의 안내(클릭하시면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홈페이지로 연결되면서 제가 하는 강의가 일괄로 다 뜹니다. 사이트에는 강의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학기 제가 미술사 수업을 진행할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지점은 신촌점, 천호점, 압구정본점, 무역센터점, 미아점입니다. 

모든 지점 정규 강의 1주 전 (이번에 신촌점은 정규개강 2주 전) 특강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요일과 시간은 정규 강의와 동일합니다.  특강 주제와 정규 강의 주제는 이번학기에는 전 점 동일합니다. (단 전 8주로 진행하는 지점과 전 10주로 진행하는 지점 간에 일정관계로 약간의 조정은 있습니다.)  각 지점의 강의 진행일자를 요일 순으로 정리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특강: 바니타스, 죽음을 기억하라!  

신촌점: 8월 25일  화  15:00~16:20   

천호점: 9월 2일  수 14:30~15:50   

압구정본점: 9월 3일  목 14:40~16:00  

무역센터점: 9월 3일 목 19:10~20:20 

미아점: 9월 4일 금 11:00~12:10  

 

미술사를 알면 보이는 미술 III: 미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신촌점: 매주 화  15:00~16:20   10 주 강의   9월 8일~11월 10일

천호점: 매주 수 14:30~15:50  8주 강의   9월 9일~11월 14일 (9월 30일 휴강)

압구정본점: 매주 목 14:40~16:00  10주 강의   9월 10일~11월 19일 (10월 1일 휴강)

무역센터점: 매주 목 19:10~20:20  8주 강의   9월 10일~11월 5일 (10월 1일 휴강)

미아점: 매주 금 11:00~12:10  8주 강의   9월 11일 ~ 11월 13일 (10월 2일, 9일 휴강)

 

해당 지점을 클릭하시면 강좌찾기 사이트로 연결되고, 거기서 '바로 신청'을 클릭하시면 온라인 등록도 가능합니다. 다만 등록 전에 아이디 등록을 하셔야하긴 한답니다. ^^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20. 8. 10. 22:14 미술 이야기

한동안 안하던 팝 퀴즈~ 한번 나갑니다. 이번 학기에 다룬 초현실주의에 관련된 문제이죠?    아래 작품에서 사용된 기법을 뭐라할까요? 초현실주의 미술에 자주 이용되었던 것이죠?  이 기법은 시각예술 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활용되었습니다.  로트레아몽 (Lautréamont: 1847-1870)이라는 시인의 "수술대 위에서의 우산과 재봉틀의 우연한 만남처럼 아름다운~"이라는 싯구가 잘 알려져 있죠. 

요새는 가재 아래 쪽 검은색의 물건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를 질문해도 훌륭한 팝 퀴즈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답변 및 해설 

Salvador Dalí (1904-1989) - 독특한 콧수염만큼이나 기행으로도 잘 알려진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 흘러내리는 시계로 더 유명하지만 오늘은 전화기를 가져와봤어요. 

아래의 작품은 유명한 초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í: 1904-1989) 의 '전화기'라는 작품입니다.  의식에 꽉꽉 눌려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해방시키자는 것이 초현실주의자들의 목표였구요. 이 작품 역시 그 선상에서 만들어진 전화로 기법상 데페이즈망 (dépaysement)이라고 합니다. 'dépaysement'이라는 단어에서 'pays'는 불어로 나라라는 뜻인데요, 부정 접두사 'dé'가 붙으면서 '추방, 유배'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낯선 환경, 낯설음'이라는 뜻입니다. 영영사전에는 'Change of scnery'라고 나오기도 하네요.  

데페이즈망 기법은 요새 말로 '니가 왜 거기서 나와~'로 요약됩니다. 전혀 맥락이 맞지 않는 이질적 사물의 결합을 통해 낯설음을 유발하며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죠. 

Salvador Dalí (1904-1989), Telephone (1936), Steel, plaster, rubber, resin and paper ; 178 × 330 × 178 mm, Tate

초현실주의는 영어로는 'Surrealism', '쉬르리얼리즘'이라고 하는데, 원래 불어 surréalisme에서 온 것입니다. 초현실주의의 종주국은 프랑스라는 것을 보여주죠.  이번 학기 수업을 들어셨다면 더 자세한 설명도 들으실 수 있었겠지만... 물론 수업을 한 번 듣는다고 다 기억하고 있다는 보장은 못하긴 하죠. ^^  

기회가 되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올리기로 하고, 오늘은 짤막한 팝 퀴즈로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합니다~ 

보너스로 그의 더 유명한 그림 한장~ 

Salvador Dalí, 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oil on canvas ; 24.1 x 33 cm, MoMA '기억의 끈질김' 정도로 해석이 될 'The Persistence of Memory' 달리의 대표작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20. 8. 10. 01:10 미술 이야기

다음 학기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정규 강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제반 사항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스케줄에 대해서는 다시 포스팅을 올리겠습니다.  한동안 포스팅이 뜸했는데, 정규 강의 준비가 바쁘기도 바빴고, 개인적으로는 알게모르게 '코로나 블루'도 있었던 듯 합니다. 아무래도 나는 언택보다는 컨택이 익숙한 옛날 사람인가봐요. 

 


사진 작품이 많은 캐나다 출신 작가인 제프 월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계의 주요 작가 중 한명이다.  그의 <갑작스런 돌풍 (호크사이 작품을 따라서)> (1993)은 일본의 우키요에 작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호크사이의 잘 알려진 작품을 라이트박스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로 '재현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호크사이의 작품을 빌어서 어떤 것을 비판하고자는 의도는 보이지 않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패러디 (Parody)라고 하기보다는 패스티쉬 (Pastiche)라고 할 수 있다. 패러디는 예전부터 문학에서 시작되어 폭넓게 사용되어 온 기법이라면 패스티쉬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접어들어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기법이라고 할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서는 '전용 (Appropriation)'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것이 패러디인가? 무엇이 패스티쉬인가?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정규 수업에 자세히 다뤄보고자 하지만, 오늘은 일단 시각적으로 감상해보는 걸로! 

Jeff Wall,  <A Sudden Gust of Wind (after Hokusai)>, (1993) Transparency on lightbox ; 25 × 39.7 × 34 cm, Tate  

 

Katsushika Hokusai (1760–1849), Yejiri Station, Province of Suruga. Part of the series Thirty-six Views of Mount Fuji, no. 35. (c. 1832), woodblock color print ; 24.3 x 36.3 cm, Brooklyn Museum

패러디와 패스티쉬의 차이에 대해서는 논의할 점이 많겠지만, 일단 쉽게 접근해서 공통점을 하나 들어보자면, 둘다 원작을 알고 있을 때, 작품을 즐기는 재미가 훨씬 커진다는 점.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20. 8. 10. 00:02 일상 이야기

제목은 거창하지만, 요는 이 포스팅이 무려 56일만의 글이라는 것. 설마 사람들이 안물안궁할 브라질 아이스크림에 대한 추억 글 하나를 끝으로 거의 두달동안 포스팅을 안/못하게 될 줄이야....

'라떼는~'말이야~

돌이켜보면, 폐강 되었던 봄 학기를 지나 여름학기에는 수강생 수가 줄긴했지만, 나름 대망의 재개강을 하였기 때문에 수업 준비를 새로 하느라 바빴던 것도 있다. 게다가, 다른 일 몇가지도 새롭게 시작하게 되면서 신경 쓸 일이 늘어나면서 블로그에 올릴 글을 쓸 여력이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느때 같으면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할수록, 또 바쁘게 살면 살수록 부딪히면서 새로운 생각이 떠올라 글을 쓰고 싶고 그래서 짬을 내서 글을 올리고 했는데 왜 일까? 생각해보니, 알게 모르게 '코로나 블루'라는 것도 한몫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난 몇 달을 겪으면서 왠지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엄청난 시대의 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2차 산업혁명의 시기를 살던 사람들이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겠지만, 지나고 나서 역사책 속에 그러한 변혁의 시기였노라 기록된 것처럼 말이다.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방적기가 돌아가는 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던 변혁의 시대를 목격했던 사람들처럼, 아주 새롭지는 않고 이전부터 있긴 했지만, 지난 몇달 본격적인 언택트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훗날 역사책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그러한 엄청난 변혁의 시대로 기록될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휴머니즘을 내세운 혁명가들은 자신들은 정의로운 일을 한다고 믿으면서, 밤에 몰래 공장으로 숨어들어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나쁜 방적기들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들의 행위가 과연 정의로웠나는 차치하고라도, 그들의 그런 행위가 도도한 역사적 흐름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는 것은 지금에 와선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얼마전부터인가 이제는 '4차 혁명의 시대'라고 일컬어져왔지만, 나를 포함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닥 와닿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나부터도 이제는 진짜 우리가 '4차 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고, 코로나 사태가 이를 가속화시켜 주었으며, 어쩌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술문명의 발달이 반드시 인간성의 황폐화를 가져오는 것이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가 반드시 '진화'하고 '발전'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기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렘도 없잖아 있지만, 낯익은 세상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 '꼰대'라는 말을 자주 듣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과거의 경험에 바탕해서 살고 있고, 이전의 기억은 좋은것으로 추억하게 되어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도 다 갖고 있게 마련이다. 새로운 시대, 낯선 것들이 많아지는 시대에 대해 갖게되는 기대와 함께 공존하는 불안감. 이는 코로나 19이라는 전염병이 전세계를 흔들면서 기대보다는 불안감 쪽이 더 커지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게 개인적 소견이다. 

이 모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 그 속에서 나는 또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생각보다 별반 달라진것 없이 살게 될 수도 있으리라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기록될까 궁금해진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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