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병과 사자 :: '내 맘대로 작품 보기' 태그의 글 목록
2020. 5. 8. 00:52 미술 이야기

한동안 빈센트 반 고흐의 꽃 그림을 시리즈로 올리는 통에 '내 맘대로 작품 보기'의 원래 취지에는 벗어나서 반 고흐의 그림을 줄창 포스팅 했다.

원래 내가 '내 맘대로 작품 보기'라는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것은 작품을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가진 채, 작품 자체만 직관적으로 보고 감상평을 써보자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글 한번 쓰기 너무 어렵고 준비시간이 너무 걸리는데, 그렇게 오랜 조사기간을 거친는 것이 반드시 작품 감상을 자~알 하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품과 작가에 대한 오랜 조사를 한 뒤에서야 글을 쓰는 작업은 어차피 오랫동안 해오고 있는 일이라 블로그에서만이라도 연구에 대한 부담감은 덜어내고, 직관적으로 작품 감상을 해보자 싶어서다.  결국 '내 맘대로 작품보기'는 내가 가진 '훈련된 직관'이란 것이 있다면, '훈련'부분보다는 '직관'이라는 부분을 좀 더 다듬어보고 싶어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그러한 '내 맘대로 작품 보기'의 취지에 잘 맞는 작품이다. 이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는 페북에서 발견하기 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고, 그냥 단순히 그림이 맘에 들어서 포스팅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름은 짐 에드워즈 (Jim Edwards), 작품 제목도 발음 자신없게시리, 'Plas Canol to the Moelwyns'이라는 제목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도 실제 지명인듯 하다. 

Jim Edwards, Plas Canol to the Moelwyns

다른걸 다 차치하고라도 그림을 보고 하~하며 안도가 섞인 탄성을 내뱉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고마운 그림이다. 아직도 맘 놓고 맑은 공기 들이키며 바깥을 나돌아다니지 못한 상황에서 명료한 색상으로 이토록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을 눈 앞에 펼쳐지게 해주다니!  맑은 공기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결코 나올 수 없을것 같은 선명한 색상과 명확한 윤곽선. 그리고 간략화한 선들은 질서감을 선사하지만, 동시에 조화롭게 깃들여진 율동감은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아래는 우연히 작가 이름을 검색하다가 발견하게 된 기사. 

https://www.chroniclelive.co.uk/whats-on/arts-culture-news/artist-jim-edwards-opening-ouseburn-10497237

 

Artist Jim Edwards is opening his Ouseburn Studio doors for the special Christmas event

The working spaces of more than 200 artists and designers will be open to the public during the popular festive shopping weekend

www.chroniclelive.co.uk

기사 속에 등장한 작가가 작업중인 사진 한장. https://www.chroniclelive.co.uk/whats-on/arts-culture-news/artist-jim-edwards-opening-ouseburn-10497237

기사를 읽어보니, 작가는 영국 작가이고 자신의 스튜디오 겸 갤러리도 소유하고 있으며 현재 아주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듯하다.  그리고 심지어 그의 홈페이지와 페북 주소도 발견했다.  덕분에 그의 다른 작품들도 (온라인 상으로나마) 더 둘러볼 수 있었는데, 역시 난 내가 처음 발견한 작품이 가장 맘에 든다. 

https://www.jimedwardspaintings.com/

 

Jim Edwards

Cityscape & landscape painter, artist. Studio Gallery.

www.jimedwardspaintings.com

https://www.facebook.com/jimedwardsartist/

이즈음 되니, 새삼 우리가 얼마나 네트워크가 촘촘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오늘 날에는 제2의 빈센트 반 고흐는 나오기 힘들 것같다.  프랑스나 네덜란드에서 알아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는 반드시 그의 작품의 진가를 알아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며칠 전만해도 난 이 제임스 에드워즈라는 작가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오늘 나는 그의 홈페이지와 페북을 통해서 그의 당일 스케줄까지 알게 되었지 않은가?  

 

 

미술사적으로 조금 생각해보면 그의 화풍은 야수파의 시초라고도 표현주의의 선구자라고도 알려진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초기 풍경화와도 유사하고, 그의 동반자이자 최초의 표현주의 그룹인 청기사파에도 속했던 가브리엘 뮌터 (Gabriele Münter: 1877-1962)의 화풍과도 유사하다. (칸딘스키의 경우 점점 더 과격하게 추상으로 내달리면서 초기의 러시아 전통미술에서 영향을 받았던 윤곽선이 뚜렷하고 원색이 강렬한 화풍은 버리게 된다. 미술사 개론서엔 일반적으로 후기의 작품들만 예로 실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의 초기 작품들은 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아래는 초기의 칸딘스키 작품과 가브리엘 뮌터의 작품의 예들.

칸딘스키의 초기 풍경화
가브리엘 뮌터의 작품

  

맥락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앤디 워홀이 수십년전 '누구나 다 15분간의 명성은 가질수 있다'고 했다. 매일 떠오르고 사라지는 유명 유튜버들을 보면서, 그 말이 오늘날 실현되고 있음을 실감하는 중인다.   오늘날은 알려지기까지도 잊혀지기까지도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간다는 맹점은 있긴 하지만 말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20. 5. 1. 00:24 미술 이야기

의도한 것은 아닌데, 계속해서 반 고흐의 꽃 그림을 올리게 된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번이라는데, 무려 네번째!  이렇게 포스팅으로라도 꽃 놀이를 해서 소중한 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에 대한 보상을 해보겠다는 맘이다. 그리고 새삼 깨닫게 된다. 반 고흐는 정말 꽃 그림을 많이 그렸구나.   (이전의 반 고흐 포스팅 아몬드 꽃, 복숭아 꽃, 배꽃에 대해서는 링크를 참고)

정말 그렇다! 그래서 세계 유명 미술관 곳곳에 그의 꽃 그림이 안 걸린데가 없을 정도다.  상황이 그러하니, 그의 어떤 꽃 그림은 내가 본 적이 있는지 아님, 어디서 본 건지 알쏭달쏭 아리까리 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의 제비붓꽃 그림은 전시실의 분위기도 기억날 정도로 확실히 기억난다. 가끔 그런 작품들이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나이트 호크스'가 그러했고, 이 블로그의 제목이 된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가 그러했다).  반 고흐의 '제비붓꽃들 (Irises)'는 J. 폴 게티 미술관에서 봤다.  [난 붓꽃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포스팅을 계기로 찾아보고 화면에 나타난 꽃은 '제비붓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Vincent van Gogh (1853-1890), Irises (1889) oil on canvas; 74.3 × 94.3 cm, J. Paul Getty Museum

그리 대작은 아니지만, 내가 생각했던 규모보다는 꽤 큰 작품의 크기에 놀라고 화면 가득히 채운 꽃을 그려낸 힘찬 붓질과 생생한 색감에 놀라고,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중에 제일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 <제비붓꽃들>을 소개한다.  사실 제비붓꽃은 서양화가들이 많이 그리는 꽃의 종류는 아닌데, 반 고흐는 이 특이한 꽃을 꽤나 좋아했나보다.  그가 그린 또 다른 제비붓꽃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적인 제비붓꽃 그림이 미국의 동서부에 각각 한 점씩 있는 셈이다. 

핑크색 벽과 대조되는 바이올렛 빛깔의 붓꽃이 화려함을 더한다. 반 고흐가 사용한 분홍색은 변색이 심해서 오늘날 남은 작품에서는 거의다 흰색으로 보인다. 이는 아래 장미꽃을 그린 화병의 장미꽃 색들도 마찬가지.  Vincent van Gogh, Irises (1890) oil on canvas ; 73.7 x 92.1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위의 제비붓꽃이 가득 꽃힌 화병은 1890년 5월 그가 생 레미의 정신병원을 퇴원하기 전에 폭발적으로 그려낸 두 점의 제비붓꽃 화병과 두 점의 장미 화병 그림 중 하나다. 저번 포스팅에도 언급했듯이 그는 1890년 7월 자살인지 타살인지 논란 중인 총상으로 세상을 뜨게 되므로 이 작품은 그가 죽기전 두달 전에 완성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작품과 함께 그가 그렸던 장미 화병 그림들 (아래 그림 참고)과 또 한 점의 제비붓꽃 화병 그림은 1907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그의 어머니가 소장했던 작품이라고 한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에 그가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 중에 그렸던 두 점의 장미 화병이 각각 한 점씩 소장 중이다.  Vincent van Gogh  (1853–1890), Roses (1890) oil on canvas ; 71 x 90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Vincent van Gogh, Roses (1890) oil on canvas ; 93 x 74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에 그가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 중에 그렸던 두 점의 장미 화병이 각각 한 점씩 소장 중이다.  Vincent van Gogh  (1853–1890), Roses (1890) oil on canvas ; 71 x 90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다시 제비붓꽃으로 돌아와 보자. 장미나 다른 화병의 꽃들도 즐겨 그린 반 고흐이지만, 그의 제비붓꽃은 여러모로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비붓꽃을 그린 서양화가들이 그리 없기도 하고, 다른 꽃들보다 에너지면이나 색감면에서 단연 그의 제비붓꽃 그림은 독보적이라 생각한다.  아직 학술적으로 조사해보진 않았지만, 난 그가 그의 제비붓꽃 소재를 일본의 작품에서 따온게 아닌가 생각해왔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그의 제비붓꽃 화병 그림을 감명 깊게 보고 나서, 일본의 장식적인 미술을 대표하는 오가타 코린 (Ogata Kōrin (尾形光琳): 1658-1716)의 제비붓꽃 그림을 그린 대형 병풍을 연이어서 봐서 였을까? 금박을 배경으로 녹색과 청색을 아낌없이 사용한 그의 제비붓꽃이 리드미컬하게 펼쳐져 있는 병풍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Ogata Korin (尾形光琳), Irises at Yatsuhashi (left) (Metropolitan Museum of Art)
 Ogata Korin (尾形光琳), Irises at Yatsuhashi (right) (Metropolitan Museum of Art)

오가타 코린은 금박을 배경으로 제비붓꽃이 만개한 병풍을 수 점 제작하였고, 세계 각곳의 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그리고, 이 제비붓꽃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그 얘기인 즉슨, '이세 모노가타리 (The Tales of Ise (伊勢物語))' 혹은 '이세 이야기'라고 하는 일본의 헤이안 시대 고전으로 와카라고 하는 일본의 시로 구성된 옛날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주인공이 신분이 높은 귀족 여성과의 연애가 발각되어 교토에서 추방되게 되었는데, 떠나는 길에 야츠하시 (8개의 다리) 위에서 연애시를 읊는다.

이세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병풍 속에 인물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지만, 이 작품을 보면 일본 사람들이라면 이 꽃과 다리가 그 장면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반 고흐가 그 내용까지 알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고, 그가 고가인데다가 부피도 큰 이 금박 병풍을 직접 봤을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그는 부채나 우끼요에 작품 같은 저가인데다가 이동이 용이한 작품들 중에 이 작품과 유사한 그림을 본 적이 있으리라 짐작해본다.   

Ogata Korin: Irisis, right screen, 151x360 cm. Ink, color and gold on paper, begin. 18th-century. Nezu Art Museum
Ogata Korin: Irisis, left screen, 151x360 cm. Ink, color and gold on paper, begin. 18th-century. Nezu Art Museum.

이로써 무려 네번에 걸친 반 고흐와 함께하는 봄 꽃놀이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어느새 5월이다. 5월에도 꽃들은 피어 있을 것이고, 아직도 전염병에의 공포는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달을 맞아 기분 전환하고 활기찬 생활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20. 4. 27. 16:52 미술 이야기

지난 며칠 계속 반 고흐의 꽃나무에 대해서 포스팅을 하고 있다. (아몬드 꽃복숭아 나무) 오늘은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반 고흐의 꽃나무 한 그루를 올려본다.   이 작품을 그린 시기는 복숭아 나무와 과수원 그림을 많이 그리던 시기 1888년 4월, 장소도 마찬가지로 아를르 지방에서 그린 것이다. 그는 유독 아래 그림처럼 오도카니 한 그루 나무를 많이 그렸다. 

Vincent van Gogh (1853 - 1890), Small Pear Tree in Blossom (1888)  oil on canvas ; 73.6 x 46.3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저번에 언급한 것처럼 이렇게 전방에 뚜렷한 윤곽선으로 주제를 그리는 방식은 우끼요에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아몬드 꽃 참고할것) 하지만 그의 나무에는 왠지 모를 짠~함이 느껴진다. 주변엔 아무 것도 없이 혼자 서있는 나무. 뒤틀린 나무 줄기에 열린 꽃들은 아름답지만, 보통 그렇게 작은 꽃들이 모여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의 정취와는 좀 다른 고즈넉함이 느껴진다.   꽃은 많아도 아름답고 홀로 피어도 아름답지만 말이다. 

 

위의 배 나무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꽃 핀 복숭아 나무>  Vincent van Gogh (1853 - 1890),  Peach Tree in Blossom  (1888), oil on canvas ; 50 x 37.5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20. 4. 24. 17:50 미술 이야기

며칠 전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 - 1890)의 <아몬드 꽃>에 대해서 포스팅을 하였다. 오늘 '내 맘대로 작품 보기'편은 저번 작품보기 보다 더 '내 맘대로~'의 취지에는 벗어난다.  이전에 몇 번 스쳐지나듯 봤을지도 못하는 이 복숭아 나무 그림의 뒷야기와 이와 연관된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8년 4월1일 일요일자)를 요번 기회에 처음 읽게 되었으니, 오늘의 '내 맘대로 작품보기'는 '그림과 함께 편지 읽기'라고 이름 붙여야할지도...

지난번의 <아몬드 꽃>은 새로 태어난 조카에 대한 사랑과 어린 생명에의 축복과 희망으로 가득한 작품이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는 작품이다. 비록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 그를 염두에 두고 그린 작품은 아니지만 말이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반 고흐의 분홍색 복숭아 나무 (The Pink Peach Tree)  (1888)이다.  지난번의 작품과 비교하면 약간 작지만 비슷한 크기이고 같은 꽃나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색조면이나 붓자국의 면에서나 많이 차이가 난다.  (인터넷 상으로 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의 이미지가 아래 띄운 이미지라 원래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다 담을 수 없음은 아쉽지만 감안하고 감상하시길.) 

 

자신에게 처음으로 화가의 길을 제시해주고, 그림을 가르쳐주었던 사촌의 남편인 안톤 모브에 대해 각별한 심정을 가졌던 것 같다. 그의 부고를 듣고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는 위의 작품 <분홍색 복숭아 나무>를 미망인이 된 사촌에게 자신과 동생의 이름으로 보낼 것이라 밝히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모브에 대한 추억> Vincent van Gogh, <Souvenir de Mauve (Reminiscence of Mauve)> (1888), oil on canvas ; 73 x 60 cm, Kröller-Müller Museum

반 고흐가 (자신의 환상 속의) 일본의 기후와 유사한 아를르 지방에 옮겨온 뒤, 그 해 봄에 그린 것이다.  반 고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겠지만, 그는 과수원을 주제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반 고흐는 화려하고 커다란 꽃망울을 지닌 장미나 목단보다는 하나보다는 무더기로 모여서 흐드러지게 피어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라일락이나 배꽃, 아몬드 꽃, 그리고 복숭아 꽃과 같이 자잘한 꽃들과 나무들을 많이 그렸다. 

위의 작품 <분홍색 복숭아 나무>에 대해서는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1888년 4월1일자로 보낸 편지에서, 그 제작과정과 그림의 왼쪽 아래에 자신의 서명 위에 "Souvenir de Mauve"라고 쓰게 되었던 경위에 대해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빈센트는 위의 작품에 대해서, '앉은 자리에서 단번에 야외에서 넓게 펼쳐진 과수원에 복숭아 나무들과 푸르른 하늘과 흰 구름'을 그렸노라 하면서, '이제까지 자신이 그린 풍경화 중에서는 제일 잘 된 것'이라 자부한다. 이 작품을 완성하고 집에 들어왔을 때, 그는 사촌으로부터 안톤 모브 (Anton Mauve: 1838-1888)의 초상화 한 점과 함께 그의 부고 소식을 받게 된다.  

안톤 모브는 헤이그 화파를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헤이그 화파는 프랑스의 바르비종 화파와 유사하게 야외의 풍경을 주로 주제로 다루었다. 이들의 화면의 색상에서 '회색 화파'로 불리기도 한다. Anton Mauve (1838-1888), Morning Ride on the Beach (1876) oil on canvas ; 45 x 70 cm, Rijksmuseum, Amsterdam

안톤 모브로 말하자면, 반 고흐의 외사촌의 남편으로 당시에는 꽤 알려진 화가였는데, 친절하게도 방황하던 반 고흐를 화가의 길로 인도해준 사람이었다. 1881년, 반 고흐는모브의 스튜디오로 옮겨가 그의 밑에서 그림을 배웠고, 그는 반 고흐의 생활을 돌봐줬다고 알려져 있다.  비록 그가 반 고흐에게 그림을 봐 준 것은 길어야 한달 남짓에 불과하기에 그 둘이 함께 지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처음에는 친절했던 그가 금세 차가워져서'는 반 고흐에게 더 이상 그를 돌봐줄 수 없다고 잘라말했다고 한다. 그게 그의 변덕인지 아님 반 고흐에겐 주변 사람들을 못견디게 하는 뭔가가 있었는지 잘 모르지만 말이다. 모브의 입장에서 보면, 반 고흐는 '그림보다는 산책을 더 좋아하는' 게으르고 싹수 안보이는 청년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고, 혹은 당시 반 고흐가 사귀던 여성이 애 딸린 매춘부라 그러한 그의 사생활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에게 처음으로 화가의 길을 제시해주고, 그림을 가르쳐주었던 사촌의 남편인 안톤 모브에 대해 각별한 심정을 가졌던 것 같다. 위에 언급한 편지에서, 그의 부고를 듣고 빈센트는 감정이 격해져 '목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들어서 자신이 막 완성한 그림 <분홍색 복숭아 나무>에 "안톤 모브에의 추억, 빈센트와 테오"라고 썼고, 미망인이 된 사촌에게 자신과 동생의 이름으로 보낼 것이라 밝히고 있다. (현재 작품에 Theo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나중에 빈센트가 지운 것이리라)

그러면서 편지에는 '내 생각에는 모브 씨에 대한 추억은 너무 심각한 것이 아니라 정답고 즐거운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하면서 이런 구절을 덧붙이고 있다. 

‘Don’t believe that the dead are dead.
While there are people still alive 
The dead will live, the dead will live’.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한 죽은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  /죽은 자는 (산사람과 더불어) 살 것이다. 죽은 자는 (산 사람과 더불어) 살것이다. 

위의 문구는 마치 반 고흐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세상을 뜬지 무려 1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는 우리와 더불어 이 봄을 맞고 있다. 

1888년 4월에서 5월 사이 아를르에서 그렸다는 분홍색 배 나무.  빈센트는 비슷한 시기 복숭아 나무 그림을 두 점 그렸는데, 그 중 하나는 모브에게 헌정했고, 또 하나는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냈다.   아래 작품은 내가 찾아본 한도에서는 <분홍색 복숭아 나무>와 구도가 가장 비슷한데, 이 작품이 동생에게 본 작품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Vincent van Gogh (1853 - 1890),  The Pink Peach Tree  (1888),  oil on canvas ; 80.9 cm x 60.2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20. 4. 20. 18:36 미술 이야기

오늘 소개할 작품은 엄밀한 의미에서 '내 맘대로 작품 보기'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원래 '내 맘대로 작품 보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내가 사전 지식이 없이 우연히 맞닥뜨린 작품 중 맘에 드는 것을 따로 깊이 있는 조사를 하는 일 없이 내가 본 것과 직관에 기초해서 글을 써보자는 것이 취지였다.   그런데 오늘 올리는 작품은 내가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리는 이유는....

이 봄 변변하게 흐드러지게 피는 봄 꽃들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지내는게 안타까워서 그림으로라도 상쾌한 봄 날의 공기속에 만개한 꽃을 만끽하며 그 설렘을 나눠보고자...

예전 학교 다닐 때 주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미술사나 미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나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화가로 빈센트 반 고흐가 '당첨'된 적이 있다. 그리고, '왜 우리 모두는 반 고흐를 사랑하는가?'라는 답없는 질문에 한동안 얘기에 열을 올리기도 했었다. 나로서도 반 고흐가 최애 작가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 중 몇 작품은 각별히 좋아해서 오늘 소개하는 그림은 한동안 스마트폰 커버로 사용하기도 했다. (꽤 거금을 주고 인터넷에 주문을 했는데, 내가 기대해 마지 않았건만, 실제로 받은 제품은  화면으로 봤던 쨍하던 청록색 하늘이 아니라 실망을 하긴 했지만! 거금 (?)을 들인게 아까워서)    

Vincent van Gogh (1853 - 1890),  <Almond Blossom> ( February 1890,  Saint-Rémy-de-Provence) oil on canvas ; 73.3 x 92.4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반 고흐 뮤지엄에 소장 중인 이 작품은 미술관 사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1890년 2월  남프랑스 지방인 생-레미-드-프랑스에서 그려진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오늘 소개할 작품은 모두가 사랑해 마지않는 네덜란드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 - 1890)의 <아몬드 꽃 (Almond Blossom)>(1890)이다. 1890년 2월에 그려진 이 작품은 그해 1월 31일 동생 테오와 그의 아내 조 사이에서 태어난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이었다.  동생 테오의 남달랐던 우애는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특히나 조카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딴 Vincent Willem van Gogh로 지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빈센트는 각별히 더 기뻤던 모양이다. 그의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 '조카의 이름을 자신들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었어야 하는거 아닌가'하면서도 '그 소식을 듣자마자 위의 작품에 착수했다'고 알리고 있다.  청록색의 신선하고 청명한 하늘을 배경을 힘차게 쭉쭉 뻗은 가지 위로 아름답게 피어난 흰색 아몬드 꽃들은 새롭게 탄생한 생명에 대한 축복과 희망으로 가득차 있다.    

자연 속에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는 빈센트 반 고흐가 좋아하는 주제였긴 하지만, 아몬드 꽃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던 듯 하다. 이미 2년전 그는 아직 추운 겨울임에도 싹을 틔운 아몬드 가지가 유리병에 담아 2점이나 그리기도 했다.  

Vincent van Gogh, Blossoming Almond Branch in a Glass (1888) Van Gogh Museum, Amsterdam

빈센트 반 고흐가 좋아한 것은 꽃나무 뿐 만은 아니다. 그는 유명한 일본미술 팬이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는 폭넓게 일본풍의 유행이 있었다. 이를 자포니즘 (Japonisme)이라는 명칭이 따로 있을 정도로 콜렉터와 애호가들 사이에 엄청난 인기였다. 빈센트 반 고흐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본 미술을 무지 사랑했고, 실제로 일본의 목판화 (우끼요에)를 상당수 수집하기도 했다.   <아몬드 꽃>에서도 일본 목판화의 영향이 보이는데, 주제를 근거리에서 확대해서 그림으로서 강한 윤곽선으로 표현된 가지들이 화면 밖으로 잘려져 나간 듯한 구도는 우끼요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히로시게와 같은 유명 우끼요에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모사하기도 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안도 히로시게의 우끼요에 목판화 작품을 유화로 모사한 작품. 한자를 알았을리 없던 반 고흐가 그려놓은 한자를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 Vincent van Gogh, Japonaiserie Flowering Plum Tree (after Hiroshige) (1887) oil on canvas; 55 x 46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안도 히로시게의 에도 100경 중에서 30번째 작품인 <카메이도 매화 공원>. 판화 작품이다보니 소장처는 세계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Ando Hiroshige, Plum Park in Kameido (亀戸梅屋舗, Kameido Umeyashiki) number 30 in the series One Hundred Famous Views of Edo (1857), a woodblock print in the ukiyo-e ; 37 x 25 cm

 

사실 빈센트 반 고흐와 자포니즘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되어 있고, 그런 사전 지식 없이도 시각적으로도 영향이 너무 명백해서 오늘은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뭐 그가 애초에 아를르 지방으로 옮긴 것도 일본과 같은 따뜻한 햇살이 항상 빛나는 곳을 찾다가 가성비가 높은 아를르 지방에 정착을 하게 된 것이고,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작품은 궁극적으로 다 '일본적'이라고까지 천명한 작가이니까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는 습도 높은 일본의 기후를 지중해의 태양 가득한 기후로 만들어 버린 것은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일본에 대한 환상의 결과물!)

이 <아몬드 꽃>이라는 작품을 오늘 선택한 것은 왠지 모르지만, 내가 이 작품을 접할 때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찬란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는 내 맘까지 벅차오르는 듯하게... 물론 이와는 상반되게 역시 왠지모를 '처연함'도 함께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벅참과 쓸쓸함의 절묘한 조화가 나로 하여금 이 작품이 프린트된 스마트폰 커버를 사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빈센트 반 고흐가 <아몬드 꽃>을 그린 것이 1890년 2월이고, 그가 생을 마감한 것이 같은 해 7월이니까, 이 작품은 그가 세상을 뜨기 전 불과 5개월 전에 완성한 작품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불태워서 그린 그림이라서 그런걸까? 아님 그건 그냥 남은자가 덧붙이는 쓸데없는 감상(感傷)적 감상(感賞)인건가?  

오늘의 내 맘대로 작품보기, 빈센트 반 고흐의 <아몬드 꽃>이었습니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31. 13:52 미술 이야기

이 글에는 2편이 있어요.    1편만 읽고 오류를 지적하시지 마시고~ (뭐 하셔도 괜찮습니다만), 어쨌든 2편까지 꼭 읽어주세요~ 혼란을 야기했다면 죄송합니다. 

인도계 영국작가인 아니쉬 카푸어 (Anish Kapoor)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아마도 시카고의 밀레니엄 파크에 설치된 <구름 문 (Cloud Gate)>라는 작품일 것이다. 나만 해도, 아니쉬 카푸어라는 외우기 힘든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이 작품을 통해서였다.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 파리에 가면 에펠탑 앞에서 사진 찍듯이, 너나없이 모두 이 거대한 강남콩 앞에서 포즈를 취하곤 했다.  물론 나도 이 앞에서 몇 차례....  선촬영 후감상.  

공공설치인 탓에 이 작품은 당시의 기후의 변화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에 따라 비춰지는 풍경의 모습도 매번 변한다.  일단 거대한 조각품은 전통적 조각에서 느낄 수 없는 규모와 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그 아름다움을 느끼느냐 아니냐는 개인차가 있으니 패스. 

이 작품이 인상적인 작품은 알루미늄이라는 현대적 매체를 사용하고 형상도 도우넛 모양의 충분히 현대적 형상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전달하는 미학은 지극히 동양적이라는데 있을 것이다.  'bean'이라는 별칭처럼 도우넛 같기도 하고, 콩의 형상을 하고 있는 형태의 특징과 거대한 규모 탓에 주변의 풍경이 오롯이 다 비춰진다. 따라서 삼라만상을 다 담고 있는 우주와도 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그 속에 비춘 나의 작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우주 속에 갖힌 또다른 나와 마주하게 되고, 과연 진정한 나란 누구인가...하는 '장자의 나비'같은 생각도 하게 한다. 한편 거대한 <구름 문>과 대비되는 그 속에 비친 조그마한 내 모습에서 내 존재의 미미함을 느끼면서 철학적 사유를 하게 된다고나 할까?  

Anish Kapoor, Cloud Gate (2006), Stainless steel sculpture, 10 × 13 × 20 m,  Millennium Park, Chicago.  고광택제의 알루미늄으로 제조한 조각으로 아니쉬 카프어의 대표작. 북쪽의 마천루를 비추고 있는 모습을 동쪽에서 촬영한 것. 북쪽으로는  East Randolph Street을 따라 마천루들이 즐비하다.   

 

Anish Kapoor, Cloud Gate (2006), Stainless steel sculpture, 10 × 13 × 20 m,  Millennium Park, Chicago 

 

그러던 작품이었으나, 최근 영하를 밑도는 강추위에 이렇게 쪼그라들었다는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댓글 중에는 '이제야 작품 같아졌네.'라는 글도 있더라마는, 나같은 경우는 원상회복이 될 것인지 심히 걱정이 되었다.  나의 추억도 담겨 있는 조각품이 또 다시 아름답게 삼라만상을 비추어줬음 좋겠다는 바람.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은 국내에도 있다. 리움 미술관 야외 정원에 두 점과 실내에 한 점~

하늘 거울 (Sky Mirror)는 여러버전이 있고, 리움의 작품과 대동소이하다. 

예전에 안토니 곰리에 대한 글을 쓰면서 리움 미술관은 종합선물세트와도 같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건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에도 해당이 되네요.  안토니 곰리에 대한 그 글이 궁금하신분 여기를 참고하세요.  

 

아니쉬 카푸어의 공공조각 다른 작품으로는 <하늘 거울 (Sky Mirror)> 있다.  시카고의 <구름 (Cloud Gate)> 마찬가지로 고광택제 알루미늄으로 제작되어 하늘을 비추는 오목한 접시모양의 설치물로 여러가지 버전이 세계 곳곳에 있다.  

최초의 버전은 2001 영국 노팅엄의 웰링턴 서커스 (Wellington Circus, Nottingham, England) 설치된 것이다. 작품은 무게가 10 톤에 육박하고 6 미터 너비의 오목한 접시로 하늘을 향해 고정되어 있어, 거울과도 같은 매끈한 표면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을 반영한다.   버전은 2006 9 19일부터 10 27일까지 한시적으로 뉴욕의 록펠러 센터에 설치되었던 버전이 있는데, 무려 11m 지름으로 3 높이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볼록한 면은 5번가를 오목면은 록펠러 센터의 안뜰 쪽을 향해서 독특한 풍광을 제공했었다

이밖에 영구 설치로는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허미타지 미술관 (Hermitage Museum) 네덜란드 틸버그 (Tilburg) 드퐁 현대미술관 (De Pont Museum of Contemporary Art), 달라스의 AT&T Statium 있다. 그리고, 한국의 리움 미술관.  

아니쉬 카푸어, <하늘 거울 (Sky Mirror)> 2006 9 19일부터 10 27일까지 한시적으로 뉴욕의 록펠러 센터에 설치되었던 버전이 있는데무려 11m 지름으로 3 높이에 해당하는 규모

 

1980년대부터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명실공히 세계적 작가인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세계는 시기별로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시카고의 <구름 문>이 가장 인상적이었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 내가 한차례 아핫! 하고 아이디어에 감탄했던 작품은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되었던 <승천 (Ascension)>이라는 작품.  

‘ascension’ by anish kapoor, basilica di san giorgio, venice image by oak taylor-smith

 

 

서양의 중세때부터 수도 없이 그려졌던 예수 승천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런 신박한 표현을 착안해내다니!   어떤 의미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가장 '리얼리즘'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쉽게도 나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은 고사하고, 직접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목도한 경험도 없지만, 영혼이라는 것은 본래 형상을 지닌 것이 아니니, 만약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니시 카푸어의 작품과 가장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원을 따지자면, 뒤샹의 '남성 소변기'에서 출발했고, 이후 팝아트와 네오팝 작가들이 끊임없이 시도해온 '발상의 전환'과 '사고의 전복'을 통해 유발되는 '충격'이 예술의 목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충격 요법'을 지향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중 하나라면, 그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참고로 아래는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그려졌던 예수 승천의 다양한 예들 중 일부.  아래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얼마나 참신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Rembrandt (1606–1669), The Ascension (1636), oil on canvas ; 93 x 68.7 cm, Alte Pinakothek 

 

Master of the Rabbula Gospels, The Ascension of Christ (586) Parchment, 34 × 27 cm, Biblioteca Medicea-Laurenziana

Benvenuto Tisi da Garofalo, Ascension of Christ, 1510-20. Source: Wikimedia Commons

Gebhard Fugel, Ascension of Christ (1893/94), Catholic Parish Church of St. John Baptist, Obereschach, Ravensburg

 

쪼그라든 강남콩 모양의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을 보고 써본 내맘대로 작품 보기 세번째 시간이었습니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1. 22. 08:19 미술 이야기

작년 12월 초 순경에 한 기사에서 서도호 작가의 작품이 "The Best Public Art of 2018"으로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브릿징 홈, 런던(Bridging Home, London)’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예전 그의 'Seoul Home'과 유사하구나 생각하면서, 잠깐 훑어보았다.  UAP라는 단체가 제정한 3년차 되는 상이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일단 그 단체가 뭔지 자세히 모르겠고, 3년차니까 상자체가 자리를 잡은 건 아니겠구나 하면서 그냥 지나긴 했다. 서도호는 원체 내가 관심있어 하는 작가라 일단 북마크를 해두고 나중에 다시 한번 살펴봐야지 하다가 연말 바쁜 통에 잠시 잊고 있었다. 

Do Ho Suh, Bridging Home, 2018, London. Co-commissioned by Art Night and Sculpture in the City, and curated by Fatoş Üstek.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Victoria Miro Gallery, and Gautier Deblonde (관련기사: https://www.artsy.net/article/artsy-editorial-best-public-art-2018)

오늘은 한동안 블로그 글도 못올리고 있다가 다시 '내 맘대로 작품 보기' 시리즈(?)의 두번째 시간에 올리기로 맘 먹었다. 

내가 서도호 작가의 작품과 처음 접한 것은 뉴욕에서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PS1이라는 곳에서 신생 유망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아둔 전시회였다.  그 때 전시되었던 작품은 하나는 'Who Am We?'(2000)라는 작품이었고, 또 하나는 'High School Uniform'(1997)이었다.  

당시 인상은 참 참신하다는 인상과 함께, 아이러니하게 참 '한국적'이라는 느낌이었다.  라벨로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기도 전이었고, 작가에 대한 정보도 없던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작가의 이름을 보고도 발음상으로는 한국 사람 이름 같지만, 작가의 성장배경, 교육과정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한참 이후의 일이었기에 당시로는 확신을 갖지 못했었다.)  

(PS1은 Public School 1이라는 뜻인데, 폐교가 된 뉴욕의 공립학교를 미술관으로 바꾸어서 전위적인 작품들을 전시하는 곳이다.

Do Ho Suh, Who Am We? (Multi) (2000) Offset wallpaper ; sheet (each): 61 x 90.8 cm, MoMA ; 아래 사진은 위 작품의 세부 (image from MoMA)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얼굴 하나 없는데, 벽지로 제작된 이 사진첩(?)은 멀리서보면 모두가 같은 모양의 점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뽀인트라고 할 수 있다.  제목도 'Who am I?'가 아니다. 'Who ARE We?'도 아니다. 'Who AM WE?'이다. 여럿이지만 하나로 뭉뚱그려진 존재들.   


Do Ho Suh, High School Uniform (1997) (인터넷에서 가져온 이미지로 내가 본 전시장의 모습은 아니지만, 대략 분위기는 전달되리라 생각한다)

아, 이 이상 한국의 교육 환경을 잘 표현한 작품이 있을까 하는 느낌.  물론 요새는 학령인구가 줄어들어 한 반 학생 수가 소수이기도 하고, 교복 자율화를 거쳐 교복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훨씬더 다양하고 이쁜 교복들이 많지만, 국민학교를 나온 세대라면 윗 작품에서는 코딱지 만하게 얼굴이 실리던 '국민학교 졸업앨범'을 떠올릴 것이고, 아래 작품을 보면, 예전 고등학교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을 방문한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발언의 패러디 급의 문구가 유행한 적이 있었고, 그 여세를 몰아 뉴욕 빌보드에 비빔밥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리기도 했었다.  미술계에서도 저 화두에 맞춰 여러 작가들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많았었던 것으로 안다.  그 고민에 결정적인 해결방법은 없었던 듯, '이제는 단청 문양과 오방색은 그만 보고 싶다' 는 소망이 생길만큼 천편일률적인 '한국적임'에 지쳤던 관람객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에 반해, 서도호의 작품에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저 작품들을 본 외국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무엇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천편일률적인 규격에 맞추어 넣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임을 다 알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신하면서도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라 크게 인상 깊었다. 벽지 작업은 앤디 워홀은 물론 로버트 고버 등 유명한 팝 작가들이 많이 사용한 작품 기법이기도 하고, 마네킹들의 설치들도 수많은 작가들이 사용한 방법이라 기법만으로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로버트 고버 Robert Gober 의 설치 작품 (1989)

서도호의 작품들을 두번 째로 만난 것은 수년 후의 그의 개인전이었는데, 이것도 꽤 오래전의 일이다. 

그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Karma"라는 제목의 설치 작품인데, 커다란 인물의 조상을 다리 부분만 크게 만들어 갤러리 전체를 차지하게 만들어 놓고 그의 내딛는 구둣발 아래로는 어릴적 남자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초록색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그마한 군인 인물상들이 그 발걸음을 떠 받치고 있는 형상이었다. 

Do Ho Suh (b.1962), Karma (2003), Urethane paint on fiberglass and resin, 389.9 × 299.7 × 739.1 cm, 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두번째로 인상 깊은 작품으로는 'Some/One' (2001)이라는 애매모호한 제목의 작품으로, 얼핏 멀리서 보면 이순신 장군이 입으셨을 법한 갑옷 같은 조각품 같은데, 가까이서 보면 셀 수없이 많은 군인들의 인식표 (Dog tag)들을 이어 만든 설치 작품이었다. 

Do Ho Suh, Some/One (2001) at the Seattle Art Museum, Washington

Do Ho Suh installs Some/One (2001) at the Seattle Art Museum, Washington, 2002. Production still from the Art in the Twenty-First Century Season 2 episode, Stories, 2003. © Art21, Inc. 2003.

Do Ho Suh, Blue Green Bridge (2000), plastic figures, steel structure, polycarbonate sheets, 1137.9 x 129.5 x 61 cm, Edition of 2, LM2466 (위)와 그 세부 (아래) https://www.lehmannmaupin.com/artists/do-ho-suh  이 작품에서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의를 위한 소의의 희생에 대해서 좀 더 확실히 표현하고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이 작은 군상들이 커다란 청록색의 다리를 만들기 위해 힘겨운 몸놀림으로 떠받들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들에서는 공통적으로 한 명의 위인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이 떠받들고 희생을 해야하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한국의 현대사와 나란히 생각해보면, '군 독재의 군화에 짓밟힌 민중'이라는 이미지일 것이라는 짐작도 할 수 있게 해준다.  두번째 전시회는 작품의 모습과 형식적인 면에서는 첫번째 내가 봤던 전시회의 것들과 전혀 달랐지만,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점에서도 놀라왔다.  전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진 개별성과 그로 인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그러던 그의 작품 세계가 확연히 달라진 것은 그의 집 시리즈에서였다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대학원과 군복무까지 마친 그가 미국에서 다시 학업을 하면서 느꼈던 '노마드'적인 정서를 담았다는 평을 얻고 있는 작품들이다. 

Do Ho Suh, Seoul Home/Seoul Home/Kanazawa Home (2012) silk, metal armature, 1457 x 717 x 391 cm, LM16332 https://www.lehmannmaupin.com/artists/do-ho-suh 

Do Ho Suh, Seoul Home/L.A. Home/New York Home/Baltimore Home/London Home/Seattle Home 1999, silk, 149 x 240 x 240 inches, Installation view at the Korean Cultural Center, Los Angeles, 1999 

이 작품들도 한편으로는 팝아트적인 어휘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딱딱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라는 촉감과 질감의 전복을 통해 유용성을 제거함으로써, 충격과 신선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클레즈 올덴버그 (Claes Oldenburg: b.1929)가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있다. 

클레즈 올덴버그의 작품들, Soft Sculptures

서도호는 올덴버그의 촉감과 질감의 전복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땅에 굳건히 자리한 집'이 공중에 떠 있게 만듦으로서 굳건함과 부유함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충돌하게 만들었다.  또한 불투명한 건축물을 재질상 거의 투명한 올 고운 모시나 명주천을 사용함으로써 투명/불투명 사이의 전복도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전복을 통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추억과 경험, 그리고 미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오가면서 느끼는 방랑자적인 입장을 투영하고 있다.  

이 작품들을 통해서 서도호는 개인적인 것으로 세계적인 것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쿠로자와 아키라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말이다. 처음에는 자신이 성장했던 한국의 한옥을 위주로 설치 작업을 했지만, 점점 더 영역을 확대해서 외국의 건축물은 물론 가전제품과 가재도구들에까지 제작하고 있다. 

Do Ho Suh,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2013) silk, metal armature, polyester fabric, metal frame, 1530 x 1283 x 1297 cm, LM22819 https://www.lehmannmaupin.com/artists/do-ho-suh


Do Ho Suh, (left) “Specimen Series: 348 West 22nd Street, APT. New York, NY 10011, USA - Toilet”; (right) “Specimen Series: 348 West 22nd Street, Apt. A New York, NY 1011, USA - Stove,” both polyester fabric. (Courtesy Do Ho Suh and Lehmann Maupin Gallery)

이번에 UAP (Urban Art Project: 뉴욕과 상하이 등 다양한 지역에 거점을 두고 공공 미술을 제작하고 있는 조직)에서 선정한 그의 작품은 그의 Seoul Home에서 발전해 온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좀 더 시간을 두고 조사를 해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고 그렇게 해보고 싶다.     

내가 블로그에 첨언할 필요도 없이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훌륭한 작품세계를 펼치고 있는 작가이지만, '내 맘대로 작품 보기' 코너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서 올려보았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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