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특히 거기서 출제되는 미술관련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거기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서 몇번 포스팅하였다. 이 프로그램을 모르는 분들에게 잠깐 소개를 하자면, '옥탑 방의 문제아들'은 고정으로 출연하는 다섯명의 패널과 매주 바뀌어 출연하는 초대손님이 총 10문제를 맞추어야 옥탑방에서 나갈 수 있다는 설정으로 진행하는 퀴즈 프로그램이다. 그 퀴즈라는 것이 거기서 문제가 나오기 전엔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문제일 뿐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해답 모른다고 세상사는데 아~무런 지장없는 그런 문제들이다. 그런데 일단 문제를 듣고 나면 또 그렇게 해답이 알고 싶고, 그래서 끝까지 보게 되는 그런 프로그램이다. 물론 그 해답을 알아맞추는 과정에 패널들의 기상천외한 발상에 크게 웃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언급했듯이 난 주로 미술에 관련된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져 왔었다. 그런데 지난주 나왔던 새틴 바우어새에 대한 문제는 분명 자연의 새에 대한 문제인데 예술에 대해서 또 나아가서는 창작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는 문제였다.
질문은 호주에 사는 새틴 바우어새 (Satin bowerbird)는 구애를 위해서 하는 특이한 행동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였고, 해답은 수컷이 암컷을 위해서 아름다운 둥지를 짓고 장식을 한다는 것이었다.
좌) 새틴바우어새의 수컷 우)새틴바우어새의 암컷
같은 색으로 둥지를 장식하고 있는 새틴바우어새
색상을 구분할 수 있는 새인듯 같은 색상의 폐품들을 모아서 집을 꾸미는데, 인테리어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봤더니 디자인도 색상도 그렇게 다양할 수가 없다. 물론 파란색을 주로 모은 둥지의 경우, 그것이 인간들이 버린 플라스틱 폐품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 조금 씁쓸하기는 했다. 하지만, 얼마나 놀라운 본능인가? 이걸 미대에서 가르쳐서 저정도의 구성능력과 감각을 갖출때까지 교육을 마치려면 아마 새의 수명이 다할때까지 끝마칠 수 있을까 싶은데 말이다.
새틴바우어새 둥지의 예들 새틴바우어새의 둥지의 예
그런데 인터넷에서 예들을 살피다가 아래의 둥지를 봤고, 왠지 데쟈뷰 같아서 곰곰히 생각했는데, 내가 전에 조사했던 작가의 작품과 너무 유사하다.
새틴바우어새의 둥지의 예밥 베르슈어렌 (Bob Verschueren), <혼돈 이후 (After the Chaos)> (2010) 가문비와 물푸레나무, Arte Sella, Malga Costa, Italy, 2010
벨기에 출신의 작가 밥 베르슈어렌 (Bob Verschueren: b.1945)의 <혼돈 이후 (After the Chaos)>가 바로 그 작품이다. 새틴 바우어새가 그 누구에게 배운적 없듯이, 이 작가 또한 독학으로 예술가의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또한 자연의 소재만을 이용해서 작업한다. 난 그의 작품을 접하고 자연과 인공의 절묘한 조합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리 자연처럼 보여도 인간의 작품이라는 것을 모를수 없겠다 했는데, 새틴바우어새의 둥지를 보니까 (더군다나 인간이 버린 폐품을 활용한) 예전의 그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미처 몰랐지만, 밥 베르슈어렌이 제작한 작품과 똑같은 둥지를 만드는 새가 지구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지 또 누가 알겠는가?
밥 베르슈어렌이 어떤 새의 둥지 혹은 비버의 둑을 모방했나는 잘모르겠지만, 진짜 새의 둥지를 모방해서 작품을 만든 작가가 없는 건 아니다. 독일 출신 작가 닐스-우도 (Nils-Udo: b. 1937)의 <클렘슨 진흙-둥지 (Clemson Clay – Nest)> (2005)가 그 예이다. 이 작품은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 소재의 클렘슨 대학의 정원에 설치한 대규모 구조물이다. 내부는 대나무로 틀을 잡고 바깥쪽은 소나무 기둥으로 만든 커다란 둥지 모양의 구조물은 2년간 유지되다가 나중엔 설치에 이용되었던 나무들을 갈아 구멍을 메꾸어서 흔적을 없앴다고한다.
닐스-우도 (Nils-Udo: b.1937), <클렘슨 진흙-둥지 (Clemson Clay – Nest)> (2005) Clemson University. SC닐스-우도의 <클렘슨 진흙-둥지>의 설치 장면
닐스-우도의 경우, 때로는 고대의 스톤 헨지를 연상시키는 설치물, 때로는 자연현상과도 같은 설치물을 세계 곳곳에 설치해오고 있다. 그의 작품은 거대한 규모의 설치물이라 인간이 만든 것이 분명하지만,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면서 자연 환경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밥 베르슈어렌과 상통한다 할 수 있다.
밥 베르슈어렌 역시 주로 광활한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자연물을 이용한 조형작품을 제작해왔다. 초기에 그는 자연 염료를 들판에 펼쳐놓고 바람에 의해 완성되는 <바람 그림 (Wind Painting)>을 시도하기도 하였는데, 1978년부터 지속적으로 자연과 식물 생장에 관심을 둔 작업을 해왔다.
밥 베르슈어렌의 <바람 그림> (1978)
반드시 천연재료, 특히 1980년대 이후로는 식물 재료만 사용해온 밥 베르슈어렌의 작품은 조형적으로도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그 속에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주기에 대한 깊은 성찰, 자연과 인간의 상관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철학적인 작품이다. 대지위에 분말 염료를 뿌린 <바람 그림>이외에도 자연과 빛의 관계를 이용한 <빛 그림 (Light Painting)> 등, 그의 작품은 넓은 의미에서는 대지 미술 (Land Art)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환경에 관한 관심에서 부상한 '환경미술 (Environmental Art)' 혹은 비교적 새로운 명칭인 '에코 아트 (Eco Art)'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다. 한 작가의 다양한 작품의 스펙트럼과 그 작가가 다양한 장르와 사조에 걸쳐서 활동하는 것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라고 볼 때, 닐스 우도와 반 베르슈어렌 역시 명실공히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작가들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밥 베르슈어렌의 작품. 전시실에 전시된 모습밥 베르슈어렌, <삶의 여정 (Chemin de vie)> 밥 베르슈어렌 (Bob Verschueren), <Sound Installation> Domaine Du Chateau De Seneffe, Belgium
이들의 작품과 더불어 화요일 밤에 알게된 호주에 서식하는 새의 한 종류가 창조해내는 세계의 오묘한 평행선의 발견은 답을 알아맞히던 못맞히던 간에 내가 '옥탑 방의 문제아들'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영국의 ‘올해의작가상’에해당하는것이터너프라이즈 (the Turner Prize)이다. 그런데, 18명의작가들로구성되어리버풀을근간으로활동하는에셈블(Assemble)이라는팀이 “그랜비포스트릿츠프로젝트(the Granby Four Streets Project)”로 2015년터너프라이즈수상했다.이들의작업은생활환경이열악한지역을찾아다니면서, 그곳에서공동으로낡은집을고쳐주거나, 새로집을지어주는작업을하는데, 그과정에사진이나영상등파생되는예술작품들을포함하여집을짓는행위자체까지모두그들의작업에포함된다. (도판 3)
믹스라이스의작가들이수년간에걸쳐공동체의주민들과깊은유대관계를맺고서로의신뢰관계를바탕으로작업을해왔듯, 대부분의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작가들도그러하다. 2014년맥아더그랜트를수상한미국작가릭로우 (Rick Lowe)도이점을분명히하고있다. 그는 LA Times의인터뷰에서이렇게밝힌다: “반드시아주오랜동안관계를발전시켜야합니다…. 어떠한공동체에뛰어들어와서, 곧바로그곳의모든복잡함을다파악할수있다고생각한다면그것은오만하고그공동체를무시하는행위가될것입니다.” 미국작가릭로우, 영국의어셈블그룹, 한국의믹스라이스모두공동작업을통해서사회문제를제기하므로써사람들에게그문제들을인식시키고, 나아가서는문제해결을모색한다는점에서공통적인목표를가지고있다고볼수있을것이다.그런점에서믹스라이스를위시한위에언급한이들의작품을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의범주에넣을수있을것이다.
물론 “Socially Engaged Art”라는타이틀에자체에대한비판이없는것은아니다. 모름지기작가는진공상태에사는것이아니고, 자신이속한사회와자신의환경의영향을받으며작품을제작한다.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 말그대로하자면, ‘사회와관련을맺는예술’이라는뜻인데, 그렇다면그러한타이틀을달지못할예술이어디있겠는가?혹은그런기치아래에서제작되진않는예술작품들은전부사회와유리된것이라고할것인가? 그러한아이러니를의식한탓인지, 믹스라이스의작업을지칭하고자하는여러가지시도가존재한다. 이는미술사조내에서의우리가알고있는유명한 ‘주의’나사조들이실은그특정명칭이하나로정착될때까지는시간이걸렸고, 그이전에는여러가지명칭으로불렸다는것을기억해볼때, 그다지드문일은아니다. 따라서, 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와같은사회적, 정치적문제에대한언급을하면서대중들의관심을환기시키는예술을일컫는용어는다수존재하고아직확립된하나의합의된명칭은존재하지않는다는말이다.
4. 공공미술(Public Art)과새로운공공미술 (New Genre Public Art)
먼저, 예술가이자저자, 교육자인수잰레이시(Suzanne Lacy)가 1991년에처음만들어낸용어로“뉴장르퍼블릭아트 (New Genre Public Art),” 즉“새로운장르의공공미술”이라는용어가있다.이용어는샌프란시스코미술관에서행해진공개퍼포먼스와수잰레이시의저서『지형의자리매김: 새로운장르의공공미술 (Mapping the Terrain: New Genre Public Art)』이라는저서를통해처음소개되었다. 보통 ‘새로운’ 이라는수식어가붙는다는것은그이전이존재한다는의미인데, 실제로‘공공미술’이란단어는해당예술작품의구매자가개인이든공공단체이든, 혹은그것이설치된장소가사유지이든지공유지이든지상관없이공공영역에있는예술을지칭하는용어로폭넓게사용되어왔다.
이 글은 작년에 쓴 글로 2016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들 중 "믹스 라이스"라는 팀에 관한 것이다. 기존에 알고 있는 회화나 조각, 심지어 설치미술이나 비디오 아트가 아닌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팀'의 작품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글이다.
하지만, 대략이라도 현대미술이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가끔씩 아주~현대적 미술에 대해서도 쓸까 생각중인데, 이 글이 그 첫 포문을 여는 글이 되겠다.
그《올해의작가상》전이라는전시회는원류를따져올라가보면, 국립현대미술관이주관하는대표적인전시로 1995년부터 2010년까지정기적으로개최되었던《올해의작가》전을모태로하고있다. 이를국립현대미술관이 SBS 문화재단의협력을통해, 2012년부터독창성과역량을갖춘작가들을후원하는수상제도로변경하여운영하고있다.어느덧올해로 5회째를맞은《올해의작가상》전은재능있는작가들의발굴을통해한국현대미술의발전을모색해가면서이제는대한민국의대표수상제도로제대로자리매김해가고있는듯하다.
과연 60여년전에한독일철학자의에세이가어떤식으로오늘날한국의한프로젝트팀의작품을비추어주는렌즈가될수있을까에대한의문은믹스라이스를다루는한방송국의다큐멘터리에서언급한 “혐오의시대예술의역할”이라는부제에서일말의실마리를발견하게된다. (2017년 1월 22일일요일밤 11시 5분방영, SBS 아트멘터리 ‘남을위한행진곡’)하이데거의글이씌여진시대도 “혐오의시대”를겪고전후이제막화해를모색하던시기였을것이고, 이는 2017년의오늘날의현실과도일맥상통하고있기때문이다.
하지만, 고정된장소를전제로하는주거는정체성을지켜주는수단이된다는점에서는유용하지만, 본질적으로배타적이고향수를불러일으키는개념이라고봤을때중대한문제를야기한다.그정체성은우리에게고정된정체성을부여하고, 과거에뿌리를내리기위해취해진것으로미래와의진정한관계를방해하는본질적으로후진적인방향성을내표하고있다고도볼수있기때문이다.
사건은 10월 5일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유명 작품 '풍선을 든 소녀 (Girl with Balloon)가 1백4만 파운드, 한화로 15억을 훌쩍 넘는 가격에 팔리고 난 직후에 일어났다. 직후에 뱅크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이 경매에 나와 팔리게 되면 작동하도록 이 작품에 분쇄기를 장치했음을 밝혔다고 한다. 물론 이는 당시 경매에서 작품이 조각조각 분쇄되는 장면을 보고 진정으로 놀라는 관중들의 모습이 담긴 인스타그램들과 함께 여러 뉴스에 게재되었다.
물론, 이 상황 자체가 과연 어떻게 가능했는지 여러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1. 분쇄기가 액자 속에 장치가 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과연 경매를 준비하는 측에서는 액자에 끼워져 있는 작품을 사전에 살펴보지 않았던 것일까? - 경매 이전 작품의 상태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 한번쯤은 작품을 액자에서 빼보지는 않았던 것일까? 게다가 작품과 액자 무게 외에 그 정도의 장치가 되어 있었다면 작품은 이상할 정도로 상당한 무게였을텐데 말이다.
2. 그 분쇄기는 왜 작품의 절반 정도밖에 분쇄가 진행되지 않은 것일까? 전부다 분쇄되었다면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되었을텐데, 지금 상태로는 미묘하다. 예상했던 대로, 구매자는 이 상태의 작품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은 이 상태로 또 거래가 될 것이라 짐작된다.
3. 그 분쇄기를 장치하고 나서 경매에서 판매될 때까지 수년은 걸렸을텐데, 과연 그 분쇄기는 어떻게 작동했던 것일까? - 뱅크시의 정보원 (?)이 그 작품의 소재를 계속 추적해오다가 소더비 경매장에 잠입하여 경매가 이뤄지는 순간 원격 조정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던 것일까? 건전지 없이 그런 작동을 할 수 있는 장치가 있나? 전기 장치는 잘 모르지만, 여하튼 미스테리다.
경매 관련자들을 깜쪽같이 속였다 치고, 지치지 않는 건전지 에너자이저를 써서 성공적으로 경매사가 경매봉을 두드리는 순간 분쇄기를 작동시켰다 치자. 방법이야 어떻게 되었든, 이번 사건은 미술사에 또 다른 역사를 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퍼포먼스라고도 볼 수 있는 이번의 사건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터무니 없기까지 한 천문학적인 금액들이 오가는 경매에서의 작품거래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를 보내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유명세에 따른 작품 가격이 높아지고 하는 미술계의 통례에 반대하기 위해 자신(들)의 얼굴이나 구체적인 이력을 밝히지 않아 왔던 것이다.
뱅크시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애당초에 그 (혹은 복수의 작가군단?)가 익명으로 활동한 것은 그(들)의 작품이 영국 브리스톨 거리에 그리피티를 그리는 것을 시작해서인데, 영국에서 거리에 낙서를 하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법적인 제재를 피하기 위해서라고도 알려져 있다. 물론 위에 밝힌대로 미술계의 통상적인 관례에 대한 반항이라는 설도 있다.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그가 1974년 영국 출생이라고 밝힌 곳도 있는데, 대부분의 미술관련 사이트에서는 여전히 그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다고 씌여있다.)
이후에 그리피티 이외에도 꾸준하게 기발한 활동을 해온 그의 작품은 많은 논란과 함께 경매에서의 작품의 가격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다분 정치적이고, 반전주의, 반자본주의적 메시지로 가득한 그의 작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그의 명성에 편승해 뱅크시를 자처하는 작품도 적지 않고, 그에 대해 '내 작품 아님'을 홈페이지에서도 밝히기도 한다. (한번 더 꼬아서 생각하자면, 이러한 의사표명 또한 그의 자작극이 아닌가 의심하게도 된다. 왜냐하면, 익명으로 작품활동하는 것 자체가 '작품에 따라다니는 작가의 이름'이라는 관례에 대한 반항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애당초 굳이 저렇게 주인 찾아주기 식의 성명서를 낼 필요가 있나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몸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체제적인 작품을 하는 그가 미술시장에서 몸값을 높이게 된것은 어찌된 영문인걸까?
일례로 2003년 제작되었던 Bomb Hugger라는 그래피티 작품의 경매 경과를 살펴보자.
Sotheby's London
Date:2010-02-11
Lot Number :284
Low Estimate :$39,200[+92%]*
High Estimate :$54,800[+37%]*
Hammer Price :$75,200
Sold For :$92,250*
2010년 2월 11일자 경매를 보면 이 작품의 최종 가격은 최저 예상 가격 4만불을 가볍게 넘어 최종가는 9만2천불, 한화로 1억이 넘는 금액에 거래가 되었다. 애당초 미술 작품에 터무니 없는 가격을 매기는 이러한 미술 시장에 대한 비판은 경매서 고가로 팔린 작품을 거리에서는 60불에 파는 행위를 하거나 직접적으로 아래와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등, 여러차례 그의 작품 속에서 언급되었다.
Banksy – I Can’t Believe You Morons Actually Buy This Shit, 2007 '너희같은 멍청이들이 정말로 이런 쓰레기를 사다니, 나는 당최 믿을 수가 없다.'는 제목으로 경매장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쯤 되면, 그의 작품 값을 올리는 것은 미술 시장이자 미술계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가깝게는 앤디 워홀의 팝아트, 좀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셀 뒤샹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다.
Banksy, Soup Cans (2006) EHC Fine Art 앤디 워홀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인건가? 현대미술가들은 스프캔이라는 상품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미술사 적으로 보면, 이는 마르셀 뒤샹이 1917년 한 전시회에 철물점에서 구입한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라는 서명만 하고, '샘 (The F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출품을 한 것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 되지 않을까?
애시당초 참가비만 내면 전시를 허용하는 허술한 전시회에 출품했음에도 당시에는 그가 출품한 변기는 출품이 거절 당했다. 이후, 작가는 작품을 '제작'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기만 해도 되는 것이라는 면죄부 (?)를 받게 되는 미술사적인 일대사건으로 기록되게 되는 것이다. 이후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 면죄부로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선택'해왔던가.
이번 뱅크시의 첩보전을 방불케할 '퍼포먼스'는 미술사적으로 또 다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경매에서 작품의 가격을 매겨 유통하는 과정에 대한 반항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 퍼포먼스 자체는 또 다른 형태의 예술 형태로 자리잡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절반쯤 분쇄기를 통과한 그 작품은 이번 경매가를 가볍게 뛰어넘으며 더 높은 가격에 판매될지도.
한편, 뱅크시가 자신(들)의 인스타그램에 사전에 분쇄기를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해당 경매에서 작품이 순식간에 분쇄되어 액자밑으로 흘러내리는 과정을 촬영한 것을 올리면서 "The urge to destroy is also a creative urge" - Picasso라는 구문을 함께 실었다. 이는 항상 자신의 이전의 작품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창조를 추구했던 피카소가 '창조적인 진공청소기'라 불렸던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천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 미술계의 황금만능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을 했지만, 그 미술계에서 최고가를 갱신하며 그러한 시스템을 만끽한 피카소에 대해서는 별 저항이 없었나보다.
리움은 사립 미술관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미술관일 것이다. 몇 차례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리움은 마치 종합선물세트 같다. 현대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작가들, 혹은 남길 화가들의 작품들이 비교적 빠짐없이 적어도 한 작품씩 다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그 작품들이 다 개론서에 실릴 법한, 그 작가의 장점이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대표작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대표작들은 이미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덜 알려진 작품들이라도 실제 구매를 한다고 생각해보면 그 가격은 천문학적 금액이므로 대표작들을 골라서 소장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 이해는 된다. 또 장점은 개론서나 여타 미술관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아~ 이런 작품도 있었구나 하고 감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한번은 상설 전시관을 한 바퀴 돌다가 우연히 천장을 쳐다봤는데, 거기엔 이런 작품이 있었다.
Antony Gormley, Feeling Material XXIX (2007). Stainless steel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공사하다가 남은 철사를 미처 치우지 못했나 할 철사 뭉치. 아니, 설마....하며 라벨을 보니 맞.았.다. 그것은 안토니 곰리 (Antony Gormley: 1950~)의 작품이었다.
안토니 곰리는 1980년대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영국의 중견 조각가이자 설치 작업가이다. 1994년,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그래도 현대미술 분야에서는 가장 권위있는 상 중에 하나인 터너 프라이즈를 수상한 이래 다양한 수상 경력을 쌓아가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2014년에는 기사작위도 받아서 이제는 Sir Antony Mark David Gormley, OBE*이다. 이제는 영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그의 작품들이 소장되고, 많은 명소들에 그의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다.
2014년 4월 15일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기사작위를 수여받는 안토니 곰리 (photo by Jonathan Brady/PA Wire)
공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고 작가 자신이 밝히고 있는 그의 작품은 실존 철학, 불교 사상 등의 영향이 보이는 심오한 작품들이 많다. 그 중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이라고 느낀 작품은 작가의 신체를 철로 주조한 동상들이 수없이 해변가에 늘어서 있는 <Another Place>이다.
Antony Gormley, Another Place, Crosby Beach, Liverpool/England
이 작품은 리버풀 지역의 크로스비 해변에 철로 주조한 동상 100점을 모두 얼굴이 바다 쪽을 향하도록 하여 설치한 작품이다. 작가의 나체를 그대로 본 뜬 이 설치는 유럽에서 두 번 전시한 적도 있는데, 한때에는 외설논란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2007년 이후에는 이곳에서 영구 설치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위의 사진 처럼 해변가에 세워진 동상도 있으나, 밀물 때엔 상당부분 동상이 잠기게 되는 것도 있는데,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끼도 끼면서, 파티나 혹은 버디그리라고 불리는 녹청이 끼게 된다. 이런 경우,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과 자연이 된다.
그 곳을 찾은 방문자들은 이들 조각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조각에 옷을 입히거나 하면서 색다른 연출을 한뒤 촬영하거나 해서 그 사진을 SNS에 올리기도 하는데, 그 자체로 또 다른 작품으로 변신한다. 이 때 동상들은 출연자이기도 하면서 배경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냥 그곳을 지나는 이들과 바다를 지나는 배와 함께 서 있는 동상을 찍은 사진들을 찍기도 하는데, 그 자체로 또 다른 작품이 된다. 특히, 어떤 작품들은 얼마전 여기 블로그에 올렸던 호쿠사이의 우키요에 속의 파도 그림과 같은 미학과 철학이 담긴듯 하기도 하다.
크로스비 해안에 설치된 곰리의 작품 <Another Place> 그 자체, 그리고 또 그것을 촬영한 사진들. 그 속에는 세월의 흐름과, 자연의 변화, 또 그 곳을 찾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어우러져 끊임없이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 내며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매번 다른 컨텍스트를 만들어낸다. 자연과 인공, 자연과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의 조건, 숙명, 동과 정, 생과 사... 수 많은 생각할 거리를 끊임없이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왠만한 건물만한 크기의 철조 구조물로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야외에 설치하는 작업들이 있다. 이 경우 성긴 철 구조물 사이사이로 바라보는 쪽의 풍경이나 햇살이 투과되는데, 그 속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빛의 반사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아래 작품은 그 철 구조물을 인간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 내, 네덜란드의 렐리스태드 지방의 강둑에 설치되어 있는 <Exposure>라는작품이 있다. 현지인들이 '용변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하는데, 아닌게 아니라.... 하지만, 원체 큰 사이즈라는 점, 그리고 인간의 형상을 딴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상기되는 여러가지 감상이 생긴다. 전격의 거인이 떠오르는 이 작품은 신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보자면, 오딧세이가 떠나고 난 뒤 혼자 남은 사이클롭스가 저러고 쪼그리고 앉아 떠나는 배들을 보고 있었지 않을까...
Antony Gormley, Exposure (2010) in Lelystad/The Netherlands. photo by Herman Verheij
그리고 수년전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작품이 아래 작품인데, 같은 <Feeling Material>의 제목을 달고 시리즈 번호만 다른 이것이 현재 리움의 작품과 비교적 유사한 작품일 것이다.
Antony Gormley (b. 1950), Feeling Material XIV (2005), 4mm square section mild steel bar ; 224.8 x 217.9 x 170.2 cm
위의 작품은 실제 인간의 크기를 훌쩍 넘는 크기의엉킨 철사뭉치들이 어렴풋이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우주의 혼돈에서 탄생하는 인간과도 같은 모습이다. 무에서의 유가 창조되는 순간인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건가? 무질서 속의 질서감이 느껴지면서 왠지 철학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Feeling Material>이라는 제목에서 'material'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도 다양하다. 물질, 혹은 질료 하지만, 뭔가 구체적이고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지 않은가?
다시 리움으로 돌아와보자. 아닌게 아니라, 처음에 볼 때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지만, 1 미터 남짓한 작지 않은 철사더미에서 작은 우주의 소용돌이가 보이는 듯도 하다. 저 혼돈의 끝에는 어떤 생명이 탄생하게 될런지도 모른다.
Antony Gormley, Feeling Material XXIX (2007). Stainless steel
그러나, 솔직히, 이 조그만 철사 뭉치를 보는 것 만으로, 안토니 곰리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것 같다. 더구나 애당초 이 작품을 처음 보는 이가 이 작가에게 관심을 갖게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물론, 미술관에 그의 거대한 등신상을 가져다 와서 다른 작품들 사이에 좁게 끼워 세워놓은들 <Feeling Material XIV> (2005)와 같은 작품은 그렇다치더라도 그 자연 속의 그의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는 감동을 그대로 받을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리움은 종합선물세트인데, 때로는 잘 안팔리는 연양갱이 들어 있는 종합선물세트이므로, 양갱의 제대로 된 맛을 느끼려면, 명품 장인이 운영하는 화과점을 가서 사먹어 봐야 하듯이, 그곳에 있는 작가들을 하나씩 천천히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종합선물세트의 연양갱이 맛이 없었다고 해서, 양갱이라는 먹을거리 자체의 맛을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OBE: Officer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