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제프 쿤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Playfulness' 혹은 '장난스러움'이 아닐까 하며 글을 마쳤다.
오늘 그 꼬리를 다시 잡아, 그 장난스러움은 실은 비단 제프 쿤스 작품의 특징만은 아니라는 반전으로 이어갈까한다.
사실 제프 쿤스의 비지니스 능력이랄까 상업적 수완은 타고 난 점도 있다. 작가가 되기도 전 아직 어린 시절 예술에 재능은 있었던 듯, 가구점을 하던 부모의 가게에 자신의 작품을 장식해두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손님이 가구를 사갈 때 그 앞에 걸어둔 작품을 함께 팔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게 또 호평을 받았고 부모님의 상업도 성업을 이뤘다는 소문이다. 시드니에서도 전시된 바가 있고, 록펠러 센터 앞에서도 전시된 적이 있는 꽃으로 꾸며진 거대한 강아지 조각은 원래 1992년, 독일 아롤슨 지방의 작은 성 앞에 전시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자신의 작품이 경매에서는 높은 가격으로 팔리지만, 예술계에서는 그다지 평가받지 못하자,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꽃과 강아지를 결합해서 거대한 조각을 만들기에 이르렀고, 그것을 바젤에서 도큐멘타가 열리는 해에 독일에서 전시했다고 한다. 이후 예술계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다소 우호적으로 변했다는 후문도 함께 따르고 말이다. 물론 그 조각품의 가격이 4,500배 오른 것은 안비밀!
제프 쿤스의 거대한 강아지의 최초 버전. 1992년 독일의 아롤슨 지방의 성 앞에 세워졌다. Jeff Koons, Puppy (1992) Stainless steel, wood, soil, geotextile fabric, internal irrigation system, live flowering plants ; 1234.4 x 1234.4 x 650.2 cm
그 조각은 여러가지 버전으로 제작되었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현재 빌바오 구겐하임에 전시된 작품이다. 제프 쿤스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optimism, confidence and security"를 표현하기 위한것이라고. 어쩌면 이 구호는 비단 이 작품 뿐 아니라, 그의 전 작품 속에 흐르는 정신이 아닐까 싶다. "낙천주의, 확신, 그리고 안정감." 그리고, 이는 요즘 사람들이 작품에서 갈구하는 어떤 것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빌바오 구겐하임에 전시된 제프 쿤스의 <강아지> 조각. 무려 12 meters 40 cm x 830 cm x 910 cm에 이르는 조각상을 빽빽히 채운 꽃들을 30명의 정원사가 끊임없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일전의 포스팅에서 제프 쿤스로 대표되는 요새 미술의 특징이 'playfulness' 혹은 '장난스러움'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그것이 결국은 제프 쿤스가 주장한 'optimism'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시대는 "대공황을 견디고, 전쟁을 겪은 후 더이상 '꽃이나 소파에 기대 누운 미녀'를 그릴 수 없는 상황"이라 토로하던 추상표현주의자 바넷 뉴먼의 대척점에 와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의 삶이 반드시 전후의 상황보다 훨씬 더 즐겁고 평온한가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지만, 적어도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술에서 더이상 작가의 치열한 실존적 투쟁을 보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다. 몇년전 한국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던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작품, 그리고 내가 갤러리들의 홈페이지나 전시장에서 자주 발견하는 작품들의 경향은 어느쪽인가 생각해보면 큐비즘도 추상표현주의도 아닌 팝 아트 쪽이 많다. 조형에 대한 탐구도 심각한 철학적 자아탐구도 아니라는 말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요새 미술'은 즉각적으로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고, 그 속에서 유머와 즐거움이 넘치는 작품이 훨씬 더 많고, 작법이나 주제면에서 팝아트 혹은 네오팝에 훨씬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David Gerstein, BIKING B (1998) Hand Painted Laser-Cut Metal Cutout, 3 Layers ; 137 x 56 cm, Edition of 295David Gerstein’s “Fifth Avenue” wall sculpture, 2016David Gerstein, United StatesDavid Gerstein, Synergy (2013)
사진으로 봐서는 잘 구별되지 않지만,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작품은 준조각 혹은 부조 작품들로 '벽조각 (Wall Sculpture)'이라 불린다. 색상은 밝고, 주제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사물과 사람들이고, 그 속에서 이들은 활기차고 행복하다. 팝아트의 후예답게 그의 예술은 판화처럼 수많은 에디션이 존재하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affordable'한 편이다. (절대적으로는 물론 아무나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지만, 경매에서 최고가를 갱신하는 작가들이나, 유명 작가들의 '호당 얼마'하는 가격보다는 저렴하다는 뜻이다. 대략 명품백을 큰 맘먹고 살 수 있을 정도라면 살 수 있을 정도라고 하면 될까?)
데이비드 걸스타인 스스로도 자신이 팝아티스트임을 밝히면서, 자신이 굳이 앤디 워홀의 추종자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색상이나 대중적 이미지들을 이용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는 "내 철학은 예술은 삶과 맞닿아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작품이란 일년에 한 번 미술관에 가서나 보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그는 "(내 작품은) 관람객의 눈 높이에서 이야기한다. 내 작품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 나는 사람들이 내가 의도한 것을 이해하기를 바란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어려운 미술은 안하겠다는 소리다. 그는 심지어 관람객들이 전시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만지는 것도 허용하고 있다. 예술은 더 이상 심각한 철학을 논하거나, 유일무이한 작품이라거나 극소수의 지성과 교양을 갖춘 이들만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팝 아트 이래 지속적 흐름이긴 하다. 물론 이 와중에 추상 작품들에서 빠진 서사를 철학적 담론으로 채워가는 작업은 계속 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관람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 삶이 실존인데 굳이 작품까지 심각한 걸 봐야하나 하는 심정이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자는 넷플릭스의 성공이 바로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파악해서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즉, 명화니 예술 영화니 하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작 그런 사람도 힘든 일 끝나고 집에 가서 보는 영화는 그냥 가벼운 오락 영화이기 십상이고, 그래서 그러한 영화를 다수 제공하는 넷플릭스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즐거운 미술들이 지배적인 요즈음,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삶이 힘든것일까? 아니면 예술이라는 것이 결국 저녁 후에 가볍게 볼 수 있는 오락프로그램과 같은 역할을 자처하게 된 것일까?
아래는 내가 최근 발견한 '즐거운' 미술 작품들이다.
고근호, 즐거운 상상
김경민 , Good Morning (2012) 청동 , 우레탄 ; 220x90x420 cm임승현, 도형을 닮아가는 사람들, 원래 도형이었던 사람들전영근, 자작나무 숲
예상한대로 그 경매에서 낙찰 받은 익명의 유럽인 여성 콜렉터는 그 작품을 그대로 소장하기로 했고, 이 작품은 이제는 <Love is in the Bin> (2018)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다. 이 제목을 달게 된 것은 경매가 끝난 후 일주일 경 지난 10월 11일 소더비 측이 뱅크시의 정식 인정기관인 "해충구제 (Pest Control)"에서 발부한 인증서가 첨부되어 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모를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고, 그 기세는 점점 더 가속화되고 강렬해진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 뿐인건가?
이후 뱅크시 자신의 작품이 절반 정도만 분쇄된 것에 대해서는 '분쇄기의 오작동'이라며 '해명 (?)'을 했다고 한다. (건전지는 수명이 긴 에너자이저를 썼는데, 분쇄기는 좋은 브랜드 제품을 사용하지 않았나보다)
이 해명을 읽고, 잠시 내가 올린 위의 글에서 제기한 의혹을 뱅크시가구글 번역기를 돌려 읽었나 생각을 했.... 그럴리는 없고. 사실상 이 절반 쯤 분쇄된 작품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기에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했으리라.
이 작품은 이제는 <Love is in the Bin> (2018)이라는 제목을 달고, 지난 2월 5일부터 3월 3일까지 독일의 바덴바덴 소재의 프리다 버다 미술관 (Museum Frieder Burda, Baden-Baden)에서 전시를 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그 익명의 낙찰자가 독일계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Museum Frieder Burda, Baden-Baden
관람객들에게 관람료를 받지 않고 전시되었다고 하는데, 그 미술관의 웹사이트에 소개글에 언급된 것같이, 과연 경매시장이라는 불에 기름을 때려 부으면서 그러한 미술시장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을 남긴다.
따라서, 제프쿤스는 한편으로는 직접 제작하는 수고없이 수많은 조수들에게 일을 시켜 제작하면서(한때수백명에이른조수들의수를최근수십명해고했었다는것이뉴스가되기도했다), 아이디어를 짜내는 고뇌 따윈 집어치고 광고나 이미 유명한 작품들의 패러디와 차용을 해서 제작하면서, 헐리우드 스타만큼이나 유명세를 톡톡히 누리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 그는 생존화가중가장비싼작품을제작하는것으로유명하기도하지만, 반면에일부러싸구려처럼보이게만든작품은현대미술의‘질’과‘수준’을염려하는진지한미술비평가와애호가들에게늘비판과경멸의 대상이 되어왔다.
Jeff Koons. Photo: Adam Berry/Getty Images. 절묘하게 잘찍은 사진. 그의 뒷쪽의 둥근 등의 모습이 마치 후광처럼 보이게 찍었다.
광고크리에이티브디렉터프랭크다비도피치(Franck Davidovici)가제기한소송에쿤스가저작권위반으로€300,000 (£270,000) [약4억원상당]을배상하도록최종판결을받았다. 아이러니한점은제프쿤스의이작품은2007년크리스티경매에서프라다재단이무려3.7 million (£2.8m) [30억5천만원상당]에 구매했었다는사실이다.
Jeff Koons, Fait D'Hiver (1988) CREDIT: RALPH ORLOWSKI/GETTY IMAGES EUROPE 표절 소송에서 패배한 제프 쿤스의 1988년 작품 Fait D'Hiver
Franck Davidovici’s original advert for Naf Naf, which he says American artist Jeff Koons plagiarised for his work Fait d'Hiver CREDIT: TELEGRAPH 제프 쿤스가 표절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유명 의류 브랜드 나프나프의 광고
나프나프의광고를보면젊은여인이눈밭에누워있는데, 설정상눈사태의희생양으로보이고, 그녀를구하기위해서 마치 조난자를구조하는세인트버나드와같이돼지가목에럼주가담긴작은통을매고그녀의곁에다가서고있는모습이다. 이작품은‘나프나프’가아기돼지삼형제에서벽돌집을지었던막내돼지의이름인데서딴설정이리라.
두작품모두, 조각작품이라는유사점이외에도, 프랭크다비도비치가주장한바대로소녀의표정과목에통을매단돼지가자신의작품과동일함하다. 굳이전문가의식견을묻지않더라도, 두작품은보통사람들의눈에도놀랍도록유사하다. 제프쿤스의경우, 추위를강조하기위한것인듯, 펭귄두마리를덧붙였다는점, 쿤스의 돼지가 선물 포장의 리본 같은 것을 두르고 있는 것이외에는여인과돼지라는등장인물과구도까지동일하다. 게다가제목까지‘Fait d’Hiver’라는동일하게달았는데, 이는영어로굳이번역하자면“The Fact of the Winter”라고 해석 할수있는 뜻이 명확하지는 않은 불어단어인데, fait divers (‘짧은뉴스’라는뜻)와동일한발음에서딴언어유희이다.
왼쪽) 프랑스 사진작가 Jean-François Bauret의 'Enfants' (1975)의 사진 작품 ; 오른쪽) 제프 쿤스, 도자기 작품 '나체 (Naked)' (1988) - 프랑스 법정은 제프 쿤스에게 장-프랑소아 보레에게 4만 유로를 지불하라는 판정을 내렸다.
제프쿤스의“나체(Naked)”는 1988년제작된1미터남짓한도자기조각으로나체의두어린이가어깨동무를 한 채, 남자아이의오른손에들려진꽃을여자아이가자세히들여다보고있는모습이다. 이는장-프랑소아의1975년사진작품“어린이(Enfants)”라는사진과몹시유사한데, 이작품은엽서에사용되었다고한다. 사진작품에서는두어린이가꽃을들고있지는않고, 그냥나란히서서어깨동무를하고있는모습이긴하지만, 소녀의숙인고개의모습소년의시선등에서유사하다.
영국의 ‘올해의작가상’에해당하는것이터너프라이즈 (the Turner Prize)이다. 그런데, 18명의작가들로구성되어리버풀을근간으로활동하는에셈블(Assemble)이라는팀이 “그랜비포스트릿츠프로젝트(the Granby Four Streets Project)”로 2015년터너프라이즈수상했다.이들의작업은생활환경이열악한지역을찾아다니면서, 그곳에서공동으로낡은집을고쳐주거나, 새로집을지어주는작업을하는데, 그과정에사진이나영상등파생되는예술작품들을포함하여집을짓는행위자체까지모두그들의작업에포함된다. (도판 3)
믹스라이스의작가들이수년간에걸쳐공동체의주민들과깊은유대관계를맺고서로의신뢰관계를바탕으로작업을해왔듯, 대부분의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작가들도그러하다. 2014년맥아더그랜트를수상한미국작가릭로우 (Rick Lowe)도이점을분명히하고있다. 그는 LA Times의인터뷰에서이렇게밝힌다: “반드시아주오랜동안관계를발전시켜야합니다…. 어떠한공동체에뛰어들어와서, 곧바로그곳의모든복잡함을다파악할수있다고생각한다면그것은오만하고그공동체를무시하는행위가될것입니다.” 미국작가릭로우, 영국의어셈블그룹, 한국의믹스라이스모두공동작업을통해서사회문제를제기하므로써사람들에게그문제들을인식시키고, 나아가서는문제해결을모색한다는점에서공통적인목표를가지고있다고볼수있을것이다.그런점에서믹스라이스를위시한위에언급한이들의작품을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의범주에넣을수있을것이다.
물론 “Socially Engaged Art”라는타이틀에자체에대한비판이없는것은아니다. 모름지기작가는진공상태에사는것이아니고, 자신이속한사회와자신의환경의영향을받으며작품을제작한다.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 말그대로하자면, ‘사회와관련을맺는예술’이라는뜻인데, 그렇다면그러한타이틀을달지못할예술이어디있겠는가?혹은그런기치아래에서제작되진않는예술작품들은전부사회와유리된것이라고할것인가? 그러한아이러니를의식한탓인지, 믹스라이스의작업을지칭하고자하는여러가지시도가존재한다. 이는미술사조내에서의우리가알고있는유명한 ‘주의’나사조들이실은그특정명칭이하나로정착될때까지는시간이걸렸고, 그이전에는여러가지명칭으로불렸다는것을기억해볼때, 그다지드문일은아니다. 따라서, 소셜리인게이지드아트와같은사회적, 정치적문제에대한언급을하면서대중들의관심을환기시키는예술을일컫는용어는다수존재하고아직확립된하나의합의된명칭은존재하지않는다는말이다.
4. 공공미술(Public Art)과새로운공공미술 (New Genre Public Art)
먼저, 예술가이자저자, 교육자인수잰레이시(Suzanne Lacy)가 1991년에처음만들어낸용어로“뉴장르퍼블릭아트 (New Genre Public Art),” 즉“새로운장르의공공미술”이라는용어가있다.이용어는샌프란시스코미술관에서행해진공개퍼포먼스와수잰레이시의저서『지형의자리매김: 새로운장르의공공미술 (Mapping the Terrain: New Genre Public Art)』이라는저서를통해처음소개되었다. 보통 ‘새로운’ 이라는수식어가붙는다는것은그이전이존재한다는의미인데, 실제로‘공공미술’이란단어는해당예술작품의구매자가개인이든공공단체이든, 혹은그것이설치된장소가사유지이든지공유지이든지상관없이공공영역에있는예술을지칭하는용어로폭넓게사용되어왔다.
이 글은 작년에 쓴 글로 2016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들 중 "믹스 라이스"라는 팀에 관한 것이다. 기존에 알고 있는 회화나 조각, 심지어 설치미술이나 비디오 아트가 아닌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팀'의 작품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글이다.
하지만, 대략이라도 현대미술이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가끔씩 아주~현대적 미술에 대해서도 쓸까 생각중인데, 이 글이 그 첫 포문을 여는 글이 되겠다.
그《올해의작가상》전이라는전시회는원류를따져올라가보면, 국립현대미술관이주관하는대표적인전시로 1995년부터 2010년까지정기적으로개최되었던《올해의작가》전을모태로하고있다. 이를국립현대미술관이 SBS 문화재단의협력을통해, 2012년부터독창성과역량을갖춘작가들을후원하는수상제도로변경하여운영하고있다.어느덧올해로 5회째를맞은《올해의작가상》전은재능있는작가들의발굴을통해한국현대미술의발전을모색해가면서이제는대한민국의대표수상제도로제대로자리매김해가고있는듯하다.
과연 60여년전에한독일철학자의에세이가어떤식으로오늘날한국의한프로젝트팀의작품을비추어주는렌즈가될수있을까에대한의문은믹스라이스를다루는한방송국의다큐멘터리에서언급한 “혐오의시대예술의역할”이라는부제에서일말의실마리를발견하게된다. (2017년 1월 22일일요일밤 11시 5분방영, SBS 아트멘터리 ‘남을위한행진곡’)하이데거의글이씌여진시대도 “혐오의시대”를겪고전후이제막화해를모색하던시기였을것이고, 이는 2017년의오늘날의현실과도일맥상통하고있기때문이다.
하지만, 고정된장소를전제로하는주거는정체성을지켜주는수단이된다는점에서는유용하지만, 본질적으로배타적이고향수를불러일으키는개념이라고봤을때중대한문제를야기한다.그정체성은우리에게고정된정체성을부여하고, 과거에뿌리를내리기위해취해진것으로미래와의진정한관계를방해하는본질적으로후진적인방향성을내표하고있다고도볼수있기때문이다.
사건은 10월 5일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유명 작품 '풍선을 든 소녀 (Girl with Balloon)가 1백4만 파운드, 한화로 15억을 훌쩍 넘는 가격에 팔리고 난 직후에 일어났다. 직후에 뱅크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이 경매에 나와 팔리게 되면 작동하도록 이 작품에 분쇄기를 장치했음을 밝혔다고 한다. 물론 이는 당시 경매에서 작품이 조각조각 분쇄되는 장면을 보고 진정으로 놀라는 관중들의 모습이 담긴 인스타그램들과 함께 여러 뉴스에 게재되었다.
물론, 이 상황 자체가 과연 어떻게 가능했는지 여러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1. 분쇄기가 액자 속에 장치가 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과연 경매를 준비하는 측에서는 액자에 끼워져 있는 작품을 사전에 살펴보지 않았던 것일까? - 경매 이전 작품의 상태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 한번쯤은 작품을 액자에서 빼보지는 않았던 것일까? 게다가 작품과 액자 무게 외에 그 정도의 장치가 되어 있었다면 작품은 이상할 정도로 상당한 무게였을텐데 말이다.
2. 그 분쇄기는 왜 작품의 절반 정도밖에 분쇄가 진행되지 않은 것일까? 전부다 분쇄되었다면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되었을텐데, 지금 상태로는 미묘하다. 예상했던 대로, 구매자는 이 상태의 작품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은 이 상태로 또 거래가 될 것이라 짐작된다.
3. 그 분쇄기를 장치하고 나서 경매에서 판매될 때까지 수년은 걸렸을텐데, 과연 그 분쇄기는 어떻게 작동했던 것일까? - 뱅크시의 정보원 (?)이 그 작품의 소재를 계속 추적해오다가 소더비 경매장에 잠입하여 경매가 이뤄지는 순간 원격 조정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던 것일까? 건전지 없이 그런 작동을 할 수 있는 장치가 있나? 전기 장치는 잘 모르지만, 여하튼 미스테리다.
경매 관련자들을 깜쪽같이 속였다 치고, 지치지 않는 건전지 에너자이저를 써서 성공적으로 경매사가 경매봉을 두드리는 순간 분쇄기를 작동시켰다 치자. 방법이야 어떻게 되었든, 이번 사건은 미술사에 또 다른 역사를 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퍼포먼스라고도 볼 수 있는 이번의 사건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터무니 없기까지 한 천문학적인 금액들이 오가는 경매에서의 작품거래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를 보내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유명세에 따른 작품 가격이 높아지고 하는 미술계의 통례에 반대하기 위해 자신(들)의 얼굴이나 구체적인 이력을 밝히지 않아 왔던 것이다.
뱅크시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애당초에 그 (혹은 복수의 작가군단?)가 익명으로 활동한 것은 그(들)의 작품이 영국 브리스톨 거리에 그리피티를 그리는 것을 시작해서인데, 영국에서 거리에 낙서를 하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법적인 제재를 피하기 위해서라고도 알려져 있다. 물론 위에 밝힌대로 미술계의 통상적인 관례에 대한 반항이라는 설도 있다.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그가 1974년 영국 출생이라고 밝힌 곳도 있는데, 대부분의 미술관련 사이트에서는 여전히 그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다고 씌여있다.)
이후에 그리피티 이외에도 꾸준하게 기발한 활동을 해온 그의 작품은 많은 논란과 함께 경매에서의 작품의 가격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다분 정치적이고, 반전주의, 반자본주의적 메시지로 가득한 그의 작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그의 명성에 편승해 뱅크시를 자처하는 작품도 적지 않고, 그에 대해 '내 작품 아님'을 홈페이지에서도 밝히기도 한다. (한번 더 꼬아서 생각하자면, 이러한 의사표명 또한 그의 자작극이 아닌가 의심하게도 된다. 왜냐하면, 익명으로 작품활동하는 것 자체가 '작품에 따라다니는 작가의 이름'이라는 관례에 대한 반항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애당초 굳이 저렇게 주인 찾아주기 식의 성명서를 낼 필요가 있나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몸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체제적인 작품을 하는 그가 미술시장에서 몸값을 높이게 된것은 어찌된 영문인걸까?
일례로 2003년 제작되었던 Bomb Hugger라는 그래피티 작품의 경매 경과를 살펴보자.
Sotheby's London
Date:2010-02-11
Lot Number :284
Low Estimate :$39,200[+92%]*
High Estimate :$54,800[+37%]*
Hammer Price :$75,200
Sold For :$92,250*
2010년 2월 11일자 경매를 보면 이 작품의 최종 가격은 최저 예상 가격 4만불을 가볍게 넘어 최종가는 9만2천불, 한화로 1억이 넘는 금액에 거래가 되었다. 애당초 미술 작품에 터무니 없는 가격을 매기는 이러한 미술 시장에 대한 비판은 경매서 고가로 팔린 작품을 거리에서는 60불에 파는 행위를 하거나 직접적으로 아래와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등, 여러차례 그의 작품 속에서 언급되었다.
Banksy – I Can’t Believe You Morons Actually Buy This Shit, 2007 '너희같은 멍청이들이 정말로 이런 쓰레기를 사다니, 나는 당최 믿을 수가 없다.'는 제목으로 경매장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쯤 되면, 그의 작품 값을 올리는 것은 미술 시장이자 미술계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가깝게는 앤디 워홀의 팝아트, 좀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셀 뒤샹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다.
Banksy, Soup Cans (2006) EHC Fine Art 앤디 워홀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인건가? 현대미술가들은 스프캔이라는 상품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미술사 적으로 보면, 이는 마르셀 뒤샹이 1917년 한 전시회에 철물점에서 구입한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라는 서명만 하고, '샘 (The F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출품을 한 것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 되지 않을까?
애시당초 참가비만 내면 전시를 허용하는 허술한 전시회에 출품했음에도 당시에는 그가 출품한 변기는 출품이 거절 당했다. 이후, 작가는 작품을 '제작'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기만 해도 되는 것이라는 면죄부 (?)를 받게 되는 미술사적인 일대사건으로 기록되게 되는 것이다. 이후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 면죄부로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선택'해왔던가.
이번 뱅크시의 첩보전을 방불케할 '퍼포먼스'는 미술사적으로 또 다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경매에서 작품의 가격을 매겨 유통하는 과정에 대한 반항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 퍼포먼스 자체는 또 다른 형태의 예술 형태로 자리잡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절반쯤 분쇄기를 통과한 그 작품은 이번 경매가를 가볍게 뛰어넘으며 더 높은 가격에 판매될지도.
한편, 뱅크시가 자신(들)의 인스타그램에 사전에 분쇄기를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해당 경매에서 작품이 순식간에 분쇄되어 액자밑으로 흘러내리는 과정을 촬영한 것을 올리면서 "The urge to destroy is also a creative urge" - Picasso라는 구문을 함께 실었다. 이는 항상 자신의 이전의 작품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창조를 추구했던 피카소가 '창조적인 진공청소기'라 불렸던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천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 미술계의 황금만능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을 했지만, 그 미술계에서 최고가를 갱신하며 그러한 시스템을 만끽한 피카소에 대해서는 별 저항이 없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