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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14. 20:37 미술 이야기

며칠 전 제프 쿤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Playfulness' 혹은 '장난스러움'이 아닐까 하며 글을 마쳤다. 

오늘 그 꼬리를 다시 잡아, 그 장난스러움은 실은 비단 제프 쿤스 작품의 특징만은 아니라는 반전으로 이어갈까한다. 

사실 제프 쿤스의 비지니스 능력이랄까 상업적 수완은 타고 난 점도 있다. 작가가 되기도 전 아직 어린 시절 예술에 재능은 있었던 듯, 가구점을 하던 부모의 가게에 자신의 작품을 장식해두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손님이 가구를 사갈 때 그 앞에 걸어둔 작품을 함께 팔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게 또 호평을 받았고 부모님의 상업도 성업을 이뤘다는 소문이다.  시드니에서도 전시된 바가 있고, 록펠러 센터 앞에서도 전시된 적이 있는 꽃으로 꾸며진 거대한 강아지 조각은 원래 1992년, 독일 아롤슨 지방의 작은 성 앞에 전시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자신의 작품이 경매에서는 높은 가격으로 팔리지만, 예술계에서는 그다지 평가받지 못하자,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꽃과 강아지를 결합해서 거대한 조각을 만들기에 이르렀고, 그것을 바젤에서 도큐멘타가 열리는 해에 독일에서 전시했다고 한다. 이후 예술계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다소 우호적으로 변했다는 후문도 함께 따르고 말이다. 물론 그 조각품의 가격이 4,500배 오른 것은 안비밀! 

제프 쿤스의 거대한 강아지의 최초 버전. 1992년 독일의 아롤슨 지방의 성 앞에 세워졌다.  Jeff Koons, Puppy (1992) Stainless steel, wood, soil, geotextile fabric, internal irrigation system, live flowering plants ;  1234.4 x 1234.4 x 650.2 cm

그 조각은 여러가지 버전으로 제작되었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현재 빌바오 구겐하임에 전시된 작품이다. 제프 쿤스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optimism, confidence and security"를 표현하기 위한것이라고.  어쩌면 이 구호는 비단 이 작품 뿐 아니라, 그의 전 작품 속에 흐르는 정신이 아닐까 싶다. "낙천주의, 확신, 그리고 안정감." 그리고, 이는 요즘 사람들이 작품에서 갈구하는 어떤 것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빌바오 구겐하임에 전시된 제프 쿤스의 <강아지> 조각.  무려 12 meters 40 cm x 830 cm x 910 cm에 이르는 조각상을 빽빽히 채운 꽃들을 30명의 정원사가 끊임없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일전의 포스팅에서 제프 쿤스로 대표되는 요새 미술의 특징이 'playfulness' 혹은 '장난스러움'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그것이 결국은 제프 쿤스가 주장한 'optimism'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시대는 "대공황을 견디고, 전쟁을 겪은 후 더이상 '꽃이나 소파에 기대 누운 미녀'를 그릴 수 없는 상황"이라 토로하던 추상표현주의자 바넷 뉴먼의 대척점에 와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의 삶이 반드시 전후의 상황보다 훨씬 더 즐겁고 평온한가 생각해보면 그렇지는 않지만, 적어도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술에서 더이상 작가의 치열한 실존적 투쟁을 보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다. 몇년전 한국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던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작품, 그리고 내가 갤러리들의 홈페이지나 전시장에서 자주 발견하는 작품들의 경향은 어느쪽인가 생각해보면 큐비즘도 추상표현주의도 아닌 팝 아트 쪽이 많다. 조형에 대한 탐구도 심각한 철학적 자아탐구도 아니라는 말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요새 미술'은 즉각적으로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고, 그 속에서 유머와 즐거움이 넘치는 작품이 훨씬 더 많고, 작법이나 주제면에서 팝아트 혹은 네오팝에 훨씬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David Gerstein, BIKING B (1998) Hand Painted Laser-Cut Metal Cutout, 3 Layers ; 137 x 56 cm, Edition of 295
David Gerstein’s “Fifth Avenue” wall sculpture, 2016
David Gerstein, United States
David Gerstein, Synergy (2013)

사진으로 봐서는 잘 구별되지 않지만,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작품은 준조각 혹은 부조 작품들로 '벽조각 (Wall Sculpture)'이라 불린다.  색상은 밝고, 주제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사물과 사람들이고, 그 속에서 이들은 활기차고 행복하다.  팝아트의 후예답게 그의 예술은 판화처럼 수많은 에디션이 존재하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affordable'한 편이다. (절대적으로는 물론 아무나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지만, 경매에서 최고가를 갱신하는 작가들이나, 유명 작가들의 '호당 얼마'하는 가격보다는 저렴하다는 뜻이다. 대략 명품백을 큰 맘먹고 살 수 있을 정도라면 살 수 있을 정도라고 하면 될까?)   

데이비드 걸스타인 스스로도 자신이 팝아티스트임을 밝히면서, 자신이 굳이 앤디 워홀의 추종자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색상이나 대중적 이미지들을 이용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는 "내 철학은 예술은 삶과 맞닿아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작품이란 일년에 한 번 미술관에 가서나 보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그는 "(내 작품은) 관람객의 눈 높이에서 이야기한다. 내 작품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 나는 사람들이 내가 의도한 것을 이해하기를 바란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어려운 미술은 안하겠다는 소리다. 그는 심지어 관람객들이 전시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만지는 것도 허용하고 있다.  예술은 더 이상 심각한 철학을 논하거나, 유일무이한 작품이라거나 극소수의 지성과 교양을 갖춘 이들만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팝 아트 이래 지속적 흐름이긴 하다. 물론 이 와중에 추상 작품들에서 빠진 서사를 철학적 담론으로 채워가는 작업은 계속 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관람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 삶이 실존인데 굳이 작품까지 심각한 걸 봐야하나 하는 심정이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자는 넷플릭스의 성공이 바로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파악해서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즉, 명화니 예술 영화니 하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작 그런 사람도 힘든 일 끝나고 집에 가서 보는 영화는 그냥 가벼운 오락 영화이기 십상이고, 그래서 그러한 영화를 다수 제공하는 넷플릭스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즐거운 미술들이 지배적인 요즈음,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삶이 힘든것일까? 아니면 예술이라는 것이 결국 저녁 후에 가볍게 볼 수 있는 오락프로그램과 같은 역할을 자처하게 된 것일까?

아래는 내가 최근 발견한 '즐거운' 미술 작품들이다.  

고근호, 즐거운 상상 

 

김경민 , Good Morning (2012) 청동 , 우레탄 ; 220x90x420 cm
임승현, 도형을 닮아가는 사람들, 원래 도형이었던 사람들
전영근, 자작나무 숲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9. 5. 10. 00:10 미술 이야기

Banksy, Love is in the Bin, 2018, Private Collection, Photo: Sotheby’s © Banksy SOTHEBY'S © BANKSY

 

작년 2018년 10월 5일, 소더비 경매에 나온 뱅크시의 작품이 경매 망치가 내려쳐지자마자, 그의 작품이 분쇄되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거기에 대한 글을 남기면서 나름 추측을 해봤다. (그 글에 대해서는 요새 미술~뱅크시 Banksy ...또 사고치다를 읽어보길)  

https://sleeping-gypsy.tistory.com/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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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한대로 그 경매에서 낙찰 받은 익명의 유럽인 여성 콜렉터는 그 작품을 그대로 소장하기로 했고, 이 작품은 이제는 <Love is in the Bin> (2018)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다.  이 제목을 달게 된 것은 경매가 끝난 후 일주일 경 지난 10월 11일 소더비 측이 뱅크시의 정식 인정기관인 "해충구제 (Pest Control)"에서 발부한 인증서가 첨부되어 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모를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고, 그 기세는 점점 더 가속화되고 강렬해진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 뿐인건가?

이후 뱅크시 자신의 작품이 절반 정도만 분쇄된 것에 대해서는 '분쇄기의 오작동'이라며 '해명 (?)'을 했다고 한다.   (건전지는 수명이 긴 에너자이저를 썼는데, 분쇄기는 좋은 브랜드 제품을 사용하지 않았나보다)   

이 해명을 읽고, 잠시 내가 올린 위의 글에서 제기한 의혹을 뱅크시가 구글 번역기를 돌려 읽었나 생각을 했....   그럴리는 없고. 사실상 이 절반 쯤 분쇄된 작품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기에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했으리라. 

이 작품은 이제는 <Love is in the Bin> (2018)이라는 제목을 달고, 지난 2월 5일부터 3월 3일까지 독일의 바덴바덴 소재의 프리다 버다 미술관 (Museum Frieder Burda, Baden-Baden)에서 전시를 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그 익명의 낙찰자가 독일계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Museum Frieder Burda, Baden-Baden

관람객들에게 관람료를 받지 않고 전시되었다고 하는데, 그 미술관의 웹사이트에 소개글에 언급된 것같이, 과연 경매시장이라는 불에 기름을 때려 부으면서 그러한 미술시장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을 남긴다. 

BANKSY @ MUSEUM FRIEDER BURDA LOVE IS IN THE BIN

Museum Frieder Burda, Baden-Baden 전시 준비 중인 모습

 

이후에는 작품의 소유자로부터 영구 대여를 받는 형태로 2019년 3월 7일부터 스튜트가르트 주립미술관 (the Staatsgalerie Stuttgart)에서 전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독일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뱅크시 팬이라면 한번쯤 일정을 짤 때 참고해보시기를...

스튜트가르트 주립미술관의 구 건물. 예전 예술 아카데미가 있던 건물이라고 한다

 

1984년 완성된 스튜트가르트 주립미술관의 신축 건물, 주로 현대미술을 전시한다고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1. 11. 00:30 미술 이야기

요새 미술 - 제프 쿤스의 표절 Jeff Koons's Plagiarism 

네오팝 아티스트 혹은 차용 작가로 불리는 제프 쿤스는 마르셀 뒤샹과 앤디 워홀의 미학 (그런 것이 있다면) 담론을 결합하여 극대화 시킨 작가라고 있다.  뒤샹은 철물점의 소변기를 그대로 사서 엎어 놓더라도 작가의 선택 있었다면 작품이 되도록 하면서 예술가들로 하여금 손수무엇인가를 만들지않아도 되도록 만들었다. 워홀은 배고픈 천재 작가의 신화를 벗어던지고 성공한 예술가는 헐리우드 배우만큼의 유명세와 부를 누려도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따라서, 제프 쿤스는 한편으로는 직접 제작하는 수고없이 수많은 조수들에게 일을 시켜 제작하면서 (한때 수백명에 이른 조수들의 수를 최근 수십명 해고 했었다는 것이 뉴스가 되기도 했다), 아이디어를 짜내는 고뇌 따윈 집어치고 광고나 이미 유명한 작품들의 패러디와 차용을 해서 제작하면서, 헐리우드 스타만큼이나 유명세를 톡톡히 누리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다.  그는 생존 화가 가장 비싼 작품을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일부러 싸구려처럼 보이게 만든 작품은 현대 미술의 수준 염려하는 진지한 미술 비평가와 애호가들에게 비판과 경멸의 대상이 되어왔다.  

 

 

Jeff Koons. Photo: Adam Berry/Getty Images. 절묘하게 잘찍은 사진. 그의 뒷쪽의 둥근 등의 모습이 마치 후광처럼 보이게 찍었다.

 

제프 쿤스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데미안 허스트와 함께 생존 작가로서는 작품 가격이 가장 높은 작가 랭킹 3위안에 드는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적 작가이다그는 애당초 키치’ (고급 미술에 대응한 개념으로 저질이고 싸구려 미술) 지향하며 의도적으로  싸구려 같고 저질인 작품들을 만들어내며 이율배반적으로 경매에서는 연이어 최고 가격으로 팔아 치워왔다

초기에는 일부러 삼류 잡지의 표지와 같은 사진을 작품으로 만들어내거나포르노 배우였던 아내와의 성관계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조각을 등신대로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1988년부터는 진부함 (Banailty)’ 시리즈물로 조각품들을 유사한 미감 (이것도 미감이라면) 작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서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그의 공방에 소속한 조수들과 함께 전문 기술자들을 고용해서 말이다

그런 제프 쿤스의 의도적 저질 미술 혹은 키치 미술은 외설 논란과 함께 종종 법정 소송에 휘말리기도 해왔다. 이번에는 그의 1988 Fait d’Hiver 프랑스 의류 나프나프 (Naf-Naf) 1985년의 광고를 표절했다는 논란끝에 최종적으로 프랑스 법정에서 표절 판결을 받았다.    

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랭크 다비도피치 (Franck Davidovici) 제기한 소송에 쿤스가 작권 위반으로 €300,000 (£270,000) [4억원 상당] 배상하도록 최종 판결을 받았다. 아이러니 점은 제프 쿤스의 작품은 2007 크리스티 경매에서 프라다 재단이 무려 3.7 million (£2.8m) [305천만원 상당] 구매했었다는 사실이다

 

Jeff Koons,  Fait D'Hiver (1988) CREDIT:  RALPH ORLOWSKI/GETTY IMAGES EUROPE  표절 소송에서 패배한 제프 쿤스의 1988년 작품 Fait D'Hiver

 

Franck Davidovici’s original advert for Naf Naf, which he says American artist Jeff Koons plagiarised for his work Fait d'Hiver CREDIT: TELEGRAPH  제프 쿤스가 표절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유명 의류 브랜드 나프나프의 광고

 

나프나프의 광고를 보면 젊은 여인이 밭에 누워 있는데, 설정상 눈사태의 희생양으로 보이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마치 조난자를 구조하는 세인트 버나드와 같이 돼지가 목에 럼주가 담긴 작은 통을 매고 그녀의 곁에 다가서고 있는 모습이다. 작품은 나프나프 아기 돼지 삼형제에서 벽돌집을 지었던 막내 돼지의 이름인데서 설정이리라.

 

작품 모두, 조각 작품이라는 유사점 이외에도, 프랭크 다비도비치가 주장한 바대로 소녀의 표정과 목에 통을 매단 돼지가 자신의 작품과 동일함하다. 굳이 전문가의 식견을 묻지 않더라도, 작품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도 놀랍도록 유사하다.  제프 쿤스의 경우, 추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인 , 펭귄 두마리를 덧붙였다는 점, 쿤스의 돼지가 선물 포장의 리본 같은 것을 두르고 있는 것 이외에는 여인과 돼지라는 등장인물과 구도까지 동일하다. 게다가 제목까지 ‘Fait d’Hiver’라는 동일하게 달았는데, 이는 영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The Fact of the Winter”라고 해석  있는 뜻이 명확하지는 않은 불어 단어인데, fait divers (‘짧은 뉴스라는 ) 동일한 발음에서 언어유희이다.   

 

다비도비치는 제프 쿤스의 작품의 존재를 2014 퐁피두 센터에 전시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전시로 인해 퐁피두 센터도 2014 전시로 인해 벌금을 물게 되었다. 1988 이후 그가 유명 광고 등에서 있는 저작권이 있는 이미지들을 이용해서 제작한 쿤스의 ‘Banailty (진부함)’라는 조각 시리즈는 그의 본국인 미국에서 끊임없는 논란을 야기해왔다. 그리고 쿤스에게 프랑스에서의 소송이 처음은 아니었다. 작년에는 제프 쿤스 개인 유한회사인 Jeff Koons LLC 작고한 프랑스의 사진 작가 -프랑소아 보레 (Jean-François Bauret)에게 51백만원 (€40,000) 배상하도록 판결했다.

 

왼쪽) 프랑스 사진작가 Jean-François Bauret의 'Enfants' (1975)의 사진 작품 ; 오른쪽) 제프 쿤스, 도자기 작품  '나체 (Naked)' (1988) - 프랑스 법정은 제프 쿤스에게 장-프랑소아 보레에게 4만 유로를 지불하라는 판정을 내렸다. 

제프 쿤스의 나체 (Naked)” 1988 제작된 1미터 남짓한 도자기 조각으로 나체의 어린이가 어깨 동무를 한 채, 남자 아이의 오른손에 들려진 꽃을 여자 아이가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프랑소아의 1975 사진 작품 어린이 (Enfants)”라는 사진과 몹시 유사한데, 작품은 엽서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사진 작품에서는 어린이가 꽃을 들고 있지는 않고, 그냥 나란히 서서 어깨 동무를 하고 있는 모습이긴 하지만, 소녀의 숙인 고개의 모습 소년의 시선 등에서 유사하다.   

미국에서의 경우, 여러 논란들이 있었지만, 법정 소송으로 발전한 경우는 없는데 비해, 프랑스 법정은 차용미술 재벌 작가에 대해서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은 듯하다.

이는 순수 예술의 역사를 이끌어온 프랑스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 이해해도 될까?

 

Art Roger, 'Strings of Puppies'   

 

Jeff Koons, Puppies   String of Puppies (1988),  polychromed wood,  106.7 x 157.5 x 94 cm  © Jeff Koons  Edition of 3 plus AP    사진 작가 아트 로저의 '줄줄이 강아지'라는 사진 작품을 쿤스가 채색 목재 조각품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소송까지는 가지 않고 '표절'이 의심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사진 작가와 법정 밖에서 합의로 매듭지었다 알려졌다. 

 

참고로 제프 쿤스의 다른 작품은 그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왠만한 패션 브랜드보다 잘 꾸며 놓았다.  그의 홈페이지 주소는 여기~ 

http://www.jeffkoons.com/

 

Welcome to jeffkoons.com | Jeff Koons

 

www.jeffkoons.com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10. 01:30 미술 이야기

어제에 이어 '믹스라이스'에 대한 글 Part II


3. 현대미술의 다양한 모습 – 셜리 인게이지드 아트사회 참여 미술

이제껏 살펴본 바와 같이 믹스라이스의 작품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고스스로가 현대미술을 어느정도 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친숙한 형태의 예술은 아니다이러한 작품을 하는 믹스라이스가 2016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고이는 세계적인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국의 ‘올해의 작가상 해당하는 것이 터너 프라이즈 (the Turner Prize)이다그런데, 18명의 작가들로 구성되어 리버풀을 근간으로 활동하는 에셈블(Assemble)이라는 팀이 “그랜비  스트릿츠 프로젝트(the Granby Four Streets Project)” 2015 터너 프라이즈 수상했다.  이들의 작업은 생활 환경이 열악한 지역을 찾아다니면서그곳에서 공동으로 낡은 집을 고쳐주거나새로 집을 지어주는 작업을 하는데 과정에 사진이나 영상  파생되는 예술작품들을 포함하여 집을 짓는 행위 자체까지 모두 그들의 작업에 포함된다. (도판 3)

도판 3) Assemble

이러한 류의 새로운 경향의 예술을 지칭하는 많은 이름들이 존재한다가장 대표적인 명칭으로는 소셜리 인게이지드 프랙티스 (Socially Engaged Practice), 번역하자면, ‘사회 참여 운동’ 정도가  것이다약칭하여 소셜 프랙티스 혹은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 (Socially Engaged Art)라고도 칭하는데공동체와 관련된 문제제기를 의도로 하는 활동을 포괄하는 일련의 예술을 통칭한다. 2004년부터 실행된 터너 프라이즈를 주간하는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홈페이지에 개재된 용어 해설에 따르면대부분 협업으로 이뤄지며 공동체와의 공동작업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이는 대부분 봉사활동 (outreach program)이나 교육 프로그램의 결과인 경우가 많고사회 운동과 관련이 깊은 이러한 예술 형태의 가장 특징적 요소는 사회참여적 요소이고 따라서 정치적 이슈를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믹스라이스의 작가들이 수년간에 걸쳐 공동체의 주민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의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작업을 해왔듯대부분의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 작가들도 그러하다. 2014 맥아더 그랜트를 수상한 미국작가  로우 (Rick Lowe)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그는 LA Times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다  반드시 아주 오랜동안 관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공동체에 뛰어 들어와서곧바로  곳의 모든 복잡함을  파악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만하고  공동체를 무시하는 행위가  것입니다.”  미국 작가  로우영국의 어셈블 그룹한국의 믹스라이스 모두 공동 작업을 통해서 사회문제를 제기하므로써 사람들에게  문제들을 인식시키고나아가서는 문제해결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믹스라이스를 위시한 위에 언급한 이들의 작품을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의 범주에 넣을  있을 것이다.

물론 “Socially Engaged Art”라는 타이틀에 자체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모름지기 작가는 진공상태에 사는 것이 아니고자신이 속한 사회와 자신의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작품을 제작한다.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 그대로 하자면, ‘사회와 관련을 맺는 예술이라는 뜻인데그렇다면 그러한 타이틀을 달지 못할 예술이 어디 있겠는가?  혹은 그런 기치 아래에서 제작되진 않는 예술작품들은 전부 사회와 유리된 것이라고  것인가그러한 아이러니를 의식한 탓인지믹스라이스의 작업을 지칭하고자 하는 여러가지 시도가 존재한다이는 미술 사조내에서의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주의 사조들이 실은  특정 명칭이 하나로 정착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이전에는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렸다는 것을 기억해볼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다따라서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와 같은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예술을 일컫는 용어는 다수 존재하고 아직 확립된 하나의 합의된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4. 공공 미술(Public Art) 새로운 공공미술 (New Genre Public Art)

먼저예술가이자 저자교육자인 수잰 레이시(Suzanne Lacy) 1991년에 처음 만들어낸 용어로  장르 퍼블릭 아트 (New Genre Public Art),”  새로운 장르의 공공 미술이라는 용어가 있다.   용어는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서 행해진 공개 퍼포먼스와 수잰 레이시의 저서 지형의 자리매김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 (Mapping the Terrain: New Genre Public Art)이라는 저서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보통 ‘새로운’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은  이전이 존재한다는 의미인데실제로 공공 미술이란 단어는 해당 예술작품의 구매자가 개인이든 공공단체이든혹은 그것이 설치된 장소가 사유지이든지 공유지이든지 상관없이 공공 영역에 있는 예술을 지칭하는 용어로 폭넓게 사용되어왔다.

공공 미술 (Public Art)라는 용어는 유래를 따져 거슬러 올라가보면먼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당시  정부가 구민정책이자 선전정책인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도시의 미화작업에 예술가들을 대거 고용하여 벽화등을 제작하도록  것에서 찾아볼  있다이러한 미국의 공공 미술은 1970년대에 이르러 전기를 맞게 된다먼저 1960년대 활발했던 인권운동의 결과공공 장소에 대한 대중의 권리의식의 대두하게 되는데서 원인을 찾을  있다 시기는 도시 재개발 프로그램이 시작되고예술계에서는 대지미술미니멀리즘  작품들이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로잘린드 크라우스를 위시한 미술사가와 비평가들의 연구등에 힘입어 예술계와 문화계 전반에 걸쳐 조각의 개념에 대한 재검토를 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1977 공공 아트 기금 (Public Art Fund) 조성되고, 1979 건축 속의 예술 프로그램(Art-in-Architecture Program) 실행되면서미국 전역에 걸쳐 연방 기관의 건축물에는 반드시 미술작품을 함께 조성해야만 하도록 하게 된다.  (비슷한 예로우리나라의 대형 건물앞의 조각품들대표적인 예로 조나단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남자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것이다공공 미술은 이러한 대형 건물 앞의 조형물과 동일시 되면서다시 미술계에서는 이처럼 단순히 장식에 머무는 공공 미술에 대한 비판적 반성도 일어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기념비특정인물을 기리기 위한 조각상그리고 특정 장소에 설치하기 위해 장소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예술 사이트 스페시픽 아트 (Site-Specific Art)라는 새로운 경향의 예술이 대두함에 따라 이에 대한 미학적 논의도 활발해졌다거기에 1989 리처드 세라 (Richard Serra: 1938-) 기울어진  (Tilted Arc)” 철거를 둘러싸고 법정소송이 일어나게 된다이에 따라공공 미술의 정의와 의의나아가서 작가의 권한과 대중의 권리에 대한 미학적정치적인 논의가 뜨겁게 펼쳐지게 되고사회전반에 걸친  논란을 겪게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기울어진  대표적인 후기 미니멀 아트 작가인 리처드 세라가 건축 속의 예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의뢰를 받아 뉴욕 맨하탄의  연방 정부의 건물 (the Jacob K. Javits Federal Building)  광장 (Foley Federal Plaza) 설치하게  작품이다. (도판 4) 

도판 4) Richard Serra, Tilted Arc

논란의 발단은 건물의 광장을 가로지르며 놓여진 강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세라의 조각이  건물과 주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생활의 방해가 된다는 여론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하게 되면서 일어난 것이다.  이에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Site-Specific Art’  장소에 놓이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따라서다른 장소에 옮겨진다면  작품의 의의가 상실되어버리므로 작품의 이전을 반대한데서 시작한다많은 예술계의 인사들이 작가의 편을 들어 언론과 학술 발표를 통해 창작의 자유를 옹호하고작가의 의도를 존중할 것을 피력했다하지만이에 반해그곳에서 매일매일을 생활하는 이들의 실질적인 불편함그리고 녹슬어 흉물로 변해버린 거대한 강철 덩어리를 봐야하는 시각적인 괴로움을 호소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아반대의견도 거셌고 청문회도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공공 미술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인 대중의 공익을 위하지 못하는 세라의 작품은 존재가치가 있냐는 것이었다.

결국 여론에 밀려 그의 조각은 철거되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 되었지만이후로도 공공 미술의 역할과 의의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는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논의 되고 있는 상황이다. 1991 수잰 레이시가 “공공미술이란 공원이나 광장에 놓여진 조각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장르의 공공 미술 (New Genre Public Art)”이라는 용어를 창조해  이는 어쩌면 리처드 세라의 조각을 염두에 두고  발언일지도 모른다 과연 예술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존중하고 예술의 자율성을 위해서  광장에 계속 두는 것이 옳았던 것인가아니면예술 작품도 작가도 사회의 일부로서 존재할 뿐이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불편과 혐오감을 주는 것이라면 철거된 것이 정답이었던 것인가?  철거 자체가 여론을 의식한 정치적 행동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공 미술에 대한 리처드 세라의 조각품 사건은 해결점을 제시했다기 보다는 쟁점을  많이 남겼다고   있다.

수잰 레이시가 정의한 새로운 장르 공공 미술 해당한 일련의 작품이 발표된 대표적인 전시회로는 1993  《활동중인 문화컬쳐  액션 (Culture in Action)》인데시카고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팀의 그룹들이 모여 8개의 프로젝트를 이행하였다복잡다단한 이들의 활동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롭고  그룹의 관심사도 다양하다 예를 들면메리 제인 제이콥 (Mary Jane Jacob) 스컬프쳐 시카고(Sculpture Chicago) 공공미술에 대한 재해석 노력도시 빈민지역의 건설에 대한 관심그리고 마크 디용 (Mark Dion) 시카고 도시 생태 활동 그룹 (Chicago Urban Ecology Action Group) 보여주는 시카고에 국한되지 않는 광범위한 지역의 자연과 생태학에 대한 관심 등이 그것이다이들 그룹의 작업은 믹스라이스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다양하고 다채롭고예술 작품으로서의 형식이나 주제면에서도 상응하는 점이 많다 일일이 비교 설명하기는 지면이 부족하기에여기서는 참여한 그룹중 하나의 명칭이 ‘Sculpture Chicago’이라는 점만 지적하고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여기서 ‘Sculpture’ 조각이고 ‘Chicago’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도시 시카고이다하지만  단어의 조합의 의미는 모호하다여기서의 ‘sculpture’ 명사로 읽기보다는 시카고를 조각하라 동사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그들 전시의 이름이 ‘Culture in Action,’ ‘행동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믹스라이스가 섞여 있는  아닌 쌀을 섞어라라는 뜻에 가까우리라는 추측이  타당하게 여겨지는 대목이다.      

 

5. 나가며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혹은 소셜 프랙티스커뮤니티 아트사회적 전환 (Social Turn), 액티비스트 아트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지만공통적인 특징은 대체로 1) 프로젝트 팀을 이뤄서 작업한다는 . 2) 사회적정치적 이슈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는  3) 쉽게 정의내리기 힘든 다양한 형식과 주제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등을   있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비판은 이미 다다의 포토 몽타쥬에서도 목격했기에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있고성격은 때로 다를 수가 있다 하더라도 공공 미술의 역사도   편이라 새롭다고는   없다만화나 낙서 (graffiti) 팝아트 작가들이 이미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려 놓았기에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리고  소련 등의 공산주의 국가의 정치적 선전용으로 제작된 포스터 등의 예에서 보듯 예술이 정치적 이념을 띄고 있는 예도 많이 보아왔다그리고 무엇보다 순수 예술이란 엄밀한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있다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관람자의 입장에서 소셜리 인게이지드 아트는 일견 낯설고 새롭다고 여겨지다가도주제나 형식적 측면에서만 보면 친숙하게 여겨지는 부분들이 많다 

이들의 작품이 낯설어지는 부분은 오히려 예술가와 관람객과의 역할과 관계 문제그리고 예술 시장에서의 상품으로서의 예술 작품의 가치 문제에 있다믹스라이스는 영화에서의 감독과 같은 존재인가 (분명  관점은 부정할 것이라 짐작한다아니면 그냥 (해당 지역의 주민들과공동 제작자라고 불릴 것인가아니면페스티벌에 동참하는 참가자로서의 관람객인가?  그들의 작품은 어디서부터이며 어디까지인가페스티벌에서의 노래대화도 작품에 포함되는가아니면그러한 일련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긴 메모사진영상  일정한 포멧을 지닌것으로 한정해야  것인가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구입한다거나 소장한다 의미가 통할 것인가아니면후원한다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인가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9. 01:30 미술 이야기

이 글은 작년에 쓴 글로 2016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들 중 "믹스 라이스"라는 팀에 관한 것이다.  기존에 알고 있는 회화나 조각, 심지어 설치미술이나 비디오 아트가 아닌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팀'의 작품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현대미술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글이다. 

하지만, 대략이라도 현대미술이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가끔씩 아주~현대적 미술에 대해서도 쓸까 생각중인데, 이 글이 그 첫 포문을 여는 글이 되겠다. 

이하는 작년의 글을 그대로 옮기는 식으로~~

 

믹스라이스올해의 작가상 2016 수상 작가의 장소’, ‘주거 대한 고찰

 

작년 8월부터 올해 2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올해의 작가상》전에는 회화, 조각, 설치, 사진, 영상 다채로운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 4김을, 백승우, 함경아, 믹스라이스 작품이 전시되었다.  

《올해의 작가상 2016》전( 2016.08.31 - 2017.02.19) 

전시 소개에 관해서는 여기를 참조

 

《올해의 작가상》전이라는 전시회는 원류를 따져 올라가보면,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대표적인 전시로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던 《올해의 작가》전을 모태로 하고 있다. 이를 국립현대미술관이 SBS 문화재단의 협력을 통해, 2012년부터 독창성과 역량을 갖춘 작가들을 후원하는 수상제도로 변경하여 운영하고 있다.  어느덧 올해로 5회째를 맞은 《올해의 작가상》전은 재능있는 작가들의 발굴을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발전을 모색해가면서 이제는 대한민국의 대표 수상제도로 제대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위치의 《올해의 작가상》에서는 1 심사를 통과한, 위에 언급한 4팀의 작가들 , 2016 10 2 심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2016년의 수상자로 믹스라이스 선정하였다.  믹스 라이스 조지은과 양철모라는 두명의 작가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으로 지난 15 동안 한국사회의 이주노동자와 재개발에 대한 이슈를 지속적으로 다루어 왔다. 

 

 

 

1. 그룹 명칭에 대한 고찰; 믹스라이스 (Mixrice), mixed rice 혹은 Mix Rice!

 

먼저믹스라이스라는 그룹명을 먼저 살펴보자.  잡지 <미술세계> 2016 11월호에 실린 작가 양철모의 인터뷰에 따르면, ‘믹스라이스비빔밥이라는콩글리쉬라고 밝혔다. 그리고 아시아가 문화권이라서 이러한 용어를 사용했음을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2002년부터 이미 프로젝트 팀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던 조지은 작가에 이어, 2003  자신도 가담하며 공동작업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팀의 명칭에 대한 양철모 작가의 의견을 십분 존중하더라도, 애시당초 정확히 어떠한 의도로 프로젝트 명을 정했는지,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정한 명칭에 내포되었을 다양한 의미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만약비빔밥이라는 정확하고도 단일한 의미를 전달하기를 원했다면믹스라이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의견을 빌자면, 우리의 단어 선택은 우리의 잠재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 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만이 중요한게 아니라 관객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도 중요하고 작품의 의미에 포함된다는 의견 받아들인다면, 프로젝트 팀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믹스라이스인가?

 

첫째,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작가가 초기 작품 활동에서 주력했던 이주노동자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있을 것이다. 빵과 밥이라는 이분법으로 생각해 보자면, 확실히 쌀은, 작가의 말맞다나, 아시아 문화권을 대유하는 것으로 이해할 있다. 그리고 믹스라이스라는 그룹명이 영어도 한국어도 아니라는 , 그래서 단어자체의 의미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점은 작가가 처음 주목했던 아시아계 노동자 이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묘하게 맞물려들어간다고도 있다. 국보다는 경제적 상황이 좋지않은 동남아 국가에서 들어와 한국에서 불법체류라는 상태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분명 한국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당당하게 외국인임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불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한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해석은, 단어가 콩글리쉬 혹은 브로큰 잉글리쉬일 경우, 그것이 의도 조어이든 아니든간에 단어자체가 주는 반향은 이처럼섞임혹은어울림이란 쉽지않다는 것을 자체로 드러내준다.  상대방의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오용하기 쉽고 의미도 왜곡되기 쉬울 것이다.  물론 그러한 왜곡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잠시 유보해봐야 한다.  낯선 문화의 몰이해 속에 아름다운 오해가 탄생하고 그것은 또다른 의미의 창조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해석도 물론 가능하다.  그룹명이 믹스드 라이스 (Mixed rice), 잡곡이라는 이미 여러 종류의 쌀이 섞여 있는 상태가 아닌 동사로서의 ‘mix’ 사용한 명령문으로서의 믹스 라이스 (Mix rice), 이제는쌀을 섞으라 의미로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룹명을 통해서 작가들은 같은 아시아인이라는 동일성에 주목하여 우리 모두 더불어 살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것은 아닌가 생각해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 말고도 또다른 해석들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믹스라이스 작품활동의 다양성과도 상통한다는 것도 염두에 둘만하다.

 

2. 믹스라이스의 다양한 작품 세계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형태의 프로젝트 팀을 이루어, 마찬가지로 낯선 듀오 그룹명으로 활동한믹스라이스 작품행보 또한 현대미술에 아주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들에게는 낯선 것일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믹스라이스는 조지은과 양철모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으로, 이처럼 작가가 아닌 명이상의 작가들이 프로젝트라는 것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일컫는 일련의 현대미술의 형태로,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예술작품에 대한 일종의 대안이라고 있다.  믹스라이스는 이에 머물지 않고 작가 이외에도 이주 노동자들과의 협업을 통한 작업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제작해왔다.  속에는 사진, 영상, 벽화, 퍼포먼스와 같은 기존의 예술의 범주에 넣을 있는 것도 있지만, 메시지를 담은 티셔츠, 핫케이크, 포츈 쿠키의 제작, 주민들과 함께 개최한 페스티벌 작품의 유형을 쉽게 정의할 없는 작품들도 많다.  (자세한 내용은 믹스라이스 홈페이지를 참조해보자. http://mixrice.org/)

 

성남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믹스라이스의 작품은 소외되어 망각된 도시와 그곳에서 생활하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2006 마석가구단지의 이주민공동체와의 협업을 통해 불법체류 중인 이주민들의 인권문제와 그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조명하는 작품이 있다.  (도판 1) 믹스라이스의 작업의 특징은전지적 작가로서 작품을 기획하고 감독하는 위치가 아닌 이주민들과의 협업을 통해 완성해가는 것에 있다고 있다. 때로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이들과 작업을 하기도 하고, 이주민들의 속내를 그대로 반영하기 위한 글들을 작업화하기도 한다.

도판 1) 마석 단지 페스티벌 

 

믹스라이스는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무분별한 도시의 재개발 운동으로 야기되는 사회문제에도 시선을 돌려 작품활동을 하였다. 최근에는 2 채널 영상으로 제작된 《덩굴연대기》에서 있듯이,  나무들의이식(移植)’ 문제를 조명하면서, 도시 재개발과 맞물려 자행되는 변두리 지역 나무들의 무차별적이고도 비자발적인 이식문제를 다룬다.  해묵은 나무들은 오랫동안 자리에서 지역의 풍경이자 나아가서는 공동체의 일부로서 역사를 이루며 함께해 왔던 존재이다.  이들을 무분별하게 파헤쳐 새로 건축된 아파트 단지의 조명을 위해 옮겨심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는 환경문제이자 생태학의 문제에 대한 언급인 동시에, 여러가지 주변 상황들 때문에 자신들의 오랜 보금자리를 떠날 밖에 없는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의 이주 (移住)’ 상황의 은유로도 읽을 있다.  이러한 식물의이식 대한 관심은 비디오 작품 아니라, 실제 재개발 지역에서 채취한 식물들을 갤러리의 거대한 흰벽에 세심하게 늘어붙이는 작업과 같은 설치작업으로도 이뤄지고 있다. 

 

또한이주 문제에 대해서는 재개발 지역에서 파낸 갤러리의 바닥에 깔고집을 위한 으로 재배치하는 설치도 감행한다.  바닥에는 노끈등으로 구획을 만들어주방,’ ‘거실,’ ‘안방등의 푯말을 세워두었는데, 이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 아파트 개발 초기의 분양 당시, 농지로 사용하던 땅에 그런식으로 구획해두고 재개발을 위한 토지 매매가 이뤄지던 것을 풍자하여 재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도판 2)

도판 2) 아주 평평한 공터 

 

일견 일관성이 없어보이는 믹스라이스의 작업은 자세히 들여보면, ‘거주이주,’ ‘동일성차이,’ 그로 인해 생겨나는 경계그리고 나아가서는정체성 대한 질문으로 일관되게 이어져 왔다는 것을 있다.  그리고, 일견 생활과 밀접하여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듯한 그들의 작품은 실은 무척이나 심오한 철학적 주제에 닿아있다는 것을 있다.  글에서는 이처럼 생활에 밀접하면서도 철학적인 믹스라이스의 작품은 묘하게도 독일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1889-1976) 건물, 거주, 사고” ("Building Dwelling Thinking")라는 글의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Martin Heidegger, ‘Building Dwelling Thinking’, in Poetry, Language, Thought (NY: Harper & Row, 1971), pp. 145–61.)

 

독어로는 'Bouen Wohnen Denken'이라는 제목인건물, 거주, 사고라는 에세이는 원래 1951 하이데거가 건축가들이 주축이 되어 열린 '인간과 우주'라는 주제의 심포지움에서 발표한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다.  과연 작가 믹스라이스가 하이데거의 저작에 친숙한지 특히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에세이의 내용은 지난 수년간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믹스라이스의 작품의 주제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일견 일관성있어 보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다소 상충하는듯도 보이는 믹스라이스의 작품 속에 내재한 복잡한 질문들도 하이데거가 논하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과 상통하고 있다.

 

과연 60여년전에 독일 철학자의 에세이가 어떤 식으로 오늘날 한국의 프로젝트 팀의 작품을 비추어주는 렌즈가 있을까에 대한 의문은 믹스라이스를 다루는 방송국의 다큐멘터리에서 언급한혐오의 시대 예술의 역할이라는 부제에서 일말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2017 1 22 일요일 11 5 방영, SBS 아트멘터리남을 위한 행진곡’)  하이데거의 글이 씌여진 시대도혐오의 시대 겪고 전후 이제 화해를 모색하던 시기였을 것이고, 이는 2017년의 오늘날의 현실과도 일맥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이데거의 에세이건물, 거주, 사고 1951 건축가들을 위주로 심포지움의 강의를 내용으로 한다.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건축의 개념과 거주의 개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 나가는데 이는 오늘날 믹스라이스가 제기하는 문제와 연결해 보면 흥미롭다.  장소(place)’ 무시하고건물(building)’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었을 건축가들이 모여 개최한 심포지움에서 하이데거는 모름지기건물주거 차이를 명백히 하며, ‘거주한다는 (dwelling) 건물 (building) 선행한다 다소 이색적인 주장을 한다.

 

거주하는 (dwelling) 이라는 개념은 거주의 주체가 어디에소속된다는 (belonging)’ 의미하고 따라서 거주의 주체의정체성 (identity)’ 나아가서는진정성 (authenticity, 독어로는 Eigentlichkeit)’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는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있다.  달리 말하면, ‘거주라는 것은 진정한 존재 (authentic existence)’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발전되는 것이고, 우리가 진정성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질문과도 상통한다고 있는 있는것이다.  결국 장소 (혹은 거처) 주거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결여했을 정체성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상대로라면, 주거란 정체성, 자신, 혹은 의미자체에 대한 감각을 잃을 위험이 있는 현대성에 대한 해독제가 있다.   

 

하지만, 고정된 장소를 전제로하는 주거는 정체성을 지켜주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는 유용하지만, 본질적으로 배타적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개념이라고 봤을때 중대한 문제를 야기한다.  정체성은 우리에게 고정된 정체성을 부여하고, 과거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취해진 것으로 미래와의 진정한 관계를 방해하는 본질적으로 후진적인 방향성을 내표하고 있다고도 있기 때문이다.

 

장소로 인해서 생성된 정체성은 장소의 경계 내에 있는우리라는 소속감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서우리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장소에서 제외시킨다. 정체성이 바로 장소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정체성은 상당부분 장소의 개념에 의존하며우리 통제 밖에 있게 된다.  주거장소 개념을 강조하고 특성적 정체성을 기반으로배타성 정당성을 부여한 점이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동조한 역사적 증거 내지 근거로 비판 받고 있다는 점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믹스라이스의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지난 십수년 동안의 다양한 작품들에 드러난 장소와 거주에 관한 논의는 상반된 문제의식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수있다.  믹스 라이스의 재개발 문제와 식물의 이식의 과정에 촛점을 맞춘 최근의 작품이주거 부여하는정체성 관한 문제라면, 그보다 이전의 마석가구단지 페스티벌을 필두로 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는 바로 주거의 고정성으로 인해 야기된배타성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재개발 지역의 주민들이 당하는 불이익에 대한 문제,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아 확실히는 알수 없으나 아마도) 원치 않는 곳으로 이식 되는 식물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한 문제와 타국에서 한국에 옮겨와 자리잡고자 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있을 것인가?

 

앞서 밝혔듯, 장소와 거주라는 개념을 소속감과 정체성을 연관시킬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이때, 정체성은 차이를 배제하고, 마찬가지로 장소와 거주라는 개념도 그런 점에서 봤을때에는 배타적일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논지는 배타성으로 점철되어 있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의 1957년의정체성의 원칙 (The Principle of identity)”라는 글에서 그는 정체성에 대해 화해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정체성의 의미를함께 소속하는 (belonging together)’에서 찾는데, 여기서함께 (together)’ 중점을 것인가, 아니면소속됨(belonging)’ 중점을 둘것인가에 따라 차이가 야기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함께 모인이들과의 단결을 강조하게 되면서 단일성이 중시되고, ‘소속됨 강조하게 되면 구성원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되므로자율성 인정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나아가서 정체성이란 동일성에 머물것이 아니라, 함께 소속하는 주변의 사물 (여기에서는 믹스라이스의 작품에서의 나무를 떠올리게 된다)들과 인간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라고 논한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자면, (Earth), 하늘, 유한자 (mortals) (divinities)라는 4(Fourfold) 요소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다양성과 조화의 예를 블랙포레스트 농가에서의 생활을 예로 들며 하이데거는 (강의) 마치고 있는데, 이는 믹스라이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견 상충하는듯 보이는 자연과 인간의 문제, 외국의 이주민과 재개발 지역 주민의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점의 모색 보다는 문제제기의 단계인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어떠한 장소에 소속한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본질이자, 속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 만큼이나 주거와 소속,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영원히 계속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믹스라이스가 제기해 여러가지 방향으로 향한듯 보이는 복잡한 문제들이 실상은 서로의 특이성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소속감을 지니고 주거 있는 조화로운 지점에서 해답을 구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글이 길어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나머지를 올리기로 할게요~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8. 00:18 미술 이야기

예술계의 홍길동이라고 할까 쾌걸 조로라고 할까?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 (Banksy)가 또 사고를 쳤다. (상황은 여기서 확인!)

사건은 10월 5일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의 유명 작품 '풍선을 든 소녀 (Girl with Balloon)가 1백4만 파운드, 한화로 15억을 훌쩍 넘는 가격에 팔리고 난 직후에 일어났다.  직후에 뱅크시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이 경매에 나와 팔리게 되면 작동하도록 이 작품에 분쇄기를 장치했음을 밝혔다고 한다.  물론 이는 당시 경매에서 작품이 조각조각 분쇄되는 장면을 보고 진정으로 놀라는 관중들의 모습이 담긴 인스타그램들과 함께 여러 뉴스에 게재되었다. 

물론, 이 상황 자체가 과연 어떻게 가능했는지 여러가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1. 분쇄기가 액자 속에 장치가 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과연 경매를 준비하는 측에서는 액자에 끼워져 있는 작품을 사전에 살펴보지 않았던 것일까? - 경매 이전 작품의 상태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 한번쯤은 작품을 액자에서 빼보지는 않았던 것일까? 게다가 작품과 액자 무게 외에 그 정도의 장치가 되어 있었다면 작품은 이상할 정도로 상당한 무게였을텐데 말이다.

2. 그 분쇄기는 왜 작품의 절반 정도밖에 분쇄가 진행되지 않은 것일까?  전부다 분쇄되었다면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되었을텐데, 지금 상태로는 미묘하다.  예상했던 대로, 구매자는 이 상태의 작품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 작품은 이 상태로 또 거래가 될 것이라 짐작된다. 

3. 그 분쇄기를 장치하고 나서 경매에서 판매될 때까지 수년은 걸렸을텐데, 과연 그 분쇄기는 어떻게 작동했던 것일까?  - 뱅크시의 정보원 (?)이 그 작품의 소재를 계속 추적해오다가 소더비 경매장에 잠입하여 경매가 이뤄지는 순간 원격 조정장치의 스위치를 눌렀던 것일까?   건전지 없이 그런 작동을 할 수 있는 장치가 있나? 전기 장치는 잘 모르지만, 여하튼 미스테리다. 

경매 관련자들을 깜쪽같이 속였다 치고, 지치지 않는 건전지 에너자이저를 써서 성공적으로 경매사가 경매봉을 두드리는 순간 분쇄기를 작동시켰다 치자.  방법이야 어떻게 되었든, 이번 사건은 미술사에 또 다른 역사를 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퍼포먼스라고도 볼 수 있는 이번의 사건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터무니 없기까지 한 천문학적인 금액들이 오가는 경매에서의 작품거래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를 보내는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유명세에 따른 작품 가격이 높아지고 하는 미술계의 통례에 반대하기 위해 자신(들)의 얼굴이나 구체적인 이력을 밝히지 않아 왔던 것이다.  

뱅크시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애당초에 그 (혹은 복수의 작가군단?)가 익명으로 활동한 것은 그(들)의 작품이 영국 브리스톨 거리에 그리피티를 그리는 것을 시작해서인데, 영국에서 거리에 낙서를 하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법적인 제재를 피하기 위해서라고도 알려져 있다. 물론 위에 밝힌대로 미술계의 통상적인 관례에 대한 반항이라는 설도 있다.  (일부 웹사이트에서는 그가 1974년 영국 출생이라고 밝힌 곳도 있는데, 대부분의 미술관련 사이트에서는 여전히 그에 대해서 밝혀진 것이 없다고 씌여있다.) 

후에 그리피티 이외에도 꾸준하게 기발한 활동을 해온 그의 작품은 많은 논란과 함께 경매에서의 작품의 가격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자세한 활동은 그의 홈페이지를 참고하라.  http://www.banksy.co.uk/out.asp)

다분 정치적이고, 반전주의, 반자본주의적 메시지로 가득한 그의 작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그의 명성에 편승해 뱅크시를 자처하는 작품도 적지 않고, 그에 대해 '내 작품 아님'을 홈페이지에서도 밝히기도 한다. (한번 더 꼬아서 생각하자면, 이러한 의사표명 또한 그의 자작극이 아닌가 의심하게도 된다. 왜냐하면, 익명으로 작품활동하는 것 자체가 '작품에 따라다니는 작가의 이름'이라는 관례에 대한 반항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애당초 굳이 저렇게 주인 찾아주기 식의 성명서를 낼 필요가 있나 싶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몸으로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체제적인 작품을 하는 그가 미술시장에서 몸값을 높이게 된것은 어찌된 영문인걸까? 

일례로 2003년 제작되었던 Bomb Hugger라는 그래피티 작품의 경매 경과를 살펴보자. 




Sotheby's London 

Date:2010-02-11 

Lot Number :284 

Low Estimate :$39,200[+92%]* 

High Estimate :$54,800[+37%]* 

Hammer Price :$75,200 

Sold For :$92,250*



2010년 2월 11일자 경매를 보면 이 작품의 최종 가격은 최저 예상 가격 4만불을 가볍게 넘어 최종가는 9만2천불, 한화로 1억이 넘는 금액에 거래가 되었다.   애당초 미술 작품에 터무니 없는 가격을 매기는 이러한 미술 시장에 대한 비판은 경매서 고가로 팔린 작품을 거리에서는 60불에 파는 행위를 하거나 직접적으로 아래와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등, 여러차례 그의 작품 속에서 언급되었다. 

Banksy – I Can’t Believe You Morons Actually Buy This Shit, 2007  '너희같은 멍청이들이 정말로 이런 쓰레기를 사다니, 나는 당최 믿을 수가 없다.'는 제목으로 경매장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쯤 되면, 그의 작품 값을 올리는 것은 미술 시장이자 미술계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가깝게는 앤디 워홀의 팝아트, 좀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셀 뒤샹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다. 

Banksy, Soup Cans (2006) EHC Fine Art 앤디 워홀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인건가? 현대미술가들은 스프캔이라는 상품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미술사 적으로 보면, 이는 마르셀 뒤샹이 1917년 한 전시회에 철물점에서 구입한 남성용 소변기에 R. Mutt라는 서명만 하고, '샘 (The F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출품을 한 것에 비견될 만한 사건이 되지 않을까?    

애시당초 참가비만 내면 전시를 허용하는 허술한 전시회에 출품했음에도 당시에는 그가 출품한 변기는 출품이 거절 당했다.  이후, 작가는 작품을 '제작'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기만 해도 되는 것이라는 면죄부 (?)를 받게 되는 미술사적인 일대사건으로 기록되게 되는 것이다. 이후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 면죄부로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선택'해왔던가. 

이번 뱅크시의 첩보전을 방불케할 '퍼포먼스'는 미술사적으로 또 다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경매에서 작품의 가격을 매겨 유통하는 과정에 대한 반항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 퍼포먼스 자체는 또 다른 형태의 예술 형태로 자리잡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절반쯤 분쇄기를 통과한 그 작품은 이번 경매가를 가볍게 뛰어넘으며 더 높은 가격에 판매될지도. 

한편, 뱅크시가 자신(들)의 인스타그램에 사전에 분쇄기를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해당 경매에서 작품이 순식간에 분쇄되어 액자밑으로 흘러내리는 과정을 촬영한 것을 올리면서 "The urge to destroy is also a creative urge" - Picasso라는 구문을 함께 실었다. 이는 항상 자신의 이전의 작품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창조를 추구했던 피카소가 '창조적인 진공청소기'라 불렸던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천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  미술계의 황금만능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을 했지만, 그 미술계에서 최고가를 갱신하며 그러한 시스템을 만끽한 피카소에 대해서는 별 저항이 없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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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잠자는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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