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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4. 01:30 미술 이야기

블로그를 시작하고 나니 남이 쓴 글들도 많이 읽게 된다. 

그러고서 느낀 것으로는 요새 부쩍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나부터도 짧은 글을 여기저기 쓰기도 했고, 이 블로그에도 일상 속에서의 단상을 이야기 하면서 언급하기도 했으니.

2018년 한국에서의 삶이 복잡하긴 복잡한가보다. 

하지만, 미술사에서 논하는 1960-70년대 정점을 이룬 미니멀리즘과 생활 속의 '미니멀리즘 (?)'은 많이 다르다.  

언제 한 번 나부터라도 조용히 앉아 생각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우선은 그게 다르다는 것은 나라도 나서서 밝혀두고 싶었다.  앞으로도 미술이랑은 관계 없이 살 것인데 그게 뭐 대수냐 하면 정말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혹시라도 앞으로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많은 미술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미니멀리즘 작품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관련 자료를 접할 기회가 올 때, 그렇게 잘못 잡힌 개념 때문에 정확한 이해에 방해를 받을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생활 속의 '미니멀리즘'은 '미니멀 라이프 스타일'이 맞고 '미니멀'까지만 쓰시는 게 적확하다는 것. 그리고, '미술에서의 미니멀리즘은 개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는 게 낫지 않나 하는 게 개인적 소견.      

그러다 접한 전시 소식이 있어 소개. 가을에 전시한번 봐도 좋을 것 같아요. (뉴스에서만 접한 것일 뿐이므로, 개인적으로는 어떠한 관련도 없고, 전시회의 퀄리티에 대해서도 모릅니다만) 

서울대 미술관 전시관에서 미니멀리즘 작품의 전시회가 열린다네요.

【서울=뉴시스】 오완석 언더페인팅 (마이너스) Underpainting (Minus)2014 불투명 무반사 유리 위에 페인트 paint on groundnon-reecting glass 150x100cm 5점 each 150x100cm 5 piece set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3. 00:49 일상 이야기

원하지도 않았는데, 매일매일 날라드는 교훈적 문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self-help 혹은 자기계발서라고 분류되는 책도 읽어본 기억이 없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그렇게 날라드는 문구나 자기계발서의 대부분의 내용들이란 결국은 모두가 알고 있는 뻔한 '좋은' 내용이고, 사실 그게 실천이 안되니 문제고, 삶이 힘든거지, 거기 적힌거 몰라서 못하는 사람은 없지 않아? 뭐 대충..., 이런 생각이었다.  


“Success is the sum of small efforts repeated day-in and day-out.”

- Robert Collier

그런데, 어느날 날라든 이 문구는 왠지 좋다고 느꼈다. 

이후, 가끔 이 문구를 떠올리곤 하는데, 내가 뭔가를 조급하게 바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매일매일 해야할 일이 지겹다고 느껴질 때, 이 문구를 떠올리면 조급한 맘은 가라앉고, 지겨움은 참을성으로 바뀌곤 했다.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 도움이 되어 성취한 '성공'이 세간에서 봤을때 큰 '성공'은 아니라고 할 지라도, 내 스스로에게 '성취감'을 주는 충분히 '성공'적인 일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블로그를 시작한지 한달.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이 블로그가 '정착 (?)'될 때까지, 매일 하나씩은 일상적 얘기라도 하나씩은 올리자 맘 먹어봤다.  익숙치 않은 블로그에 매일매일 글을 적어 올리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로버트 콜리어 아저씨의 글귀를 떠올렸다.  (알고보니, 이 분, 20세기 초에 자기계발서로 베스트셀러를 남긴 분)

그러구서 한달, 지금 보니까 올린 글이 꽤 된다.  역시 매일매일 조금씩 빠뜨리지 않고 뭔가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게 '성공'이지 성공이 별거냐.  물론 앞으로도 저 문구가 약발이 안 먹힐때까지 계속해 보리라 생각해본다.  

앞으로는 '자기 계발서'를 한번 찾아 읽어봐야 할까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2. 07:00 일상 이야기

어느 날, 페이스북에 짧은 동영상이 올라왔다. 

거기엔 한 아버지가 어린 딸아이를 안아올린 채, 거울을 마주보고 자신이 하는 말을 딸아이에게 복창하게 하는 것이었다. 

I am smart, beautiful, strong.... 

이런 식의 자기 암시법은 여러번 봐온 것이라 그다지 새롭지는 않았지만, 특이하게 여긴것은 다음 두 구절이었다. 

"I am not better than anybody.  

Nobody is better than me."

일견 서로 상충하여 모순인 것처럼 들리는 이 구절은 결국 '자존감'과 '타인에 대한 존중'에 대한 요약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말을 매일 아침 복창하며 자라난 저 소녀는 타인에 대한 존중을 할 줄 아는 자존감 충만한 어른으로 자라겠구나 싶었다. 

갑질과 을질이 연일 매스컴에 오르는 요즈음, 아침마다 어린 아이에게 저 구절을 복창시키며 키워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나만 인상깊게 본 것은 아닌듯.  유튜브에서 'father to a daughter, you are not better than...'으로 찾아보니 나.왔.다.  

그래서 이렇게 링크를 공유.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10. 1. 03:30 일상 이야기

お仕事頑張って下さい~~~

미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내가 관찰해 본 바로는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일했고 항상 바빴다.  그런데, 내가 느낀 바로는 한국에서 일본인들이 열심히 일한다는 이미지는 있어도 미국인들은 왠지 열심히 일한다는 이미지는 없는 것 같았다.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건 그들의 태도 때문인것 같다.  

내가 잠시 일본에 있을 때, 내 방문의 목적이 이러저러하고, 일본에 있는 동안 이런저런 일을 하고 돌아갈 것이라고 이야기하면, 열 명중 아홉 명은 '아 그러냐~'고 하고 나서는, 꼭 “Oshigoto ganbatte kudasai (お仕事頑張って下さい)”라고 이야기를 마무리 했다. 


흐음... 물론 글로 배울 때 그 표현의 뜻이 '일 열심히 해주세요'라는 뜻이 아닌 것은 알고, 그냥 성공을 기원한다는 식의 가벼운 격려의 의미를 담은 인사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을테지만, 막상 매번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미 열심히 하고 있는데, 뭘 더 열심히 하라는거지?'라는 의문이 맘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곤 했다.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 그 문화를 체득하는 데에는 원체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라면 내게 무슨 말을 해줬을까?  격려의 의미를 담아 'I hope work goes well for you.'라고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Good luck!' 정도라고 말했을 것 같다.  내가 스케줄에 쫓겨 언제까지 일을 마쳐야 한다고 했다면, 대부분은 (그렇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Take it easy.'라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지금이 글을 쓰며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부터도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열의 부족에 대해 의아해하며 한편으로는 무안했던 적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만약, 나보다 높은 연배의 선생님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중간에 보고서 격려 차원의 말을 해주는 경우였다면, '열심히 하라'는 말 대신, 'Keep up the good work.' 이라는 말을 해주었으리라.  친구들이라면, 바쁘더라도 여유를 잊지말고  '쉬엄쉬엄 해'라고 하거나, 선배나 선생님의 경우에는 보통  '(잘 하고 있어) 지금처럼만 해.' 정도의 말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이면을 살펴보자면, 미국인들의 경우, 개인차는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쿨~한 것을 지향하는 문화라서인듯하다. 따라서, 자신이 할 일이 많아 무척 바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시간에 쫓기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반해, 짧은 기간 밖에 머물지 않아 일본인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받은 인상으로 그들은 자신의 열성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또 그러한 열의가 타인에게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 결과, 밖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에는 커다란 온도차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미국에서 나고 자란 친구에게 영어는 할 수 있어도 문화적 차이를 잘 모르는 일본인이 'Oshigoto ganbatte kudasai'를 직역해서, 'Please do work hard.' 라고 했다면? 미국인 친구는 자신의 일이 무엇인가 크게 부족한가 엄청난 반성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역으로, 일본어를 글로만 배운 사람이 일본인 친구에게 Take it easy 이나 Keep up the good work 라는 말을 섣불리 일본어로 직역해서 말한다면?  '落ち着いて'(진정하세요) 혹은 'もっと上手に働きなさい (일을 좀 더 잘하세요)'  일본인 친구 역시 자신이 뭔가 크게 일을 잘못하고 있다고 불안해하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두 친구 모두 이직을 고려해야하나 걱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언어를 안다는 것과 문화를 안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언어는 통해도, 상호문화적 차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서로 오해를 사기가 쉽다.  처음 모든 것이 낯설던 외국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자, '사람 사는 것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 곤 할 때마다, 피부에 확 닿게 느껴지는 차이... 그것이 결국 언어(만)의 익숙함 위로 덮쳐드는 문화의 차이 때문이었다.  

언어가 문화의 차이를 만드는지, 문화가 언어의 차이를 만드는지 알 수 없지만, 따라서 나라마다 '예의바른 언행'이라는 것도 차이가 있다.  물론, 그러한 차이가 오해를 낳기도 하지만, 그 차이를 이해하고자 노력만 한다면 훨씬 더 풍요로운 경험과 폭넓은 사고가 가능해질테지만 말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30. 01:13 영화 이야기

한동안 누군가 내게 가장 감명깊게 본 영화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 대답은 항상 '개같은 내 인생 (My Life as a Dog)'이었다. 

주인공인 잉게말이 자신보다 불행했을 우주선을 탄 강아지 라이카를 떠올리며 애써 자신의 처지를 위안삼고 있다.

영화의 내용을 모르고 들으면 조직이 등장하는 다소 거친 영화인가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1959년 스웨덴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하는 서정성 뿜뿜 돋는 내용의 영화이다. 이 영화를 만든 라세 할스트룀 (Lasse Hallström) 감독의 대표작으로는 길버트 그레이프, 쇼콜라 등이 있고, 다들 유명한 영화지만,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좋았다.  레오나르도 드 카프리오 오빠 (잘 생기면 다 오빠)가 나오는 길버트 그레이프를, (내입장에서 보자면) 무명인 스웨덴의 아역 배우가 이긴 셈이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영화는 Reidar Jönsson이라는 작가의 같은 제목의 자전적 소설 (1983년작)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어쩐지... 사소한 스토리에 생활적 디테일이 있더라니...]

소위 '성장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 사는 잉게말이라는 소년의 성장기를 그의 시선에 따라 바라본 영화이다. 잉게말에겐 자신만큼이나 장난꾸러기인 형이 있어 이 둘이 매일 합이 1+1=3인 강도의, 살아있는게 다행일 정도의 사고를 치며, 열심히 성장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결핵을 앓던 엄마의 병이 깊어지면서, 부득이 엄마가 요양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면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형과 잉게말 각각 다른 친척집으로 가게 되는데, 잉게말은 순박하고 착하나 결코 어른스럽다고 보기는 힘든 삼촌에게 맡겨지게 되면서 영화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삼촌이 살던 동네로 와서도 잉게말은 장난꾸러기 소년이 칠 수 있을 만한 크고 작은 장난과 사고를 치고, 엄마 없는 소년이 겪을 만한 외로움을 겪으며, 처음엔 낯설어서 텃세를 당하던 동네 꼬마들과 하나둘 친해져 가며, 때론 대책 없는 어른들의 행동들을 지켜 봐가며, 어느새 동네의 이쁜 소녀에게 신경을 더 쓰게 되는 사춘기로 접어 들어간다는 얘기이다. 

영화 첫 장면 잉게말의 독백으로 이런 대목이 나온다. 뜬금없이 '라이카는 어땠을까? 사람들이 우주선에 자기를 태웠을 때.  내가 봤을 때엔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어. 걘 먹이통이 비워질 때까지 우주를 뱅글뱅글 돌아다녀야 했다구. 그리곤 굶어 죽었지. 거기에 비하면, 나는 괜찮아....'  이런 생각을 하며 잉게말은 자신이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강아지나 엄마와 형과 떨어져 낯선 동네로 가서 지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소련이 우주로 쏘아 올린 1957년의 우주선 스푸트니크 호에 실험용으로 실린 강아지 라이카 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삼는다.  

삼촌네 헛간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라이카를 생각하는 잉게말. 작은 헛간에 난 좁은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잉게말의 모습은 묘하게 작은 우주선에 실렸을 라이카의 처지와 오버랩된다. 

12살의 소년이라 주변의 사람들 뿐 아니라 엄마에게도 자신의 풍부한 감수성을 이해 받기 힘든 소년(그걸 이해 받기에 그가 치는 사고의 강도가 대부분 너무 높다)은 그렇게 외로운 밤 엄마 생각이 나거나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 외롭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라이카를 떠올리며 자신의 처지가 낫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영화 내내, 자신보다 더 불운했을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거리곤 한다. 이를테면, 지름길로 가려던 어떤 사람이 창던지기 대회를 하는 경기장을 지나게 되어 운 나쁘게 창에 맞아 죽는 이야기. 그 사람보다는 자신의 처지가 낫다, 뭐 이런 식이다.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그 모양새가 너무나도 아이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또래 소년으로서는 할 수 있는 한껏 어른스러워서 짠하면서도 감동스럽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 작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스웨덴 선수인 잉게말 요한슨과 미국의 플로이드 패터슨간의 권투 경기의 라디오 중계에 귀기울이고 있다. 이 장면은 우리의 주인공 잉게말과 선머슴같은 귀여운 소녀 샤가와의 권투 경기와 오버랩된다.  온 마을에 터지는 함성으로 보아 잉게말 선수가 승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어느새 잉게말과 샤가는 소파 위에서 새근새근 낮잠을 자고 있는 장면을 비추곤 줌아웃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권투선수와 주인공 잉게말의 이름이 같은것, 그리고 둘다 권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쟤가 커서 권투선수가 될려나 했는데, 소설가의 자전적 소설이므로 그건 아닌걸로...)       

1959년의 스웨덴이 배경인 관계로 문화적, 시대적 차이로 이해못할 정서도 없잖아 있었지만, 감수성 풍부한 소년이 몰이해 속의 세상을 자기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며 한동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자리했었다. 

그러다, 최근에 좀 충격적인 뉴스를 봤다. 무인 우주선을 쏘아보내면서, 떠돌이 강아지 라이카를 무려 3년이나 훈련시켜 스푸트니크 호에 태웠다는 것은 이 기사로 처음 알았다. 무려 3년이나!  그리고, 그 우주선은 어차피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일주일치의 사료를 다먹고 나면 라이카는 어차피 굶어죽을 운명이었다는 것도 처음 생각이 미쳤다. (지금 생각해보니, 잉게말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라이카를 떠올리며 자신의 불행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 라이카가 우주선을 쏘아 올린지 불과 다섯 시간 만에 압력과 온도 차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일주일치의 사료도 다 먹지 못하고... 일주일 후에 죽으나 발사 후 다섯시간 후에 죽으나, 그게 무슨 차이냐 싶기도 하고, 또 그렇게 일주일동안의 비행이면 끝날 인생, 아니 견생인데, 3년의 고된 훈련은 또 웬 말이냐 싶기도 하고... 허탈하고 무의미하고.... 슬프고 잔혹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인생도 결국은 그런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만약 일주일 후의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미래를 알거나, 내 인생의 끝을 알고 있다면 오늘의 인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  

'라이카의 진실'이라는 뉴스를 접하고 갑자기 생각나서 적어봤다. '개같은 내 인생'에 대해서...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9. 18:59 일상 이야기

네이버 이웃맺기 위젯을 맺었다 우쭐.뿌듯하기도 잠시...
친구기 확인못하겠다며 캡쳐를 보내준 모바일 판 블로그에서는 아닌게 아니라 확인이 되지를 않구요.

그나마 내가 로그인한 화면에선 관리자라 그런가 링크 옵션은 있는데 친구화면엔 오직 글 카테고리랑 방명록만 있군요!

관리자에게만 보이는 링크 옵션이라...  아이구 의미없다~~~

혹 제가 가진 문제점에 대한 해결법을 주실분은 안계실까요?


관리 페이지에서 체크해본 결과, 태그는 제대로 붙어있는거 같긴 한데, 미리보기를 클릭하면 새창에 

페이지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Chrome이 이 페이지에서 비정상적인 코드를 감지했으며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차단했습니다.  
ERR_BLOCKED_BY_XSS_AUDITOR 

이렇게 나오네요.  뭐가 잘못된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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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9. 07:00 미술 이야기

Edgar Degas (1834-1917) The Bellelli Family (1858-1867) oil on canvas ; 250 x 200 cm, © RMN-Grand Palais (Musée d'Orsay) / Gérard Blot 



개론서에는 편의상 인상주의에 포함시키고, 실제로 까칠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에드가 드가는 하지만, 살아생전에는 자신의 작품을 인상주의라고 하는 것에는 크게 거부감을 표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에드아르 마네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집안의 자제였던 드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이탈리아와 미국 등지를 다니면서 집안을 일으키고자 노력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고모를 방문해서 그녀의 가족을 그린 초상화이다. 


화면에는 고모와 그의 남편 벨레리 남작과 그들의 두 딸들이 모여 일단 가족 초상화의 형식을 띈다.  벽에는 최근 작고한 그의 아버지이자 고모에게는오빠인 오귀스탕 드가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드가의 고모는 화면의 왼쪽에 두 딸과 함께 자리하고 서 있고, 남편인 남작은 화면의 오른쪽에 놓인 의자에 등을 돌린 채 앉아서 딸들과 아내가 있는 쪽을 바라다보고 있다.  

얼핏 보면 일반적인 가족 초상화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은 인상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에 설득력이 실릴만큼, 이 작품은 북유럽의 초상화와도 같은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 가족 초상화에서는 지체 높은 귀족의 '화목한 가정'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일설에는 고모부가 처녀시절의 고모를 억지로 범해 결혼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화면 전반에는 고모의 고고함에 미치지 못하는 듯한 이탈리아인 고모부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남편과 아내는 화면의 좌우 가장자리로 멀리 떨어져 있고, 7세와 10세가 되는 조카들은 놀이용 앞치마라고 할 수 있는 pinafore를 착용하고 있지만, 다소 경직되어 보인다. 상중이라 검은 색의 옷을 입고 있는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입을 꽉 다물고 있어 귀족적 풍모를 가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고모부는 편안한 옷을 입고 가족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지만 그 사이에는 세로선이 강조된 문과 거울의 틀, 그리고 중간에 놓인 탁자로 이들의 사이는 단절되어 있다.  이 둘의 사이가 불편한 것에 대한 암시는 의자에 걸터앉은 조카가 한쪽 다리를 미처 다 뻗지 않고 접은 채 앉아있는 모습, 화면 하단의 오른쪽의 강아지가 잘려나가 화면에 다들어오지 않게 그려진 점 등에서 더 강조된다.  




사실주의자로 불리기 원했던 드가는 전통적 화법으로 그려진 작품을 통해 모델들의 심리를 꿰뚫는 예리한 초상화작품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그린 수 많은 발레리나 그림들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posted by 잠자는 집시
2018. 9. 28. 03:03 일상 이야기

유학을 간 지 얼마 안되어서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012

내가 첫 유학을 시작한 학교는 미국의 종합대학답게 각 단과대별로 도서관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중앙도서관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내가 다닌 한국의 학교 도서관의 자료는 아마도 한 단과대학의 자료 소장량에도 크게 못미칠 것이라 짐작될 정도로 장서의 양은 압도적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혹시라도 거기서 찾지 못하는 자료는 interlibrary loan이라고 해서, 다른 학교나 기관에서도 서로 빌려주고 빌려볼 수 있는 체계까지 갖추고 있으니, 적어도 자료가 없어서...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터였다. 

나는 그 거대한 중앙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맡은 일은 누락 소장 자료의 기록이었다. [방대한 양의 장서와 소장품을 가진 도서관이다보니, 도서관에서 소장 중이지만 미처 기록이 되지 않은 책이나 자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그건 사람이 찾지 않는 한 확인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때 깨닫게 되었다. 흔히 공식 기관의 웹사이트에 있는 기록이라면 일단 믿고 보는 경우가 많지만, 생각 외로 잘못된 정보와 오류가 많다는 것을).]  

아르바이트 하는 학생 수도 꽤 많았던 것 같은데, 그 학생들에게 섹션을 할당해서 누락 자료 정리를 하도록 하는 식이었다.  내가 할당 받은 구간은 무려 생물 분야의 '곤충학'!  곤충학 분야의 크고 작은 학회지의 누락된 기록 정리.  처음 할당 받고는 세상 재미없고 보람없는 구간을 배정받았다 한숨을 쉬었다. 내 평생 이 자료들을 볼 일 있겠냐 그러면서.....  '뭐, 재미 있으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으니'라고 시작한 일은 정리하는 일 자체는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고, 뭔가 하나씩 정리해서 완성해 나가는 재미도 있었다. 그다지 길지 않은 동안 일을 했지만, 그 사이 익숙해진 이름도 생기고 말이다. 

그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한 학자가 있었는데, (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이름은 잊었다) 그는 미조리인지 미시시피*의 (지역도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호수인지 저수지(이것도 가물가물) 인지에 거주하는 소금쟁이에 대한 생태를 조사한 것을 1910년대부터 무려 4-50여년간 (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의 공백은 있었다) 지속적으로 연구하여 발표를 했었고, 학회지에 게재하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엔 그의 주제가 좀 다른 의미로 놀라왔다. 뭐 그렇게 사소한 것을 이렇게 오랫동안 연구하지? 하는 생각이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정리하던 내내 매년 꾸준히, 그것도 몇 십년동안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거 같던 주제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특정 학술지들에 이름을 올리는 그를 보고선 나중엔 경탄해 마지않을 수 없없다. 

그 때 느꼈다. 남들은 관심갖지 않고, 남들이 얼핏 보기엔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그렇게 지속적으로 파고들어야 되는 것이 학문이라는 것이구나.  그리고 결국 학문이라는 것이 저러한 작지만 지속적인 노력들이 모여 우뚝 서게 되는 것이구나... 결국, 우리가 가볍게 찾아보는 구글, 네이버, 다음 등 에서 얻는 지식의 바탕도 실은 저러한 지난한 노력들의 축적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금쟁이에 대한 어린이용 교육 동영상에서 알게되는 것들도 다 학자들의 노력이자 성과이다. 

 

나는 학문이라는 것을 떠올릴때마다, 저 미조리인지 미시시피인지의 작은 마을 조그마한 호수가에서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긴 장화를 신고 손에는 뜰 채같은 것을 들고 하루 종일 작은 곤충들을 관찰하면서 반세기를 보냈을, 이제는 세상에 없을 그 노 학자를 떠올린다. 남들은 어떻게 보든 그는 자신이 하는 그 작업이 좋아서 견딜 수 없게 즐거웠으리라 생각한다.  지리멸렬한 노력들의 축적. 학문이란 그런 것이다.  

* 내 기억으로는 미시시피 강인데, 자신이 없다. ^^;;;

posted by 잠자는 집시